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조광조,학포양팽손◑
龍仁縣深谷書院講堂記/學䂓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7. 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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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仁縣深谷書院講堂記
정암 조광조 竹樹書院 和順 1570년(선조3) 창건, 1594년(선조 27) 사액
선조 3 1570 경오 隆慶 4 - 綾州에 竹樹書院이 建立되어 享祀되다.
四年庚午 建竹樹書院於綾州 卽先生結纓之地。而因朝令。移奉中條山祠版建之文。因沙溪金先生議。配梁公學圃。○萬曆癸丑。重修書院。靈巖郡守趙纘韓著記。○院之西麓。舊有臺。庚戌。監司朴承宗。名以天日。仍著記。
선조 38 1605 을사 萬曆 33 - 墓下에 深谷書院이 건립되어 향사되다. *47개존속서원
三十三年乙巳 建深谷書院於先生墓下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 7월, 深谷書院에 賜額되다.
심곡서원은 1605년 건립되어 1650년 사액을 받았으며 1871년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으로, 건립연대와 사액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고 사액 후 원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서원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 7월, 坡山書院에 賜額되다.
栗谷先生全書卷之三十四 / 附錄 二 / 院享錄
紹賢書院。卽隱屏精舍。先生定居石潭。擬立朱子祠於隱屏。以靜菴,退溪二先生配於東西。先生沒後二年丙戌。諸生始建祠字。奉安三先生位版。以成先生遺志。其後十一年丙申。奉先生位版。配于東二位。萬曆庚戌。賜額。至顯廟辛丑。又以牛溪先生配于西二位。又至肅廟丁酉。以沙溪配于西三位。正宗丙申。又以尤庵先生配于西三位。移奉沙溪位。配于東三位。
紫雲書院在先生墓下。萬曆乙卯(1615,강해군7)。創建。後移建于州南五里許泉岾。其後。又移于墓下。孝廟庚寅(1650,효종1)。賜額。肅廟丙子。竝享朴南溪世采。至乙未。配以沙溪。仍移南溪就配位。
栗谷先生全書卷之三十七 / 附錄 五 / 紫雲書院廟庭碑 尤菴宋時烈撰
京外諸生。建院作廟而俎豆之。孝廟賜額曰紫雲。遂立牲繫于三分一之庭。而刻文其上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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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거(尹宣擧) 1610년(광해군 2)~1669년(현종 10)
魯西先生遺稿卷之一 / 詩
謁深谷書院。趙文正公墓在龍仁深谷里。墓下建書院。庚辰(1580,선조13; 1640,인조18; )七月。賜額。 庚寅(1650,효종1)
種德千年地。斯文百世祠。苾芬勤後學。芳臭着殘碑。大道誰傳脈。新扁會有時。四賢同一賜。天意定前期。
院立於墓傍。墓前兩碑。一則南衮之文。一則李山海之筆也。院額深谷。與坡山紫雲同日揭篇。故篇內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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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一百四十三 / 記 / 龍仁縣深谷書院講堂記
