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농월정에서 원운으로 읊다〔弄月亭用原韻〕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10. 2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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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趙氏初代大宗約長親筆謹序

◐박명부(朴明榑)號: 여승(汝昇), 지족당(知足堂)◑

●生  : 1571년(선조 4)

●卒  : 1639년(인조 17)

●경력: 예조참판, 한성좌윤, 도승지  

13455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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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및 활동사항]

1590년(선조 23)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 교서관 부정자(校書館副正字)에 보직되었다가 이듬 해에는 저작(著作)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김성일(金誠一)·곽재우(郭再佑) 군막에 왕래하면서 군무(軍務)에 많이 협찬했으며, 1593년에는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다가 환도(還都) 후 박사(博士)를 제수 받았다.

그 뒤에 호조좌랑(戶曹佐郞)·해주판관(海州判官)·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합천군수(陜川郡守)로 나갔는데, 당시 합천에 정인홍(鄭仁弘)이 있었으나 그의 집에는 출입하지 않았다.

1614년(광해군 6)에 이이첨(李爾瞻)·정인홍 등이 광해군을 종용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도 유폐시키자, 그는 직언으로 항소하다가 관직을 삭탈 당하고 축출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부수찬(副修撰)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자 그 해 여름에는 대구부사(大邱府使)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죽산부사(竹山府使)·형조참의(形曹參議)·좌부승지(左副承旨)·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 등을 역임하다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재임 중에 병자호란을 당해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강화(講和)를 반대하였다.

끝내 성하지맹(城下之盟)이 맺어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농월정(弄月亭)을 짓고 은거(隱居)하다가, 1638년(인조 16)에 예조참판(禮曹參判)·한성좌윤(漢城左尹)·도승지(都承旨) 등에 연이어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지족당문집(知足堂文集)』 3책이 있다.

농월정에서 원운으로 읊다弄月亭用原韻

玄圃瑤池逈且幽현포요지형차유 /

현포와 요지가 멀고도 그윽한데
巨靈移向此間留거령이향차간류 /

산천의 신령이 이 사이에 옮겨와 머물렀네
洪濤碾過氷紈滑홍도년과빙환홀 /

큰 물결은 맷돌처럼 지나 찬 깁처럼 미끄럽고
亂瀑瀠回雪乳浮난폭형회설유부 /

어지러운 폭포가 감돌아 눈이 날리는 듯하네
狂叫可堪同拍手광규가감동박수 /

미친 듯이 부르짖고자 할 때 함께 손뼉 칠 만하고
苦吟時復爲搔頭고음시복위소두 /

억지로 시상 떠올리며 때로 다시 머리 긁적이네
也知弄月吹簫侶야지농월취소려 /

또한 알리라 달을 희롱하며 퉁소 부는 무리가
合是當年第一流합시당년제일류 /

아마도 당년의 품격이 가장 뛰어났음을

[-D001] 농월정(弄月亭) :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의 안의삼동(安義三洞) 가운데 화림동(花林洞)에 있는 정자인데, 박명부(朴明榑, 1571~1639)가 지었다. 박명부의 자는 여승(汝昇), 호는 지족당(知足堂),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1590(선조23)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저서로는 지족당집이 있다.

[-D002] 원운 : 박명부(朴明榑)지족당집(知足堂集)1농월정에 적다.題弄月亭〕〉라는 제목의 시를 말한다.

●박명부(朴明榑)의 《지족당집(知足堂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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