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는 사림파의 영수(領袖)다. 영수는 우두머리 라는 뜻이다, 사학계에서는 사림파가 조선왕조를 반대하고 낙향한 인물들이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의 선조 양절공 조온은 전혀 그런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조온은 조선 개국공신 중 한명이고, 조온의 아버지 양렬공은 이자춘의 딸과 결혼하여 조선왕조와 친족으로 이어져 있다. 그외에도 사림세력이 화를 당한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의 인물 90여명중 70퍼센트 정도가 한양 거주자 였다. 더군다나 세조의 찬탈에 협력한 사람들이 공신책봉을 받았는데 이때당시 훈구파들은 사장학자들이다.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곧 문학 이냐 도학 이냐의 싸움이었다. 역사 지식이 짧은 사람들이 이걸 이해 못하는 이유는 고려시대를 이해 못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는 사장학과 불교의 나라였다. 사림 세력들이 조선의 개국 공신들이고, 세조때의 공신들인 훈구세력들은 고려시대의 잔재들이다. 훈구파의 유명한 유자광 도 보면 시와 문장을 즐겼던 사장학자다.
문맥들을 편집해서 올린것이니 완전판을 읽고싶으면 직접 찾으면 된다. ☆계실繼室 - 다시 얻은 처(妻). 계처(繼妻).
※국조인물고 - 조온[趙溫]
1347(충목왕 3)~ 1417(태종 1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할아버지는 검교밀직부사 돈(暾)이고, 아버지는 용원부원군 인벽(仁璧)이며, 어머니는 환조(桓祖 : 李成桂의 아버지 子春)의 큰딸인 정화공주(貞和公主)이다. 어려서부터 외삼촌인 이성계를 따랐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 때 이조판서로 참여하여 회군공신에 책록되었고, 1392년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으로 평양윤(平壤尹)에 임명되고 한천군(漢川君)에 봉해졌다. 1393년(태조 2) 서북면도순문사로 수주(隋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고, 연의주도(鍊義州道)의 장정들을 군적(軍籍)에 올려 병력 강화를 도모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친군위도진무(親軍衛都鎭撫)로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이 되었고, 중추원사를 거쳐 의흥삼군부 좌군동지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同知節制使)·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참찬문하부사로 이방간(李芳幹)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상왕(태조)의 명으로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등을 죽인 죄로 완산부(完山府)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다. 1401년 태종이 즉위하자 참찬의정부사로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의정부찬성사·동북면찰리사가 되었다.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공의 4세손(世孫)인 정암 선생(靜菴先生)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하여 우리나라의 유종(儒宗)이 되고 부자(夫子, 공자(孔子)를 말함)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니, 그 또한 공이 덕(德)을 쌓은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양절공 적손은 불행하게도 누차 끊어졌다가 이어 나갔다. 게다가 임진년 전쟁(임진왜란)을 만나 이어서 가문이 점차 쇠퇴하여 집안에 전해오던 귀중한 옛 유물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으며, 유서 한 장만 남아 있었다. 내가 어릴적 장난치며 노닐 때 일찍이 유서를 본 적이 있었으나 그것을 보배로 여길 줄 몰랐다. 내가 성장하여 조상의 행장(行狀), 지(誌), 갈(碣) 등 행적을 기록한 글을 구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유상(遺像) 세개 같은 경우는 모두 전란 속에서 망실되었다. 이때 종손 대호군공(大護軍公) 조흥인(趙興仁)은 본생친(本生親: 양자가로 간 사람의 생가 부모)인 나의 종증조모의 상을 당하여 시골의 여막(廬幕)에 거처하고 부인은 서울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허겁지겁 피난하여 남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중에 늙은 하녀가 신주(神主) 하나를 품에 안고 이르렀는데 바로 양절공의 신주이다. 이때 바야흐로 왜놈들이 서울에 가득 찼었다. 무지한 하녀가 어찌 수습하여 받들어 돌아갈 줄이나 알았겠는가? 사우(祠宇)에 나열된 여러 위패 가운데에서 유독 양절공의 신주만을 가져왔으니 실로 기이한 일이로다. 그런데 양절공의 첫번째, 두번째 두 부인의 신주를 다시 만들고자 하였으나 성씨와 관향을 모두 알 수가 없어 이에 통탄하여 애석하게 여길 따름인데 무릇 후대의 자손이라면 이에 동정할 것이다.