粤自仁,明兩朝以來。先生之道。大明於世。雖婦人孺子。莫不誦其名稱其德。後雖有能言之士。更無容贅其辭矣。惟太學生康惟善之疏。是伸冤明道第一文字。而論先生源派者。未免有可疑。其以圃隱爲東方理學之宗者。蓋圃隱始以程朱之說。啓牖東土。其橫豎說話。直契無違。則其謂之理學之宗者。不亦宜乎。至其以金司藝叔滋爲傳圃隱之學於冶隱。以授其子畢齋。以至於金文敬公而遂及於先生。則竊恐不得爲不易之定論也。先賢授受之統。非後學所敢議。然竊以諸老先生之尙論及以先生言論風旨觀之。則竊謂中間數君子特以發其端而已。惟受學於文敬公者。不可誣也。蓋先生負特立之姿。膺奎明之會。不由師傳。獨契道妙。由濂洛關閩之學。上求乎大學,語,孟,中庸之旨。規模正大。工夫嚴密。粹然聖賢之道。而純乎帝王之法矣。雖未能行之於一時。而傳之於後者。可以愈久而無弊矣。嗚呼。此豈人力之所與哉。天實啓之也。朝廷旣從祀文廟。則其崇報也極矣。而京外章甫又卽丘墓之傍。建祠妥靈。而講堂則未遑也。其後章甫搢紳。又合謀鳩材。經始於己亥三月。訖功於辛丑二月。藏修游息之所。於是略備矣。而先生五世孫今三山使君渭叟爲諸生求記於余。余以爲先生之生於我東者。實如濂溪之於宋朝也。豈必授受次第如貫珠。然後乃爲道學之傳哉。凡後人之登斯堂者。不徒想像乎先生之容色聲音。而必須講求乎先生之所學。夫先生之所學。不過近宗乎程朱之正脈而上求乎洙泗之妙旨而已。夫出口入耳。有名無實者。固先生之所深恥也。況於浮靡藻繪之習哉。蓋嘗聞書院之設。莫盛於宋朝。其勸戒院士之說。莫備於張南軒嶽麓之記矣。細而飮食起居之節。近而事親從兄之實。微而天理人欲之際。無不畢擧。則可謂無餘蘊矣。而晦翁猶以爲未究乎下學之功。而必使養之於未發之前。察之於將發之際。善則擴充之。惡則克去之。夫二夫子之說。卽先生之所服習而受用者也。然則欲求先生之學者。捨是宜無他說也。抑先生遺事。有逸於諸書者。先生從文敬於煕川之時。年僅十七矣。文敬得一美味。將奉送母夫人。守者不謹。爲鴟鴉所攫。文敬聲氣頗厲。先生進曰。先生奉養之誠則誠至矣。而君子辭氣。不可須臾放過也。文敬不覺膝前執手曰。我非汝師。而汝實吾師也。終日嘖嘖。先生資質之美。固度越古今。而文敬服善之量。亦有所相發於先生矣。煕川遺老至今傳爲美談。此宜揭於斯堂。故並著之。時崇禎癸丑十月日。恩津宋時烈記。
[주-D001] 日 : 一本日下有後學二字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3
◐용인현(龍仁縣) 심곡서원(深谷書院) 강당기(講堂記)◑
지난 인종(仁宗)ㆍ명종(明宗) 두 조정(朝廷) 이래로 선생(조광조(趙光祖)를 일컬음)의 도(道)가 세상에 크게 밝아져서 비록 부인네나 아이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외고 그의 덕을 칭송(稱頌)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그후에는 비록 말을 잘하는 선비가 있어도 다시는 말을 덧붙일 수 없게 되었다. 오직 태학(太學) 유생(儒生) 강유선(康惟善)의 소장(疏章)이 바로 원한(寃恨)을 풀고 도를 밝힌 첫 번째의 문자(文字)였으나, 선생의 연원(淵源)을 논한 것은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그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을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삼은 것은, 대개 포은이 맨 처음 정주(程朱)의 학설로 우리나라를 계도(啓導)했는데, 그가 종횡(縱橫)으로 설화(說話)한 것이 이학에 부합하여 어김이 없었으니, 그를 이학의 조종이라 이른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야은(冶隱 길재(吉再))이 포은한테서 전해 받은 학문을 사예(司藝) 김숙자(金叔滋)가 그의 아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전수(傳授)해서 김 문경공(金文敬公 문경은 김굉필(金宏弼)의 시호)에게 내려왔다가 드디어 선생에게 미쳐 왔다는 것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 되지 못한 듯하다. 선현(先賢)이 주고받은 계통(系統)을 후학(後學)이 감히 논의할 바 아니나, 여러 노선생(老先生)의 언론(言論)과 선생의 풍지(風旨)로써 본다면, 중간 두어 분은 다만 그 단서(端緖)를 계발(啓發)했을 뿐이고, 오직 문경공에게서 수학(受學)했음만이 속일 수 없는 일이다.
