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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행사자료❀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영양전통 주실마을(注谷村)=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2. 6.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영양주실마을=

주실수방풍림 지훈/세림詩碑 월록서당(月麓書堂) 月麓書堂(월록서당) 存省齋(존성재) 克復齋(극복재) 지훈시공원(芝薰詩公園) 지훈동상(芝薰銅像) 지훈문학관(芝薰文學館) 지훈문학광장(芝薰文學廣場) 목간고택(木澗古宅) 월하고택(月下故宅) 주곡교회(注谷敎會) 당동댁(唐洞宅) 방우산장(放牛山莊) 옥천고택(玉川故宅) 창주재(滄洲齋) 임산서당(霖山書堂) 창주정사(滄洲精舍) 조지훈생가(호은종택)(趙芝薰生家(壺隱宗宅)) 원촌댁(遠村宅) 효석(曉石) 조운해(趙雲海)박사 생가 심천정(心川亭) 만곡정사(晩谷精舍) 학파헌(鶴坡軒) 주실마을회관 주차장

 

영양군 제12회 지훈예술제 - 제12회 지훈 예술제 일정 연기 안내 : 행사장 공간정비로 인해..... 주실촌(注室村) 또는 주곡촌(注谷村)

미정(9월~10월)

(2일간)

○ 지훈백일장 및 사생대회

○지훈문학특강및지훈시퍼포먼스대회

○ 체험프로그램 운영

○ 승무, 길놀이 공연, 원놀음 및 시낭송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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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14)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길 55 (주곡리 222번지)  TEL. 054-682-7763 영양 지훈문학관 jihun.yyg.go.kr

COPYRIGHT @ Jihun literature house. ALL R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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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지훈예술제 일정 연기 안내드립니다.

작성일 : 2018.03.19

 

지훈예술제에 관심 가져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12회 지훈예술제는
보다 나은 예술제 개최를 위한
행사장 공간 정비로 인해,
10월에 개최 될 예정이오니
이점 양해 바랍니다.
문학이 있는 가을 날,
풍요로운 예술제로 찾아뵙겠습니다.
문의처 : 영양군청 문화관광과 054-680-6432  

청록파 시인 조지훈 선생(1920~68)을 기리는 예술제가 선생의 생가마을. 경북 영양군은 조지훈 선생의 생가마을인 일월면 주실마을 지훈문학관 일원에서 ‘제12회 지훈예술제’를 연다. 조지훈 선생의 삶과 작품을 주제로 한 시와 음악, 무용, 전시 등의 행사가 펼쳐진다. 지훈문학 세미나와 선생의 시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지훈시 퍼포먼스대회’, 지훈시 목판 찍기, 선생의 시를 담은 깃발 전시회, 살풀이·진도북 공연, 지훈 백일장 및 사생대회 등으로 꾸며진다. 지역 동아리의 기타 및 색소폰 연주회와 시 낭송회도 마련된다.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 요리 전시, 건강체조경연대회, 원놀음 공연 등이 펼쳐진다. 이와 함께 선바위관광지 분재야생화테마파크에서는 ‘제5회 전국분재예술대전’이 열려 희귀수종 등 다양한 분재작품 300여점이 전시된다.

 

한양조씨(漢陽趙氏) 영양군(英陽郡) 일월면(日月面) 주곡리(注谷里, 주실) 기타 마을-경북 영양군(英陽郡) 일월면(日月面) 주곡리(注谷里, 주실) 기타 마을

 

청송군 진보면에서 영양읍 지나 수비면 쪽으로 가는 31번 국도를 주행하다 보면 일월면 삼거리 지점에 이른다. 거기 일월삼거리에서 진행 방향으로 왼손편에 한양조씨(漢陽趙氏) 주곡리(注谷里, 주실)실로 드는 표지판을 만나게 되는데 좌회전하여 918번 지방도를 들어 봉화(奉化) 재산면(才山面)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주실 마을은 금방이다.

 

영양읍의 원당리(元塘里, 하원리, 下元里), 일월면의 도계리(道溪里), 주곡리(注谷里), 가곡리(佳谷里) 등 마을은 명시(名詩) 승무(僧舞)의 작가 조지훈(趙芝薰) 시인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 한양조씨 집성마을이다. 마을 이름 주실은 마을의 모습이 배의 모습을 닮아 그리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고종(高宗) 때 조순대부(朝順大夫)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낸 조지수(趙之壽)이다. 그의 증손(曾孫)으로 조선 개국과 함께 한성(漢城)으로 옮긴 조돈(趙暾)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면서 조지수를 시조로 하고 한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었다.

