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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계서원(勿溪書院)▣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1587~1667)선생
물계서원 충렬사 상락공 김방경 봉안문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물계서원 충렬사 상락공 김방경 봉안문
물계서원(勿溪書院) 충렬사 봉안문(忠烈祠 奉安文)1)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2) 花山峙靑。洛水流淸。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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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물계서당(勿溪書堂), 물계서원(勿溪書院), 우학정(友鶴亭)
물계서당(勿溪書堂) 경북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44-6 물계서당(勿溪書堂), 물계서원(勿溪書院)은 1727년(영조3년) 음력 12월 11일에 삼남지역에 어사를 파견하여 증축한 서원을 조사하고 한 인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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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계서원 충렬사 상락공 김방경 봉안문]
서아우계) 후생들을 도우소서. 1)물계서원(勿溪書院) 충렬사 봉안문(忠烈祠 奉安文) : 학사 김응조선생이 1661년(현종 2)에 지역 유림과 함께 경북 예천군 감천면에 물계서원을 건립하고 충렬사를 세워 고려의 영걸 상락공 김방경(金方慶, 1212~1300)선생의 혼백을 모시면서 지은 봉안문이다.
물계서원(勿溪書院)
물계서원 충렬사 상락공 김방경 봉안문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물계서원 충렬사 상락공 김방경 봉안문]
서아우계) 후생들을 도우소서. 1)물계서원(勿溪書院) 충렬사 봉안문(忠烈祠 奉安文) : 학사 김응조선생이 1661년(현종 2)에 지역 유림과 함께 경북 예천군 감천면에 물계서원을 건립하고 충렬사를 세워 고려의 영걸 상락공 김방경(金方慶, 1212~1300)선생의 혼백을 모시면서 지은 봉안문이다.
예천-물계서당(勿溪書堂), 물계서원(勿溪書院), 우학정(友鶴亭)
예천-물계서당(勿溪書堂), 물계서원(勿溪書院), 우학정(友鶴亭) (tistory.com)
물계서당(勿溪書堂)
경북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 186
(도로명)경북 예천군 감천면 관현1길 26-1
물계서당(勿溪書堂), 물계서원(勿溪書院)은
1727년(영조3년) 음력 12월 11일에 삼남지역에 어사를 파견하여 증축한 서원을 조사하고, 한 인물을 여러 개 첩설한 서원에 대해서 모두 훼철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을 비롯한 영남사림이 서원(書院)을 훼철하지 말 것을 주청하는 소를 올렸다. 그러나 안동인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선생을 주벽으로 모시던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의 물계서원(勿溪書院)은 1864년(고종1)의 1차 서원철폐령엔 포함되지 않았으나, 1868년(고종5)의 2차 서원철폐령에는 불행하게도 포함되어 흔적도 없이 역사속으로 사라지자 이를 애석하게 여기던 예천의 유림 권영달(權寧達)이 1917년 감천면 관현리에 건립한 우학정(友鶴亭)을 1962년에 누각식(樓閣式) 건물로 중건하여 물계서당(勿溪書堂)이라 편액(扁額)하고 명맥을 유지하여 왔으며, 1988년 순천인(順天人) 김철희(金喆熙)가 ‘물계서당기(勿溪書堂記)’를 지어 편액하였다. 물계서당이 있는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는 자연촌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당이 위치한 곳의 옛 이름은 ‘홍구동(紅九洞)’이다. 물계서원이 있었던 천향리는 천년기념물 제254호인 ‘석송령(石松靈)’이 있는 마을로 물계서당과 이웃하고 있으며 최근에 예천군에서 새롭게 정비하였다.
물계서원은 풍산인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1587~1667)선생이 75세이던 1661년(현종2)에 감천 물한촌(勿溪)에 서원을 세우고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선생의 혼백을 봉안하여 제사를 모셨다.
학사(鶴沙) 선생은 상락공의 충성과 의로움이야말로 세상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점과 물계가의 샘[泉] 주위 분위기도 세상의 잡념을 씻어내 뜻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여기고 사당을 세워 충렬사(忠烈祠)라 하고 봉안문(奉安文)을 지었다.
화산(花山)은 높고 푸르며 낙동강 물 맑게 흘러
지령(地靈) 길러 정기 모아 신선에서 하강하니
단우(壇宇)도 넓고 넓다.
세상에 드믄 재주 문무(文武) 겸비하니
때 마침 태어나사 몸 바쳐 보국(輔國)할제
곧은 기풍 충천(沖天)하고 엄숙강기(嚴肅綱紀) 떨쳤도다.
총마어사(驄馬御史) 나가실제 죽절(竹節)같이 곧은 충성
신명(神明)도 감동하고 만백(蠻貊)도 순종하다.
정의 세워 역적 토벌 괴수 잡아 목을 베니
인륜(人倫) 좋은 동국 땅에 어진 장상(將相) 위풍 밝혀
동해로 군려(軍旅) 떨쳐 파도가 조용하다.
생령(生靈)은 덕(德)을 입고 사직(社稷)은 혈기 찾아,
미관피발(微管被髮) 본 받으니 태산북두(泰山北斗) 높은 명성
우주를 덮은 공적 사후조두(死後俎豆) 마땅하다.
향방(鄕邦)이 추모하니 성사(盛事)에 운수(運數) 있어,
오백 년 지난 후에 부용산(芙蓉山) 기슭에
엄연한 정사(精舍)있어 맑은 사당 오가(五架)로다.
거북점[龜筮] 치고 좋은 날 선택하니 어진 선비 모여 든다.
공중에 도는 향연(香煙) 휘황하게 밝은 촛불
방불(彷佛)하신 그 영풍(英風) 천만세(千萬世) 두고 두고
나의 초려(蕉荔) 흠향(歆饗)하시고 후생들을 도우소서.
그 후 상락공(上洛公)을 주벽으로
현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학사의 고조 허백당(虛白堂) 김양진(金揚震),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를 추배하여 4위를 모셨으며
훼철되기 이전 물계서원의 경내 건물은 사당, 동재, 서재, 전사청, 신문, 정문, 홍살문 등이 있었다.
학사 김응조 선생 문집(鶴沙金應祖先生文集) (tistory.com)
■학사 김응조 선생 문집(鶴沙金應祖先生文集)
조선 후기의 문신 김응조『金應祖, 1587년(선조 20) ~1667년(현종 8)』 선생의 학사선생문집(鶴沙先生文集) 목판본(木板本) 全6冊中 4冊(권1, 권7~8, 권9~外集, 연보 부록 등)의 문집이다. 권두에 歲丙申秋八月上浣韓山後人李象靖序와, 외집 말미에 崇禎後三甲午(1774)...李世澤의 跋이 있다. 크기> 20 × 31.5cm이다.
김응조(金應祖)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아헌(啞軒)이다. 아버지는 산음현감 대현(大賢)이고.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정치를 피해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에 힘썼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그 뒤 병조정랑. 흥덕현감. 선산부사를 지냈다. 1637년(인조 15)에는 청나라 사신의 빈번한 출입으로 재정이 곤란해지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환곡의 이자 가운데 일부를 중앙관아에서 쓰게 하는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제안하여 이를 시행하게 했다.
효종 초에 사간. 동부승지. 좌부승지. 공조참의를 거쳐 1662년(현종 3)에는 대사간. 한성부우윤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고. 안동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천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학사집〉·〈사례문답 四禮問答〉·〈산중록 山中錄〉·〈변무록 辨誣錄〉이 있다.
