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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병자호란(丙子胡亂,1637년)◈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5. 22.

병자호란()은 인조 14년 병자년 음력 12월 8일부터 정축년 음력 1월 30일까지, 양력으로는 병자호란() 1637년 1월 3일부터 1637년 2월 24일[8]까지 이루어진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침략 전쟁을 일컫는다.

1627년 후금이 일으킨 정묘호란 종전 후 10년만에 발발한 전란으로서 임진왜란 이래 동아시아의 판도를 다시 한번 크게 뒤바꾼 사건이었다. 청은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을 굴복시켜 번국으로 삼고, 조선은 그 대가로 군사적, 경제적 부담과 공녀 차출을 강제당하게 된다. 당대 동방의 패권국이었던 명나라도 상호 온건적인 군신관계를 맺어온 우방국 조선이 청의 속방이 됨으로써 멸망이 가속화되어 1644년 멸망했다.

2. 설명[편집]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정축하성)이란 항례를 치뤄 당대 조선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 전쟁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경우, 전쟁의 배경, 전쟁의 전개 방식, 한반도 세력의 대처 등을 보면 고려-거란 전쟁 당시 '거란의 2차 침입' 때와 몹시 흡사하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인조는 고려의 현종처럼 신속한 몽진(蒙塵)을 하지 못했고 청나라의 너무 빠른 진격 속도 때문에 소모전을 벌일 때까지 시간을 끌지도 못했으며 중요한 통제 사령탑으로 기용한 측근들이 싸움을 회피하거나 패배하여 결과적으로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전쟁에서 결국 패배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 할아버지인 선조의 임진왜란 초기의 빠른 몽진(蒙塵)과도 자주 비교가 되는 편이다.

대중들에겐 흔히 '조선이 사대주의로 명나라를 섬기다가[9] 연이은 실책[10]으로 자멸했고, 청나라의 홍타이지는 항복한 조선에 자비를 베풀어 멸망시키지 않았다'는 속설이 퍼져있지만,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천연두가 홍타이지와 청군의 귀국을 앞당겼다는 것이다.[11] 당시 조선과 청의 국력 격차는 쉽게 멸망이나 정복이 이루어질 만큼은 아니었고, 전쟁 중 천연두가 발병한 탓에 소모전을 바라지 않은 청은 전면전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를 뒤집어서 외교적인 이득을 보기 위한 단기 전쟁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몇 년 안 가서 명나라도 멸망했다.

한국의 병자호란사 담론은 청나라가 처했던 위기 상황보다도 침략을 당한 조선의 사정만으로 해석하려는 경우가 많다보니, 한림대학교의 오수창 교수는 <청(淸)과의 외교 실상과 병자호란>이라는 논문에서 '자초한 전쟁' 이라는 이런 통념들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했다. “병자호란, 조선이 자초한 전쟁 아니다" 그 외에 다음 글을 참고하는 것도 좋다. 병자호란의 원인에서, '청나라' 의 입장 - 전쟁은 오직 조선 때문이 일어난 것인가? 물론 학자들 사이에서 객관적 연구와 논쟁이 더 필요한 부분이긴 하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가 출연했던 EBS 평생 대학) 역사 이야기 - 병자호란 편과 구범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2019년에 출간한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3. 명칭[편집]

옛 기록에는 '병자노란'(丙子虜亂)이나,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 부른 기록도 있다. 병자년 - 정축년에 걸쳐 있었다는 의미에서는 '병정노란'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위에 인용된 《연려실기술》의 '병자노란'이라는 표기는 오타가 아니다. 호(胡)나 노(虜)나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제2차 조청전쟁[12]이라는 명명도 있다. 본시 고려판 병자호란인 여몽전쟁의 경우도 본시 고려나 조선의 입장에선 '몽고의 침입'으로 불렀고, 조선 왕조식으로 표기하자면 신묘몽란, 신묘호란, 신묘노란 등등으로 불린다. 현대 한국의 동아시아사 과목 교육 과정에서는 "병자전쟁"으로 칭한다.

