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칠지도에 새겨진 연호는 백제 연호: 왜 신공왕후 당시 태자·태손 파견해 통치
晛溪亭 斗井軒
2016. 7. 1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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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에 새겨진 연호는 백제 연호
백제의 제후국 증거 칠지도…왜 신공왕후 당시 태자·태손 파견해 통치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6971
<일본서기> 신공왕후 55년(375) 기록에 백제 초고(肖古)왕이 죽고, 56년 백제 왕자 귀수(貴須)가 왕이 되었고, 64년(384)에 “백제국 귀수왕이 죽고 왕자 침류(枕流)왕이 왕으로 섰다.(百濟國貴須王薨 王子枕流王立爲王)”의 초고왕과 구수왕은 근초고(近肖古)왕과 근구수(近仇首)왕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65년(385)에 “백제 침류왕이 죽고, 왕자 아화(阿花)가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辰斯)가 빼앗아 왕이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의 아화는 침류왕의 아들 아신(阿莘)왕자이다. 침류왕이 즉위 이듬해 죽었는데 태자 아신이 어려서 침류왕의 동생인 진사가 즉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칠지도에 관한 문구는 신공왕후 52년 기록에 있다. 따라서 그 해는 372년으로 백제 근초고왕 27년이다. 신공왕후가 근초고왕의 손자 침류왕에게 말한 내용까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침류왕은 왜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침류왕은 무슨 이유로 왜에 체류하고 있었던 걸까?
그 해답은 바로 위 <일본서기> 신공왕후 64년(384)에 ‘王子枕流王立爲王’이라는 기록에 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왕자 침류왕이 왕이 되었다’인데 이는 어법상 이상한 표현이다. 왜 하필 왕자 침류 뒤에다가 임금 王자를 붙였고, 그 침류왕이 왕이 되었다고 기록했을까? 이 문구를 풀어서 해석하면 “(근구수왕의) 왕자 침류(왜)왕이 (백제의) 왕이 되었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즉 근구수왕의 장자인 침류 왕자가 당시 왜왕의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기록된 칠지도는 372년 백제 근초고왕이 손자 침류를 왜왕으로 보내면서 그 상징으로 하사한 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당시 왜는 신공왕후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때부터 백제의 대왕이 태자나 태손을 왜왕으로 파견해 간접 통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서기>는 마치 백제가 칠지도를 헌상한 것처럼 기록했던 것이다.
▲ 기존의 칠지도 명문 [사진=필자제공]
즉 신공왕후가 신라의 파사이사금 때인 100년 전후에 삼한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제 근초고왕이 신공왕후가 다스리던 왜를 정벌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분풀이로 <일본서기>는 신공왕후의 통치연대를 앞당기고, 가짜 삼한정벌 기사를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참고로 신공왕후는 69년(389) 100세의 나이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앞면) 泰?四年 ?月十六日 丙午正陽造百鍊銅(鐵)七支刀 生(出)辟白兵宜供供 侯王????作
(뒷면) 先世以來 末有此刀 百滋(濟)王世?(子) 寄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상세설명 =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6487 참조]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泰?四年 ?月十六日”의 ?월을 지금까지 一月 또는 五月로 판독했으나, 2009년 고려대학교 연구원인 홍성화 박사에 따르면 NHK의 X-레이 촬영으로 칠지도 명문의 연(年)자와 월(月)자 사이에 십(十)자가 추가로 검출됨에 따라 제작일을 11월 16일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11월 16일이 병오(丙午)의 일간지(日干支)를 가진 연도를 산출하면 369년이 아니라 408년이 되어, 칠지도는 백제의 전지왕(腆支王) 4년 11월 16일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칼에 새겨진 명문의 '泰□四年'은 전지왕 4년으로 추정되어 백제가 자체연호를 썼던 사실까지 확인되었다고 주장했다.
