◐살아가는 행복 이야기

■ 우리詩 논단 -천상병의 시세계: 조 병 기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6. 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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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詩 논단

 천상병의 시세계

  조  병  기

 

  1. 들어가며

   천상병이 문학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9년 19세 때부터 《죽순》, 《처녀》 등의 동인지에 시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후 1952년 「문예」지의 추천을 거쳐 문학 활동을 시작으로 몰년인 1993년까지 근 40여 년에 걸쳐 그가 남긴 작품은 8권의 시집과 산문집, 동화집 등이 있다.

  천상병 시인은 일제치하를 거쳐 한국전쟁기, 그리고 민주화과정에서 분단에 의한 안보적 상황이 고조됐던 60년대 70년대를 살아야 했다. 그는 60년대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의 옥고와 혹독한 전기고문을 당하기도 한다. 특히 전쟁기에 부산피난생활에서 그는 시대고와 함께 시작에 불태워야 했고 대학공부를 했으니 그의 많은 작품이 무관하지 않다.

  천상병의 시세계는 전후기 이분하여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를 전후하여 그의 시적변모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기가 데뷔로부터 70년대초 수락산 생활 이전까지라면 그 이후부터 몰년까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기의 시가 순수서정의 이상세계라 한다면 후기시는 현실에 집착한 세속적 시세계라 하겠다.

 

 

  2. 초기시의 비극적 정서

  초기시에 나타난 천상병의 시적 정서는 슬픔, 눈물, 그리움, 기다림 등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것들은 ‘새’를 매재로 하고 있다.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상징적 매체로 삼고 있는 ‘새’는 10여 편에 달하고 있음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중 몇 편을 살펴보자.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잎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한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새」 전문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 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파랑새」 전문

 

  새의 이미지는 천상병 자신과 다를 바가 없다. 미래에 대한 ‘죽음’을 환기하면서 자연적 상관물을 매개로 삼고 있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전통성의 실마리는 이런 데서도 찾아질 수 있다. 천상병은 많은 ‘새’ 제재를 자유분방하게 구사하면서 삶의 온갖 고뇌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날개를 가지고 싶다.

어디론지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싶다.

- 중략 -

나는 어디로든지 가고 싶다.

날개가 있으면 소원성취다.

하느님이여.

날개를 주소서 주소서….

                                 -「날개」 부분

 

  직설적인 표현이지만 천상병이 지향하는 세계는 자아의 진실과 세계의 현실상이 서로 어긋날 때 생성되는 비극적 세계관이다. 때문에 천상병의 「새」는 자신의 비유적 대상으로 더러는 현실적 비판으로 강화되기도 하고, 하늘 지향의 의도로 나타난다. 현실비판의 경우, 1967년 이른바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일과 무관하지 않다.

 

이젠 몇 년이었던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게 편다.

                                   -「그날은」 전문

 

  시인은 ‘아이론 밑 와이셔츠 같이 당한 그날’이라고 회고하면서 진실과 고통, 공포감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내면에 새와 하늘을 갖고 있다. 진실이 이상적 세계라면 고통은 현실적 삶이 되는 것이다. 새는 이 두 세계를 오르내리는 시적 자아라 하겠다. 이 시에서 중심제재는 무서움이다. 곤충에게서도 공포의식이 발동하고 악수를 청하는 대상에게서조차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다. 이 위기감은 시의 앞부분인 ‘이제 몇 년이었던가’의 과거 일을 회상하게 된다. 아직도 시인은 내 마음 한 켠에 있는 새에게 자기구제를 시도한다. 현실탈출의 출구를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 새마저도 ‘소스라침’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새’는 천상병에게 유일한 자아 출구이며 하늘에 이르는 매개인 것이다. 지상과 하늘, 현실과 이상세계의 대립적 구조를 이루면서 비극적 정조를 고조시켜 가는 것은 천상병 시인 특성일 수 있다. 수사적 기법을 선택하지 않은 대신 대립적 이미지를 빌어 시적 긴장을 제공하는 것은 이 시인 특유의 시세계이기도 하다.

