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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에 대한 기문(道峯書院記)●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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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谷先生全書卷之十三 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년(중종 31)~1584년(선조 17)

●己卯七年 先生 四十四歲(1579) 三月。作道峯書院記

●1579년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

■도봉서원에 대한 기문(道峯書院記)■

 

서원을 세우는 일은 본래 장수(藏修, 학업을 닦는 일)와 아울러 선현의 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고장의 향선생(鄕先生)중에 후학의 모범이 될 만한 이를 찾아 사우(祠宇)를 세우고 경모(敬慕)를 다하여 많은 선비들의 현인 되기를 희망(希望)하는 뜻을 흥기시키는 것이다.

 

정암(靜菴)선생 조 문정공(趙文正公)은 본관이 한양(漢陽)이다. 한양은 본래 양주(楊州)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도성으로 편입되었다. 양주읍 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도봉산(道峯山)이 있고 거기에 영국동(寧國洞)이 있는데, 옛날에 영국사(寧國寺)가 있다가 지금 절은 없어지고 동의 이름만 그대로 전해진다.

 

선생이 소시(少時)에 이 동중의 천석(泉石)을 무척 좋아하여 왕래 휴식하였고 조정(朝廷)에 있을 때도 공무가 끝나는 틈을 타 이곳을 찾아 노닐었으므로 지금에도 시골 노인 중에는 이러한 옛말을 하는 자가 있다.

 

1573년(선조 6) 겨울에 목사(牧使) 남언경(南彦經)이 이곳을 찾아보고 개연(慨然)히 선생의 유적을 회상하고는 시골의 선비들을 찾아서, 경모(敬慕)할 사우를 만들 것을 의논한 바, 중지(衆志)가 일치되었다. 바로 옛 절터에 사우를 건립하고 이어 서원(書院)을 시설하니 향인들이 분발하고 공인(工人)들이 노력하여 이듬해 여름에 사우와 서원이 완공되었다.

 

사우는 북쪽에 위치하여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보조 건물을 삼았고, 서원은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가운데에 강당을 설치하고 그 양쪽에는 두 협실(夾室)로 배치하고 전랑(前廊, 앞에 있는 행랑)은 시내를 내려다보고 낭사(廊舍) 옆에는 문이 있으니, 모두 지형을 따른 것이다.

 

목수의 역사(役事)만이 대강 완공되었을 뿐, 나머지 모든 일이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남 목사(南牧使)는 병으로 인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후임으로 온 목사 이제민(李齊閔)과 또 그 뒤를 이은 이정암(李廷馣)이 이 사업을 잘 계승 수행하였다. 선비에게 급여할 녹미와 서적을 보관할 서실과 제물을 차릴 주방 등이 차례로 형성되었다. 6년째 되는 1579년(선조 12) 봄에 비로소 일손을 떼게 되었다.

 

낙성식에 앞서 서원의 유생 안창(安昶)이 많은 선비들의 소청으로 나에게 기문을 청하여 왔다. 이(珥)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지금 문형(文衡)의 대가들이 한두 명이 아닌 터에 바닷가의 마르고 병든 늙은 이의 붓을 반드시 빌어 유림의 성대한 행사를 표장(表章)하려는 본의가 어디에 있을까. 혹 이(珥)가 선생의 끼치신 은택을 받아 이 학문의 조박(糟粕)이라도 대강 체득했다고 잘못 생각한 것이나 아닐까, 이(珥)는 너무 부끄러워 감히 감당하지 못할 일이다.

 

다만 영국(寧國)의 동학(洞壑)은 암석이 깨끗하고 물이 맑아 한 구역의 승지를 이루었고, 현인의 사우와 유교의 서원이 일시에 새로이 갖추어져 있어 많은 유생들이 모여 든 지 몇 해가 되었는데 한 번도 관람하지 못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신병이 있어 직접 찾아 갈 수 없고, 다만 이름만이라도 그 사이에 끼이게 되는 것을 지극한 영광으로 여기기 때문에 참람되고 망령됨을 잊고 한 마디 말을 덧붙이려 한다.

 

우리나라가 본래 문헌(文獻)의 나라로 일컬어지고 있기는 하나 고려〔王氏〕이전에는 소위 학문이라는 것이 미사(美辭)를 조작하고 여구(麗句)를 추구하였을 뿐, 성리(性理)에 관한 담론은 전연 들을 수 없다가 그 말엽에 와서 정포은(鄭圃隱)이 비로소 이학(理學, 성리학)의 시조로 일컬어지기는 하나 그 언론과 풍지(風旨)는 상세히 알 수 없었고, 후인들이 다만 한 몸으로 5백 년 동안의 퇴폐하고 파괴된 강상(綱常)을 떠받쳤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 본국에 들어와서는 문풍(文風)이 취규(聚奎)하던 운(運)을 이었으나 능히 위기(爲己)의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난 이는 역시 배출되지 않았다.

