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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 년 만에"…사물놀이 몰개, 임란 의병장 조웅 백기풍물 재현!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12. 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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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 년 만에"…사물놀이 몰개, 임란 의병장 조웅 백기풍물 재현

뉴스1 원문 기사전송 2023-09-30 07:03

 

30일 사물놀이 몰개가 임진왜란 때 조웅 장군의 백기풍물을 재현해 눈길을 끌고 있다. 사진은 이영광 사물놀이 몰개 대표.(독자 제공)

2023.9.30/뉴스1

◐충청북도 충주시 탄금대안길 33

(지번)충북 충주시 칠금동 산 1-1

◈백기당(白旗堂) 조웅(趙熊.1567.명종 22-1592.선조 25)◈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충청북도 충주에서 활동했던 의병장.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백기(白旗). 개국공신 조인옥(趙仁沃)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된 조일(趙逸)이다. 충주 출신의 조웅은 1591년(선조 24) 조헌(趙憲)의 천거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얼마 후 사직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조강(趙綱)을 따라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나누어 의병을 이끌고 한성으로 가는 길목인 충주 앙성면 태자우(현 능암리 대평촌)에서 북상하는 왜군을 맞아 격전을 벌여 물리쳤다.

이 사실을 충청도체찰사가 행재소의 임금에게 알려 충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임하지 않았다. 조웅은 깃발을 모두 흰 것으로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기장군이라고 하였다. 또한 8도의 의병 중에 “호서 백기장군과 영남의 홍의장군(곽재우)이 가장 뛰어나다.”고 할 정도로 용맹하였다. 1592년 8월 왜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후 전열을 가다듬고 대비하고 있던 어느 날 짙게 깔린 안개 속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중과부적으로 사로잡히게 되었다. 왜군이 항복을 권했으나 저항하다가 1592년 8월 4일 사지가 찢겨지는 고통을 겪으며 순절했다.

사후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1등에 오르고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18년(광해군 11)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1690년(숙종 16) 정려가 건립되었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조천리에 있다.

【생애】

조선 전기 의병장. 충주시(忠州市) 가금면(可金面) 가흥리(可興里) 출생한 조웅은 태어나면서부터 빼어난 재질을 지녔고 기개가 호탕하였고 자라나면서 몸이 장대하고 체력이 좋았다고 한다. 일찍이 모계(慕溪) 조강(趙綱)선생으로부터 글을 배웠으며 처음에는 유학을 배우다가 뜻한 바가 있어 무예를 익혔으니 모계 선생도 한 번 보고는 나라에 공을 세울 군인임을 알고 무예를 권장하였다. 말을 잘 탔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말 위에 서서 달리며 활을 쏠 정도였으므로 사람들이 ‘나는 장군’이라고 하였고 한다.

조웅은 선조 24년(1591년)에 별시(別試) 무과에 합격하고 특별히 기용되어 내금위(內禁尉)가 되었다가 조헌의 천거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왜군은 20만의 대군을 가지고 부산에 상륙해 파죽지세로 북상, 15일 만인 4월 28일 충주에 다다랐다. 충주 역시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이 왜적을 맞아 싸웠으나 패하였으며 5월 2일 서울도 함락되어 왕은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고향에 내려와 있던 조 웅은 스승인 조강을 따라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의병진을 나누어 충주에 와서 주둔하였다. 충주의 태자산 아래에서 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서울로 향해 올라가는 왜적의 후속 부대를 막아 물리쳤다.