대개 선생은 특출한 자질을 가지고 문명(文明)한 기회를 만나서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 없이 홀로 도의 묘리(妙理)를 깨쳤다. 염락관민(濂洛關閩)의 학문을 말미암아서 위로 《대학(大學)》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중용(中庸)》의 논지(論旨)를 구했는데, 규모(規模)가 정대(正大)하고 공부가 엄밀(嚴密)하여 순수한 성현의 도이고 제왕(帝王)의 법이었다. 비록 한 시대에 시행되지는 못했으나, 후세에 전해서 더욱 오래되어도 폐단이 없을 만하였다. 아, 이것이 어찌 인력(人力)의 간여할 바이겠는가. 하늘이 실상 계시(啓示)한 것이다. 조정에서 이미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토록 했으니, 그를 보답함이 매우 지극하였다. 그런데 서울과 외방 선비들이 또 그의 무덤 곁에 사당을 세우고 신위를 봉안했으나, 강당(講堂)은 미처 짓지 못하였다가 그후에 장보와 진신이 다시 의논하고 재목(材木)을 모아, 기해년 3월에 시작해서 신축년 2월에 준공하였다. 이리하여 공부하고 휴식하는 장소가 대략 완비되었다. 선생의 5대손인 지금 삼수 군수(三水郡守) 위수(渭叟)가 여러 학생을 위해서 나에게 기(記)를 청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선생이 우리나라에 탄생한 것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가 송 나라에 태어난 것과 같다. 어찌 반드시 구슬을 꿰듯이 차례로 주고받아야만 이 도학(道學)의 전통(傳統)이 되는 것이랴. 무릇 후인으로서 이 강당에 오르는 자는 한갓 선생의 용색(容色)과 성음(聲音)만을 상상하지 말고 반드시 선생의 학문한 바를 강구(講究)해야 할 것이다. 대저 선생의 학문은 가깝게 정주 학문의 정맥(正脈)을 종주로 삼고 위로 수사(洙泗 공자의 연원을 일컬음)의 오묘한 지의(旨意)를 구한 데에 불과하였다. 대저 입에서 나와 귀로 들어왔으나,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는 것은 선생이 매우 부끄러워하던바였는데, 하물며 겉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버릇이겠는가.
일찍이 들으니, 서원을 설치한 것은 송 나라 때에 가장 성했고, 서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를 권장(勸奬)한 말로는 장남헌(張南軒 장식(張栻))의 악록기(岳鹿記)만큼 구비한 것이 없다 한다. 세밀(細密)하기로는 음식(飮食)ㆍ기거(起居)의 절차. 비근(卑近)하기로는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실상과, 현미(玄微)하기로는 천리와 인욕의 즈음까지 거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따로 할 말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그런데 회옹(晦翁)은 오히려 ‘하학(下學)들의 공부에 대해서는 궁구하지 못했다.’ 하여 반드시 발(發)하기 전에 수양하고 발하는 즈음에 살펴서 선(善)은 확충(擴充)시키고 악(惡)은 이겨서 없애도록 하였다. 대저 두 부자(夫子)의 설은 곧 선생이 복습(服習)해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의 학문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이것을 버리고는 딴말이 있을 수 없다.
선생의 유사(遺事)로서 여러 글에 빠진 것이 있다. 선생이 문경공을 따라서 희천(煕川)에 갔을 때 나이가 겨우 17세였다. 문경공이 맛좋은 음식 한 가지를 구해서 모부인(母夫人)에게 보내려고 하는데 간수하는 자가 소홀히 하여 솔개가 움켜가 버리므로 문경공의 꾸중 소리와 기색이 자못 엄숙하자 선생이 앞에 나아가서,
“선생께서 봉양하려는 정성은 진실로 지극하지마는, 군자(君子)의 말과 기색은 잠시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므로, 문경공이 듣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으로 걸어서 선생의 손을 잡으면서,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고, 네가 실상 나의 스승이다.”
하고는, 종일토록 칭찬해 마지않았다.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은 진실로 고금에 뛰어났지마는, 문경공의 선에 복종(服從)하는 도량(度量) 또한 선생과 서로 계발(啓發)된 바 있었다. 희천의 고로(古老)가 지금까지 이 일을 미담(美談)으로 전하는데, 이것을 이 당에 게시(揭示)함이 마땅하므로 아울러 나타내었다.