올해(1627) 내가 관직에서 물러나 허름한 집으로 돌아가 거처하게 되었다. 한가한 날에 집안의 족보를 꺼내놓고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나머지를 증보하던 차에 마침내 종가에 가서 궤짝을 열어 이 유서(遺書)를 얻게 되었다. 손을 씻고 받들고 읽어보니 필획이 절묘하고 아름답고 웅건 하였다. 꿇어앉아 읽어 보고는 돌아오니 남기신 가르침이 타이르고 격려하며 간곡 하였기에 우러러 아득히 사모하고 굽어서는 깊이 감동하였다. 수백 년 동안 전해져 내려와 아직 남아있는 손때를 직접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아아! 오늘날 양절공의 자손은 그 숫자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전대의 업적과 공적을 계승할 수 있는 사람은 대체로 드물며, 향사(享祀)를 지냄도 한결같지 않으니 이것은 바로 양절공의 큰 훈계를 어기는 것이다. 무릇 나는 불초무사(不肖無似: 어진 사람을 닮지 못한 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이르는 겸칭)하고 또한 근심스럽고 두려우면서도 얼굴 붉어져 부끄러울 따름이니, 스스로 마음써야 할 바를 모르겠다. 하물며 이를 보고 조상을 욕되게 할 수는 없으니 의당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에 양절공의 유지를 그대로 베껴 써서 여러 종족에게 널리 배포한다. 하지만 손이 서툴고 능숙하지 못하여 문자만을 베껴 취하였으나 늘 눈여겨 볼 교훈으로 여겨야 할 것이니, 승냥이와 수달피 같은 미물도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뜻을 경계하여 깨우치기 바란다.
정묘년(1627) 음력 섣달에 후손 극선(克善)이 감격하여 목메어 울며 쓰다
(≪야곡집(冶谷集)≫권5) 번역: 김제공파 문학박사 조성환님
●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윤5월 19일 甲戌 1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한천 부원군(漢川府院君)조온(趙溫)이 졸(卒)하였다. 조온의 선계(先系)는 본래 한양(漢陽) 사람으로, 용진(龍津)457) 에 사거(徙居)하였다. 아버지 조인벽(趙仁璧)은 용원 부원군(龍原府院君)이었다. 조온은 일찍 태조(太祖)의 잠저(潛邸) 때부터 섬기어, 드디어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 공신(佐命功臣)이 되었고, 3조(三朝)458) 에 역사(歷仕)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염정(廉靜)하고 온량(溫良)하며,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적었다. 가산(家産)을 일삼지 아니하여 귀(貴)하였으되 능히 절검(節儉)하였다. 죽으니 나이 71세였다. 철조(輟朝)하고 부의를 보내며, 유사(有司)에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시호를 양절(良節)이라 하였다. 아들에 조의(趙儀)·조완(趙琓)·조흥(趙興)·조육(趙育)이 있었다.
※장남 조의(趙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차남인 조완(趙琓)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고, 그 다음 조하(趙河)는 별장(別將)이고, 그 다음 조흥(趙興)은 선공감 정(繕工監正)이고, 그 다음 조육(趙育)은 의영고 사(義盈庫使)이다. 실록엔 조하(趙河)가 빠짐!!!
※장남 조의(趙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차남인 조완(趙琓)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고, 그 다음 조하(趙河)는 별장(別將)이고, 그 다음 조흥(趙興)은 선공감 정(繕工監正)이고, 그 다음 조육(趙育)은 의영고 사(義盈庫使)이다. 실록엔조하(趙河)가 빠짐!!!
[주-D001] 輔 : 底本에는 “轉”으로 되어 있다.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 및 《冶谷集・世系》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2] 事 :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에는 “命”으로 되어 있다.
[주-D003] 散 : 底本에는 “敬”으로 되어 있다.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4] 耋 :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에는 “袠”로 되어 있다.
