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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황주변씨 충신 변윤중 삼강정려(黃州邊氏三綱旌閭) - 전남관찰사 조종필의 [삼강정려각기] 懸板▣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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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첩에 기여한 화차를 만든 망암 변이중을 모신 장성 봉암서원

시골집에 내려간 김에 봉암서원을 찾았다. 봉암서원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에 크게 기여한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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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변씨 충신 변윤중 삼강정려(黃州邊氏三綱旌閭) - 전남관찰사 조종필의 [삼강정려각기] 懸板▣

[황주변씨 삼강정려각(黃州邊氏三綱旌閭閣)]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화차길 168 (지번)장안리 59-1

장성읍 장안마을에 망암 변이중 선생을 모시는 봉암서원 앞에 황주변씨 삼강정려가 자리하고 있다.

삼강정려란? 한 집안에 충신과 열녀. 그리고 효자나 효부를 말하는데, 황주변씨 집안에 변이중의 종제인 충신 변윤중과 그의 부인 열녀 함풍성씨. 그리고 아들 변형윤의 아내 효부 장성서씨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이다. 변윤중과 그 부인, 며느리 세분을 위한 것이므로, 그 후 고종 때 당시 전남관찰사(現도지사) 조종필(한양인)이 변윤중을 충신으로, 성씨 부인을 열녀로, 그리고 며느리 서씨 부인을 효부로 함께 조정에 올려 변윤중을 이조 참의로 증직하고 삼강정려의 명을 받았다.

망암 변이중 선생의 종제인 변윤중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평소 거느린 종들과 장정 200여명을 모아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장안리에서 싸웠으나, 적의 수효가 워낙 많아 10여일 동안 수십 명을 사살하면서도 결국 패전의 쓰라림을 맛보았다. 도망간다는 것은 의롭지 않다 하여 마지막 싸움터였던 부엉 바위로 올라가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그러자, 변윤중의 부인 성(成)씨도 남편이 몸을 던진 바로 그 자리에서 강물로 뛰어들어 역시 순사하였다.

충신 변윤중·열여 함풍성씨·효부 장성서씨의 총·효·열 삼강정려로 1893년(고종 30) 나라에서 정표를 받아 세웠다. 변윤중의 호는 휴암, 학행으로 상의원 직장에 임명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정유재란 때 향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휴암 아래 황룡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처인 함풍성씨와 며느리인 변형윤의 처 장성서씨도 따라 순절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며 내부에 각각 [忠臣(충신)贈通政大夫吏曹參議行尙衣院直長(증통정대부이조참의행상의원직장)邊允中之閭(변윤중지려)高宗癸巳命旌(고종계사명정)](1893), [변윤중(邊允中)의 처(妻) 함풍성씨(咸豊成氏)의 열녀정려(烈女旌閭),烈女(열녀)邊允中之妻(증통정대부이조참의변윤중지처)贈淑夫人咸豊成氏之閭(증숙부인함풍성씨지려)高宗癸巳命旌(고종계사명정)](1893), [변형윤(邊亨胤)의 처 장성서씨(長城徐氏)의 효부정려(孝婦旌閭)孝婦(효부)宣務郞邊公亨胤之妻(선무랑변공형윤지처)宜人長城徐氏之閭(의인장성서씨지려)高宗癸巳命旌(고종계사명정)](1893)와 당시 전남관찰사 조종필의 [삼강정려각기]등 4개의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1983년 중수하며 현판의 내용을 새긴 비 3개를 새로 세웠다.

▲당시 전남관찰사 조종필의 근서한 "삼강정려문기"

의병장 윤진과 변윤중의 순절 , 김세곤 글 무등일보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39. 의병장 윤진과 변윤중의 순절!

http://segon53.tistory.com/15860683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39. 의병장 윤진과 변윤중의 순절, 김세곤 글 무등일보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39. 의병장 윤진과 변윤중의 순절 입력시간 : 2014. 03.18. 00:00 입암산성도(규장각 소장) 도망간 수령대신 고을지키다 의롭게 죽어 성을 쌓은

segon53.tistory.com

김세곤 2014. 3. 18. 15:39  입력시간 : 2014. 03.18. 00:00

도망간 수령대신 고을지키다 의롭게 죽어
성을 쌓은 것은 난리에 대비코자 한 것
성은 바로 내가 죽을 곳이고
오늘은 바로 내가 목숨을 바칠 날이다
몇 명의 의병과 함께 죽기로 싸웠다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창칼에 목이 찔려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태연한 모습으로 순절하였다

1597년 8월16일 왜군은 남원성을 함락시킨 후 전라도를 초토화하였다. 왜군들은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죽이고 코를 베었으며 산하를 불태웠다. 고을 수령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관아를 버리고 도망갔고, 백성들은 산 속으로 숨고 배를 타고 피난가기에 바빴다. 의로운 선비들은 의병을 일으킬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였다. 팔도의병장 김덕령이 1596년에 억울하게 옥사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런 와중에도 의롭게 나선 이가 있었다. 장성의 윤진과 변윤중이 그들이다.

먼저 9월16일에 입암산성에서 순절한 윤진에 대하여 알아보자.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이룬 9월16일에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는 1만 명을 이끌고 노령을 넘어 남하하였다. 이 날 시마즈는 입암산성을 함락시켰다.