문집상세해제 기사목록 (ugyo.net)
勿溪書院移建記
勿溪書院 移建에 대한 記文이다. 물계서원은 忠烈公 金楊震(1467∼1535)을 제향하기 위해 후손 鶴沙 金應祖(1587∼1667)의 발의로 세워졌으며 후에 鶴沙 자신도 竝享되었다. 서원의 舊基가 甘泉縣 서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고 터 또한 平穩하지 않아 영구히 보존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어 마침내 移建을 논의하였다. 李光斗가 풍광이 빼어난 현의 서쪽 2∼3리 부근 山麓에 터를 정하고 전 군수 李後榮이 山長이 되어, 1697년(숙종 23) 2월에 이건하게 된 사실을 적고 있다.
=오죽재(梧竹齋) 조의양(趙宜陽) 文集=
遠遊篇, 邵武道中, 友人黃子衡欲之上庠以詩留行, 奉酬丘子野表兄飮酒之句, 古意, 晨起對雨, 殘臘, 夜聞子規, 杜門, 宿山寺, 晨登雲際寺, 池上示同遊者, 宿篔簹鋪, 齋居閒磬, 又聞琴作, 讀道書作(六首), 秋夜懷子厚, 川上見月歸示同行者, 冬日(二首), 懷友, 寄山中舊知, 試院雜詩, 八月七日夜月, 夢山中故人, 南安道中, 九日, 再至作, 苧溪道中, 夜雨, 寄題金元鼎同年長泰面山亭, 梅花兩絶, 宿傳舍見月, 涉澗水作, 祠事齋居聽雨呈劉子晉, 之德化宿劇頭鋪夜聞杜宇, 次旬父韻, 次祝澤之表兄韻, 小盈道中, 對月思故山野景, 梵天寺觀雨, 秋暑, 和李伯玉蘇東坡梅花韻, 和劉抱一, 再和, 梅花開盡未及吟賞仰貽同好, 困學, 復齋, 克己, 春日, 示西林院惟可師, 感事, 次子有聞捷韻, 偶題, 次張彦輔賞梅韻, 家山堂晩照效輞川體, 次劉丈秀野閑居十五詠(只謄八首), 秀野劉丈寄示南昌諸詩和此兩篇, 次秀野韻, 留秀野劉丈, 又和秀野, 次秀野極目亭韻, 次亭字詩呈秀野兼簡王宰, 次秀野滄波觀至赤石觀刈早稻, 次題臥雲巖, 和秀野見留之作, 次韻寄題芙蕖館, 葺居, 次張敬夫登定王臺韻, 馬上口占次敬夫, 登山有作次敬夫, 後洞山口晩賦, 霜月次林擇之, 方廣寺睡覺次敬夫, 石廩峰次敬夫, 至上封用擇之韻, 贈上封諸老, 醉下祝融峯作, 宿梅溪胡氏客館觀壁上題詩自警, 次擇之韻聊記秦事, 雪梅二闋奉懷敬夫, 次韻擇之見路傍亂草有感, 野人家, 西山嶽麓莫能上下聊賦, 進賢道中, 野望, 次擇之宿進賢客舍韻, 安仁曉行, 有懷南軒呈伯崇, 九日登天湖以菊花須揷滿頭歸分韻得歸, 和人游西巖, 題周氏雪亭, 送林擇之還鄕赴選, 擇之誦所賦擬呂子進元宵韻, 擇之寄示深鄕唱和鳥石南湖佳句輒次, 送林熙之, 次淸湍亭韻, 次圭甫將軍巖韻, 次彦集經營別墅之作, 奉酬圭父茉莉之作, 次圭父觀魚韻, 再題吳公濟風泉亭, 寄公濟兼簡李伯諫, 公濟和詩見悶耽書勉以敎外之樂以詩問, 伯諫和詩(邢色규解方漫漫, 是中正氣愈駸駸)此乃從心之妙云, 百丈山六詠, 九月六日早發潭溪夜登雲谷翌朝賦此, 雲谷二十六詠, 送許順之南歸, 宿雲際寺別許順之, 彦集奉檄歸省, 寄題宜春使君張定叟隱齋, 日用自警示平父, 唐石雪中, 宿休菴用德功壁閒韻贈陳道人, 壬子三月二十七日聞迅雷有感, 崇安客舍聞子規聲得三絶句呈平父, 寄雲谷瑞泉庵主, 屢欲賦廬阜而不就六月中臥龍庵偶成詩, 讀李賓老玉澗詩偶成, 九日陪, 次卜掌書落成白鹿, 白鹿講會次卜掌韻, 和張彦輔初到南康之句, 和張彦輔落星寺之作, 次張彦輔臥龍之作, 和張雪後棲賢之作, 次沈侍郞遊楞迦李氏山房韻, 閏十一月中坐彭蠡門喚船與諸人共載汎湖至堤首回棹入西灣還分韻賦詩, 和林擇之黃雲之句兼簡同遊, 和彭蠡月夜汎舟落星湖, 讀子厚詩用其卒章晨起之韻, 登蘆峯, 五禽言和王仲衡尙書, 遊密庵分韻得淸字, 次寄萬頃寒光奉呈休齋先生, 用林擇之韻別陳休齋, 和林擇之鳳凰山韻, 承侍郞使君示所與少傳西湖佳句, 伏蒙侍郞示及致政少傳送行長句, 伏讀致政少傳相公送趙成都韻次餞, 次劉正之芙蓉韻, 淳熙甲辰中春精舍閒居作武夷櫂歌, 劉子澄遠寄羊裘有懷仁輔義語以謝兩絶, 答袁機仲論啓蒙, 懷潭溪舊居, 聞鼀 , 延平水南天慶觀夜作, 墨梅, 戱作楊廷秀問訊離騷之作,趁韻, 次晦叔寄弟韻, 蘭, 水口行舟, 易, 客來, 秋日, 放船. 樂府 水調歌, 次袁機仲韻. |
跋 |
趙宜陽이 朱子 詩에 次韻을 시작한 것은 1792년 11월 27일이고, 다음 해인 1793년 1월 16일에 완성되었다. 조의양은 주자 시 차운의 의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우레 소리를 듣고 시를 짓는 경우, 주자는 천하를 담당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었으므로 군왕의 웅대한 결단을 읊었고, 자신은 산림에 뜻을 두었으므로 時運의 회복을 읊었고 따라서 대상은 같아도 소감은 다르다는 것이다. 주자가 죽은지 5백여년이 지나, 당시는 육왕학이 천하를 뒤덮고 西學도 점차 밀려오고 있어 뜻있는 선비들은 근심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海東의 주자는 바로 退溪이며, 퇴계를 앙모하는 심정으로 주자 시에 차운하였다고 하였다. 1793년에 趙宜陽이 썼다. |
詩 |
輓訥隱李先生, 輓懶拙齋李先生, 輓權仙溪(墉), 輓鄭琢之(璞), 輓李參奉(重光), 輓李仲華(重實), 輓李若天(象辰), 輓金渴睡軒(㙔), 輓權繩軒(濤), 輓金德翁(象錬), 輓李晩花軒(世師), 輓柳叔文(道源), 輓李君輔(尙慶), 輓南忍窩(大萬), 輓李子明(級), 輓松泉權丈(灝), 輓丁成之(志宬), 輓李四一(龜元), 輓蔡進士(湜), 輓承宣姪(錫晦), 輓柳昌甫(明休), 輓全伊堂(得濂), 輓柳德逸(日休), 輓李僉樞(栖), 輓李孟仁(孝慶), 輓柳汝遠(弘源), 哭柳壻(萬休), 輓權上舍(馨復), 輓柳漢卿(宗文), 哀從孫上舍(縣귀), 輓裵季珍(집), 聞柳女入地寄哀(1806), 哀君美姪(題此輓數朔後公歿), 輓權君(昌植). |
詩 |
擬杜草堂長篇, 登高丘望遠海, 遠別離, 效李白公無渡河, 效古贈丁海左(範祖), 淸凉山, 題申天若(命欽)鶴巢洞茅堂(其先祖按廉使古里), 過金籠巖(澍)朴松堂(英)古里有感, 過義狗塚, 砥柱碑下問香娘所自沈淵, 過金烏山憶冶隱吉先生, 陜川大野城過竹竹廟, 登涵碧樓, 登矗石樓, 次申靑泉(維翰)韻, 回至矗石樓次李仲諴(詠義巖韻), 南江, 楡谷待李仲諴不至, 次朴丈(師赫)紫皐堂八詠, 贈李實甫(英徵), 龍華山下道興津爲述寒岡旅軒忘憂堂諸先生泛舟故事, 望伽倻山憶崔孤雲, 紅流洞次崔孤雲韻, 讀太極西銘有感, 鄭藥圃先生(琢)神道碑, 淸心臺(尹別洞先生逍遙之地), 中夜見窓月有感, 登洪杜谷玉溜亭, 文山詞, 伏賡御題樊巖詩稿韻呈相公案下, 次樊巖蔡相公(濟恭)金剛山歇惺樓韻, 靑松歸路訪瓢隱遺墟登仙遊亭(1754), 夢遊島潭(1762), 夢遊泰山, 兒時夢遊洞庭湖微月掛斑竹枝四邊商歌互答覺來窓虛蟾壁畵隱如向來景至今老壯爽氣沁肺(三首), 南征, 黃山碑殿, 渡錦江, 方丈山, 蟠桃館(南原), 呈丁海左, 上俗離山雲莊臺, 贈萬頃姪(錫晦), 湖南歸路有感, 知禮縣龍洲先生淸德碑(縣有李五峯芳草亭先生遊行之所), 吉先生採薇亭, 東都懷古(1771), 東都與南上舍鵬路李上舍士寬同遊, 送冬至使赴北京, 宿開元寺, 東武吟, 詠懷, 次立春韻贈菊潭, 過果川, 過新溪驛, 過水原憶權公(廷吉), 呈李于鱗(甲龍, 1783), 次朴參判大人(良佐)韻, 過弄淸臺有感, 天柱峯, 草澗, 贈金抱爈(翼景), 覽德臺, 鳳山, 和權江左翁(萬)淸凉山月歌, 栢潭, 三山亭, 廬江養浩樓次朱元兆詩, 贈金道彦(宗德)直夫(宗敬), 懷柳士極(규), 七月旣望次讀書洞落成韻呈八友兄, 呈李丈(命天)蔚玧匪所, 呈丁海左, 賦伐木三章贈南上舍活山老人(居慶州), 贈李琶西(集斗), 戊申元朝感吟(1788), 廬江會校講錄刊補歸次龜溪韻奉寄李學甫柳叔遠柳養直(浩源)李命吉(弘天), 奉贈李錦淵翁(植春), 奉贈尹雪園, 與李臥雪(尙慶)聯句, 西湖(時湖樓漂後未及重建), 洪武皇帝節義旗, 臨淸閣贈山甫君輔琢之和甫(1769), 贈外孫柳炳文, 喜外孫柳徽文講濂洛風雅, 雨中見(집)姪來, 鴻峴遇金潤秋借參同契二冊, 贈城谷子, 伏次家大人壽陞正憲追榮焚黃時賀韻, 次山陽焚黃慶席韻, 追次棣華亭十二詠韻, 謹次八友兄書室雜詠韻, 夜坐獨吟, 伏呈八友兄, 仍足百韻詩呈李艮翁夢瑞(獻慶), 邂逅趙君善問扶桑事不覺日域森然在目, 文忠公墓豎碣日歸路遇雨, 次柳柳州(灃)寫麗史彙纂五年字韻, 閱八友兄遺稿抆淚而題, 呈李琶西(集斗), 慕古逸人, 咏懷, 次孟浩然除夕韻, 次李君輔步蘇集隸臺詩韻, 花山道中與權而輯(睦)賦州字, 醴泉東岳寺, 龍門寺送權恭甫, 贈龍門寺僧, 閒居, 山村春日, 追和黃聖徵(炳漢)南遊韻, 寄題金公望(象九)新居, 贈申執玉(履相), 懷李上舍龍舒沈上舍鳳錫安上舍有常, 次李重維大人重牢宴賀韻, 孫兟兟蕃而盛德人食報膺餘慶. |
