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陽人문화유적❀

충주의 임진왜란 의병장인 조웅(趙熊) 장군!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12. 1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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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은 유독 덮고 지루하다. 8월이면 충주의 임진왜란 의병장인 조웅(趙熊) 장군이 떠오른다.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에서 출생한 그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활동했던 의병장이다.

임진왜란 7년간의 싸움은 고려 고종 때 몽고와의 30여년 항쟁과 함께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큰 시련의 시기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군은 30여만의 대군을 몰고 부산에 상륙하여 삽시간에 전국을 유린하였다.

우리는 전쟁초기부터 준비 없이 속수무책으로 맞섰으니, 왜군들은 새 병기인 조총(鳥銃)으로 무장하고 아무런 저항을 받음이 없이 한양(서울)로 향했다. 왜군은 경상도 양산과 밀양을 휩쓸고 파죽지세로 상주 조령방면으로 올라왔다.



충주 탄금대에 있는 임란충신백기장군기적비(壬亂忠臣白旗將軍趙熊紀蹟碑).   /충북도청 공식 블로그
조정(朝廷)에서는 긴급히 조령, 죽령, 추풍령 방면의 방어를 위해 조치를 취하고,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충주방면을 지키도록 보내고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었다. 신립은 김여물을 부장으로 삼고 내려가면서 군사(농민)를 모집해 4월 26일 충주에 도착했다. 도중에서 모집한 농민들과 지방군을 아우르니 8000여명이었지만 이들은 훈련받지 못한 군사들이었다. 신립은 “우리 군사들은 훈련받지 못한 오합지졸이니 이들을 사지(死地)에 넣지 않으면 그 투지를 드높일 수 없다”고 하면서 탄금대 앞에 배수진을 치고 적을 맞았다.

고니시(小西行長)가 이끄는 1만8700명의 왜적은 28일 새벽에 문경을 떠나 조령을 넘어 아침에 (수)안보역(安保驛)을 지나 정오경에 충주남쪽 단월역에 다다랐다.

왜군은 여기서 세 갈래로 나누어 탄금대를 포위하며 들어가는데 그 세가 풍우와 같았다. 신립은 이에 맞서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세가 불리하자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면서 달천의 월탄(月灘)에 빠져 죽으니, 종사관 김여물도 함께 했다. 8000여의 우리 군사들도 모두 장렬하게 옥쇄(玉碎)하였다.

충주의 싸움에서 패한 소식을 들은 조정은 급히 서울을 버리고 북쪽으로 몽진(蒙塵)의 길을 재촉하였으니 신립의 충주패전은 온 국민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20일 만인 5월 2일에 서울은 함락되었다.

1592년 8월 4일 전사

관군의 계속된 패배로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전국각지의 명망 있는 선비들이 의를 부르짖고 의병을 일으키니 농민은 물론 천민까지도 이에 호응하여 가담하였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곽재우, 고경명, 조헌, 김천일 등이다. 충청도에 있어서도 승려 영규를 비롯하여 조헌, 김홍민, 이산겸, 박춘무, 조강, 이봉 등 의병장과 충주의 조웅, 조덕공 등이 있었다.

충주지역의 사민(士民)들은 명망 있는 신립장군을 믿고 피란을 가지 않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왜군들에 의해 참변을 당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희생이 더욱 심하였다.

조웅은 1591년(선조 24) 11월에 별시무과에 합격하여 내금위에 이르고 선전관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사직하고 고향 충주로 내려와 있다가 왜란을 맞았다. 스승인 조강(趙綱)을 따라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나누어 의병을 이끌고 한성으로 가는 길목을 지켰다. 위기를 느낀 조웅은 사방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하얀 깃발을 군호로 삼아 앙성면의 태자산 아래에 주둔하고 서울로 향하는 왜군의 후속부대를 막았다. 태자우(현 능암리 대평촌) 마을에서 북상하는 왜군과 격전을 벌여 물리치면서 백기장군(白旗將軍)이라 불리었다.


충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웅 선무원종공신녹권(趙熊 宣武原從功臣錄券)’ 중 일등 공신 조웅 부분.    /국가유산청 충청북도 문화유산자료
왜적의 대부대를 상대로 승전하자 조정에서는 그를 충주목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임지에 나가기 전 또다시 왜군과 싸우다가 안개 짙은 새벽에 포위되어 잡히는 몸이 되었다. 적은 항복을 권했으나 끝내 항거하자 사지를 찢기는 고통을 겪으며 1592년 8월 4일 순절했다. 시신은 급하게 그가 어렸을 때 공부하던 소태면 청룡사로 옮겨 가매장했다가 이듬해에 지금 앙성면 조돈 말림꼴로 장례하였다. 앙성면 능암리에는 그의 충신문이 있다.

조웅장군은 사후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에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등록됐다. 선무원종공신녹권에는 임진왜란 때 충절로 이름이 있던 선무(宣武)·호종공신(扈從功臣) 등 9000명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그는 또한 1618년(광해군 11)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1690년(숙종 16)에는 정려(旌閭)가 건립되었다. 이 정려는 일제강점기 때 허물어졌다가 복원되었다,

충주시립박물관에는 ‘조웅선무원종공신녹권’이 소장돼 있어 조웅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의 묘소가 있는 앙성면 조천리에는 ‘조웅장군의 묘역과 묘비’가 있고, 충주 탄금대에는 후손들에 의해 백기장군 조웅의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한편 충주시 소태면 오량동에는 조웅장군의 전투담과 관련한 구비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청룡사와 조웅장군’이란 제목의 전설은 임진왜란 때 조웅이 의병을 일으켜 청계산을 중심으로 왜병과 맞서 싸우면서 수차례 전공을 세우고, 청룡사에서 순국했다는 내용이다.

김현길 국립한국교통대 명예교수
편집자주❙ 만승(萬升) 김현길 국립한국교통대 명예교수는 원로사학자로서 45년 동안 한 길만 걷고 있는 93세의 노익장이다. 김 교수는 중원문화 연구는 물론 충북과 전국의 향토사연구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지난해 말 소장하고 있는 거의 모든 자료를 관리‧활용하겠다고 한 충주문화원에 넘겼다. 이는 스스로 고령이란 점에서 몇 년 전부터 그동안의 저술 등 자료를 정리하고 회억(回憶)하는 실천적 움직임의 하나다. 앞서 2021년 말에는 만승 제4수상집 ‘회억의 장’을, 2022년 6월에는 향토사연구 등을 정리한 중원문화산고(中原文化散稿)를 출간하기도 했다. 지난 4월초에는 80세를 넘기면서 시작한 서예의 개인전 및 김생서집(金生書集) 출간기념회를 여는 등 활동이 왕성하다. 이번 연재는 위 두 저서와 구술을 기초로 본지가 정리해 싣는 방식이다.

출처 : 충청리뷰(https://www.ccrevie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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