4. 전쟁의 동기[편집]

 

병자호란 - 나무위키

"우리 나라가 천조(天朝)에 대해서 의리상으로는 군신(君臣)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정리상으로는 부자지간과 같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준 큰 은혜가 있는데 말해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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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정치적인 문제가 병자호란의 원인이 됐음이 20세기 초 하야시 다이스케에 의해 지적됐으며, 병자호란의 원인을 정묘맹약 이후 누적된 양국간의 경제적 마찰에 비중을 둔 이나바 이와키치의 경우도, 일련의 '존호 문제'를 병자호란의 동기로 설명하고 있다.[13] 한국의 호란 연구에서도 명의 모범적인 조공국인 조선을 통해 위상을 정립하려는 홍 타이지가 인조에게 존호 문제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이것이 강경한 척화론을 촉발하여 사신들의 도주와 절화교서의 탈취를 초래했다고 지적하며 이것이 호란으로 이어지는 동기가 됐다는 것이 통설을 이룬다.[14] 의미 부여의 차이지만, 홍타이지의 존호례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이 이틀간 배례 거부를 한 것이 중대한 계기[15] 및 직접적인 동기[16]가 됐다고 보거나 이들이 국서를 버린 것을 계기로 양국의 국서 교환이 단절됐음을 강조하기도 한다.[17] 즉, 공물 수량을 두고 양측이 마찰을 빚은 것은 수량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승하는 후금의 위상을 조선에게 반영하려는 것이 본질이었다.[18]

4.1. 조선의 친명배금 노선[편집]

 

병자호란 - 나무위키

"우리 나라가 천조(天朝)에 대해서 의리상으로는 군신(君臣)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정리상으로는 부자지간과 같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준 큰 은혜가 있는데 말해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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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가 천조(天朝)에 대해서 의리상으로는 군신(君臣)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정리상으로는 부자지간과 같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준 큰 은혜가 있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따라서 천조에 만약 사변이 발생했을 경우에는 우리 나라 군신들로서는 국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달려가서 선봉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는 평소 병(兵)과 농(農)을 분리하지 않아 왔으므로 아침에 명을 내려 저녁에 집결시키기는 형세상 불가능한데, 이런 사정은 동정(東征)한 여러 대인(大人)들이 일찍부터 환히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번의 노추(老酋) 는 실로 천하의 강적이니 결코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니 왕사(王師)는 단지 병력을 배치하여 무위(武威)를 보여주고 크게 성세(聲勢)를 떨쳐 호랑이가 산속에 웅거하고 있는 형세를 지은 다음에 다시 저 적의 동태를 관찰하면서 기미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는가. 지금 만약 깊이 들어가 섣불리 행동하며 진격한다면 만전(萬全)의 계책이 못될 듯하니 한 번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렇듯 인심이 좋지 못한 때 대군을 징발해서 멀리 중국으로 보낸다면 뜻밖의 걱정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중국 조정은 우리 나라에 있어 임진 왜란 때 구원해 준 망극한 은혜가 있으니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보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만 이 세상이 생겨난 이래로 사변이 끝없이 일어나는데 혹시라도 흙이 무너지는 환란과 대처하기 어려운 변고가 있게 된다면 묘당에서 장차 어떻게 조처할지 모를 일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의 평안·함경 두 지역은 저 적의 지방과 맞닿아 있는데, 이번에 나라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국경으로 내보냈다가 뒤에 만약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계책과 충동격서(衝東擊西)의 작전을 구사하며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들어오는 것처럼 하기라도 한다면 묘당에서 장차 어떤 계책으로 대응할지 또한 모를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중국 조정이 만약 저 적에게 병화(兵禍)를 입어 아랫나라에 구원을 요청해 왔다면 나라의 존망이나 일의 이해 따위는 돌아보아선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 조정에서 군대를 징발하여 저 적의 죄를 물으려 하고 있으니 일의 완급(緩急)에 있어 크게 차이가 납니다."