詩(退溪先生詩次韻) |
過吉先生閭, 矗石樓(用龍蛇事), 臨風樓(七夕), 感春, 雨留新蕃縣, 義州雜詠十二絶, 聚勝亭韻奉別聖節使洪公春卿, 讀東史, 南樓壁上六言四韻, 九月七日午憩臨津亭, 泰安曉行憶溫溪先生, 宿淸風寒碧樓, 湖上園亭效康節體, 錦江亭, 晩步次明陽正賢孫韻, 夜起有感, 晨至溪莊用東坡新城途中韻, 和西林院詩韻, 七臺三曲詩, 閒讀武夷志次九曲櫂歌十首, 古意, 白雲洞書院示諸生韻, 退溪, 寒樓, 和陶集移居韻(二首), 和陶集飮酒(二十首), 東齋感事(十絶), 林居十五詠, 陶山雜詠十八絶, 二十六絶(逐題又有四言詩一章), 愛閒, 養靜, 焚香, 次金芝山(八元)見寄韻, 贈李龜巖(楨), 秋日獨至陶舍得趙月川(穆)韻遣懷, 韓上舍永叔(江墅十景), 郭侯景靜(求題山水畵幅(五絶), 端居, 竹嶺道中遇雨, 洛東觀水樓, 暎湖樓, 送李義州(潤慶)韻, 全義縣山谷行遇飢民, 自春川向楊口皆崖路傍江峽束眞奇景, 水仁驛, 湖上園亭次山谷韻, 竹山途中, 三嘉雙明軒, 題山水圖, 七月望日狎鷗亭卽事, 醉題狎鷗亭, 鳥嶺道中, 龍宮浮翠樓, 偶成六言, 周書武陵贈陸淸山人詩卷後, 次男(應龍)見贈韻, 三智灘, 都土潭, 乃邁潭, 花灘, 龜潭, 長會灘, 次金季珍(彦琚)見寄韻, 景濂亭, 順興途中, 郡齋早起, 雙淸堂月夜, 次東軒韻求和金季珍, 聚遠樓, 春寒, 閒居次月川栢潭芝山酬唱韻, 溪居早春, 次山谷韻贈郭右曺, 自燕子院向所峴馬上卽事, 濯淸亭示主人, 書季任倦遊錄後, 次安陰舊題韻, 次尙州見和韻, 霞皐小亭名以漱石山奇水麗, 二十三日, 復次商山見和韻, 次金季珍遊邊山諸作韻, 實相寺南溪, 直淵瀑布, 摩天臺, 用東坡韻酬道中遇雪見寄詩, 次韻答李公幹(賀淵其號), 遊枕流亭(在烏川下洛水上), 三月四日聾巖先生臨溪堂, 寄趙松岡, 錦溪詠竹, 贈別閔景說參議赴燕京, 次友人韻, 次金厚之爲金季珍漆溪十詠韻, 偶題, 次松岡見贈韻, 又次, 韓士炯(胤明)往天磨山讀書留一帖求和偶書所感寄贈, 宋秋派(麒壽)雪中見訪云夢中得句相思成鬱結幽恨寄瑤琴覺而足四韻示之次韻, 宋企村(純)俛仰亭, 次錦溪新寧韻, 贈錦溪論圖書, 奉別南時甫, 晦日夜吟次金應順(命元)韻, 寄島潭李而盛, 九月二十九日溪堂卽事, 山中偶書, 枕流亭, 次韻寄題松江亭, 竹溪書院, 白鹿樂而康, 臨皐書院(永川), 藍溪書院(咸陽), 伊山書院(榮川), 總論書院, 偶成(五絶只謄三絶), 十八日風雨, 寄題淸遠亭, 月瀾臺, 考槃臺, 凝思臺, 郞咏臺, 凌雲臺, 禦風臺, 再訪陶山梅(十絶只謄五絶). |
書 |
與李尙之 山陰에서 文會가 있었음을 말하고, 그 자리에 朱子書 1질을 가지고 가서 講討하였음을 말하였다. 또한 그 자리에는 權季善과 李斐彦이 참석하였는데 그들의 筆力이 대단하여 江左의 사림이 쓸쓸하지 않음을 알았다고 하였다. 上大人 趙宜陽이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아버지 趙元益에게 보낸 편지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이 표현되어 있다. 上鈍巖伯兄(1772) 伯氏인 葵陽에게 보낸 편지이다. 가선대부가 더해졌고 이에 따라 동지중추부사의 교지를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배경에는 선조인 병조판서공의 음덕이 컸음을 말하면서,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것인지를 말하였다. 다만 편지에 표기된 간지를 계산해 보면, 행장에 표기되어 있는 연도와 차이가 있어 간지 표기에 착오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上八友仲兄(1773) 숙질간에 함께 과거에 급제한 것을 함께 축하하는 편지이다. 1773년(영조 49)에 仲兄인 八友公 趙普陽과 伯兄인 趙葵陽의 아들 錫晦가 동시에 문과 급제한 사실을 말한다. 趙宜陽은 늙은 부모님께 즐거움을 드린 것에 대해 기뻐하면서, 압구정 뒤에 있는 선조 병판공의 묘소에 성묘라도 하자고 제의하고 있다. 上八友仲兄(1782) 오래 동안 형제가 만나지 못하였음을 말하였다. 다친 다리는 이제 아프지는 않고 조금씩 걸으면서 길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집안 친족들의 궁핍을 걱정하면서 도움을 주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다. 與李琶西 李集斗에게 보낸 편지이다. 詩를 받고 평론을 부탁하는 편지에 대해 답장을 하였다. 90을 바라본다고 하였으므로, 이 편지를 쓴 시기는 80대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答金(1803) 金氏성을 가진 사람에게 보냈다.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이 늙을수록 더함을 말하였다. 從孫이 알려 주어서 상대방의 정황을 알고 있으며, 직접 만나 의문점을 질의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與柳壻(萬休, 1766) 맏사위인 柳萬休에게 쓴 편지이다. 임금님의 병환이 회복되어 조정에서 3월중에 別試를 베푼다고 하므로 형님의 서울행이 헛걸음이 되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사위 집안의 형제들도 서울로 갈 것으로 전망하였다. 與柳壻(1770) 외손자와 산모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돌림병에 걸려 있으므로 잘 조리한 후에 친정으로 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자신의 건강은 이제 위험한 고비는 넘겼음을 화살을 피한 새에 비유하였다. 與外孫柳炳文 외손자인 柳炳文에게 쓴 편지이다. 딸과 외손자 형제의 건강을 걱정하면서, 자신은 늙었지만 건강은 여전함을 말하였다. 그리고 외손자 형제에게 공부에 독실하게 매달릴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선비의 맛난 음식은 책 속에 있음을 말하면서, 독서에 있어서 한창 나이는 70세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與外孫炳文, 徽文(1792) 외손자인 柳炳文 柳徽文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들이 仲父의 초상을 치른 일을 위로하고 학업을 독려하였다. 