 

한양조씨(漢陽趙氏)가 더욱 번성하게 된 것은 그 시조(始祖)인 조지수(趙之壽)의 현손 조인벽(趙仁壁) 때부터이다. 조인벽의 아버지는 용성총관(龍城摠管)을 지내고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에 봉해진 상게(上揭) 조돈(趙暾)이며, 아우 조인옥(趙仁沃)과 함께 조선 개국에 많은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매부(妹夫)가 되었다. 조인벽의 아들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 1347∼1417)은 찬성사(贊成事), 조위(趙渭)는 우의정(右議政)을 지냈다.

 

한양조씨의 영양 지역 입향은 1518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온(趙溫)의 현손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죽자 양절공 조온의 아우 우의정 조위의 증손(曾孫)인 현감 조종(趙琮)이 화를 피하여 영주(榮州)로 이거하였다. 조종의 장자 조인완(趙仁琬)의 후손은 풍기(豊基) 와단에, 차자 조예완(趙禮琬)의 후손은 임하면 오대리에 정착하고, 삼자 조지완(趙智琬)의 손자 조관(趙貫)은 병자호란 뒤 출세를 단념하고 옛 안동부 감천현(현 예천군 감천면)에 이거하였으며 후손 중 문과 6명, 진사 15명을 배출하여 일대에 두루 알려진 가문이 되었다. 또 사자(四子) 조신완(趙信琬)의 증손 조적(趙績)은 안동 저전(苧田, 현 서후면 저전리)에 정착하였으며, 오자(五子) 조형완(趙亨琬)의 아들 조원(趙源)은 영양(英陽)으로 이거하여 후손이 일월(日月)과 주곡(注谷)에서 크게 문호(門戶)를 개창(開創)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지훈의 고향마을 동구(洞口)에 위치한 주실마을숲은 하늘을 가린 울창한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곳으로 단풍과 낙엽이 멋스럽다. 조지훈 시비 ‘빛을 찾아 가는 길’이 발목 깊이로 쌓인 낙엽 속에서 외로이 숲을 지키고 서 있다. 이 주실마을숲은 ‘2008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 명품 숲이기도 하다.

 

나그네가 주실 마을에 들면 먼저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壺隱宗宅)과 마주하고 있는 문필봉(文筆峰)이 눈에 들어온다. 호은종택의 대문을 등지고 맞은편을 보면 봉우리가 여럿 보이는데 그중 대문과 일직선상에 놓여있는 봉우리가 주실마을의 문필봉(文筆峰)이다. 문필봉이란 풍수학에서 붓의 모양을 닮은 봉우리를 가리키는 말로 그런 산봉우리를 마주하고 있는 집이나 마을에는 훌륭한 학자가 태어난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런데 주실마을의 문필봉은 그 봉긋한 생김새도 그렇지만 옆으로 물길까지 끼고 있어 최고의 지형으로 꼽힌다. 붓에 물이 더해지는 형국이니 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주실마을에는 재물과 사람, 문장은 남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의 전통이 이어왔단다. 또 이 마을은 고래로 교육열이 특별해 수많은 박사와 교수를 길러낸 ‘박사마을’로도 유명하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본향(本鄕)은 지금의 서울인 한양이다. 시조 조지수(趙之壽) 공은 고려 중기에 조순대부(朝順大夫)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고 아들는 쌍성총관(雙城摠管) 조휘(趙暉)이다.  총관공의 아들 조양기(趙良琪)는 총관 겸 부원수(副元帥)이며 손자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조돈(趙暾)은 아들 조인벽(仁璧)과 함께 홍건적(紅巾賊) 격퇴에 큰 공을 세웠다. 돈의 첫째 아들 양렬공(襄烈公) 조인벽은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와 삼사좌사(三司左使)를, 둘째 검찬성공(檢贊成公) 조인경(趙仁瓊)은 검찬성을, 셋째 검한성공(檢漢城公) 조인규(趙仁珪)는 검한성을 지냈고 넷째 충정공(忠靖公) 조인옥(趙仁沃)은 개국공신으로 태조묘(太祖廟)에 배향되었다. 개국공신인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은 찬성사(贊成事)를, 좌명공신인 양경공(良敬公) 조연(趙涓)은 우의정(右議政)을, 가천재공(嘉川齋公) 조사(趙師)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한양조씨는 문묘(文廟) 배향 1위(位), 종묘(宗廟) 배향 1위, 봉군(封君) 16위, 부조묘(不祧廟) 6위, 시전(諡典) 15위, 체식(食) 21위, 청백리(淸白吏) 2위, 문과 급제 90여 위의 인재를 배출하였다.