16세기 말에 일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임진왜란을 명나라의 구원으로 극복한 일은 당위론적인 사대관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제 조선 사회에서 명에 대한 사대는 외교가 아닌 윤리, 도덕의 문제였다. 이를테면, 1619년 명과 후금이 충돌했을 때, 파병을 반대한 광해군은 물론이고, 대다수 신료들 역시 조선군의 허약함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명을 돕기 위한 원군의 파병을 지지했던 것은, 오로지 '대명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었다.[19] 그와 같이 광해군 시절의 조정 또한 대명 사대에 소홀하다는 명분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인조 정권과 마찬가지로 친명배금을 추구했고. 광해군을 왕위에 옹립한 이이첨 등이 있던 대북 또한 열렬한 친명배금주의 성향이었다. 사실 대북은 여진(=후금, 청)에 대해서는 서인 못지 않은 골수 강경파였는데, 광해군 때 후금과의 관계에 대해서 "나라가 망할지라도 후금과 친선 못맺습니다!" 라고 했다.[20] 그러므로, 광해군의 중립외교 또한 결과적으로 사르후 전투 당시의 파병 결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한계가 명확한 상황이었다.

조명 연합군이 사르후에서 참패하여 강약이 가려진 다음에도, 조선의 사대부들은 당파를 막론하고 '오랑캐'이자 '역적'인 후금에게 비타협적 자세를 계속 고수했다. 조선의 문신들이 징병칙서를 거절한 광해군의 왕명을 거부하여 파업에 벌이고 계해정변까지 초래한 것, 가도의 모문룡 휘하 명군의 횡포를 방기하고 재정을 쏟아준 것, 병자호란 직전 청 사신을 박대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이에대해 한명기 교수 처럼 광해군과 광해군 다음 즉위한 인조대의 외교노선에 큰 변동은 없었다는 해석 또한 존재하는 상황이다.[21] 다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해당 주장은 1622년 5월에 명의 징병칙서를 광해군이 거부한 이래 더 이상의 징병 요구가 없었던 점, 그해 10월 광해군이 누르하치를 후금국 칸(後金國汗, amaga aisin gurun-i han)으로 인정하고 우호적인 국서를 보내 부분적인 외교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크게 만족한 누르하치가 더 이상 외교전을 진행하지 않고, 요서 공략에 집중한 점 등을 감안하지 않은 피상적인 관찰일 뿐이다라는 반론 또한 존재한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화친 제안에 대해서도, 비변사의 일부 고위 관료를 제외한 조정 대다수는 척화를 주장했고 특히 대각(臺閣)이 그 중심이었다. 그러한 주화, 척화의 논쟁은 당론과 무관했다. 대명 의리에 기반한 척화론은 당파를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척화론은 실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도 아니었다. 인조대 군신들은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단독으로 후금의 침략을 물리칠 가능성이나 명의 군사적 지원 가능성을 낮게 보면서도, 국가의 존망보다는 상국을 섬기는 대의(大義)가 더 중요하다며 척화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인조 정권은 후금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밀려 정묘화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귀최명길 등 이를 주도한 신료들을 참수하라는 상소가 잇다를 정도로 주화론자들의 입지는 매우 좁았다. 그러한 상황은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에도 그대로 이어졌다.[22]

병자호란을 앞둔 시기 조선의 신료와 사대부들은 사대를 위해서는 나라가 망해도 상관없다는 극언을 서슴치 않았으며,[23] 대표적인 예가 다음 홍문관의 차자다.