 

오직 우리 정암 선생만이 그 단서를 한훤당(寒喧堂) 문경공(文敬公)에서 얻어 독실한 행의가 더욱 힘차고 스스로의 체득이 한층 깊어, 몸가짐은 반드시 성인이 되고자 하였고 조정에 서서는 반드시 도를 행하고자 하였으니, 정성스럽게 힘쓴 바는 군심(君心)을 바로잡고 왕정(王政)을 개진하며 도의의 길을 열고 이욕의 근원을 막는 일로 선무(先務)를 삼았다.

 

이를 창조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선비의 기풍(氣風)이 크게 달라졌는데, 하늘이 송(宋, 조선 중종 시대를 중국 송나라에 비유하는 말)나라를 돕지 아니하여 음흉하고 간특한 일이 비록 당시에 조작되기는 하였지만, 그 유풍(流風) 여운(餘韻)이 5세도 못되어 양광(陽光)이 오늘에 와서 발하기 시작하였다. 후세의 선비된 자가, 어버이는 버릴 수 없음과 임금은 뒤로 미룰 수 없음과 의리는 버릴 수 없음과 이욕은 취할 수 없음과 제사에는 경건을 생각하고 상사(喪事)에 슬퍼할 줄 아는 것은 다 우리 선생의 가르침 때문이다. 진실로 그 공적을 논하고 그 은덕을 보답하려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 사실을 분명히 간파하고 이 아름다운 일을 시작한 것은 매우 높일 만한 일이다.

 

이(珥)는 이로 인하여 가만히 느끼는 바가 있다. 선생이 평소에 사람을 교훈한 일은 다만 위기(爲己)의 학문을 힘쓰는 데 있었을 뿐, 시문을 익혀 벼슬자리를 구하는 일에는 그저 범연하였다.

 

이 서원에 기거하는 후학이 진실로 세속의 풍습을 일체 제거하고 한결같이 거경(居敬)·궁리(窮理)·역행(力行)하는 것으로 심조(深造, 쉬지 않고 공부하는 것)하는 공정(功程)을 삼아 서로 관감(觀感)하고 서로 책선(責善)하여 거안 자심(居安資深:이치에 안착하고 수용함이 깊음)의 경지로 나아간다면 선생의 은혜를 능히 보답한다 이를 것이며, 묘정(廟庭)을 첨배(瞻拜)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며 선생의 도가 비록 전에는 비색하였으나 뒤에 와서 실현되는 셈이니, 어찌 사문(斯文)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만약 입지(立志)가 독실하지 못하고 구습(舊習)이 작용되어 문사(文辭)나 짓고 필묵이나 희롱하여 과시(科試)만을 희망하고, 주리면 먹고 배부르면 희유(嬉遊)하여 얼마 안 되는 시각이라 해서 아끼지 않는다면 선생을 저버린 바가 크다. 무슨 면목으로 묘문 안으로 떳떳이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되면 선생의 도는 이미 옛날에 궁하였고 또 지금에 와서도 폐기되는 셈이니, 어찌 애통스럽지 않으랴. 아! 후생은 이를 생각해야 한다.

 

서원(書院)의 규약은 제생(諸生)들이 부제학(副提學) 초당(草堂) 허공 엽(許公曄)에게 품의하여 정하였다.

 

이 공사에 사문(斯文)의 선후배가 다 함께 비용을 도왔지만 허공이 실로 이에 앞장섰고 그밖에 우참찬(右參贊) 백공 인걸(白公仁傑)과 이조참판(吏曹參判) 박공 소립(朴公素立)의 공 또한 딴 사람들보다 특이하였다.

 

1579년(선조 12) 덕수인(德水人)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쓰다.