숭정 기원 후 계축년(1673, 현종14) 10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익성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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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菴先生集卷二十五 / 雜著 / 深谷書院學䂓
學者。所以學爲人也。爲人之方。都在小學一書。故朱子曰那箇是做人底樣子。士之有志於學者。捨是書奚以哉。於惟我靜菴文正公先生。實東方道學之宗。而其學一以小學爲主。以及於四書,近思錄。蓋聞寒暄金先生老年猶以小學童子自處。先生少受學於寒暄。故篤信是書如此。淵源其有所自矣。吾鄕幸而得先生杖屨於是衣履於是俎豆於是。凡我縫掖之士。孰不聞風而興起也哉。自今游先生之院者。當讀先生所讀之書。欲讀先生所讀之書。又當自小學始。盍相與勉之。
一。讀書次第。先小學次大學 兼或問 次論語次孟子次中庸次詩經次書經次易經。而心經,近思錄,家禮諸書則或先或後。循環讀過。
一。掌議別擇有文行士望所歸者。直月亦擇有經學人。使掌講事。非有故。切勿許遞。要以久任責成爲主。
一。講生則以從前赴講人員抄成講案。案中人如自願居齋則聽。
一。書院本爲士子羣居講學而設。而近來游書院者。但以春秋參祀爲重。故書院只爲先賢享祀之所。有其名而無其實。往往或有居齋者。而不過習科文而觀雜書。未見有講習之美。可勝歎哉。此後居齋者勿讀異端之書。又勿做科業文字於齋中。惟專意於義理之說。朝夕肄習。
一。白鹿洞是書院之祖。而朱夫子學䂓。辭約而義盡。且諸生自修之方。莫上於栗谷先生學䂓模範。隱屛精舍學䂓約束。幷書揭于壁上。居齋及出入者。一以是爲法。無或踰越。
一。居齋儒生。每日平明。皆以常服 笠子直領。或冠巾直領之類。 詣廟庭。不開中門。只再拜。分立東西。相向行揖禮。
一。每月朔日焚香後。掌議與直月。與居齋儒生設講。錄中之人。雖不能常時居齋。亦可趁期來會。講時先讀壁上所揭諸書。一人抗聲讀之。諸生竦然聽之。
一。每講會。先定一朔內所當讀之章數。起某章止某章。後次講會。就其中抽一章講誦。四十以下背講。掌議與直月。同爲出栍。定其高下。四十以上方許臨講。而臨講者亦出栍。○掌議直月是出栍者。許令除講。有司年老則勿爲之。色掌則同諸生爲之。
一。每講輒列書案中人姓名。名下錄其起止及通略粗不之屬。一件置于院中。一件上于院長。各得以考其勤慢。
一。一朔內所定章數。必須不多不寡。要以熟讀精究爲主。講時無徒令一塲誦過。就文義上。反復討論。而直月錄其講說。上于院長。以質其是非。使後來就講者。得以參考。
一。講案中人大段事故。衆所共知外。毋敢公然不參。不參者。掌議察其有故無故。責罰之。
一。講學外。不可有他事。如有起鬧之人。則掌議輒施重罰。
一。每夏冬之末。通計前後講生畫數。或賞或罰。就四十歲以下爲之。
一。院長無故時。或詣院會諸生而試講。以課其勤惰。
一。講學時必須贍財而後可以供士。有司專掌此事。必極擇勤幹擧職者而久任之。院中錢穀。自前多有稱貸之䂓。動成逋欠。此後則一切嚴禁。或有犯者。與受幷施極罰。
一。院力凋弊。居齋者固難供饋。而講會時禦飢之資。不可不隨力爲之。
一。院中書冊。閪失居多。餘存者一一錄成一冊。齋任赴院時。往往曝曬而檢察之。雖齋任亦不得擅出一卷于院門外。犯者責罰之。
一。春秋享事時。入齋諸生。先爲習祭儀。次讀退溪先生所撰行狀。或栗谷先生所撰誌文。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심곡서원 강당에 현액되어 있는 심곡서원의 학규.「도암 이재 학규」로도 불리는 「심곡서원 학규」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재(李縡, 1680~1746)가 지은 심곡서원의 규칙서이다. 현재 상현동에 있는 심곡서원 강당에 현액되어 있다.