  천상병의 새 이미지는 「갈매기」(1952·《문예》 천료작)를 시작으로 70년대 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는 「갈매기」에서 ‘그대로의 그리움이/ 갈매기로 하여금/ 구름이 되게 하였다// 기꺼운 듯/ 푸른 바다의 이름으로/ 흰 날개를 하늘에 묻어 보내어’라고 한다. ‘새’와 ‘하늘’ 의식을 이미 내보여 주고 있으며 또한 시인의 공간의식을 짐작케 한다. 서러움과 그리움, 외로움, 그리고 기다림의 정서는 공간의식과 맞물리면서 일관되게 관류하고 있으며 비극적 정조와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천상병 시에서 ‘새’는 ‘햇발’을 날라다 주는 매체이기도 하지만 날지 못하고, 울지 못하는 좌절의 새일 때 자아와 세계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게 된다. ‘아시지의 성프란시스코는/ 새들에게/ 은총 설교를 했다지만/ 저 새는 아프기만 한 것이다.’에서 은총을 받지 못한 새는 날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며 움직일 수도 없는 비극적 상황에 놓인 새에게는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에 소외와 좌절을 주체하지 못한다.

 

슬픔 옆에서

지겨운 기다림

사랑의 몸짓 옆에서

맴도는 저 세상 같은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물결 위에서

바윗덩이 위에서

사막 위에서

극으로 달리는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새는

온갖 한낮의 별빛 계곡을 횡단하면서

울고 있다.

                               -「한낮의 별빛(새)」(1970. 6. 《창작과 비평》)

 

  슬픔, 기다림, 사막, 바위 등의 시어는 새의 한계상황이다. 순수지향은 좌절에 부딪친다.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새’다. 별빛 계곡을 횡단하면서 우는 새는 고독의 존재다. 시인의 현실적 고뇌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빛’과 ‘저 세상’을 그리워한다. 거친 물결, 바위, 사막과 같은 어두운 현실을 밝게 해줄 빛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우리의 서정시 가운데 비극적 정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현저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황조가 이후, 고전시가들에서도 쉽게 찾아진다. 근대시에 들어 김소월, 한용운 등에 이어 30년대 이후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천상병 역시 예외가 아님을 앞의 시에서 말해준다.

  천상병의 비극의 요인은 대자적인 것과 대타적인 것을 아울러 갖고 있는데 그의 극복방식은 새를 매개로 한 좌절적 극복 태도라고 볼 수 있다.

 

 

  3. 대립적 공간구조

  천상병의 시적 공간 구조는 지상→하늘이 상승 구조라면 하늘→지상은 하강구조인 것이다. 여기서 「귀천」은 상승구조이지만, 「소릉조」는 하강구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천상병 시는 상승구조보다는 하강구조가 우세하기 때문에 슬픔, 좌절, 체념 그리고 분노 등의 비극적 정서로 나타난다. 「귀천」에서 짙게 나타나는 회귀의식 즉, ‘돌아가리라’는 절실한 진술은 죽음을 영원함과 자유로움, 진정한 안식의 공간이라고 하겠다. 회귀공간은 고향, 집, 무덤 등의 원형적 심상과도 맥을 같이 하는 자기 구원의 공간인 것이다. 이처럼 천상병은 대립적 구조를 이루면서 화해의 매개체로서 ‘새’를 끼워 넣는다.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기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주막에서」

 

  시 「소릉조」와 함께 고향회귀의 작품이다. 할머니는 향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하면서 고향의 안온함을 제공하는 것이다. 시인의 오랜 낭인생활은 늘상 고향상실의 소외감과 가난의 문제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할머니를 통하여 고향의 모성과 추억을 찾아 과거 속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할머니의 등뒤에 고향의 뒷산이 보이고 그곳에 얽힌 추억들이 눈발처럼 시인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1970년대를 전후하여 시적 공간은 수락산 주변으로 옮아간다. 「수락산변」을 비롯하여 산과 시냇물, 계곡 등의 자연적 사물에 대한 시들이 그것이다. 천상병이 이처럼 초기시의 서정공간이 변모된 것은 결혼과 함께 정착된 생활에서 찾아진다.

 

이 근처는 버스로 도심지까지 가려면

약 한 시간이 걸리는 변두리.

수락산 아랫마을이다.

 

물 좋고 산좋은 이곳,

사람도 두터운 인심이다.

그래서 살기 좋은 고장이다.

 

오늘은 부실 보실 비가 오는데,

날은 음산하고 봄인데도 춥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좋아 이곳이 좋아.