 

계유년 단종(端宗) 복위(復位)를 협력한  충정공의 손자 조순생(趙順生)과 그 아들, 손자들은 세조에게 화를 당하고 충절을 세웠다. 특히 문정공(文正公) 정암(靜菴) 조광조(趙光朝)는 도학정치를 폈으며 문묘에 배향되었고,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인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를 편수한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와 두 번째 족보인 신묘삼권보(辛卯三卷譜)의 서문을 쓴 문간공(文簡公) 조경(趙絅)은 청백리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인 백기당(白旗堂) 조웅(趙熊), 산서공(山西公) 조경남(趙慶男), 독립군 총참모 조영원(趙永元), 최근에는 대정치가 유석(維石) 조병옥(趙炳玉) 박사, 시인 조지훈(趙芝薰), 조병화(炳華) 등이 문중을 크게 빛냈다. 2000년 전국 인구 조사에서 한양조씨는 95,206가구, 307,746명으로 조사되었다.

 

한양조씨가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인물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성종13∼1519,중종14)는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감찰(監察) 원강(元綱)의 아들. 14세에 어천도찰방(魚川道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희천(熙川)에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 이때부터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學統)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1510년(중종5) 진사(進士)가 되고,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典籍), 감찰(監察)을 역임하며 왕의 신임을 얻고, 입시(入侍)할 때마다 유교(儒敎)로써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해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역설했다. 이해 정언(正言)으로서,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계비 책봉 문제가 논의될 때 박상(朴祥), 김정(金淨) 등이 앞서 폐위된 신씨(申氏)의 복위를 상소하다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으로 유배되자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言路)를 막는 결과가 되어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다고 주장, 오히려 이행을 파직케 함으로써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을 입증받았다. 그 후 수찬(修撰), 호조 및 예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1517년 교리(校理)로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 향촌(鄕村)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케 하였다.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 폐지를 강력하게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없애게 했다. 1519년 대사헌에 승진,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했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신진사류(新進士類), 특히 30대의 소장학자를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勳舊派)를 외직에 몰아냈고, 특히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너무 많다 하여 삭훈(削勳)을 주장, 전 공신의 4분의 3을 삭제하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훈구파의 결정적 반발을 야기했다. 훈구파의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은 경빈(敬嬪) 박씨(朴氏)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게 하고,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走肖爲王”이란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다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는 한편,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만나서 위협에 가까운 논조(論調)로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무고했다. 이에 조광조의 도학적(道學的) 언행에 염증을 느껴오던 왕은 그를 투옥,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일단 사형이 면제되었으나, 능주(綾州)에 유배, 훈구파의 끈덕진 공격으로 마침내 사사(賜死)되었다. 선조 초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楊州)의 도봉서원(道峰書院), 희천(熙川)의 양현사(兩賢祠)에 제향(祭享)되었고,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저서에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한양에서 살았던 한양조씨는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정암 조광조가 화를 입게 되자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조광조의 삼종숙 되는 현감 조종(趙琮)이 영주(榮州)로 내려오고, 그 손자인 참판 조원(趙源, 1511∼?)이 영양으로 이거하여 5백여 년간 세거하게 되었으니 영양의 입향조는 곧 조원이다.

 

조원이 1553년에 영양으로 오면서 그는 함양오씨(咸陽吳氏) 오필(吳滭)의 딸과 결혼하여 처가가 있는 영양의 원당리[元塘里, 현재 하원리(下元里)라 불린다]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는 공신(功臣)의 후손이라는 후광(後光)과 오씨 집안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영양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조광인(趙光仁, ?∼1582)과 조광의(趙光義, 1543∼1608) 두 아들을 둔 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두 형제가 영양 일대의 사족(士族)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며, 해동이로(海東二老)라 불리는 등 입지를 굳혀갔다.