도암 이재는 왜 ‘심곡서원학규’를 지었나
심곡서원은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단행했을 때도 존치됐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따라서 용인지역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서 전통을 지속할 수 있었다. 알다시피 서원은 향사(享祀)와 강학(講學)을 아우른 교육기관이다. 매월 삭망(朔望)과 춘추 중정일(中丁日)에는 향사를 봉행했다. 한편으로는 정기적인 날짜를 정해 강학했다.
조선시대 서원의 강학이 제도화된 것은 17세기 초이다. 정구에 의해 강회에 관한 별도의 규정인 강규(講規)와 강의(講儀)가 제정, 시행되면서 서원의 강학제도가 정비된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강회가 서원교육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확대됐다. 서원의 학규 중 강회 관련 내용이 증가하고, 강규 또한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강회 관련 학규가 도암 이재가 지은 <심곡서원학규(深谷書院學規)>와〈용인향숙절목(龍仁鄕塾節目)>이다.
<심곡서원 학규>는 기호학파의 맹주라 칭송되는 이재가 지은 심곡서원의 강회 규정이다. 현재 심곡서원 강당에 현액되어 있다. 도암 이재는 서문에서 <심곡서원학규>를 지은 취지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배움이라 함은 사람됨을 배우는 것을 말함이다. 사람다워지는 방도는 모두 《소학》한 책에 있다. 주자께서 말씀하기를 “그것이 사람의 모양을 만든다.” 하였는데 무릇 선비가 배움에 뜻을 가졌다면 이 책을 제하고는 어디서 찾겠는가? 우리 문정공 선생은 실로 동방 도학의 종주이시며, 그의 배움은 곧 《소학》을 위주로 하여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에 이른 것이다. 대개 듣는 바로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은 노년에 이르러서도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처하였다.
선생은 젊었을 때 한훤당으로부터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이 책을 독실하게 믿는 것이니, 연원이 저절로 있기 때문이다. 우리 향리는 다행히 여러 번 선생이 머물렀던 곳으로 묘소가 있으며, 향사를 모시고 있으니, 우리 봉액지사(縫掖之士)가 어찌 흥기하여 돈독하게 하지 않으리오. 이제부터 선생의 서원에서 배우려는 자는 마땅히 선생이 읽으셨던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선생께서 읽으시려고 했던 글을 읽으려면, 또한 마땅히《소학》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어찌 서로 면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곡서원은 정암 선생의 학통을 계승하는 만큼, 선생이 강조했던《소학》을 유학의 기본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한 글이다.
[심곡서원학규은 전국 서원 교육의 표본]
<심곡서원학규>는 서문과 총 18개 절목으로 구성돼 있다. 내용을 보면 독서의 차례, 장의와 직월의 임무, 서원 내에서의 행실, 강설 불참자에 대한 체벌과 상벌에 관한 사항, 원장이 해야 할 일, 서원 운용과 재정에 관한 사항, 서원 내 장서의 반출과 수납 관리에 관한 사항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또한 춘추 향사에 관해 선비들이 습득하고 행해야 할 의식과 유생 상호간에 지켜야 할 예의, 서원의 전곡 수납에 관한 사항, 강학할 서책의 복습과 예습에 관한 사항, 강회 참여 유생의 출석과 근태 등을 세세히 열거했다. 구체적인 18개 조목을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一. 독서하는 차례는 먼저《소학》을 읽고, 다음은 《대학겸혹문(大學兼或問)》《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역경》을 읽는다. 그리고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가례(家禮)》 등 여러 책은 혹은 먼저 읽기도 하고 혹은 뒤에 읽기도 하여 순환해 읽어간다.
