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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굴욕적 강화조약 체결 현장과 병자호란의 현장, 연무당(연미정)!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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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적 강화조약 체결 현장과 병자호란의 현장, 연무당(연미정)!

(인천시 기념물) 용진진 좌강돈대 :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215번지
(사적) 갑곳돈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0번지 외
(비지정) 월곳돈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42

  • 기사입력 2023.01.31 22:37
  • 기자명정진해 문화재전문 대기자

염하 해안을 따라 용당돈대에서 북쪽 직선거리 약 1km에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가리산돈대, 용당돈대와 함께 용진진의 관할하에 있는 좌강돈대가 있다. 또한 용진진의 홍예문은 북서쪽의 좌강돈대와 연결되어 있으며, 이곳을 용진나루, 용담포 등으로 불렀다. 

용진진(인천시 기념물)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된 진으로 군인이 머물러 있던 무장 성곽지역이며, 육군인 병마만호의 관리하에 있었다. 만호는 조선시대 무관 관직으로 지방 군영의 장수로 품계는 종4품이다. 이곳의 진에는 각궁, 교자궁, 목궁 등의 무기와 조총, 불랑기 등 각종 중화기로 무장한 군관 24명, 사병 59명, 진군 18명 등 101명의 병력이 주둔했었다. 이뿐만 아니라 선박 3척, 토졸의 위답이 20섬지기, 군향미 174섬, 조가 25섬, 장이 8점을 보유하였다. 시설로는 포좌 4문, 총좌 28개소가 있었으나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석축 부분이 없어지고 홍예문만 남아 있던 것을 1993년에 문루와 연결된 좌강돈대가 복원되었다. 홍예의 높이는 2.57m, 폭은 4.15m, 두께는 60cm~61cm, 우측 홍예의 높이는 2.14m, 폭은 4.80m, 두께는 50~60cm의 규모이며 석재는 대리석이다.

복원된 용진진의 홍예문 전면에는 지대석 위에 2단의 홍예기석을 놓고 그 위에 홍예돌을 올렸다. 선단석으로 홍예를 마감하고 무사석을 전면으로 쌓았다. 염하 쪽으로 성을 복원하지 않고 대각선으로 마감하였고 서쪽 편으로는 좌강돈대와 연결한 성을 9단을 올리고 미석으로 마감했다. 홍예문 위 2단 높여 미석을 두고 좌우에 누조를 마련했다. 미석 위에는 총안 1구만 낸 여장을 8개를 설치하고 홍예문 안쪽 좌우로 누각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두었다. 참경루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두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각 칸에는 정면과 후면에는 판문을 달았고 좌우의 측면에는 판문을 달았다. 

좌강돈대는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48개 돈대중의 하나이다. 염하에 접한 돈대중에 비교적 낮은 구릉 위에 축조되었다. 가까이에 용진진의 홍예문이 있어 성벽과 연결되어 축조하였다. 돈대의 형태는 원형이며 포좌는 염하 쪽으로 4좌가 있으며, 출입문은 서쪽에 배치된 평거식이다. 돈대의 축조는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어 8단으로 쌓고 그 위에 사각의 돌로 2단의 미석을 두고 여장은 복원하지 않는 상태이다. 기록에 의하면 여장은 37개, 둘레는 96보라 하였다. 또한 돈대 축조에 사용되었던 석재는 매음도(지금 석모도)의 해명산에서 박석을 캐서 강화 해안의 축조 현장까지 운반하여 축조하였다. 돈대의 지름은 32m이고, 돈대 내에는 창고와 주둔 병사의 숙소가 있었는데, 복원되지 않고 전체를 잔디로 깔았다. 돈대의 북쪽에는 수로가 있는데, 당시 이 수로를 따라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지 않았나 추정된다.

좌강돈대에서 북쪽으로 염하 해변을 따라 약 1.5km 거리에 강화도의 관문인 강화대교와 인접한 곳에 갑곶돈대가 있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돈대 주위가 113보(步)였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성가퀴인 여장(치첩)은 40개였다. 포좌가 있는 본래의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의 북쪽 언덕에 있었으며,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인 치성이다. 

갑곶돈대는 1679년 숙종 5년에 48개의 돈대를 축조할 때 당시 갑곶나루에 만들었는데, 이때는 ‘갑구지돈대’라고 불렀다. 이곳이 ‘갑곶’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삼국시대 ‘갑비고차(甲比古次)’에서 유래되었다. 고려 때 몽골군이 지금의 강화대교 김포 쪽에서 강화도로 건너고자 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했는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널 수 있었을 텐데 ‘라고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 됐다고 한다. 