 

조광인은 수월(水月) 조검(趙儉, 1570∼1644)과 사월(沙月) 조임(趙任, 1573∼1644) 두 아들을 두었다. 조검의 자는 자순(子純), 호가 수월이고, 조임의 자는 자중(自重), 호는 사월이다. 조광의는 조건(趙健), 조전(趙佺), 조간(趙侃), 조신(趙伸) 등 4형제를 두었다.

 

한양조씨가 영양의 각 지역으로 분가하여 살게 된 것은 영양 입향조인 조원의 손자대에 와서라고 한다. 조검은 도계리(道溪里), 조임은 원당리(元塘里), 조건은 가곡리(佳谷里), 조전은 주곡리(注谷里) 즉 주실마을에 정착하였다.

 

이 가운데 원당리에 정착한 조임은 병자호란 뒤에 문을 닫고 폐인으로 자처하며 집을 월담헌(月潭軒)이라 이름하고, 당시의 제현들과 도의를 갈고 닦으며 세상의 일을 한탄하였다. 한양조씨 사고파(沙皐派)는 바로 사월 조임의 넷째 아들인 통덕랑 조정옥(趙廷玉)에서 갈린 문중으로, 현재 사고종택(沙皐宗宅)은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종택 옆으로 주강(注江) 조시광(趙是光)이 지은 주강정(注江亭)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연륜이 깊은 고건축물 문화재가 적지 아니한데, 마을 한복판에는 조지훈의 생가인 전게 호은종택(壺隱宗宅,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에 처음 들어온 조전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 때 지은 것이다.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 저택인 'ㅁ'자형 집이다. 호은종택 인근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이 마을에서 유일한 우물이다. 대개 한 동네 안에 우물이 여러 개 있는 것이 상례인데 왜 이곳에는 하나뿐일까. 주실마을은 배 모양이다. 우물을 많이 파면 배에 물이 차 침몰한다고 믿었다는 게 동네 사람들의 설명이다.

 

조지훈은 호은종택에서 태어났지만 유년기는 바로 뒤에 있는 방우산장(放牛山莊)에서 보냈다. 제헌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형과 함께 '꽃탑회' 활동을 하며 수많은 책을 읽고 많은 작품을 쓰면서 나라 잃은 아픔을 달랜 곳이다. 조지훈 일가가 떠난 뒤 훼손됐다가 2010년 재건됐다고 한다.

 

방우산장 옆길은 '지훈길'이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위로 가면 지훈시공원이 나온다. 입구에는 공원을 알리는 돌이 세워져 있고, 뒤로는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산책로를 따라 조지훈이 썼던 시를 새겨놓은 시비들이 줄지어 서 있다.

 

시공원에는 조지훈의 동상이 있고, 승무, 낙화 같은 시를 형상화한 조각도 세워져 있다. 시공원 뒤편으로는 오솔길이 산 정상까지 이어졌다. 750m 정도 걸어 정상에 오르면 주실마을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17세기 고택인 옥천종택(玉川宗宅)이 나온다.

 

시공원에서 걸어 내려온다. 왼쪽으로 한옥같이 만들어진 지훈문학관이 보인다. 현판은 조지훈의 부인인 김난희 여사가 직접 썼다. 전시실 입구에는 조지훈 흉상이 세워져 있다. 2007년 개관한 이 문학관에는 조지훈의 시 세계에 대한 설명은 물론 그가 사용한 모자, 가죽장갑, 부채 등이 전시돼 있다. 한쪽 벽에는 그의 삶을 보여주는 사진 100여 장이 정리되어 있다.

 

문학관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시인의 숲이 나온다. 외부로부터 마을로 오는 나쁜 기운을 막는 숲이라고 한다. 시인의 마을답게 숲 하나에도 운치가 있다. 이곳에는 조지훈의 시비는 물론 21살에 세상을 떠난 그의 형 조동진의 시비도 있다.

 

조지훈 생가와 지훈문학관, 지훈시공원까지 둘러봤다면 이제는 천천히 주실마을의 고샅길을 걸어보아도 좋다. 주실마을은 400년을 이어온 마을답게 곳곳에 고택들이 남아있는데, 전게 옥천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주실마을을 한눈에 담기 아주 좋은 곳이다.

 

옥천종택과 함께 월록서당(月麓書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도 주실마을에 가면 들러볼 만한 곳이다. 한양조씨, 야성정씨(冶城鄭氏), 함양오씨 등이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한 이곳은 조지훈이 어린 시절 수학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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