조웅은 군의 표지로 모든 깃발을 흰 것으로 하였으니 그 때 사람들이 이를 두고 이르기를 '백기장군(百旗將軍)'이라 하였다. 당시 8도의 의병 중 호서의 백기장군과 영남의 홍의 장군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여 왜군도 “백기와 홍기는 피하라”고 할 정도였다. 조 웅을 백기당이라는 호를 붙인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왜군은 충주와 원주에 대부대를 주둔하고 있었으며 죽산, 양지, 용인으로 연결되는 길을 통해서 서울로 왕래하고 있었다. 조웅이 지키던 소태면과 앙성면은 그 길목이었으며 적과의 충돌이 잦았다. 한 때 소태면 남한강 북쪽 유역에서 적과의 교전이 크게 일어나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으나 아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더군다나 조웅 역시 부상당한 몸이 되었다. 이 무렵 원주의 왜군이 여주에서 패배를 당하자 원주의 잔여 왜군들은 충주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이러한 전공을 당시 제찰사가 행재소의 왕에게 알리니 당상관에 올리고 충주목사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조웅 의병장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 의병진을 정비하였는데 그해(1592) 왜적이 겹겹이 포위하고 공격해오니 의병진은 백병전으로 싸웠으나 무기의 열세와 중과부적으로 당해내기 어려웠다. 조웅 의병장은 적진에 돌격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적탄을 맞고 크게 부상하여 청룡사로 피하였지만 이튿날 순국하였다. 이 때 나이가 24세(1592년 8월)였다.

조웅의 죽음은 많은 부하들과 지방민은 물론 조정에서도 크게 놀랐다. 장례를 치를 수 없었으므로 휘하의 군졸들이 장군의 시신을 거두어 장군이 공부하던 인근 청룡사에 임시로 모셨다가 이듬해 10월에 지금의 묘로 이장했다. 이장 당시 개관을 하고 보니 안색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다고 한다.

1600년에 선조는 장군의 충성스런 노고를 추념하고 또한 절의를 다한 것을 추도하여 예관을 보내어 제사(祭祀)하게 하고 그 자손에게는 영구히 역(役)을 면제케 하였다. 선조 38년(1605)에 병조참의로 증직되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1等功臣:각 등공신(各等功臣) 이외에 작은 공이 있는 자 에게 주는 칭호)에 책록되었다. 다시 광해군 11년 (1618)에 병조참판(종2품) 겸 동지의금부사(의금부에 설치된 종2품 관직)로 추증되었다. 숙종 16년(1690) 충신 정려문(忠臣旌閭門)이 세워졌는데 한말에 왜인들에 의해 헐렸던 것을 1980년 충주시 앙성면 능암리에 재건하였다.

【조웅 묘소(趙熊 墓所)】

◐유택:충북 충주시 앙성면 조천리 산 33-1

(도로명)충북 충주시 앙성면 새바지길 117

충주시(忠州市) 앙성면(仰城面) 조천리(釣川里) 말림골에 조웅의 묘와 묘비가 있다. 묘역은 넓지 않으나 묘의 봉분은 비교적 큰 편이며 양 옆으로 110㎝의 망주석과 100cm정도의 문인석이 남아있다. 조웅은 임진왜란 중에 적을 맞아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였는데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여 장례를 치를 수 없었으므로 급한 대로 청룡사에 가매장하였다가 이듬해 10월에 지금의 산소로 이장했다. 묘가 있는 말림골의 명칭은 산소를 이장할 때 장군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모여든 추모객들의 말로 골짜기가 가득 차서 마림(馬林)이라고 하였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조웅 충신문(趙熊 忠臣門):종손놈이 세운 밭을 팔아먹고 정려문을 없세버렸다.】 ◐정려각:충북 충주시 앙성면 능암리 204-8

조웅 충신문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 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충주시(忠州市) 앙성면(仰城面) 능암리(陵巖里) 대평(大坪)에 있다. 충신문은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획하여 사면에 홍살을 두른 내부에 편액이 붙어 있다. 장대석으로 낮게 쌓은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웠으며 이익공 형식의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건물에 모두 단청을 입혔다.

조웅 장군은 임진왜란 때 적병을 무수히 물리쳤으며 그 공으로 충주목사를 제수받았으나 부임하기 전에 왜적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그 후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을 받았다. 그 후 손자 홍운이 그의 조부의 공적을 길이 전할 뜻을 가지고 조정에 진정하여 1690년(숙종16) 묘역 앞에 정문을 세우게 되었다. 이 정문은 한말과 일제 초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허물어져 찾을 길이 없었는데 다행히도 종가에서 정문의 현판을 보관하고 있어 1980년 11월에 장군의 전적지 부근인 충주시 앙성면 능암리에 정문을 복원하였으며 1992년에 중수하였다가 정려문을 세운 밭은 팔아먹고 정려문을 없세버렸다.