독서에 있어서 {大學}을 먼저하고, {中庸}, {綱目}, {左傳} 등을 읽을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널리 읽되 또한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又(1796) 외손자 柳炳文 柳徽文에게 보낸 편지이다. 趙宜陽의 草谷 동생의 초상이 있어 문상하였음을 말하였다. 외손자들에게는 東巖선생의 죽음으로 인하여 학업에 지장이 있을 것을 걱정하고 師門의 촉망을 생각하여 놀지 말고 더욱 학업에 매진할 것을 주문하였다. 溫溪李先生請諡疏 退溪 李滉의 넷째 형인 李瀣의 諡號를 청하는 상소이다. 李瀣의 죽음은 을사사화와 연관되어 있으며, 당시 권신들이 사림을 원수처럼 여겨 사화를 일으키자 李瀣는 사헌부의 장관으로서 그들의 入相을 극력 저지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귀양을 가게 되었고 급기야 妖民 李洪男과 崔賀孫의 무고에 의하여 죽음에 이르렀음을 말하였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이미 억울함을 씻어주고 직첩을 회복하여 주었으며, 숙종 임금은 증직을 하였고, 영종 임금 때에는 경연에서 諡號를 주는 문제는 논의하였으나 다른 일 때문에 중단되었음을 말하였다. 또 증직이 正卿에 이르게 되면 응당 諡號를 내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 기사는 왕조실록 정조7년 11월 17일조에 실려 있으며, 후에 李瀣에게는 貞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山谷南平草堂記 조카인 晏이 舊宅을 옮겨 草堂을 지은 것에 대한 記文이다. 흙칠을 하고, 온돌을 놓고, 창문을 만들어 방1간 당1칸의 집을 이루었으며, 방의 북쪽에는 2층으로 된 서가를 놓았다고 했다. 특히 이 초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계해년에 趙宜陽이 실수로 불을 냈던 적이 있는 곳인데, 이상하게 그 다음 해 가을에 伯氏가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그후 3년만에 다시 仲氏가 생진과에 합격하는 등 길사가 연이었던 곳이므로 앞으로 노력하면 크게 흥하리라고 적었다. 贈安斯文宜庵序 宜庵 安德文(1714∼1779)에게 써준 서문이다. 趙宜陽과 안덕문이 꼭같이 晦齋 退溪 南冥 삼현을 흠모하였으나 그들의 학문을 놓고 논평함이 서로 달랐던 모양이다. 조의양은 이에 "노선생(퇴계)은 玉山(회재)을 스승으로 하였고, 德山(남명)을 학우로 하였으니, 옛사람의 학문이 깊고 얕음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寒岡 鄭선생의 詩에 "退陶의 正脈을 영원토록 사모하고, 山海의 고풍을 특별히 흠모한다." 라고 한 구절이 있으니, 여기서 이미 正案이 정해졌다." 라고 하였다. 書君子塘記後 艮齋 李德弘(1541∼1596)의 君子塘에 대한 記文이다. 이덕홍은 퇴계의 高足門人으로 12년간 퇴계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퇴계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서적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살던 迂川의 남쪽에 못을 만들어 蓮을 심고 이름을 君子塘이라 지었다. 흔히 말하기를, 이것은 周濂溪가 蓮을 사랑하였다는 설에서 취하였다고 하나, 실은 陶山書堂에 있는 淨友塘의 의미를 흠모하였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書宋處士傳後 형제의 우애가 지극하였던 宋樀, 宋構 형제에 관한 기록이다. 동생인 構가 살인을 하여 죄를 받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樀은 "동생이 죽고 형이 살면 살아도 기쁘지 아니하고, 형이 죽고 동생이 살면 죽어도 또한 즐겁다." 하여, 대신 죽음을 택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조의양은 춘추시대의 汲壽와 후한의 褒融에 비견하여 칭송하였다. 書忍齋遺稿後 忍齋公의 유고에 대한 後書이다. 그의 齋號에 관해서 젊었을 때는 勤齋, 장성하여서는 愚齋, 만년에 이르러서는 忍齋라고 하였다. 공자의 발분망식한 뜻과 寧武子의 어리석음과 仲弓의 과묵함을 겸하였으니, 그의 학문과 사람됨을 알 수 있겠다고 적었다. 題棣華亭十二詠後 進士 李公의 정자인 체華亭에서 형제의 우애를 읊은 12수를 짓고 그 후서를 쓴 것이다. 정자는 豊岳의 서쪽 낙동강의 북쪽에 있는 작은 바위 위에 위치하였다고 하였다. 이 곳은 외딴 산속이 아니고 사람들로 시끄러운 인가에 가까운 곳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 이름도 형제의 우애를 의미하는 棣華라고 하였다. 題丁海左柴桑孤山圖後 海左 丁範祖가 사람을 시켜서 그린 柴桑孤山眞境에 대한 後題이다. 柴桑山은 중국 江西省 九江縣에 있는 산으로 晉나라때 陶潛이 여기에 살았고, 孤山은 강원도 法泉의 명승지로서 愚潭 丁時翰이 살았으며, 두 사람의 出處가 비슷하였다고 하였다. 題劉景圭南北槎行錄後 劉景圭는 육로로 介八烏蠻館을 배행하여 중국을 여행하면서 萬壽山 太液池와 같은 천하의 장관을 구경하였고, 또 通信使를 따라서 일본으로 들어가 對馬島와 大坂城을 지나면서 후지산을 보았다. 유경규는 이 여행에서 견문한 것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에 대한 後題이다. 題養閒錄後 鴻巖 權新之가 지은 養閒錄에 대한 後題이다. 권신지는 아직 나이가 많지는 않지만, 공명에의 꿈을 끊고 茅屋을 짓고 한가로움을 지키려는 계책을 세웠다. 이에 趙宜陽이 그 양한록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글을 지었다. 艮翁說 趙宜陽의 친구 李夢瑞가 집을 짓고 주역의 艮괘를 自號로 한데 대해, 그 의미를 설명한 글이다. 艮은 그친다는 뜻이다. 그쳐야 할 때에 그치고 움직여야 할 때에 움직여야 하니, 모름지기 時라는 한 글자를 올바로 한다면 艮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潛室銘(小序) 조카 君美에게 潛室이라는 호를 지어 주면서 지은 銘이다. 이 호는 朱子의 高足인 陳埴의 호에서 취한 것이며, 그 의미는 {시전}의 "潛雖伏矣"와 "相在爾室"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題讀書室學令 仲氏인 八友公이 자식 교육을 위해 지은 독서실을 위하여 지은 學令이다. 事親과 事君의 도리와 공부하는 절차와 단계는 주자의 白鹿洞規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여기에 빠진 부분을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三烈士書院告由文 병자호란에서 공을 세운 세 열사를 모신 사당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은 告由文이다. 