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陽人행사자료❀

◐2025년 6월 1일 의병의 날, 대구 망우당공원 임란호국 영남충의단 향사(봉행)

晛溪亭 斗井軒 2025. 6. 11. 17:36

2025년 6월 1일 의병의 날, 대구 망우당공원 임란호국 영남충의단 향사(봉행)

영양 참판공(, 11, 양경공파)종중에서는  202561일 의병의 날을 맞아 대구 동구 효목동 망우당(忘憂堂, 郭再祐) 공원 내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서 15회 의병의 날향사에 참례했다.

충의단에는 임진왜란(1592~1598)에 참전한 영남지역 의병 315위 영령이 봉안돼 있다. 이날 관계 기관장과 각 문중의 후손 등 500여 명이 참례하여 의병들의 충의정신을 되새겼다. 약산당공(光義, 12, 양경공파) 4종반〔수월공(휘 儉), 사월공(휘 任), 연담공(휘 乾), 호은공(휘 佺)〕 다섯 분의 선조님은 임진왜란 시 의병을 규합해 망우당 장군 진영에 합류해 화왕산과 팔공산 전투 등에 참전해 크게 활약하였고, 군량미와 말 등 군수물자를 조달하였다. 가천재-현감공파 영천종중의 조종악(趙宗岳)의 구암정(龜巖亭) : 영천시 금호읍 성천리 401-1, 귀암정(龜巖亭)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조종악(趙宗岳, 15661633)을 기려 후손들이 세운 집이다. 조종악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노모를 동생 조종대(趙宗岱)에게 부탁한 뒤 영천 의병에 뛰어들어 한천 전투, 영천성 수복 전투를 치렀다. 특히 영천성 수복 전투에서는 군대의 관향(管餉)을 맡아 군수 참모로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함으로써 승리의 기반이 되었다.
조종악은 영천 수복 후 권응수의 명에 따라 청송 지역 방어 임무를 수행했다. 이경천(李擎天)과 함께 청송으로 간 조종악은 군량을 모으고 의병 참여를 독려하는 활동에 전력을 쏟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권응수는 조종악의 지략과 용맹을 장하게 여겨 청송진(靑松陣)에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고 이로 인해 청송 지방이 병난(兵難, 전쟁의 피해)을 입지 않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대구, 안동, 영양에서 20여 명의 후손들이 참례하여 선조님의 뜻을 기렸다.

 

임진왜란 때 가문 전체가 의병에 참가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례가 6월 의병의 달을 보내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매년 61일이 되면 대구 망우공원에 세워진 충의단에서 의병을 기리기 위해 실시해 오던 추모행사가 지난해와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2년째 중단돼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임진왜란(1592-1598)은 우리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엄청난 민족적 수난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가적 위기를 한 가문이 총궐기해 구국운동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한양조씨 가문은 영남에서 최초로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는 데 참가했다. 영남은 왜적의 침략 길목에 위치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또한 의병도 영남에서 선도적으로 봉기해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이에 의병장 곽재우 장군 후손을 비롯한 한양조씨 의병 후손과 영남의병 후손들이 뜻을 모아 영남이 중심지였던 대구 망우공원에 충의사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임란호국 '영남충의단'을 건립하고 영남의병 315위 위패를 봉안해 매년 61일 의병의날 제향을 올려 위국충절을 기리고 있다.
충의단에 봉안된 의사들 중에 마을 전체가 의병에 참가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왜군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운 가문은 영양의 한양조씨가 전국에서 유일하다.
곽재우 장군의 서신을 받은 조광의(51)는 맏집 조카 조검(23) 조임(20)과 아들 조건(23) 조전(17)을 거느리고 서둘러 준비를 해 긴긴 행렬을 이루며 포산에 도착, 곽재우 장군 휘하에서 참전, 화왕산 전투에서 선봉장이 돼 크게 전과를 올렸다.
이때 조검은 선친으로 물려받은 재산 쌀 오백 섬, 기마 수십 필, 가신 40명을 보내 힘을 보탰다.

출처: https://sugisa.tistory.com/entry/임진왜란--창의倡義-경북-영양-한양조씨의-충절忠節-조씨-가문-전체가-의병에-참가하기는-전국에서-유일하다 [晛溪 斗井軒 Sugisa:티스토리]

=宣武原從功臣錄券 (標題 )=

그 공로로 조광의는 판결사, 조검은 선무원종 2등공신의 녹훈을 받았다. 아울러 조임이 남긴 시 '남정(南征)'은 임진왜란 때의 기행시 가운데 뛰어난 작품으로 학계에서 평가받고 있다.
그 후 조검(趙儉)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고령으로 참전치 못함을 한탄하고 아우 조임(趙任)과 함께 뒤뜰에 단을 쌓고 나라와 임금의 안녕을 빌었다니 그분들의 애국충절은 나이가 들어서도 가히 변함이 없었음이라 그때 쌓았던 단은 없어졌으나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후세 사람들이 그 근처에 세운 비()와 비각이 있다.
이들의 공적은 '숭정처사수월조공검축천단비'에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출처: https://sugisa.tistory.com/entry/임진왜란--창의倡義-경북-영양-한양조씨의-충절忠節-조씨-가문-전체가-의병에-참가하기는-전국에서-유일하다 [晛溪 斗井軒 Sugisa: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