"요즈음 오랑캐 사신 용골대 등이 가지고 온 거만한 글에 존호(尊號)를 확정했다고 칭했는데, 이 말이 어찌하여 이르게 되었습니까. 신들은 적이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정묘년의 난리에 참혹하게 유린당하고 기미(覊縻)의 거조가 궁여지책에서 나와 생민(生民)의 고혈을 다 기울여 사신에게 예물을 바치면서 비굴한 말로 애걸한 것이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미 위호(僞號)를 참람하게 칭하려고 하였으니, 반드시 우리 나라를 이웃 나라로 대우하지 않고 장차 신첩으로 여길 것이며 속국으로 여길 것으로, 상의하여 정탈한다는 등의 말에서 그들의 행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차마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개돼지 같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고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욕을 당하여서 거듭 조종에게 수치를 끼친단 말입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비록 그 글을 불태우고 사신을 참하여 삼군(三軍)의 사기를 진작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친히 적의 사신을 접견하시어 부도한 말을 듣는단 말입니까. 의당 엄준한 말로 배척하여 끊는 뜻을 분명히 보이고 참람하게 반역하는 단서를 통렬하게 끊어, 저 오랑캐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지키는 바에 대해 기강을 범하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일 로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그럴 경우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천하 후세에 명분이 설 것입니다. 서달에 이르러서는, 천조에 대해 새로 반역한 죄가 있으니, 우리 나라와는 통신(通信)을 왕래할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오랑캐 사신을 따라 제멋대로 국경에 들어왔습니다. 신들의 뜻으로는, 빨리 구금하라 명하여 상경하지 못하도록 해서 엄히 끊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기존에 척화론자였던 김류는 태도를 바꿔 "나가면 위태로울 확률이 반 보존될 확률이 반인데 계속 버티면 백이면 백 다 망할 겁니다." 라며 현실을 살피게 되었지만, (최명길도 "그래도 지금 결단을 내리면 만에 하나의 희망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대간들은 여전히 항복을 강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대사헌 김수현은 전쟁의 승패가 이미 가려진 상황에서도 하민(下民)들이 어육(魚肉)이 되더라도 임금께서 출성하시는 것을 불가하다고 할 정도였으니, 인조 정권의 척화신들이 얼마나 명분론에 젖어 현실을 돌아보지 않았는지는 긴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조선이 청의 군사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신속을 거부하여 홍타이지의 전면적인 침략을 당하게 된 것이, 명-청 간의 전쟁에 대해 한인 왕조의 최종적 승리를 예상하여 그들의 보복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24] 하지만 당시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척화를 주장한 사료는 고작해야 1639년 논쟁 과정에서 의리론이 밀리자 김상헌이 명의 정벌을 거론한 것 외에는 전무하다는 점이나, 막연한 명의 보복 가능성보다는 눈앞으로 다가온 청의 침공이 훨씬 더 실재적인 위협이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낮다.[25] 그와 같은 주장을 담을 논저들은, 인조 정권에서 대청 강경론이 득세했으며 그것이 호란을 유발한 주 요인 중 하나였다는 통념이 마치 허구인 것처럼 주장하다가, 김상헌의 1639년 상소 등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돌변해서 왜 당시 조선 정부가 대청 강경론에 기울어져 청의 침입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정당화하는 등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기도 하다. 더구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군신관계를 확정하는 대표적 절차인 봉표칭신의 예를 청 사신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치는 상황까지 초래하면서 거부한 것은 전혀 실리 추구라 볼 수 없는 행태였다.