祭權仙溪(墉)文 仙溪 權墉에 대한 제문이다. 祭八友仲兄文 仲氏인 八友公에 대한 제문이다. 팔우공은 문장이 뛰어났으며, 특히 讀洞에 위치한 別業은 많은 문헌이 갖추어져 있어 원근의 학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고 하였다. 祭權子和(燮)文 친우 權燮에 대한 제문이다. 화사하지만 들뜨지 않은 것이 그의 모습이고, 질박하면서도 누추하지 않으며 진실하면서도 소원하지 않는 것이 그의 성정과 행실이라 하였다. 또한 온화하면서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농담을 해도 망령스럽지 않은 것이 그의 즐거운 생활 모습이며, 높으면서도 날카롭지 않고 넉넉하여 멀리 가는 것이 그의 음성이라고 하였다. 哭上舍弟夢陽文 동생인 夢陽에 대한 제문이다. 동생에 대하여, 經書를 음식 삼고 富貴를 뜬구름처럼 여겼으며 물 한 바가지로 즐거웠고 빈한한 생활도 편안히 여겼다고 적었다. 祭亡室贈貞夫人永陽李氏文 부인 永川李氏에 대한 제문이다. 永川李氏는 처사 猶龍의 여식으로 천성이 孝養하여, 시할머니를 효성으로 섬겼으며 음식을 입에 맞게 하고 옷가지를 언제나 깨끗이 입혀서 옛날의 賢婦보다 못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祭柳壻萬休文 사위 柳萬休에 대한 제문이다. 柳萬休가 죽자 친분이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모두 탄식하였고 했다. 哭姪勗文 조카 勗에 대한 제문이다 . 勗은 仲氏인 八友公의 아들로서, 박학하고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분수에 자족하는 인품이었으나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하였다고 적었다. 哭姪집文 조카 집에 대한 제문이다. 조카에 대하여 재주와 덕, 그리고 성품과 행실이 옛날의 군자들에 비견하여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고 하였다. 祭權君命新文 權命新에 대한 제문이다. 권명신은 성품이 화려함을 싫어하였고, 韓愈와 杜甫의 시를 쓰고 시풍은 蘇軾과 黃庭堅을 따랐으며, 만년에는 程朱學에 침참하여 著者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다. 伯兄鈍巖公行狀 伯氏인 趙葵陽의 행장이다. 공의 휘는 葵陽이고 자는 向卿이며 본관은 漢陽이다. 父의 휘는 元益이고 母는 禮安李氏이다. 1706년(숙종 32)에 豊山에서 태어나서 1776년(영조 52)에 죽었으니 향년 71세이다. 3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73년(영조 49)에 仲弟 普陽과 仲子 錫晦가 함께 대과에 급제하였다. 遺稿 3冊이 본가에 家藏되어 있다. 공은 태어나서 풍골이 늠름하고 준수하여 조부가 언제나 우리 집안을 길이 보전할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오직 일을 이루는 것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鈍巖이라고 自號하였다. 공은 일찍이 新塘처사 李成全에게 수학였으니, 이성전은 바로 孤山 李惟樟의 高足이다. 知事 洪晟, 判書 洪重孝, 萬頃 李孟休, 烟客 許泌, 石北 申光洙, 台世 姜晃과 교유하였다. [始電義], [洪範賦], [尙友策], [山村野店] 등의 저술이 있다고 하였다. 著者는 柳子厚가 지은 [先友記]에 따라, 葵陽이 가깝게 교유하였던 인물로는 九思 金樂行, 三山 柳正源, 下枝 李象辰, 參奉 李達中 學中, 正言 金埅, 持平 金㙔, 參奉 李重光, 進士 權濤, 參奉 柳聖曾, 永春 李守貞, 大憲 李世澤, 連山 權正宅, 進士 成惠寅, 芝翁 金鼎漢, 龜山 任必大, 參奉 南龍萬, 參奉 金紘, 進士 宋履錫, 斯文 鄭翰弼, 進士 金柱雲, 斯文 趙性道, 進士 權潤, 進士 孫思翼, 錦翁 李植春, 進士 黃羽漢, 陰城 李世述, 斯文 金柱國 등을 들었다. 配는 豊山 金氏이다. 仲兄八友軒公行狀 仲氏인 趙普陽의 행장이다. 공의 성은 趙氏이고, 휘는 普陽이고 자는 仁卿이며 본관은 漢陽이다. 父는 元益이고 母는 禮安李氏로 1709년(숙종 35)에 豊山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鳴漢은 金鶴沙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였고, 조부 鳳徵은 李葛庵의 문하에서 從遊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커서는 부친의 명으로 小隱 李景翼에게 수학하였는데, 이경익은 孤山 李惟樟의 문인이다. 공은 또한 李懶拙齋와 權淸臺에게 質疑하였다. 1747년(영조 23)에 생진과에 모두 급제하고 1773년(영조 49)에 조카 錫晦와 함께 문과에 급제하였다. 바로 典籍에 임명되었고, 뒤에 監察에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禮曺佐郞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은 參判의 세도와 월권으로 인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1781년(정조 5)에 조카 錫晦가 어전에 입시하였는데, 임금의 질문이 집안에 이르렀을 때 측근에 있던 신하가 삼촌 조보양이 예조좌랑으로서 참판의 세도를 증오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고 하자, 임금은 바로 典籍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조보양이 숙배하기 위해 도성에 이르렀을 때 이미 병조좌랑으로 옮겨져 있었다. 공은 6일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788년(정조 12)에 첨지중추부사로서 五衛將이 제수되었으나, 이 해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공이 교유하였던 인물로는 李大山 형제와 朴南野, 李下枝 등이 있었고 특히 大山翁을 존경하였다. 通德郞安公(聖復)行狀 安聖復의 행장이다. 공은 휘는 聖復이고, 자는 克甫이며, 본관은 興州이다. 父는 夏圭이고 母는 宜寧余氏이다. 1707년(숙종 33)에 태어나서 1780년(정조 4)에 죽었으니 향년 74세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이웃에 칭찬이 자자하였다. 配는 昌原黃氏로 龜巖 孝恭의 후손이다. 祖妣貞夫人豊山柳氏遺事 조모 豊山柳氏의 遺事이다. 정부인 柳氏의 본관은 豊山이다. 류씨의 고조부는 謙庵 雲龍이다. 父는 世馨이고 母는 安東權氏로 1678년(숙종 4)에 태어났다. 정부인은 선정의 閨範을 갖추었고, 우리 집안 吉祥의 기운은 류씨에서 그 싹이 텄다고 하였다. 1751년(영조 27)에 사망하였다. 류씨는 조부 鳳徵이 세 번째 결혼한 부인이다. 조부가 문과에 급제하여 都事를 지냈고, 예조참판이 추증됨으로 인하여 류씨에게 貞夫人이 추증되었다. 