【임란 1등 충신 백기장군 조웅 기적비(壬亂 忠臣 白旗將軍 趙熊 紀蹟碑)】

◐충청북도 충주시 탄금대안길 33

(지번)충북 충주시 칠금동 산 1-1

임진왜란 중 의병활동을 하다 장렬히 전사한 조웅(趙熊)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94년 유림(儒林)에서 탄금대 충주문화원 앞에 세운 비석이다. 비의 구조는 거북모양의 화강암 받침돌에 대리석으로 비석을 세우고 위에는 화강암제의 이수를 얹었다. 비에는 ‘임란충신백기장군조웅기적비’라고 새겨져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획하여 사면에 홍살을 두른 내부에 편액이 붙어 있다. 구조는 긴 네모꼴의 다듬은 돌로 낮게 쌓은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둥근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윗부분 주두(柱頭)위에 다시 소형주두(小形柱頭)를 놓고 전형적인 이익공계통(二翼工系統)의 공포로 구성하였으며, 창방으로 연결된 기둥 사이에는 하나의 화각반(花刻盤)을 놓아 주심도리(柱心道里) 장혀(長舌)를 받쳐주고 있다.

가구(架構)는 양쪽 대들보 상부에 화려하게 풀모양 조각을 한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설치하여 굴도리의 종도리(宗道里)를 받치도록 한 삼량집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건물에 모두 단청(丹靑)을 하였다.

◐참의공선조유택: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가흥리 산 43-28

(충주=뉴스1) 윤원진 기자 = "백기장군이 출정할 때 천지가 진동하고 백기가락이 태자산 아래 울려 퍼졌다."30일 사물놀이 몰개 이영광 대표는 조웅 장군 출정식에 울렸던 백기풍물을 재현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조웅 장군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충북 충주에서 활동했던 의병장이다. 충주 앙성면 태자산 아래서 승병들과 함께 백기를 휘날리며 북상하는 왜군을 물리쳤다.

그는 싸울 때 흰색 깃발을 매달아 '백기장군'으로 불렸고, 임진왜란 때 왜군이 백기만 보고 피할 정도로 용맹했다. 출정 때 천지가 진동할 정도로 풍물놀이를 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바로 이 가락이 400여 년 만에 재현된다. 이 대표는 오는 10월3일 충주문화회관에서 첫 공연하는 '몰개 타임블랜드(MOLGAE TIMEBLEND)' 공연에서 백기가락을 선보인다.

타임블랜드는 그동안 몰개가 선보였던 융복합 공연에서 탈피해 타악기가 중심이 되는 무대다. 백기풍물은 꽹과리, 재금(바라), 징, 장구, 북, 설장구가 휘몰아친다. 12발 상모놀이와 채상소고놀이도 펼쳐진다.

이 대표는 풍물에서 시작한 사물놀이를 '한 소리'로 정의했다. 위대한 소리이자 모두 하나되는 소리를 백기풍물로 보여준다는 게 이 대표의 각오다.

이번 공연은 32년간 연주활동을 이어 온 이 대표의 음악적 역량과 깊이로 다음 세대를 이어갈 젊은 국악인들과 사물놀이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그렸다.

그중에서도 백기풍물은 사물놀이가 가야 할 미래상을 대변한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이 대표는 "사물놀이는 네 가지 악기가 한 소리를 낸다"며 "우리 사회도 함께 살아가는 울림이 필요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은 충북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으로 만들었다. 충북도, 충주시, 충북문화재단이 후원하는 유료 공연이다.

사물놀이 몰개는 1991년 충주에서 창단해 국내 1500여회, 국외 200여회의 공연을 한 대한민국의 대표 국악단체다. 이 대표는 오는 11월23일 서울 성수아트홀에서 개인 발표회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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