[주-D005] 勅 : 底本에는 “陳”으로 되어 있다.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주-D006] 豎 : 底本에는 “堅”으로 되어 있다. 《松谷集・議政府左贊成漢川府院君墓表陰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2022
▣조온 [ 趙溫 ]의 묘표(墓表) 저자 조복양(趙復陽) 시호 : 양절(良節)▣
공의 휘(諱)는 온(溫)이요 성(姓)은 조씨(趙氏)로 그 선계(先系)는 한양(漢陽) 사람이다. 쌍성 총관(雙城摠管)을 지낸 조휘(趙暉)가 그 고조(高祖)이고,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을 지낸 조양기(趙良琪)가 그 증조(曾祖)이다. 삼중 대광(三重大匡) 용성군(龍城君) 조돈(趙暾)이 그 조고(祖考)이고, 순성 익위 협찬 보리 공신(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용원 부원군(龍源府院君) 판소부시사(判少府寺事) 양렬공(襄烈公) 조인벽(趙仁璧)이 그 선고(先考)이다. 양렬공의 계실(繼室)은 환조 대왕(桓祖大王)의 딸이니, 양렬공은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매서(妹壻, 매제(妹弟)를 말함)인데, 고려 말에 국사(國事)가 다른 성씨(姓氏, 조선 태조를 가리킴)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서 곧 양양(襄陽)에서 노년을 보냄으로써 신하의 절개를 지키다가 목숨을 마쳤으므로, 양양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하였다.
공은 양렬공의 맏아들인데,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섬기어 개국 공신(開國功臣)ㆍ정사 공신(定社功臣)ㆍ좌명 공신(佐命功臣)의 세 공신에 녹훈(錄勳)되고 한천 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양절공(良節公)이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왜란 때에 공의 유상(遺像)과 대대로 간직해온 문적(文籍)을 모조리 잃어버렸기 때문에 공의 언행(言行)ㆍ사적(事蹟)과 관력(官歷)ㆍ생졸(生卒)을 모두 고찰할 수가 없다.
이에 보첩(譜牒)과 전기(傳記)에 뒤섞여 나오는 것을 살펴보면, 공의 증손자인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가 쓴 족보(族譜)의 서문(序文)에 이르기를, “양절공과 양경공(良敬公)은 효성스럽고 염결(廉潔)하고 충성스럽고 성실함으로써 함께 훌륭한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특히 양절공은 협찬한 세 가지 큰 공훈에 있어 모두 의(義)로써 적절하게 처신하였으며, 공훈의 상사(賞賜)로 받은 것들을 살림이 가난한 친족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서너 칸의 작은 초가집에서 살았으므로 말[馬]조차 몸을 돌릴 수 없을 만큼 비좁았다. 또 밥상에는 별미의 음식이 없었고 좌석에는 두터운 요조차 없었으니, 연세가 여든이 되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변함없이 살았다.”고 하였다. 양경공은 곧 공의 아우인 우의정(右議政) 조연(趙涓)이다.
또 전하기를, “양절공이 별세한 뒤에 그 아들이 집을 새로 짓고서 양경공을 초청하여 낙성(落成)을 하였는데, 양경공이 그 집에 이르러 정제(庭除, 뜰의 층계)를 보더니 당(堂)에 앉지도 않고 나가버리며 말하기를, ‘백씨(伯氏)께서 살던 집에 계단을 설치하지 않은 것이 어찌 재력(財力)이 모자라서 그랬겠는가? 그런데 너희들이 선인(先人)의 검소한 덕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도리어 돌로 계단을 만들었으니, 나는 너희 집에 다시는 들어오지 않으련다.’고 하니, 여러 조카들이 두려워하여 즉시 허물어뜨렸다.”고 한다.