先妣貞夫人宣城李氏遺事 저자의 어머니 宣城李氏의 遺事이다. 이씨의 父는 基晩이고 母는 東萊鄭氏이다. 1623년(인조 1)에 태어나서 1677년(숙종 3)에 죽었다. 시부모를 예의로써 섬겼고, 집안 사람을 화목으로 대했으며, 비복들을 은혜와 위엄으로 부렸고, 자녀 교육에 절도가 있었다. 三兄處士公行略 셋째 형 得陽의 행적을 간략히 기록한 것이다. 득양은 자가 來卿으로 1715년(숙종 40)에 태어나 1748년(영조 24)에 이른 나이로 죽었다. 配는 咸陽朴氏이다. 從孫顯洙行略 從孫 趙顯洙의 행적을 간략히 기록한 것이다. 현수의 자는 集汝이다. 父는 著者의 伯氏인 葵陽의 아들 錫晦이고, 母는 仁川蔡氏이다. 1752년(영조 28)에 태어나서 1781년(정조 5)에 죽었다. 학문에 뜻을 두어 경전 뿐만 아니라 史書와 農書까지도 손수 베껴서 다니면서 외웠지만, 그가 크게 드러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하였다. 權君命新行錄 權命新의 行錄이다. 권명신은 고려의 태사 幸의 후예로서, 父는 璉이고 母는 宣城金氏이다.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저자는 그의 기이함을 보고 장래 크게 될 것으로 기약하였으며, 명신의 종숙 君珍이 데리고 와서 저자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누차에 걸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고, 만년에는 책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심경}, {근사록} 등을 손수 베끼고 고금 성현들의 잠언을 적어 좌우에 붙이고 암송하였다. 특히 퇴계의 {성학십도}에 대해서, 천하의 도리가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고 심취하였다고 하였다. 1799년(정조 23)에 48세의 나이로 죽었다. 配는 一善 金氏이다. 淑夫人永川李氏墓誌銘(幷序) 저자의 첫째부인 永川 李氏의 墓誌銘이다. 1715년(숙종 41)에 태어나서 1756년(영조 32)에 죽었으니 향년은 42세였다. 李氏의 父는 猶龍이고 母는 聞韶 金氏이다. 李猶龍은 문장으로 당대의 이름을 떨쳤으나 3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가 죽자 당대의 명류인 李密菴, 趙玉川, 柳涵鏡, 李息山, 權淸臺, 李鹿門, 柳三山 등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이씨는 1736년(영조 12)에 저자에게 시집왔다. |
附錄 |
○ 行狀 외손자인 柳炳文이 쓴 趙宜陽의 행장이다. 휘는 宜陽이고 자는 義卿이며, 성은 趙씨이고 본관은 漢陽이다. 공의 8대조인 琮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榮州에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또 증조부 鳴漢은 金鶴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父 元益은 정헌대부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母는 宣城李氏이다. 공은 1719년(숙종 4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글을 많이 읽었고, 특히 목병이 있어 조용한 서재에서 종일토록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자라서 訥隱 李光庭을 찾아 뵙고 經史에 관해 함께 토론하였는데, 공은 특히 詩에 관해 가르침을 청하였다. 訥隱은 공에게 詩를 지음에 반드시 漢魏體를 따르도록 가르쳤다. 또한 李守淵에게 師事하고 더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20세가 넘어서는 여러 차례 향시에 급제하였고 장원을 차지한 적도 많았다. 1771년(영조 4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94년(정조 18) 조정에서는 왕후의 장수를 축하하여 慶科 別試를 베풀었는데, 특별히 노인에게 額外의 은혜를 베풀어 공은 여기에 합격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1807년(순조 7)에는 관찰사의 啓聞에 의해 가선대부를 더하고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1808년(순조 8)에 90세의 나이로 죽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랐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평소에는 겸손하여 무능한 것처럼 하였으나 내적으로는 강건하여 일을 한번 결정하면 남들이 막지 못하였다. 공은 평생 춥고 배고픈 것으로 근심하지 않았으며 다만 옛사람의 서책을 몹시 좋아하여 經傳, 子集, 文章史家 등에 관해 널리 통하였으며, 陰符經, 道德經, 參同契 등까지 많은 독서를 하였다. 詩書, 語孟은 매일 읽었고 특히 {周易}에 대해서는 매일 1편씩 읽기를 수십년을 계속하였다. 伯氏인 葵陽이나 仲氏 普陽과는 매일 함께 강론하였다. 공은 평생 동안 詩에 많은 공력을 쏟았다. 海左 丁範祖 艮翁 李夢瑞와 특히 가깝게 교유하였으며, 후세 사람 중에는 梧竹 海左 艮翁 세 사람은 당대 安東지역을 대표하는 시인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朱子와 退溪를 존모하여 양현의 詩에 次韻한 것이 책을 이룰 정도였다. 臥雪 李尙慶 虛舟 李宗岳 南屛 鄭璞 등 安東의 시인들과 함께 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南屛은 "우리가 죽은 후에는 安東의 풍류가 쓸쓸하리라." 하였다. 또 당시 詩로 널리 알려져 있던 李集斗가 安東府使를 지낼 때, 자신이 지은 詩 수백편을 공에게 보여주며 和答詩를 부탁하였다. 공은 선 자리에서 화답시를 지었고, 부사는 "진실로 나의 스승이오." 하였다. 공은 중년에 香山洞에 살았는데, 鳳凰城 아래에 梧竹齋를 짓고 自號로 삼았다. 공은 일찍이 "나는 문장가가 되는 꿈을 자주 꾸었지만, 늦게서야 주자와 퇴계의 말씀이 제일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공이 지은 詩文은 散逸되어 수습되지 못한 것이 십중팔구에 이르고, 겨우 약간이 본가에 가장되어 있다. 初配는 永川 李氏이고, 後配는 安東 權氏이다. ○ 墓碣銘(幷序) 李晩煃가 쓴 趙宜陽의 墓碣銘이다. 1719년(숙종 45)에 태어나서 1808년(순조 8)에 죽었다. 어린 아이 때 이미 정부인이 읽어주는 한글책을 듣고 기억하였다. 일찍이 詩를 지어서 訥隱 李光庭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광정은 句法은 반드시 漢魏體를 본받으라고 가르쳤고, 공은 古樂府와 建安七子를 배워 시의 격조를 더욱 높였다. 또한 靑壁 李守淵에게도 누차 質疑하였다. 