호란기 척화론이 현실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근거로 많이 예시되는 김상헌이 명의 보복 문제를 논한 척화 상소에조차 명분 우선주의는 여실히 드러나는 바다.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는데, 죽고 망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반역을 따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제 부모를 친 사람이 있다.’고 아뢴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다스리도록 명하실 것이며, 그 사람이 아무리 좋은 말로 자신을 해명한다 할지라도 전하께서는 반드시 왕법(王法)을 시행하실 것이니,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첫 번째 문단에서 강조한 부분에서 보이다시피 해당 상소는 '역(逆)=상국인 명나라를 배반'하지 않는 것을 국가의 존망보다 우선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의 세력이 한창 강하여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하는데, 신은 명분과 의리야말로 지극히 중대한 것인 만큼 이를 범하면 반드시 재앙이 이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저버리고 끝내 망하는 것보다는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명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일이 순조로우면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고 백성들의 마음이 기쁘면 근본이 공고해집니다.이렇게 나라를 지키고서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적은 아직 없습니다.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는 의리를 들어 회군(回軍)하여 2백 년의 공고한 기업(基業)을 세우셨고, 선조 소경 대왕(宣祖昭敬大王)께서는 지성으로 사대(事大)하여 임진 왜란 때에 구원해 준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지금 만일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고서 차마 이 일을 한다면, 천하후세의 의론은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지하에 계신 선왕(先王)을 뵐 것이며 또 어떻게 신하로 하여금 국가에 충성을 다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김상헌이 거듭 강조하는 바와 같이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수준의 사고를 '냉철한 현실주의'라고 평하기도 어렵거니와, 아래 문단의 강조된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상헌이 궁극적으로 호소한 것은 신하가 국가에 충성하는 것처럼, 소국은 대국을 지성으로 사대하는 것이 도리라는 도덕주의였다. 김상헌이 그 사이에 問罪之師를 운운하며 보복성 침략 가능성을 제기한 것은, 어디까지나 굳이 이해 득실을 따진다고 해도 척화가 맞는 길일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지, 그것을 유일하거나 근본적인 이유로 내세웠던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김상헌은 "국익상의 손해를 보더라도, 설령 나라가 망하더라도, 명분이 더 중요하니 척화가 옳다"고 강변한 당대의 흔한 척화신이었을 뿐이다. 단지 거기에다 "이해 득실을 따져도 척화가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는 말을 보탰을 뿐이다.

게다가 위의 상소는 병자호란 발발 전이나 전쟁 당시에 제기된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 패전 후에 청의 강요에 따라 명을 정벌하는 군사를 파병하는 것에 반대하는 상소임을 감안해야 한다. 청에 대한 화친을 반대[斥和]하는 것과는 맥락이 달랐던 것이다. 또한 당시는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에 참패한 이후였으므로, 청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던 척화신으로서는 명분론만 고집할 상황이 아니었고, 자신들의 주장=척화론에 현실주의적인 면도 있었다는 식의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이는 호란기의 척화론이 궁극적으로 국가의 보전을 위한 것이었음을 뒷받침하는 논거로는 타당하지 않다.

4.1.1. 친명배금의 옹호 또는 불가피론[편집]

 

