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陽人문화유적❀

◈ 임진왜란 의병장 조웅 장군:호서의 백기 장군, 백기와 홍기는 피하라...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7. 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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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의병장 조웅 장군
호서의 백기 장군, 백기와 홍기는 피하라...


충주시 앙성면 능암리에는 임지왜란 때에 충주지방을 지킨 유일한 의병장 조웅장군의 정려문이 큰 길 옆에 새로이 세워져 있다. 또한 앙성면 조천리 산록에는 장군의 묘소가 있으니 묘소 앞에는 110㎝의 망주석과 1m의 문인석 및 상석이 나란히 남아있다. 조웅은 명종 22년(1567년)쯤 충주시 가금면 가홍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백기당이고,본관은 한양이다.조웅은 태어나면서부터 빼어난 재질을 지녔고 기개가 호탕하였다. 자라나면서 몸이 장대하고 체력이 좋았다고 한다. 일찍이 충정공파 12세조 모계공 조강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웠으며 처음에는 유학을 배우다가 뜻한 바가 있어 무예를 익혔으니 모계 선생도 한번 보고는 나라에 공을 세울 군인임을 알고 무예를 권장하였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 청주를 탈환한 유명한 의병장 조헌은 조웅을 조정에 추천하기를 임진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 장군과 서로 비교할 만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조웅은 선조 24년에 별시에서 무과에 합격하고 특별히 기용되어 내금위가 되었다가 선전관으로 옮겼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조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왜군은 20만의 대군을 가지고 부산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북상, 15일만인 4월 28일 충주에 다달았다. 충주 역시 신립 장군이 왜적과의 충돌이 있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적의 손아귀에 넘어갔고 5월 2일 서울도 함락되어 왕은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 고향에 내려와 있던 조웅은 여러 지방에 격문을 띄워 5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앙성면의 태자산 아래에 주둔하고 서울로 향해 올라가는 왜적의 후속 부대를 막아 물리쳤다. 조웅은 군호의 표지로 모든 깃발을 흰 것으로 하였으니 그 때 사람들이 이를 두고 이르기를 '백기장군'이라 하였다.당시 8도의 의병중 호서의 백기장군과 영남의 홍의장군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여 왜적도 백기와 홍기는 피하라고 할 정도였다. 조웅을 백기당이라는 호를 붙인것도 이 때문이다.
조웅은 앙성면과 소태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적은 충주와 원주에 대부대를 주둔하고 있었으며 죽산,양지,용인으로 연결되는 길은 통해서 서울을 왕래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웅이 지키던 소태면과 앙성면은 그 길목이었으며 적과의 충돌이 잦았다.
한 때 소태면 남한강 북쪽 유역에서 적과의 교전이 크게 일어나 적의 피해는 두 말 할 것도 없고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조웅 역시 부상당한 몸이 되었다. 이 무렵 원주의 왜군이 여주에서 패배를 당하자 원주의 잔여 왜군들은 충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조웅과의 일전 역시 피치 못할 일이었다.
"조웅과의 일전 여시 피치 못할 일!"
안개가 짙게 깔린 어두운 때를 이용하여 적은 겹겹이 둘러싸 포위하고 공격해 왔다. 총알이 비오듯하고 화살과 돌이 엇갈려 상황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군졸들은 대오를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조웅은 이 때 창을 잡아들고 돌격 명령을 내리며 나아가 적 수십명을 무찔렀다. 그러나 힘이 다해 적의 총알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사로 잡히게 되었다. 왜적은 조웅의 손과 발을 잘라 거의 사경에 이르렀음에도 왜적 꾸짖기를 멈추지 않자 사지를 찢기는 죽음을 당했다 한다. 이 때 나이가 21세---26세쯤으로 보고 있다.
조웅의 죽음은 많은 부하들과 지방민은 물론 조정에서도 크게 놀랐다. 혼란 중이라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여 장례를 치를 수 없었으므로 급한 대로 청룡사에 가매장하였다가 이듬해 10월에 지금의 산소로 이장했다.
선조 38년에 병조참의로 증직되고 선무원종공신의 호를 받았다. 다시 광해군 11년 (1618)에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숙종16년(1690)에 정례문을 세웠으나 한말에 왜놈들에 의해 헐렸던 것을 후에 다시 복원하였다가 얼마전에 종손이 정려각이 있는 밭을 팔아 정려각을 없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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