一. 장의(掌議)는 별도로 문학과 덕행이 있는 선비로서, 선비들에게 신망받는 자를 뽑는다. 직월(直月) 역시 덕행이 있는 사람을 뽑아 강회 일을 맡게 하며, 연고가 있지 않으면 절대로 교체를 허락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맡아서 성공을 책임지우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
一. 서원의 일은 국학이나 주학(州學)과 다르므로 비록 벼슬에 두루 통한 사람이라도 재임은 마땅히 임명해 채우고 굳이 전례의 유무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一. 강생(講生)은 종전 강회에 참여했던 인원으로 하며 강안(講案)을 초성(抄成)한다. 강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기거하며 공부하기를 원하면 허락한다.
一. 서원은 본래 선비들이 함께 거쳐하며 학문을 연마하게 하기 위해 설치했는데, 근래에 서원을 출입하는 자들은 다만 봄·가을로 제향에 참석하는 것만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서원이 다만 선현을 향사하는 곳이 되었으니, 서원이라는 명칭만 있고 학문을 강론하는 실제가 없다. 때때로 혹은 거처하며 공부하는 자들이 있으나 과문(科文)을 익히고 잡서(雜書)를 보는데 불과해 강습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 이후에 거처하며 공부하는 자들은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말 것이며, 또한 재중(齋中)에서는 과업문자(科業文字)를 짓지 말고 다만 오로지 의리의 설에만 뜻을 두어 아침저녁으로 익혀야 한다.
一. 백록동(白鹿洞)은 서원의 효시이며 주자의 학규는 말은 간략하면서도 뜻은 다했다. 모든 학생들이 스스로 닦는 방법은 율곡 선생의 <학교모범(學校模範)>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은병정사(隱屛精舍)의 학규와 약속도 함께 써서 벽 위에 붙여놓고 기거하거나 출입하는 자는 한결같이 이것으로 법을 삼아 혹시라도 지나침이 없어야 한다.
一. 기거하는 유생은 매일 새벽에 상복으로 사당에 나가 참배하되 중문은 열지 말고 다만 두 번 절만 하고 동서로 나누어 서서 마주 향해 읍례를 행한다.
一. 매달 초하루에 분향한 뒤에 장의와 직월은 기거하는 유생과 함께 강회를 연다. 강안에 등록된 사람은 비록 항상 기거하지 않는 자라도 또한 시간에 맞춰 강회에 참석해야 한다. 강회할 때에는 먼저 벽에 걸려있는 여러 글을 읽는다. 한 사람이 큰소리로 소리 내어 읽고 모든 유생들은 조용히 듣는다.
一. 매월 강회 때는 강독할 편목을 사람들에게 추생(抽栍)하게 해 이어서 강독하는데 한 장(章)으로 기준을 삼는다. 강독할 사람은 많고 장이 적으면 한 편을 다한 뒤에 또 다시 추생해 강독하지 못한 사람은 다시 제1장으로부터 순환해 강송(講誦)해서 강독을 마치고 그친다. 강독할 사람은 적고 장이 많으면 강독을 마친 뒤에 또 다시 추생해 이미 강독한 사람이 계속 그 아래를 강하여 한 편을 다 마친 뒤에 그친다.
一. 매 강회 때마다 한 달 안에 읽어야 할 장수를 아무 장에서 시작해 아무 장에서 그칠 것을 정해, 다음 번 강회 때는 그 가운데에서 한 장을 뽑아 강송한다. 40세 이하는 배송(背誦)하며, 장의와 직월은 함께 출생(出生)하여 고하를 정한다. 40세 이상은 임강(臨講)을 허락하고 또한 출생한다. 장의·직월은 출생하는 자이므로 강독에서 제외하도록 하며, 유사는 나이가 많으면 강독하지 않도록 한다. 색장(色章)은 여러 유생과 같이 강독한다.
一. 삭일(朔日)에 만일 연고가 있어서 강회를 미루게 되면 유사가 기한보다 앞서서 글을 발송해 강회에 응하는 모든 유생에게 기별해 알려준다.