1771년(영조 47)에 처음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94년(정조 18) 별시에서 합격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1807년(순조 7)에는 관찰사의 啓聞에 의해 가선대부를 더하고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이때 공은 이미 병이 깊었지만 책을 읽고 시를 읊었다. 공은 百家의 책을 찾아 읽었는데, 陰符經, 南華經, 道德經, 參同契, 역대의 典故, 인물, 천하의 산천에 이르기까지 난문과 벽서를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만년에는 주자와 퇴계의 글을 좋아하였는데, 특히 양현의 詩에 대해서는 편마다 차운시를 지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천하의 책을 다 읽으려고 하여 넓게는 읽었지만 정밀하지 못하였는데, 근자에 유가에 전념하여 약간의 견해를 얻었다." 하였다. 언제나 유약하게 처신하여 마치 무능한 것 같았지만 일에 임해서는 과감하여 남들이 꺽지 못하였고, 사람을 대함에는 온화함이 넘쳤고, 일에 있어서는 우활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절실하였고, 행실은 소탈하였지만 실제로는 긴밀하였다. 初配는 永川 李氏이고, 後配는 安東 權氏이다. ○ 遺事 從曾孫 秉相이 쓴 趙宜陽의 遺事이다. 공의 8대조인 琮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榮州에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또 증조부 鳴漢은 金鶴沙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父 元益은 정헌대부로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孝友와 文行으로 사류의 존경을 받았다. 母는 宣城 李氏로 1719년(숙종 45)에 幽洞里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5형제 가운데 넷째로서, 鈍巖公 葵陽이 맏형이고 八友公 普陽이 둘째형이다. 어렸을 때 한번은 공이 홀연히 사라져서 집안 사람들이 그를 찾았는데, 나중에 서고에 있는 책 속에서 나왔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놀라 물었더니 "우연히 장서들을 읽게 되었는데, 배고픔을 알지 못하겠더라." 하였다. 장성하여 山雲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유학자 집안으로 李秀泰가 공에게 장인이 되었다. [五總龜經世文]은 鈍巖公 葵陽이 지은 것인데, 그 내용이 매우 광범하였다. 어떤 사람이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해 질의하면, 공이 나서서 막힘없이 대답하였다. 공이 성균관에 있었던 수년 동안, 그의 명성이 서울에까지 퍼졌다. 일찍이 눈오는 날에 訥隱 李光庭을 찾아 뵙고 詩를 논하였다. 訥隱은 [朴孝娘西江女詩]와 [香郎傳]을 주면서 세상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禮安의 선비들이 退溪 李滉의 넷째 형인 李瀣의 諡號를 청하는 상소를 올릴 때, 공을 疏頭로 추대하였다. 또 靑壁 李守淵을 배알하였는데, 가학을 전수하여 당시 儒宗이었던 이수연은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칭찬하였다. 農隱 李級은 공을 박학하고 단아한 군자라 칭하였다. 1785년(정조 9)에 {朱書節要刊補}를 교정하는 일로 廬江에 모였을 때, 李后山 柳東巖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만년에는 주자와 퇴계를 존경하여 비록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양현의 詩를 和韻함으로써 흠모의 정을 대신하였다. 공은 자식들에게 과거공부는 비록 폐할 수는 없지만 경중의 구분을 또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檜溪公에서 山谷公에 이르기까지 모두 詩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므로 사람들이 漢陽四世詩稿로 칭하였으니, 공의 詩才는 그 뿌리가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 輓詞 權訪이 쓴 趙宜陽에 대한 輓詞이다. 선대로부터 아름다운 文才를 이어 받아서 동방에 문화를 꽃피웠으며, 공이 죽고 난 뒤 동방의 풍류가 쓸쓸해졌다고 하였다. 又 黃龍漢이 쓴 輓詞이다. 공은 문장에서 으뜸이 되어 90평생 萬수의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또한 상자 속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시가 많은데, 풍월은 오래 동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있는 언덕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又 金相溫이 쓴 輓詞이다. 영남의 문장가는 대개 檜溪公의 가문에서 나왔는데, 공은 만년에 유학에 귀의하였다. 풍류객은 90년을 살고 산 속에 누웠다고 하였다. 又 權聖翊이 쓴 輓詞이다. 공이 시문고를 완성하여 그 서문을 요청하였다. 이를 언급하면서, "문장은 이미 완성되었는데, 재주 없는 이 사람이 어찌 서문을 쓸 수 있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又 姜必孝가 쓴 輓詞이다. 영남에 유학이 성할 때, 공의 이름이 홀로 드높았다. 젊어서는 정계에 나아가 정책을 내었고 늙어서는 벼슬과 영화를 버리고 유학에 몰두하였다고 하였다. 又 張中矩가 쓴 輓詞이다. 영남의 노학자들은 언제나 공을 칭찬하니, 문장을 일으켜서 많은 몽매한 사람들을 깨우쳤다고 적었다. 又 李仁行이 쓴 輓詞이다. 공은 유학의 노선생으로 그는 죽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적었다. 又 朴時源이 쓴 輓詞이다. 한 가문에 진사가 무수하고 양세에 걸쳐 중추부사를 낸 것은 다시없는 드문 경우라고 하였다. 2수의 對聯이다. 又 金在成이 쓴 輓詞이다. 공이 살던 고택에는 슬픈 바람이 일고, 梧竹齋의 빈 뜰에는 해가 져서 서늘하다고 하였다. 又 金龜鍊이 쓴 輓詞이다. 梧竹齋의 선생은 세상을 버렸고 芙蓉山 꼭대기는 서늘하다. 찾아 뵙고 인사하고자 해도 이제 받아줄 선생이 없어 눈물만 흐른다고 적었다. 4수의 對聯이다. 又 權補가 쓴 輓詞이다. 봉황새는 떠나고 집은 비었으나 드높던 기상은 여전하니, 벽오동과 푸른 대는 해가 바뀌어도 그대로라고 하였다. 又 宋文煥이 쓴 輓詞이다. 후생은 선생을 그리며 우러러 보아도 보이지 않고 覽德臺 앞의 달빛만 여전하다고 하였다. 又 辛慶龍이 쓴 輓詞이다. 깊은 마음에는 千家의 말을 담았고 담담한 가슴에는 봄 풍경을 품었다고 하였다. 