공의 손자인 사예(司藝) 조충손(趙衷孫)은 항상 여러 자제(子弟)들에게 타이르기를, “내가 석갈(釋褐, 과거에 급제함을 말함)한 날부터 선조(先祖, 조온을 말함)께서 행하신 바를 흠모하였으나 나는 선조처럼 해내지 못하였다. 우리 집안의 자제로서 만일 세상에 입신(立身)을 하고서도 혹시라도 양절공의 뜻을 저버리는 자가 있으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상국(相國) 홍언필(洪彦弼)이 지은 문절공(文節公)의 비문(碑文)에도 그 세계(世系)를 서술하면서 또한 ‘공의 청덕(淸德)과 준절(峻節)이 세상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노라’고 칭찬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공의 평생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호귀(豪貴)하고 분화(芬華)한 생활은 여러 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것이므로, 예로부터 훈귀(勳貴)의 가문(家門)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들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므로 옛말에 ‘빈천하게 살아가기는 쉬워도 부귀하게 살아가기는 어렵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공은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원훈(元勳)으로서 벼슬이 극품(極品)에 올라서 가문이 융성하고 총광(寵光)이 혁혁하였으되, 모든 것을 한결같이 청렴하고 검약함으로써 자신을 다스렸으며 마치 가난한 선비처럼 조촐하게 살았으니, 탁절(卓絶)한 조수(操守)가 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해낼 수가 있었겠는가? 공의 4세손(世孫)인 정암 선생(靜菴先生)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하여 우리나라의 유종(儒宗)이 되고 부자(夫子, 공자(孔子)를 말함)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니, 그 또한 공이 덕(德)을 쌓은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공의 선비(先妣)와 부인(夫人)은 모두 어떤 성씨(姓氏)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부인은 모씨(某氏)라고 말하기도 한다. 5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조의(趙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차남인 조완(趙琓)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이고, 그 다음 조하(趙河)는 별장(別將)이고, 그 다음 조흥(趙興)은 선공감 정(繕工監正)이고, 그 다음 조육(趙育)은 의영고 사(義盈庫使)이다. 부사(府使) 이중경(李仲慶)과 호군(護軍) 윤희전(尹希錢)과 직장(直長) 이소인(李紹仁)이 그 사위들이다. 공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대대로 이름난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까지 높은 벼슬에 오른 자들이 끊이지 않으니, 덕을 두텁게 쌓으면 복록이 오래 이어진다는 옛말이 참으로 믿을 만하다.
공의 장지(葬地)는 교하현(交河縣)의 모좌 모향(某坐某向) 언덕에 있는데, 옛날에 비갈(碑碣)이 있었으나 쓰러져 부서졌다. 이에 공의 8세손(世孫)인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조극선(趙克善)이 그 일을 슬프게 여기고서 여러 종인(宗人)들과 도모하여 재력(財力)을 모아 비석을 다듬고 장차 비문을 새기어 다시 세우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 아들인 조창한(趙昌漢)이 뒤를 이어 성사시켰다. 장령(掌令, 조극선을 말함)은 학행(學行)으로 벼슬에 나아가 장차 크게 쓰이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병이 들어 죽었으며, 조창한은 선친의 뜻을 잘 이어받아 마침내 이 비석을 세움으로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이 양절공의 묘소임을 알게 하였으니, 이 또한 비문에 기록할 만한 일이다.
漢陽趙氏가 高麗末期에 顯達하여 國初에 이르러 대대로 큰 名望이 있었다. 公이 태조를 도와 開國 定社 佐命 세 가지의 큰 勳을 冊封 받았으니, 勳業이 마땅히 國史에 빛났을 것인데, 史記는 秘藏되어 참고 할 수 없고, 집에 寶藏된 遺像과 世蹟(대대로 전하는 遺蹟) 遺勳이 모두 壬辰倭亂에 실전되어 벼슬의 이력과 行治의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다. 先君子(자기 아버지를 일컬음)께서 말씀하시기를 “洪陽族人 世珍의 집에 行狀(평생의 행적을 적은 글) 한통이 있는데, 寶襲하여 남에게 보이기를 허락지 않는다.” 했었다. 이제 와서 그의 후손을 찾아가니 이미 유실된 것이다. 어찌 한탄스럽고 애석함을 감내하겠는가.
公의 묘소(衣履之藏)가 交河縣에 있는데 墓碑가 또한 破損되었다. 朝家에서 賜牌하고 禮葬(오늘날의 國葬)한 위치로서 통탄스러운 일 더욱 어떻다 말하겠는가? 먼 자손인 有鐸과 宅俊이가 잇달아 나가 살펴보고 와서 그곳의 상황을 말하기를 “깨진 비석의 후면 각자에 邦楨, 參議, 네 글자가 있다.” 했는데, 현재 우의정인 沈公之源이 옛날 洪州牧使로 있을 때 나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공의 묘를 봉심(祇謁)하였는데, 이때에도 묘갈에 기록(欸識)이 보존되었으니, 곧 우리 외선조인 판결사공 邦楨과 참의공 邦彦이 세운 바이다.” 했다. 그렇다면 판결과 참의는 公에게 玄孫이 되니, 어찌 현손에 이르러 비로소 비석을 세울 이치가 있겠는가? 비석을 보전 못하기가 이미 두 차례나 되었고 神道碑 역시 훌륭한 새김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公의 성품이 간략하고 검소하여 집에 섬돌(石砌 ; 오르내리는 층계 돌)이 없었다. 지금까지 전송(傳誦)된 것으로 보아 遺命으로 세우지 못하게 된 것인가?