                                                  -「변두리」

 

  「귀천」이나 「소릉조」에서와 같은 서정성에는 못 미치는 자연 서정시에 그치고 만다. 「촌놈」에서는 “서울에서 80미터 거리의 근처에는 논과 밭이 있으니 촌놈으로서 행복하다”고 소시민적 진술을 하고 있다. 천상병의 시적 공간은 초기 시에서는 하늘 공간으로서 무한성, 영원성을 추구했으나 후기로 오면서 지상적 자연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4. 후기시의 실존의식

  천상병의 후기시는 완전히 시적인 것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산문적 일상을 선택하면서도 보이지 않게 철학적, 정치적 의미를 풍긴다. 그런 가운데서도 실존적 자아의식은 ①가난의 문제와 휴머니즘적 동심세계 그리고 가족애가 담긴 서정시, ②종교적 세계관, ③현실비판의 시적 전개가 시도된다. 천상병은 「나의 시작의 의미」와 「나의 기도」에서 너무 외로우면 시를 못쓴다. 고독할 때면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고, 고독해지지 않으려고 했으며, 생활을 사랑하고, 생활은 자신의 시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었으니 사회에 대한 눈도 뜨이고 생각도 많으니, 이제는 사회비판시를 써 볼까라고 말한다. 천상병의 후기시에서 실존의식은 「불혹의 추석」, 「연기」, 「편지」, 「나의 가난은」,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창에서 새」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이 사십에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찾아간다’는 시인은,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편지」

 

  시적 자아가 역시 시인 자신으로 되어 있는 시이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의 삶을 확인한다. 풍요와 결핍의 대립적 상황 속에서 지나온 삶의 성찰을 내보인다.

  후기시에서 ‘바람’, ‘길’, ‘비’ 등 자연대상과의 만남은 실존적 자아의 성찰을 알리는 시편들이다. 길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지만 바람의 길과 사람의 길은 다르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바람은 자연 현상적 의미를 벗어나 길은 많아도 갈 길이 다르다는 것을 일러준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는 것이다. ‘비로소’의 부사적 의미는 시인의 실존적 성찰을 말해 주는 것으로서 삶의 역정을 압축해 준다. 그래서 시인은 과거적 삶을 현재적 삶으로 대치시킨다. 그러면서 바람을 통해 우주적 질서의 필연성에 도달하려는 태도로 보인다.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약속」

 

  이 시에서 ‘길’은 기다림이다. 그 길은 서러움이고 필연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길’은 끝없는 황토길이다. 한하운의 ‘전라도 길’을 연상하게도 되지만, 이 시인의 경우, 현실적 지상地上의 길이 아니라 천상天上의 길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 두 시인의 ‘길’ 역시 실존적 소외의식임을 쉽사리 발견하게 된다.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음’의 ‘기다림’의 미학은 천상병이 지향하는 시세계의 하나가 된다.

 

길은 막힌 데가 없구나

가로 막는 벽도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한다.

그러니

길은 영원하다.

                               -「길」

 

  ‘바람’과 ‘길’은 도가적 의미로 묘사되고 있다. 천상병이 추구하고 있는 인생관을 말해준다. ‘길은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은 하늘만이 인도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진리는 ‘하늘’이라는 것이다. ‘나는 죽으면 땅 속인데/ 그래도 나의 영혼은/ 하늘에의 솟구침이어야 하는데/ 죽은 다음에는 연기이기를!’(「연기」)에서 ‘하늘’과 ‘영혼’의 길을 소망하고 있음을 본다. 결국 시인의 자기 성찰은 ‘바람’, ‘길’을 통하여 ‘하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시인은 현실적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늘’에 이르는 것이라 했다. 이 시인에게서 전후기를 통하여 일관되게 나타나는 시의 특징은 ‘하늘’ 지향이라 생각된다.

 

하늘에는 구름이 뜨고

새가 날으고

가이 없이 무궁무진하다

태양이 오르면

달과 별은 내일을 예고한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그 위에 계실 하느님에게

감사하며 내 삶의 보람을 찾는다.

                                        -「하늘」

 

  이 시는 천상낙원의 상상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하늘 위에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동심적 발상을 배제할 수 없지만 이것은 시인의 종교관에서 파악함이 옳을 것이다. 대표되는 작품으로 「예수님의 초상」, 「하느님 말씀 들었나이다」, 「하느님은 어찌 탄생했을까?」 등이 있으나 그의 신앙시는 동양적 경천사상과 절대자에 대한 외경심을 동일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① 나는 지금/ 한쪽 다리와/ 한쪽 팔 만으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예수님!/

제발 돌아와 주소서

그렇잖으면 저는/ 한 알의 흙과 같습니다.

 

② 하늘에서/ 나즈막하나,/ 그래도 또렷한 우리말로/

‘망상은 안돼’ 하는/ 말씀이 들리시더니 /

또 일분 후에/ ‘팔팔까지 살다가

그리고 더’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틀림없습니다 / …그냥 길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명상에 잠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③ 우주에서/ 제일 처음으로 유가 되신 하느님은/

친구가 친구를 찾는다고/ 대우주의 별과 별을/

창조하셨을 것이다./ 빛과 천체와 그늘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만물을 태어나시게 했을 것이다.