또한 3대에 걸쳐 영화가 빛났고 한 가문에 존귀함이 연이었다고 하였다. 又 族孫인 淵晦가 쓴 輓詞이다. 高陽의 자제들은 뛰어난 인품을 지녔고 樞府의 벼슬은 대를 이어 내렸다고 하였다. 經學은 李靑壁에게 배웠고 典刑은 李懶拙齋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又 金綄이 쓴 輓詞이다. 세 사람의 어진이가 남으로써 仁을 가히 경험하였고 一代의 문장은 늙어도 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 祭文 外孫 柳炳文이 쓴 제문이다. 문장에도 능했지만 詩에 더욱 뛰어났다. 한번 붓을 휘두르면 백편의 시가 나왔고 쓸수록 더욱 기이한 작품이 되었다. 늙어서 더욱 공부에 힘을 쏟았고 책상과 상자에는 시가 쌓였다. 만년에는 주자와 퇴계의 글을 좋아하였고 자세하게 차운하여 따로 책을 만들었다. 추워도 두껍게 옷입지 않았고 볼 때는 안경을 끼지 않았으며, 가난으로 근심하지 않았고 효성과 우애로 고을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고 하였다. 又 外孫 柳徽文이 쓴 제문이다. 부군께서는 옛사람의 기운과 풍모를 타고났으며, 드물게 세상에 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仲氏인 普陽은 經術에서 뛰어났다. 공은 효성과 우애로써 가풍을 이었고 어버이의 뜻을 공손히 받들었다. 평생 동안 지은 저술은 한 방을 채울 정도라고 하였다. 又 從孫 趙顯汶이 쓴 제문이다. 대과에 급제하고 소과에 급제한 것을 영화로 여기지 않았다. 물러나 芙蓉山 아래에 집을 짓고 覽德齋에서 안빈낙도하였다. 문장과 시에 뛰어나 손을 움직이면 아름다운 글이 되었다. 문체는 漢魏體를 모범으로 하였고, 글은 주자와 퇴계를 따랐다. 장수하고 큰 덕을 이루었으며 양대에 걸쳐 중추부사를 배출하였으니, 세상에 드문 일이고 나라에 상서로운 징조이다. 又 從孫 趙顯佐가 쓴 제문이다. 梧桐나무를 노래하고 綠竹을 읊었으니, 공의 齋號는 바로 여기서 나왔다. 만년에 香山洞에 집을 짓고 살았으니 골짜기가 매우 깊었다. 산을 鳳凰山이라 하였고 臺號는 覽德齋라 하였다. 사람들은 梧翁으로 불렀으며 이제는 地仙이 되었다. 가난해도 병통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늙어서 더욱 강건하였다. 후학을 훌륭하게 양성한 것이 더욱 큰 공이었으니, 어리석고 똑똑함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과제를 부여하여 순순하게 지도하였다. 저자는 10세에 고아가 되어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불행히 돌아가시니 서까래가 부러지고 산이 무너진 것과 같다고 하였다. ○ 跋 宋啓欽이 쓴 梧竹齋集에 대한 跋文이다. 梧山夫子(해제자주:梧竹齋 趙宜陽)의 저술은 매우 많지만 상자에 담겨서 이미 백년이 지났다. 우리 영남에서 문장이 가장 성하였던 때는 숙종 정조대였는데, 공이 그 가운데 으뜸이었다. 당시에 申石北 鄭南屛 丁海左 李艮翁 등이 일세를 풍미하였으나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쳤다. 南屛翁은 일찍이 탄식하기를, "공이 죽고 난 후에는 安東의 풍류가 장차 쓸쓸해지리라." 하였다. 일찍이 訥隱(李光庭)과 後村(李守淵)에게 사사하여 학문의 요체를 알았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훈계하였고, 학문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면 마음 다스리고 몸을 닦는 요결을 알려 주었고, 時文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학문하여 이름을 이루는 대체를 알려 주었다. 후학을 가르치는 뜻은 늙어서 더욱 돈독하였다. 詩는 주자와 퇴계를 모범으로 하였고, 뜻은 周濂溪와 二程을 지향하였다. 鳳凰城 覽德齋를 바라보면 그 풍류를 느낄 것 같지만 불행히 시대를 달리하여 그 가르침을 직접 받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공의 玄孫 泰敬이 마침 공의 글을 간행한다 하기에 자손은 비록 많이 있지만, 사문의 다행이며 공의 뜻을 기리는 좋은 일이므로, 한 마디 말을 말미에 덧붙이다. (金鍾錫) 1719∼1808(숙종 45∼순조 8). 字:義卿, 號:梧竹齋, 本貫:漢陽, 父:元益, 母:禮安 李氏, 居:安東.趙宜陽은 正憲大夫로서 同知中樞府事를 지낸 趙元益과 李基晩의 딸 사이에 1719년(숙종 45)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學才가 있어 글을 많이 읽었으나 목이 붓는 병이 있어 조용한 서재에서 종일토록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장성하여 訥隱 李光庭를 찾아 뵙고 詩에 관하여 깊이 배웠다. 또 後村 李守淵에게 師事하였다. 20세가 넘어서는 여러 차례 향시에 급제하였고 장원을 차지한 적도 많았다. 1771년(영조 47)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794년(정조 18) 조정에서는 왕후의 장수를 축하하여 慶科 別試를 베풀었는데, 공은 이 시험에 額外로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1807년(순조 7)에는 관찰사의 啓聞에 의해 가선대부를 더하고 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1808년(순조 8)에 90세의 나이로 죽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랐고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평소에는 겸손하여 무능한 것처럼 하였으나 내적으로는 강건하여 일을 한번 결정하면 남들이 막지 못하였다. 공은 평생 춥고 배고픈 것으로 근심하지 않았으며 다만 옛사람의 서책을 몹시 좋아하여 많은 독서를 하였다. 특히 {周易}에 대해서는 매일 1편씩 읽기를 수십년을 계속하였다. 伯氏인 葵陽이나 仲氏 普陽과는 매일 함께 강설하였다.공은 평생 동안 詩에 많은 공력을 쏟았다. 海左 丁範祖 艮翁 李夢瑞와 특히 가깝게 교유하였으며, 후세 사람 중에는 梧竹 海左 艮翁 세 사람은 당대 安東지역을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朱子와 退溪를 존모하여 양현의 詩에 次韻한 것이 책을 이룰 정도였다. 臥雪 李尙慶 虛舟 李宗岳 南屛 鄭璞 등 安東의 시인들과 함께 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南屛은 "우리가 죽은 후에는 安東의 풍류가 쓸쓸하리라." 하였다. 공은 중년에 香山洞에 살았는데, 鳳凰城 아래에 梧竹齋를 짓고 自號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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