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陽人문화유적❀

조미미 정동대감(1979)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0. 10. 3. 23:25
728x90
반응형

조미미 정동대감(1979)

조회수 55,126회•2019. 12. 7.10911공유저장

曺美美 메모리얼구독자 1.26만명구독

조미미 골든히트 2집 그리운 노래(단장의 미아리고개/불효자는 웁니다)

영을 넘고 강을 건너 남도 천리를
헤어져 그린 그님 찾아 가는데
철없이 따라 오는 어린 손이 차겁구나
자장자장 잘 자거라 아가야 잠들어라
이슬 내려 젖은 길이 멀기만 하다

사랑 찾아 임을 찾아 운명의 길은
천리라도 만리라도 찾아 가련다
등에 업힌 어린 자식 칭얼칭얼 우는데
자장자장 잘 자거라 아가야 잠들어라
이슬 내려 젖은 길이 멀기만 하다

 

대중가요의 골목길(19)-수원, 용인

사약을 한 사발 더, 미완의 개혁가 사림의 거두 조광조 <정동대감>


수원·용인의 마지막 노래를 찾아가는 길은 페달에 힘을 좀 주어야 한다. 비구니 강원 봉녕사 언덕을 넘어서면 줄지어 높이 나타나는 건물로 빽빽한 광교신도시다. 수원과 용인의 경계는 복잡하게 그려져 있다. 호수가 아름다운 도시의 부가가치를 만들어준 원천은 옛 원천유원지, 토박이들이 원천 웃 방죽, 아래 방죽이라 부르던 한적한 골짜기다. 비포장이었던 시절, 광주로 가는 43번 국도는 봄이면 겨우내 얼었던 골짜기의 물이 풀려내려 질퍽거렸다. 찔레꽃이 하얗게 지천으로 피어있는 먼내(遠川)는 아지랑이가 흔들리며 졸던 길이었다. 이제 그런 흔적을 찾기는 부질없는 일이다.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의 묘가 있는 동수원 IC 너머 수지의 초입은 상현동이다. 한남정맥의 갈래, 매봉 줄기가 동남으로 다소곳이 좌정하는 자리에 조광조 선생의 묘역이 시작된다. 한양조씨 후손은 이 묘역을 단장하면서 혁신파 사림인 선조의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석양으로 기울며 햇빛은 유순해 가고 있다.


정암 선생의 묘지는 광교산에서 보면 치마자락의 끝단에 있다. 문신석 딱 두 개가 시립하고 가운데는 종묘사직에 헌신한 공적이 허옇게 빛바래 있다. 누군가가 놓아두고 경의를 표한 지전 한 장에 나도 두어 장 보태고 고개 숙인다.


수많은 사극에서 그의 서른일곱 해 짧은 선비 생활은 더 극적이라 허물 많은 군주보다 더 알려져 있다. 젊어서 장원급제하고, 성리학에 밝아 임금의 총애를 받고 대사헌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훈구파의 모함 속에 전라도 화순 땅 능주로 귀양을 간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발칙한 허구 속에 귀양간 지 한 달만에 사약이 내려진다. 주군이 계신 북녘을 향해 매일같이 절하던 선비는 “한 그릇을 더 달라”고 받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는 야화도 있다. 그가 ‘정동대감 정암 조광조’다.


인기 극작가 신봉승은 대본과 함께 애간장 녹이는 정경부인의 속내를 탄식으로 그려낸다. 나화랑 작곡의 <정동대감>이 이미자의 노래로 전파를 타고 경향을 뒤흔든 것은 1965년의 일이다.

영을 넘고 강을 건너 남도 천리를
헤어져 그린 그님 찾아가는데
철없이 따라오는 어린 손이 차갑구나
자장자장 잘 자거라 아가야 잠들어라
이슬 내려 젖은 길이 멀기도 하다

사랑 찾아 임을 찾아 운명의 길을
천리라도 만리라도 찾아가련다
등에 업힌 어린 자식 칭얼칭얼 우는데
자장자장 잘 자거라 아가야 잠들어라
눈물에 젖은 길이 멀기도 하다


<정동대감> 신봉승 작사, 나화랑 작곡, 이미자 노래,

1965, 지구레코드

 

노래가 히트하면 동명의 영화도 만들어져 장안을 들썩이게 한다. 여인의 한, 남편을 잃고 어린것들과 살아야 하는 비련은 이 땅의 아낙들의 자기 신세에 그대로 포개어져 한 몸이 된다. 어머니의 콧노래를 듣고 자라난 딸의 애창곡이 되어버린 노래다. 이미자의 청초한 목소리로 부른 <정동대감>은 <아씨>와 함께 시대물의 두 기둥으로 우뚝 서 있다. 얼마 전에 어느 여류시인이 조광조 선생의 묘 앞에 간단한 제물을 놓고 절을 하면서 “‘어릴 적 무례’를 허물치 말아 달라”고 했다는 페이스북 사연을 들었다. 유배지에 귀양간 선비가 살던 자리는 적려(謫廬)가 되고 유허비가 세워지는데 그 시인이 바로 그 동네에 살았던 모양이다. 어릴 때 유허비 기단 거북 등을 타고 놀았었는데 커서 알고 보니 그 유명한 조광조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어서 뒤늦게나마 용서를 빌었다는 것이니 얼마나 따뜻한 이야기인가.


내 기억에도 초등학생이 무어 내용이야 잘 알까마는 방학 때면 시골 극장에 ‘문화영화’라는 이름으로 할인된 값으로 영화를 볼 기회의 목록에 <조광조>가 들어있었다. 일찍 철이 든 여자애들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금부도사에게 “사약을 거둬라”는 어명을 전하려 달려가는 파발마의 발굽 소리만 영사막 뒤편 스피커에서 귀를 찢었다. 하얀 비가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내리는 낡은 필름은 어둠을 가르고 형광빛 먼지 줄기를 자막에다 뿜어댔다.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연결되는 천인무간(天人無間)의 세상‘을 주창한, 미완의 개혁가는 너무 시대를 앞서간 게 틀림없다. 예나 제나 대립은 칼끝이요 모함은 소설보다 더 극적이니 그 늪에서 생존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을 게다.


그러고 보니 정암선생이 선조(宣祖)대에 와서야 추존된 이름 ‘문정공’, 전학 온 내 친구 창원이가 다녔던 풍덕천 ‘문정중학교’의 내력이 더듬어진다. <정동대감> 가신지 500년, 이제 애처로운 대중가요 한 편에 실어 선생을 다시 우러러본다. 날이 어두워 내려가는 발치가 조심스럽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