▲ NHK의 x-ray로 촬영한 칠지도 명문 [사진=필자제공]
<삼국사기>에 따르면, 397년 태자 전지를 왜에 볼모로 보낸 아신왕이 405년에 죽자 왜에 있던 원자 전지를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런데 아신왕의 막내동생 설례가 당시 정사를 대행하던 둘째 형 훈해를 죽이고 스스로 보위에 오르자, 전지는 왜에서 따라온 호위병들과 함께 섬으로 들어가 기다리고 있다가 해충이 설례를 죽이자 보위에 올랐다. 추가로 <고구리사초략>에는 “전지의 처 팔수(八須)는 왜왕 인덕(仁德)의 딸이었는데, 이때 섬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다음 보위에 오르는 구이신(久爾辛)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 기록으로 볼 때 칠지도 뒷면의 명문은 백제 침류왕의 아들(왕세자) 구이신(久爾辛)이 성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기이하게 태어난(奇生聖音) 것을 후왕인 왜왕에게 알리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지왕 5년(409) “왜국이 사자를 시켜 야명주(夜明珠)를 보내오자, 왕은 사신을 후히 대접했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칠지도 명문의 후왕(侯王)은 백제의 제후인 왜왕이며 이 때 왜의 사신이 칠지도를 가지고 간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칠지도는 372년 백제 근초고왕이 손자 침류를 왜왕으로 보내면서 그 상징으로 하사한 칼이고, 현존하는 칠지도 유물은 전지왕이 구이신이 태어났음을 후왕(왜왕)에게 알리는 칼로 서로 다른 칠지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칠지도는 본국인 백제대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 칼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자체연호를 사용했던 백제
중국의 경우에는 작은 나라라도 황제임을 자칭하며 자체연호를 사용했고, 제후들은 독자적으로 자체연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고구려·백제의 건원칭제 기록이 없는 이유는 중국보다 훨씬 컸던 대제국 고구리와 백제가 건원칭제를 안 했던 것이 아니라, 명나라의 속국인 조선왕조 때 <삼국사기>가 개작되면서 그 기록이 삭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자체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법흥왕 23년(536)에 건원(建元) 연호를 처음 사용했고, 이후 진흥왕 12년(551)에 개국(開國)으로 고쳤고, 29년(568)에 대창(大昌), 33년(572)에 홍제(鴻濟)라고 했다. 또한 진평왕 6년(584)에 건복(建福) 연호를 사용했고, 선덕여왕 3년(634)에는 인평(仁平)이라 했으며,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태화(太和)를 연호로 사용했다.
이후 사위와 딸의 복수에 눈이 먼 김춘추가 주도한 당나라와의 외교가 밀접해지면서 신라는 당나라의 의관을 착용했고, 진덕여왕 4년(650) 이후 자체연호 대신에 줄곧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헌덕왕 14년(822)에 웅천주도독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
▲ 경주 서봉총에서 출토된 연수원년명은합의 延壽는 고국원제의 연호 [사진=필자제공]
(2) <삼국사기>에는 고구리의 건원칭제 기록이 없지만, 다른 여러 사서에 고구리와 그 정통성을 계승한 대진국가 자체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중 영락(永樂)은 호태왕비문과 덕흥리고분묵서명을 통해 광개토태왕의 연호라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태백일사>에 기록된 장수대제의 건흥(建興) 연호는 건흥5년명금동불상이 출토되어 확인되었다.
(관련 내용 =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4090 참조)
러시아 소장 <요천제–高麗皇帝品位)>와 <만주대제–高麗大祭儀禮>에는 많은 고구리 황제들이 자체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가운데 고국원제의 연수(延壽)는 경주 서봉총에서 출토된 연수원년명은합에서, 23대 안원제의 연가(延嘉)는 연가7년명금동불상에서, 24대 양원제의 영강(永康)은 북한 소장 영강7년명금동광배 등의 출토유물을 통해 그 기록의 진실성이 확인되었다.
▲ 북한 소장 영강7년명금동광배 뒷면에 뚜렷한 永康은 양원제의 연호 [사진=필자제공]
(3) 후삼국시대 후백제에서 견훤이 연호를 사용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궁예는 무태(武泰)·성책(聖冊)·수덕만세(水德萬歲)·정개(政開) 등의 연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왕건이 고려를 세우면서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제4대 광종은 광덕(光德)·준풍(峻豊)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가 이후 자체연호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1135년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大爲)로 한 묘청이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했다. 조선왕조에서는 줄곧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역사의 흐름이 이러할진대 유독 백제만이 자체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사서에 백제의 연호 사용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 이유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와 신라에서 백제와 관련된 기록을 철저하게 왜곡·삭제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런 상태에서 칠지도 명문의 '泰X四年 十一月十六日 丙午'에서 밝혀진 백제의 자체연호 사용은 그야말로 역사적 의미가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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