병자호란 - 나무위키

"우리 나라가 천조(天朝)에 대해서 의리상으로는 군신(君臣)의 관계에 있다 할지라도 정리상으로는 부자지간과 같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위급한 상황을 구제해 준 큰 은혜가 있는데 말해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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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1620년대 이후 1644년에 이르는 명ㆍ청 교체의 전야에, 조선사회의 지식인들이 임진왜란 때 형성된 '재조(再造)'의 기억을 떠올리며 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데에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화이론(華夷論)의 논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집착의 이면에는 14세기 말 이래 200년 동안 이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로서 군림하던 명의 위세가 소멸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대적 정황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요컨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명에 대한 미련에는 명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계획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예의(禮義)를 지킬 상황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니, 신 역시 예의에 의거하여 따질 겨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해(利害)로서 논한다 하더라도, 힘센 이웃의 한나절 강포함만을 두려워하여 천자의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원대한 계책이 아닙니다. 산해관(山海關) 아래 줄지어 주둔한 군사들과 바다 위 군함에 올라탄 수졸들은 비록 오랑캐를 쓸어내고 요동 땅을 회복하기에는 부족할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의 잘못을 벌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호랑이 앞의 창귀(倀鬼)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 죄를 물으려는 군사가 천둥번개처럼 달려와 배를 띄운 지 하루 만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 당도할 것이니, 두려움의 대상이 오직 심양에만 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1639년 시점에서 작성된 이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조선이 만약 청의 편에 완전히 붙었다가 명이 만에 하나라도 세력을 회복할 경우 그 보복을 감당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는 '친명 사대주의자'의 한낱 공허한 외침만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지금 시점에서 보더라도 적어도 강희제 즉위 이전까지, 하다못해 입관(入關) 이전까지 중원의 정세는 대단히 유동적이었으며 그 향배를 쉽게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명의 세력 회복을 바라며, 혹은 두려워하며 임진왜란의 기억을 부여잡고 있던 명ㆍ청 교체기 조선 지식인들의 사유를 현실과 완전히 유리된 몽상적 관념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 수 있다. 그 기억 속에는 중화 문명의 담지자인 명에 대한 존숭과 더불어 명의 현실적 위세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경섭,『조선중화주의의 성립과 동아시아』(유니스토리, 2013). (pp.86~89) 출처
실제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의 인조 정권의 외교 정책은 분명 명나라와 청나라 그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이었다. 인조 집권 초기부터 명나라는 조선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며 의심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1629년에는 조선이 "왜노와 통혼하고 노적에게 정성스럽게 대한다(媾倭款奴)"는 말이 그들 조정에서 나올 정도로 조선을 의심하는 태도가 계속되었다. 당시 조선의 행보에 만족하지 못한 것은 후금도 마찬가지였다. 명나라와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 조선에 대해 후금은 불만을 서서히 키워가고 있었다. 국경 무역에 불만을 품은 후금 조정은, 1631년 만약 충분한 소와 말을 보내지 않는다면 평양과 한양까지 진격하겠다며 조선을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전쟁의 결말을 알 수 없었던 조선은 두 나라 가운데 어느 한 편에 방책을 취할 수 없었다. 결국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는 한, 조선은 어느 쪽도 만족시킬 수 없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의 쇠락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쟁이 끝까지 예측을 불허했던 점은 그 시대와 상황의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당연하다.

만약 이자성이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지휘관인 오삼계(吳三桂)를 자기 편으로 회유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어쩌면 한인의 중원 지배가 그대로 유지됨과 동시에 만주인들의 중원 진공 또한 훨씬 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맥락을 고려해 보면, 점차 청나라의 우세가 나타나고 있기는 했지만 청나라보다 최소 수십여 배에 달하는 인구와 거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던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에 신속하는 것이 조선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큰 모험이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조선이 그 보복을 피하고자 청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먼저 인정한 뒤, 명나라와 청나라 간의 전쟁이 명나라 또는 그 뒤를 계승한 새로운 한인 왕조의 승리로 끝났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임진왜란 당시 파병을 해준 '은혜를 배신'한 번국(藩國)에 대한 보복의 당위성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그들 조정에 없었을 것이다. 분명 병자호란을 능가하는 무서운 보복전이 뒤따랐을 것이다.
 
조일수(Ilsoo David Cho),「인조의 대중국 외교에 대한 비판적 고찰」(『역사비평』121, 2017). (pp.362~364) 출처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의 병자호란에 대한 주류학설은 "맹목적인 대명 사대주의가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고 참사를 불렀다"는 것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 인조정권의 친명배금 및 척화론을 옹호하는 주장이나 학설이 나왔는데, 이런 입장을 펴는 학자로는 한림대의 오수창 교수나 하바드대학 조일수 연구원등이 있다. 그리고 역덕 커뮤니티들에도 조선의 친명배금을 옹호하는 입장이 많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명을 편드는 조선의 근본적인 사고 원인은 명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사대의 예로 표현되는 행위들의 근본 동력은 명의 국력이 조선을 충분히 위협 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