有鐸이가 다시 세울 계획을 주창하자, 여러 의논으로 나에게 그 일을 위촉했다. 드디어 호우(湖右) 제종(諸宗)에게 布告하여 근근히 각각 한필의 綿布(무명)를 내게 하여 도합 33필을 거두었다. 克善이가 힘이 모자라고 계획이 졸하여 성공을 이룩하지 못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면포는 50필로 불어났다. 얼마 전에 克善의 내종(姑子) 박승휴가 홍주읍에 임관되자 그 자재를 위촉하여 수개월도 안되어 준공했는데, 前面大字는 현감 鄭彦悅이 쓴 바이다.
인하여 그에 대한 顚末을 서술하여 후손(來裔)에게 보이노라.
후손 장령 극선
(한풍군파, 온양군수 文穆公 克善, 1595년(선조28) - 1658(효종9), 신묘보[2권3책] 족보 편수, 양절공墓碑陰記씀) : [장명산 유택에 세워져 있던 묘비문 내용]
公이 태조를 도와 開國 定社 佐命 세 가지의 큰 勳을 冊封 받았으니, 勳業이 마땅히 國史에 빛났을 것인데, 史記는 秘藏되어 참고 할 수 없고, 집에 寶藏된 遺像과 世蹟(대대로 전하는 遺蹟) 遺勳이 모두 壬辰倭亂에 실전되어 벼슬의 이력과 行治의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다.
先君子(자기 아버지를 일컬음)께서 말씀하시기를 “洪陽族人 世珍의 집에 行狀(평생의 행적을 적은 글) 한통이 있는데, 寶襲하여 남에게 보이기를 허락지 않는다.” 했었다. 이제 와서 그의 후손을 찾아가니 이미 유실된 것이다. 어찌 한탄스럽고 애석함을 감내하겠는가.
公의 묘소(衣履之藏)가 交河縣에 있는데 墓碑가 또한 破損되었다. 朝家에서 賜牌하고 禮葬(오늘날의 國葬)한 위치로서 통탄스러운 일 더욱 어떻다 말하겠는가? 먼 자손인 有鐸과 宅俊이가 잇달아 나가 살펴보고 와서 그곳의 상황을 말하기를 “깨진 비석의 후면 각자에 邦楨, 參議, 네 글자가 있다.” 했는데, 현재 우의정인 沈公之源이 옛날 洪州牧使로 있을 때 나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공의 묘를 봉심(祇謁)하였는데, 이때에도 묘갈에 기록(欸識)이 보존되었으니, 곧 우리 외선조인 판결사공 邦楨과 참의공 邦彦이 세운 바이다.” 했다. 그렇다면 판결과 참의는 公에게 玄孫이 되니, 어찌 현손에 이르러 비로소 비석을 세울 이치가 있겠는가? 비석을 보전 못하기가 이미 두 차례나 되었고 神道碑 역시 훌륭한 새김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公의 성품이 간략하고 검소하여 집에 섬돌(石砌 ; 오르내리는 층계 돌)이 없었다. 지금까지 전송(傳誦)된 것으로 보아 遺命으로 세우지 못하게 된 것인가?
有鐸이가 다시 세울 계획을 주창하자, 여러 의논으로 나에게 그 일을 위촉했다.
드디어 호우(湖右) 제종(諸宗)에게 布告하여 근근히 각각 한필의 綿布(무명)를 내게 하여 도합 33필을 거두었다. 克善이가 힘이 모자라고 계획이 졸하여 성공을 이룩하지 못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 면포는 50필로 불어났다. 얼마 전에 克善의 내종(姑子) 박승휴가 홍주읍에 임관되자 그 자재를 위촉하여 수개월도 안되어 준공했는데, 前面大字는 현감 鄭彦悅이 쓴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