一. 강할 때는 재임과 모든 유생은 서로 읍한 뒤에 앉으며, 강을 마치고 나서 다시 읍하고 일어난다.
一. 매번 강회 때마다 강안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차례대로 적고 이름 아래에 시작한데부터 그친데까지와 통(通)·약(略)·조(粗)·불(不)의 따위를 기록해 하나는 서원에 비치해두고, 하나는 원장에게 올려 각각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살필 수 있도록 한다.
一. 한 달 안에 학습하기로 한 장수는 모름지기 많아서도 안 되고 적어서도 안 되며, 요컨대 익숙히 읽고 정밀히 연구하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야 한다. 강회 때 다만 한번 읽고 지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여 문의(文義) 상에 나가 반복해 토론하고, 직월은 그 의리의 큰 것을 기록해 원장에 올려서 옳고 그른 것을 질정해 뒤에 강회에 참석하는 자들로 하여금 참고할 수 있게 한다.
一. 매년 12월 강회 때는 다음해 매달 초하루마다 강할 글을 분배한다. 예를 들면 정월에는 입교(立敎), 2월에는 명륜(明倫)과 같은 따위이다.
一. 강안에 등록된 사람은 대단한 사고이거나,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일 외에는 감히 공연히 불참해서는 안 된다. 불참한자는 장의가 연고가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 이유 없이 불참했으면 문책해 벌을 준다.
一. 강학 외에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있으면 장의는 곧바로 중벌을 내린다.
一. 매번 여름과 겨울의 마지막에 강생(講生)의 획수를 통계해 혹은 상을 주고 혹은 벌을 준다. 40세 이하만 시행한다. 관자(冠者)로서 획장(劃壯)이 한사람, 획말(劃末)이 한사람 나왔으면, 획장은 장지(壯紙)한 묶음, 백지 두 묶음과 필묵을 각각 2개씩 상을 주고, 획말은 만좌한 자리에서 대면해 책망한다. 동몽(童蒙) 중에 획장 이하가 세 사람, 획말 이상이 세 사람 나왔으면, 획장은 관자와 똑같이 상을 주고, 그 다음은 백지 두 묶음과 필묵을 각각 하나씩 주고, 그 다음은 백지 한 묶음과 필묵을 각각 하나씩 준다. 획말은 회초리로 일곱 대를 때리고, 그 다음은 다섯 대, 그 다음은 세 대를 때린다. 순통(純通)이 둘인데 획통(劃通)이 같으며 만약 획의 숫자까지 같으면 순통인 자가 마땅히 으뜸이 되고 순약(純略)은 한 획을 순조(純粗)는 반획을 준다.
一. 원장은 다른 연고가 없으면 때때로 서원에 가서 모든 학생들을 모아놓고 시강해 부지런하고 게으름을 살핀다.
一. 강학할 때는 반드시 모름지기 예산을 넉넉하게 해 뒤에 선비들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유사가 이일을 전담하며 반드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직책을 잘 수행하는 자를 지극히 정밀하게 선택해 오랫동안 맡게 한다. 서원의 전곡(錢穀)은 비록 유사도 사사로이 칭대(稱貸)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이것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극벌(極罰)을 준다.
一. 서원의 재력이 줄어들어 기거하며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진질로 음식을 제공하기에도 어렵게 되면 강회 때 굶주림을 방비할 만한 재정을 힘에 따라 마련한다.
一. 서원 안에 있는 서책은 일일이 기록해 한 책으로 만들어 둔다. 재임이 서원에 올 때에 때때로 햇볕에 쬐이고 검사한다. 비록 재임이라도 마음대로 한권의 책이라도 서원문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범하는 자는 문책해 벌을 준다.
一. 연말에 1년 동안 쓴 돈이나 물품 및 그때까지 남아있는 수량을 유사가 기록해 성명을 기입해 원장에게 보고한다.
一. 봄·가을 향사 때 입재(入齋)한 모든 유생들은 먼저 제의(祭儀)를 익히고, 다음은 퇴계 선생이 지은 행장(行狀), 혹은 율곡 선생이 지은 지문(誌文)을 읽는다.