실제로 인조는 1636년 2월 청을 황제국으로 인정하라는 요청에 대해 '대청국황제(大淸國皇帝)'라 부르진 못하겠으나 '청국한(淸國汗)'이라 부를 수는 있다는 제안을 내놓는 등 청 측과 끊임없이 타협을 시도했다.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하는 점은 지금 시점에야 청의 승리가 명백해 보이지만, 당시 조선인들로서는 명과 청 양국 간 승패의 향방을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부 학자들은 청나라가 별로 강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병자호란 치욕은 인조의 사대주의 때문? 오해다”

또한 당시 청에 대한 강경론에는 명에 대한 사대의 예와는 별개로 청측의 횡포에 대한 조선측 스스로의 청에 대한 강한 적개심이 함께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 청은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구해왔을 뿐만 아니라, 황금·백금 10,000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더불어 정병(精兵) 30,000명까지 요구해오는 등 조선측에 무리한 요구들을 계속해왔다. 심지어 충분한 소와 말을 보내지 않는다면 평양과 한양까지 진격하겠다며 조선을 협박하기도 하였고 장차 명나라 정벌을 염두에 두며 이와 함께 후금의 오랜 숙원 중에 하나인 수군 함선을 보내라는 요구도 하는 등 반복적인 무리한 요구들로 조선내의 반청감정을 계속 고조시켰다.

 