1866년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프랑스 함대에 속한 600명의 군사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지만, 10월에 정족산성(鼎足山城)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梁憲洙)가 이끈 부대에 패해 물러났다. 패한 뒤 약탈한 수많은 문화재를 갖고 돌아갔다.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됐고 갑곶성지가 보이는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순교했다. 1875년(고종 12) 갑곶돈에 갑곶포대가 설치됐다. 이때 갑곶돈대, 망해돈대, 제승돈대, 염주돈대 등 세 포대와 함께 제물진(濟物鎭)의 관할에 속했다.

1876년에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6척의 함선을 이끌고 와 이곳으로 상륙한 뒤 운요호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압적으로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조선의 접견대관 신헌(申櫶)과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그 뒤 갑곶돈은 허물어져 일부만 남았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갑곶진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4km 지점에 월곶돈대(月串墩臺)가 위치한다. 강화 5진 7보 중 하나로 남쪽으로는 강화해협인 염하와 연결된다.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의 하구인 조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 중 강화도 쪽 돌출부인 월곶에 자리한다. 이 월곶돈대는 서해에서 한강, 임진강 두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조선시대 해상 교통로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매우 번성한 포구였다. 

이 돈대는 숙종 15년(1679) 당시 강화유수 윤이제가 정비한 돈대로 전체적인 모양은 타원형으로 둘레가 148m에 이른다. 돈대의 동서양방향의 폭은 약 47m, 남북방향의 폭은 약 38m이다. 해안 방향으로 3구의 포좌가 있으며, 문루인 해조루까지 성벽으로 연결되어 강화 외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돈대의 출입문은 홍예식이며 지대석 위에 홍예기석 1단을 놓고 그 위에 홍예석과 선단석으로 형태를 갖추고 성벽은 사각으로 다듬은 돌로 11단을 쌓고 미석을 두지 않고 총안 1구를 갖춘 여장을 두었다.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연무당 옛터.

돈대 내에는 연미정(인천시 유형문화재)이라는 정자가 있다. 강화해협과 조강의 물결모양이 마치 제비의 꼬리 같다고 해서 제비 ‘연(燕)’, 꼬리 ‘미(尾)’자를 써서 연미정이라 부른다. 팔작지붕의 겹처마로 10개의 장초석 위에 기둥을 얹은 민도리집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벽체는 두지 않았다. 북쪽으로는 개풍군, 동쪽으로는 문수산이 한눈에 들어와 아름다운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다.

연미정은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과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후 조선은 오랑캐라 여겨온 청나라를 형제처럼 대우해야 하는 굴레를 지게 된다.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제23대 왕 고종이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면학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중종(1510)이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병마절도사와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황형(黃衡) 장군(1459~1520)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황형 장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연미정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왔고 최근까지만 해도 황 씨 집안 소유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연미정 옆에는 원래 수량 500년이 넘은 2그루의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2019년 9월 태풍 링링의 영향으로 북쪽 느티나무가 부러졌는데, 느티나무 뿌리와 줄기 자체는 살아있어서 현재 새싹이 다시 나고 있다.

강화도 동쪽 해안을 따라 쌓았던 50여 리가 조금 넘는 외성에는 출입문이 여섯 개 있는데 그 첫 번째 문의 누각이 이 조해루(朝海樓)다. 조해루는 숙종 5년(1679)에 지어져 강화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검문하는 검문소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복원된 조해루는 월곶돈대와 연결되고 남쪽의 외성과는 연결되지 않았다. 홍예식 성문을 만들고 그 위에 누각을 지은 전형적인 성문 건축물이다. 성문 밖에서 본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의 겹처마건물이다. 정면 3칸 중 좌우 칸은 중간칸의 1/2이며 좌우 각 칸에는 판벽을 하고 한 개의 판문을 달았고, 중간칸에는 2개의 판문을 달았다. 누각 앞에는 총안을 낸 여장을 두었고 안쪽에는 총안이 없는 여장을 둘렀다. 

조해루와 월곶돈대 사이에 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가 세워져 있어 향년 62세로 청수를 다하자 부음에 접하신 중종왕께서 크게 슬퍼하시면서 시호를 정무로 추증하고 연미정 3만여 평 전역을 하사했다는 내역이 기록돼 있는 비(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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