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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 대종회 초대 대종약장(현재 대종회장) 공조판서(工曹參判) 은상(殷相) 조종필(趙鍾弼)▣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5. 3.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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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조판서(工曹參判) 은상(殷相) 조종필(趙鍾弼) :1840(헌종 6)∼ 1915년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은상(殷相). 예조판서 대제학 문헌공 성교(性敎)의 아들이다. 1867년(고종4) 진사가 되고, 187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사간원의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쳐 성균관대사성 및 이조참의에 이르렀으며, 한성부좌우윤·형조참판·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1893년 정부당상에 올랐으며, 1895년 중추원1등의관, 1897년 태의원경(太醫院卿)·궁내부특진관이 되고, 강화도관찰사를 시작으로 함경남도·경기도·전라남도의 관찰사를 두루 역임하였다. 1901년에는 장례원경(掌禮院卿)으로 정헌대부 정2품에 승진되었다. 1903년 다시 충청남도와 황해도 관찰사에 이어 지계아문감독(地契衙門監督)을 역임하였다. 융희 2년(1908년) 한양조씨 대종회를 창립하고 초대 대종약장(현재 대종회장)에 취임하였다.

▲▼前서울대학교분당병원장역임하셨던 조중행(趙重行)님.

▣대종회 창립 발기문(1908년,번역문)▣

은나라에서는 벼슬아치들이 수레를 탔고 주나라에서는 면류관을 썼느데 이는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의 예법(禮)의 변천을 보여준다. 여름에는 갈포(葛布)로 만든 옷을 입고 겨울에는 가죽 옷을 입었으며 사철 기후의 변화를 따르는 것이 법도였다. 그래서 성인(聖人)들은 자기의 처지가 바뀌면 모두 그렇게 하였으며 현자(賢者)들은 시세(時勢)를 좇아 자신을 인도하였다.


도리어 구습(舊習)에 교착하여 개혁하지 못하고 옛날의 법도에 젖어 전철을 바꾸지 못한다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무사에게 탕(湯) 임금의 악곡(樂曲)을 연주 하는 것과 같고, 맨발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유생(儒生)을 파는 것과 같음에 비견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무식한 사람들에게서 욕먹게 될 것이니 도리어 식자우환이 될 것이다.


오늘 날의 한민족(韓民族)을 비교하면서 보건데 지구상 강대국들과 과연 같은가? 두개골이 둥그럽고 발 꿈치가 네모난 것만 본다면 우리도 사람이고 저들 또한 사람이다. 그러나 문물과 자녀를 비교해 보면 저들 사람들이나 국가는 분명히 우리를 업신여길 것이다.


아! 단기 4000년, 신성스러운 나라, 조선 500년, 삼천리 강토를 도덕으로 교화하였건만 2000만 인구가 마침내 노
예의 이름을 뒤집어 쓸 지경에 이르렀구나! 아이들 교육 수준을 비교하여 6대주(六大洲)를 돌아 보건데 우리나라와 같이 빈약한 나라가 하나도 없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그 본말을 따져보면, 그 책임을 담당할 부형들이 교육의 방침을 세워 자제들의 방향 상실을 서둘러 선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마치 간과 폐가 모두 슬픔에 잠기는 것 같다. 또한 돌아가신 선조와 부형들의 하늘에 계신 영혼이 양양하게 혹은 오르고 혹은 대지에 내려와 남 몰래 틀림없이 이를 보고 느낄 것을 생각하면서 슬퍼 탄식하노라.


"옛날의 문명은 이미 오늘과 다르고 오늘날 우리의 문명은 저들만 못하여, 허약한 자손들이 경쟁과 선택의 틈바구
니에서 고향을 떠나 떠돌고 있는데 누가 그들을 가르치고 육성하여 다 같이 태평한 세대의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인가!"


오늘 날, 우리(여기 모인 사람들)는 선조의 자손으로 경향 각지에 흩어져 사는 자들로서 머리가 하얗게 셌으나 진정
으로 집안의 다듬이질 소리, 어린 아이 우는 소리, 젊은 이의 글 읽는 소리에 의지(기대)한다.


다른 가문의 문하생을 힐책하는 데에도 그 것이 불가피한 경우 옷깃을 여미고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진데 하물며 우
리 한양 조씨가 고려조(高麗朝)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재상과 어진 신하, 선현후학(先賢後學)이 줄을 이었으면서도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만났음에랴! 무릇 우리 자손들이 정신을 수습하여 문명의 발전을 위해 힘써 도모하지 않는다면 이는 국민의 책무를 잃는 일이며 선조의 업적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연구 검토하여 옛날의 방법을 고치고 새로운 학문을 이용하는 방향을 충분히 의논하여, 우선 교육의 채찍을 잡고
유지할 방책을 논하여야 할진데 어찌 이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통고하노니 종중의 모든 이들은 왼쪽에 쓴 정한 날짜에 모두 참석하여 방안을 연구 검토해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다.

 

=융희 2년(1908년)殷相筆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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