"요즈음 오랑캐 사신 용골대 등이 가지고 온 거만한 글에 존호(尊號)를 확정했다고 칭했는데, 이 말이 어찌하여 이르게 되었습니까. 신들은 적이 통곡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정묘년의 난리에 참혹하게 유린당하고 기미(覊縻)의 거조가 궁여지책에서 나와 생민(生民)의 고혈을 다 기울여 사신에게 예물을 바치면서 비굴한 말로 애걸한 것이 10년이나 되었습니다. 저들이 이미 위호(僞號)를 참람하게 칭하려고 하였으니, 반드시 우리 나라를 이웃 나라로 대우하지 않고 장차 신첩으로 여길 것이며 속국으로 여길 것으로, 상의하여 정탈한다는 등의 말에서 그들의 행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차마 당당한 예의의 나라로서 개돼지 같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고 마침내 헤아릴 수 없는 욕을 당하여서 거듭 조종에게 수치를 끼친단 말입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비록 그 글을 불태우고 사신을 참하여 삼군(三軍)의 사기를 진작시키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친히 적의 사신을 접견하시어 부도한 말을 듣는단 말입니까. 의당 엄준한 말로 배척하여 끊는 뜻을 분명히 보이고 참람하게 반역하는 단서를 통렬하게 끊어, 저 오랑캐로 하여금 우리 나라가 지키는 바에 대해 기강을 범하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일 로 범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그럴 경우 비록 나라가 망하더라도 천하 후세에 명분이 설 것입니다. 서달에 이르러서는, 천조에 대해 새로 반역한 죄가 있으니, 우리 나라와는 통신(通信)을 왕래할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오랑캐 사신을 따라 제멋대로 국경에 들어왔습니다. 신들의 뜻으로는, 빨리 구금하라 명하여 상경하지 못하도록 해서 엄히 끊는 뜻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후금의 지속적인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되었는데 위의 홍문관의 차자만 보아도 단순히 명에 대한 사대의 예 그 자체 보다는 청이 정묘호란 당시에 조선을 유린하고 조선을 추후에라도 속국으로 만들것이며 그렇게 능욕을 당하게 될 바에는 차라리 나라가 망하더라도 당당하게 싸우는게 훨씬 더 옳다라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척화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조선이 진정 우려한것은 위의 주장들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승리가 어느쪽으로 결론날지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즉, 일시적으로 조선이 청에 굴복한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명이 청을 이길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26] 위에서는 계속해서 척화신들의 논리에 현실주의적 논거보다는 명분주의가 우선한다고 지적하지만, 반대로 그 '현실적'이었다던 주화신의 대표주자 최명길(조선)조차도 기껏 병자호란을 화의로 이끌어놓고는 명과의 연락과 공조를 이어가려 노력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사실 이 재조지은을 강조하는 명분론을 마냥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그래서 다시 누군가에게 침공을 받으면 어디에 도와달라고 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쟁이 터지기 전 빠르게 청에게 붙는다고 한들, 그럼 청은 이 수백년의 상국, 그것도 조선 말마따나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주기까지 한 맹방을 하루아침에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편을 바꾼 번국을 위에 어느정도로 명운을 걸고 챙겨줄 것인가?[27] 혹은 설령 편을 바꿔탄다 한들 당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어제의 동맹이 오늘 뒤통수를 치며 아예 한반도를 완전 병탄하겠다고 달려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명나라는 어찌됐건 정말로 수십만 대군을 퍼부어가며 조선을 지켜주었고, 또 그런 투사능력이 있음에도 조선을 병탄할 생각이 추호도 없음을 완벽하게 인증해 준, 한국사에서 몇 안되는 믿을 수 있는 중화통일왕조 우방이었고[28] 이를 상실한다는 것은 조선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이후의 역사를 익히 아는 현대인들 입장에서야 에도 막부는 조선에 우호적이었고 청 역시 조선을 완전 병합할 생각도 없는데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속 편하게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그거야 2세기동안 그럴 일 없었던 게 다행이지 국가 지도층이라면 당연히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문제가 되는 건 이런 포지션 변화가 국내 정치에 가져올 파장이다. 사실 '명분'이나 '의리'라는 건 달리 말하자면 '질서'라고 바꿔 써도 무방하며, 중원의 왕조교체, 즉 질서의 재편은 당연히 국외에서만으로 끝나지 않고 국내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제정치가 다원화된 현대에도 주요 강대국에 대한 포지션 설정이 국내 정치에서의 입지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는데, 천조국 초1극의 국제정치 체제였던 당대에는 이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길게 설명할 것 없이 조선이란 나라가 어떤 시기에누구에 의해어떻게 출발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보면 명나라 버리고 편을 갈아탄다, 그것도 중화왕조를 버리고 북방제국으로 갈아타자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다.[29] 이제 다시 명청교체의 흐름을 조선이 나서서 인정한다면, 번국이 천조를 고를 수 있는데 신하는 군주를 고르지 못하란 법 있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될수밖에 없고,[30] 여기서 좀 더 올라가자면 40여년 전 일을 두고 "그래서 그 때 그냥 일본애들 말대로 명나라 치게 길 내어주고 편 바꿨어야 했다는 얘기냐?"라는 소리까지 나온다면 뭐 답이 없다. 즉 '나라가 망해도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소리는 달리 말하자면 '백날 잔머리 굴려봤자 어차피 명 주도의 질서에서 이탈하는 순간 이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고, 현대인들 보기에는 그깟 왕조교체가 뭐 대수라고 싶겠지만 그런 대변혁은 당연히 수백 수천의 피를 흩뿌리게 된다.[31] 그렇게 조선이 청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도 멸망을 면한 것은 청의 여러 한계와 함께 성리학이라는 동아시아 정치철학 끝판왕을 대체할 새로운 이론과 이에 기반한 신진 지배층이 형성되지 않았던 덕이고,[32] 이건 그냥 조선에게 악운이 따라줬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러한 척화론을 옹호하는 주장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크나큰 은혜를 입었던', 동시에 그와 별개로 명나라와 청나라 간 전쟁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던 당시 조선이 처한 지정학적ㆍ역사적 맥락을 좀 더 거시적인 시각으로 살펴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조일수 등은 즉 명청교체기에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명나라를 편드는게 나쁘다고 볼 수 없다는 시각이다.

척화론을 옹호하는 조일수 등에 대한 반박으로는 막연한 명의 보복 가능성보다는 눈앞으로 다가온 청의 침공이 훨씬 더 실재적인 위협이었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주장들이 설득력이 낮다라는 주장[33]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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