■道峯書院記■

書院之建。本爲藏修。而兼擧崇德報功之典。故必求鄕先生可爲後學矜式者。立祠致敬。以興起多士希賢之志焉。靜菴先生趙文正公。寔漢山人。漢山。本楊州之域。而今作都城。楊州治南三十里。有山名曰道峯山。有洞曰寧國。舊有寧國寺。寺廢而洞仍其名。先生少日酷愛洞中泉石。往來棲息。其立朝也。亦乘公退。命駕遊焉。至今鄕老閒有能談者。萬曆癸酉之冬。牧使南侯彦經。往觀其洞。慨想遺躅。咨詢鄕士。議作瞻慕之所。衆志克合。乃卽寺址。營建祠宇。因設書院。鄕人聳身。百工勤力。越明年甲戌之夏。祠院告功。祠宇在北。輔以東西齋書。院在南中。設講堂。翼以兩夾室。前廊枕溪。廊側有門。因地形也。木役粗完。凡百未庀。而南侯以疾去官。繼牧是州者。李公齊閔。李侯廷馣。踵其緖不替。於是廩士之具。藏書之室。毖祀之廚。次第訖事。越六年己卯之春。始克斷手。其將落成也。院儒安昶以多士之請。求記于珥。珥竊念當今文衡大手。非止一二。而必欲借海濱枯槀病叟之筆。以狀儒林盛擧者。其意安在。無乃誤以珥爲受先生之恩。粗聞此學之糟粕歟。忸怩不敢當。第寧國之洞。巖淨水淸。爲一區勝境。而賢祠儒院。一時鼎新。章甫輻輳者有年數矣。惟珥未克一觀。自恨嬰疾。不能致身其側。顧以綴名其閒爲至榮。故忘其僭妄。贅以一說曰。我東素稱文獻之邦。而由王氏以前。所謂學問者。不過雕琢繡繪。以爭工鬪麗而已。性理之談。蔑蔑無聞。其季也。有鄭圃隱始號理學之祖。而言論風旨。未得其詳。後人但知以一身。撑拄五百年頹壞之綱常而已。本國文風。可踵聚奎之運。而能以爲己之學名世者。亦未曾輩出。惟我靜菴先生。發端于寒暄文敬公。而篤行益力。自得益深。持身必欲作聖。立朝必欲行道。其所惓惓者。以格君心陳王政。闢義路塞利源爲先務。倡道未幾。士風丕變。天不祚宋。陰慝雖作於當時。澤未五世。陽光方發於今日。後之爲士者。能知親不可遺。君不可後。義不可捨。利不可征。祭當思敬。喪當致哀者。皆我先生之敎也。苟論其功。欲報之德。寧有紀極乎。南侯灼見其然。首此美事。深可尙也已。珥因此竊有感焉。先生平日誨人者。只孜孜於爲己而已。其於習時文干祿位。固浼浼也。後學之居是院者。誠能捐去俗習。一意以居敬窮理力行。爲深造之功程。相觀而善。相責而改。日趨乎居安資深之域。則可謂能報先生之恩者矣。瞻拜廟庭。可無愧矣。若是則先生之道。雖否於前。實行於後。豈非斯文之大幸乎。如使立志不篤。舊習作祟。操觚弄墨。惟決科是希。飢食飽嬉。棄寸陰不惜。則其有負於先生大矣。何面目能入廟門乎。如此則先生之道。旣窮於昔。又廢於今矣。豈不痛哉。嗚呼。後生其亦克念哉。院中規令。則諸生相與稟定于副提學草堂許公曄。是役也。斯文先後輩咸助其費。而許公實主張焉。其餘若右參贊白公仁傑,吏曹參判朴公素立之功。亦表表異衆云。

 [숙시진췌 熟視殄瘁]

익을 숙熟 볼 시視 다할 진殄 병들 췌瘁

아프고 시달리는 것을 자세히 눈여겨보다

 

이 성어는 조선 중기의 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선생의 시문집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 권삼(卷三)에 간원이 시사를 진언한 상소 병인년(명종21 1566)(諫院陳時事疏 丙寅)에서 발췌하다

 

殿下深拱九重 泛聞民瘼而已 전하심공구중 범문민막이이

豈能實知斯民之倒懸 기능실지사민지도현

一至於此哉 據今民力 일지어차재 거금민력

則雖使只供常貢正賦 즉수사지공상공정부

而亦不可友保 이역불가우보

終必至於困極作亂而已 종필지어곤극작란이이

赤眉黃巾 豈是天性好逆者哉 적미황건 기시천성호역자재

此皆齊民之不堪塗炭者耳 차개제민지불감도탄자이

言之至此 良可痛哭 언지지차 량가통곡

及今不救 後悔何益 급금불구 후회하익

當今有司 只恤經用 당금유사 지휼경용

不顧民力 雖有陳弊之疏 불고민력 수유진폐지소

例以防啓爲常規 례이방계위상규

而大臣 又不聞長慮深憂 必欲活民 이대신 우불문장려심우 필욕활민

而熟視殄瘁 이숙시진췌

置之無可奈何之域 치지무가내하지역

莫敢出一策焉 막감출일책언

但曰 貢進不可闕而已 단왈 공진불가궐이이

 

전하께서는 깊은 구중궁궐에 계시면서 백성들의 아픔을 대충 들으셨으니

어찌 백성의 손발을 묶어 거꾸로 매단 듯 한 고통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을 사실대로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백성의 힘으로 의거한다면

비록 일반적으로 바치는 공물과 부역을 바르게 유지한다 해도

그러하나 또한 보전하기가 어려우니

결국에는 반드시 곤란이 극도에 다 달아 난리를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적미황건족 농민의 반란이 어찌 천성이 반역을 좋아하는 자들이겠습니까

이들도 모두 다 백성으로서 매우 고통스런 지경에 빠져 견뎌 내지 못한 자들입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정말로 가히 통곡할 일입니다

지금 바로 구제하지 않으면 뒷날 후회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당장 오늘날 일을 맡아보는 유사들은 다만 쓰일 경비만 걱정하고

백성의 힘은 돌아보지 않으니 비록 폐단을 펼쳐 이르는 상소가 있더라도

의례히 임금에게 알리지 못하게 막는 것으로써 일반적 규정으로 하고

대신도 또 길게 생각하고 깊이 우려하여 반드시 백성을 살리려고 하는 것은 듣지 아니하고

아프고 시달리는 것을 자세히 눈여겨보면서도

가히 어떻게 수 없는 처지에 내버려 두고

감히 계책도 하나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는

다만 말하기를 공물을 바치는 일은 빠뜨려서는 아니 된다고 할 뿐입니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 중기의 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선생이 병인 명종21 (1566)년 간원 때 시사를 진언한 상소문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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