 

  「하늘」이 하느님에 대한 은총이라면, ①은 하느님의 구원, ②는 하느님과의 교감, ③은 창세기적 성서내용이다.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과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하느님’에게 의지하려는 현실적인 무력감은 만년에 들어 시인의 건강과 관련되어 있다. 고문의 후유증과 만성간경화증은 시인으로 하여금 종교에 의탁하려는 의지는 당연한 인간의 모습이라 하겠다.

  후기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신앙적 태도는 ‘어린이’, ‘가족애’ 등 현실적 일상과 어울려 인간적 고독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한편, 퇴행적 동심세계로 복귀하는 결과가 된다.

 

     아가야, 왜 우니?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무슨 슬픔 당했다고,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가를 깨쳤다고 우니?  

    이 새벽 정처 없는 산길로 헤매어 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아가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줄 엄마손이 있

    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지마!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아가야」(1970. 2. 《여원》)

 

  시인은 정처 없이 가파른 산길[삶의 길]을 헤매어 간다. 반겨줄 어머니 사랑도 없고, 슬픔과 괴로움만을 안고 사는 시적화자는 대문 앞에서 울고 있는 ‘아가’에게 시선을 보낸다. 시인은 ‘아가’를 통해서 인생의 깊이를 헤아리고자 한다.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아가야 울지마!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시인은 아무에게도 자신의 ‘눈물’을 보이려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억제의 연민으로 시적 아름다움을 이끌어 올리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소릉조」)’라고 했듯이 삶의 고통을 인식하고 있다.

 

요놈! 요놈하면서

내가 부르면

어린이들은

환갑 나이의 날 보고

요놈! 요놈한다.

 

어린이들은

보면 볼수록 좋다.

잘 커서 큰일 해다오!

               -「난 어린애가 좋다」

 

  천상병에게서 인생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노마디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현실과 이상, 슬픔과 기쁨, 삶과 죽음, 어둠과 밝음, 지상과 하늘, 이승과 저승, 그리고 인간과 신 등의 이분법적 대립관계를 지속시킨 시세계를 구축한 시인이다. 그래서 시인은 ‘어느날 일요일이었는데/ 창에서 참새 한 마리/ 날아 들어왔다. (중략) 세상을 살다보면 별일도 많다는데 (중략) 꼭 나와 같은 어리석은 새’라고 한다. 이 어리석은 참새에 대한 연민은 시인 스스로에게 주어진 운명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천상병이 후기에 와서 현실비판적 시를 쓰게 된 까닭은 다름아닌 6~7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된 사회현실에 대한 저항의식일 것이다.

 

  5. 마무리

  새와 하늘로 표상되는 천상병의 시세계는 지상과 하늘,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둠 등의 대립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들의 정서는 자아와 세계의 미적 거리에 의해 비극적 정조로 나타난다.

  특히 초기시의 경우 새는 지상과 하늘을 결합시켜 주는 매개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는 하늘, 죽음, 밝음의 세계로 나가는 초월의지의 상징이라 하겠다. 천상병의 초월의지는 하늘회귀의 시세계를 보여 주는데, 하늘에서 지상으로, 지상에서 하늘로 가고자 하는 ‘돌아감’의 시학이라 하겠다. 즉, 지상에서의 현실적 고뇌로부터의 자유스러움의 공간지향인 것이다.

  후기시에서는 현실적 실존의식이 강하게 나타나는 대신 ‘새’의 상징은 ‘하느님’으로 변모되어 있다. 특히 1970년대 이후의 시에서는 가톨리시즘, 자연적 소재, 가족애, 현실비판적 실존의식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기시가 하늘회귀의 시세계라 한다면 후기시는 실존의식의 세계라 하겠다. 그러나 후기시는 사변적인 일상성의 한계 때문에 전기시에 비해 시적 성과를 획득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천상병의 시에서 전후기에 일관되게 관류하고 있는 것은 삶과 죽음의 세계관이다. 이 죽음의식은 시인의 노마디즘적 생애에서 비롯한 것으로써 위기감이 내면세계를 지배했던 결과라 보여진다. 그것이 곧 빛의 지향, 하늘과 저승, 그리고 우주지향의 확대된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 조병기 시인

1972년 《시조문학》 등단.

198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및 《현대문학》 천료.

시집 으로『산길을 걸으며』 등과 연구서 『한국문학의 서정성』 등이 있음.

bkc-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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