충렬서원도 <심곡서원학규>를 준용하다.
포은 정몽주를 배향하고 있는 충렬서원의 학규도 <심곡서원학규>를 그대로 준용했다. 다음 글에서 보면, 충렬서원의 강회 규정에 대해 서문만 기록하고, 구체적인 절목은 “심곡서원의 강규에 상세하다.”고 해 생략했다.
「지금 선생의 학문에 뜻을 두고 선생의 글을 읽고자 하면 마땅히 주자의 독서에 따라 차례를 매겨야 하니, 《소학》을 먼저 하고 사서를 그 다음에 하여 입도(入道)하는 문로로 삼는다. 만일 이것으로 인해 학문을 일으키고 풍속을 착하게 하는 실마리가 되면 이 또한 선생이 내려주신 것이리라. 그러니 어찌 서로 더불어 그것에 힘써서 서원의 강규를 절목마다 상세하고 깊이 있게 하지 않으리오. 절목은 심곡서원의 강규에 상세하다」
충렬서원이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됐고, 이후 사당만 복원해 향사만 이어왔음을 전제하면, 용인지역의 전통교육은 심곡서원에서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심곡서원의 배향인물인 정암 조광조 선생이 우리나라 도학의 정통을 이었으며, 근대시기에도 정암의 학맥이 계승됐음은 매우 의미가 깊다.
특히 우리나라 서원 교육의 구체적인 면모를 가늠할 수 있는 <심곡서원학규>의 현판과 기록이 전하고 있음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심곡서원학규>가 매우 소중한 유교 자산이면서도 이제까지 소홀히 했음에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심곡서원학규> 18개 절목을 번역해 소개한 것은 이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인 분석과 실천적 계승 방안이 마련되길 기대한다.
출처: https://sugisa.tistory.com/entry/深谷書院學䂓 [晛溪 斗井軒 Sugisa:티스토리]
[惟詩풀이]
섣달 스무날 아침이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산과 들이 하얗게 눈부신데 맑게 갠 전라도 능주벌
선생의 유배지에 느닷없이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고 당도하여 어명을 알린다.
홀연히 닥친 죽음앞에서 기거하던 방으로 급히 들어가 의관을 바로하고 황망히
몇자 적으시니 세상을 결별하며 마지막으로 남기신 선생의 유시로다.
마당에 다시 나와 눈위의 망석에 무릎꿇고 멀리 북녘을 향하여 임금께
큰절을 올린 후, 정성껏 수발해준 주인농부에게 작별을 고한다.
"미안하오. 신세보답도 못하고 흉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으니 민망하기 그지없구려."
말을 마치자 마자 건네준 사약을 받아 마시고 한사발 더 자청하여
마시시니 그 흔들림없는 자태는 지고지존의 선비자세라.
선생의 나이 서른 여덟이시던 중중 14년(1519년)의 일이다.
훗날 숙종대왕은 정암집(靜菴集) 발간에 즈음하여 다음같이 詩로 술회하다.
"죽음에 임하시어 남긴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어리더니
이제 선생의 글을 읽음에 도덕의 밝고 높으심을 더 더욱 알겠노라.
조신(朝神)들이 모두다 우러르고 들녘의 아낙네까지 모두들 존경하다.
틈틈히 예술에도 흠취하셨으니 아름답도다. 필세(筆勢)의 굳셈이여."
肅廟御製刊行後識[閔鎭遠]
肅廟御製刊行後。諸生始得見此詩。不勝感慕之忱。將以揭 之院壁。以垂永久。屬賤臣使寫之。臣敬玩莊誦。有以見我 聖考崇儒重道。曠世相感之至意。一唱三 嘆。感淚交迸。謹拜手稽首。抆血以書。
崇禎後再庚戌首春。未死臣閔鎭遠。敬識。
숙묘어제간행후。제생시득견차시。불승감모지침。장이게지원벽。이수영구。속천신사사지。신경완장송。유이견아성고숭유중도。광세상감지지의。일창삼탄。감루교병。근배수계수。문혈이서。
숭정후재경술수춘。미사신민진원。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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