입암산성은 전남 최북단 입암산 정상 아래에 돌로 쌓은 성으로, 고려 고종 43년(1256년) 몽고 6차 침입 때 무신정권의 무장 송군비가 몽고군에 항거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1593년 2월에 장성현감에 부임한 이귀는 입암산성을 수축하였다. 그는 관내에서 백성을 동원할 형편이 안돼 의승장 법견에게 산성 수축 공사를 맡겼다. 법견은 전라도내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거의 완성하였다. 그런데 1594년 초에 장성현감 이귀가 전보발령이 나자 임압산성 공사는 일시 중단되었다.

이러하자 1594년 3월경에 전라도관찰사 이정암은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윤진을 축성 책임자로 임명할 것을 건의하였다. 윤진은 1592년에 장성남문창의에 참여한 바 있는 선비였다. 선조는 명하기를 “산성은 백성의 운명과 관계되고 국가를 보장하는 곳이니 조속히 성을 중수하라” 하였다. 윤진은 선조의 어명에 따라 밤낮으로 산성에 있으면서 손수 널판을 나르고 삽질을 하여 산성을 다시 쌓았다. 그리하여 포루를 설치하고 창고와 사찰을 세우는 등 요새지를 만들었다.

한편 1597년 7월에 한산도가 불탔다는 소식을 들은 윤진은 부인 권씨와 아들 윤운구 등 가족들을 데리고 입암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입암산성 이웃 네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고을 수령과 함께 성을 지킬 것을 약속받았다. 그런데 1593년 10월 13일 선조실록을 보면, 왜군들이 전라도 전역을 점령하자 대다수 수령들은 모두 관아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네 고을 수령도 마찬가지였다.

윤진은 하는 수 없이 혼자서 성을 지켜야만 하였다. 그는 가까스로 주변에서 백 여 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들은 모두 싸워 본 경험이 없는 농민들이었다. 그를 따르던 구생 具生이라는 사람이 “윤공은 성을 쌓으라는 명을 받았지, 성을 사수하라는 명을 받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는가?”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피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윤진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조정에서 이 성을 쌓은 것은 오늘의 난리에 대비코자 한 것이니 어찌 신하된 도리로 내 살 길만 바라리오. 이 성은 바로 내가 죽을 곳이고 오늘은 바로 내가 목숨을 바칠 날이다”라고 말하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의병들은 모두 흩어지기에 바빴다. 그는 몇 명의 의병과 함께 죽기로 싸웠다. 그러나 이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1만 명의 왜적을 어찌 당해낼 수 있을 것인가? 윤진은 창칼에 목이 찔려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태연한 모습으로 순절하였다. 윤진의 부인 권씨도 남편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왜적에게 욕을 보지 않으려고 품에 간직하였던 은장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왜적은 이를 불쌍히 여겨 그녀의 옷도 벗기지 않고 가버렸다. 부인 권씨는 예조참의 권벽의 딸이고, 의병장 김덕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취시가’ 시를 지은 석주 권필의 누나였다.

한편 정읍출신 이경국과 이안국 형제도 입암산성에서 윤진과 함께 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입암산성 안에는 윤진 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영조 18년 (1742년)에 세워진 이 순의비는 전라도 관찰사 권적이 비문을 짓고 장성도호부사 이현윤이 글씨를 썼다.

순의비에는 ‘부부가 함께 죽어 절의를 둘 다 이룬 것은 참으로 천년에 한 번 있을 까 말 까 한 일이요, 백세를 내려가도 감동할 일’이라고 적혀 있다. 명문 銘文은 이렇다.

저 남쪽 땅을 바라보라.
바위가 있으니 높고 높도다.
지아비는 충의에 죽고
지어미는 절개에 죽었도다.
한 몸 되어 살신성인하니
만고에 어울려 열렬하도다.
바위가 갈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름이 그처럼 없어지지 않으리라.

이어서 의병장 변윤중에 대하여 알아본다. 그는 9월18일에 장성 부엉이바위에서 순절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변윤중은 평소 거느린 하인들과 장정 200여명과 함께 장성현 장안리에서 싸웠다. 변윤중 의병은 며칠 간 싸워 왜적 수 십 명을 사살하였지만 1만명의 왜군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정들을 다 잃은 변윤중이 피를 흘리면서 마을에 돌아오자, 마을 노인들은 빨리 몸을 피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도망간다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마지막 싸움터였던 부엉이바위로 올라가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변윤중의 부인 성(成)씨도 남편이 몸을 던진 바로 그 자리에서 강물로 뛰어들어 죽었다.

변윤중의 아들 형윤과 며느리 서(徐)씨 부인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부엉이 바위로 가니 부모님의 시신이 나란히 떠 있었다. 이를 보고 아들 형윤이 죽으려 하자 서씨 부인이 남편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당신은 이 집안의 외아들인데 만일 당신이 죽는다면 후손이 끊어질 것이니 내가 당신대신 목숨을 바치겠소" 하더니 제기를 안고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장성군 봉암서원 가는 입구에는 황주변씨 삼강정려각 三綱旌閭閣이 있다. 삼강이란 조선사회를 지탱하는 유교도덕의 기본을 이루는 세 가지 강령으로 군위신강 君爲臣綱·부위자강 父爲子綱·부위부강 夫爲婦綱을 말하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삼강정려 三綱旌閭란 위와 같은 도리를 잘 지킨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들이 살던 동네에 정문 旌門을 세워 그 뜻을 기리는 일이다.

1892년에 고종 임금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열사들을 찾아내어 표창하도록 하였다. 당시 전라감사 조종필이 변윤중을 충신으로, 부인 성씨를 열녀로, 며느리 서씨를 효부로 포상을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변윤중을 이조참의로 증직하고 그의 부인과 며느리에게도 정려를 내렸다.

변윤중의 묘소는 장성군 장성읍 부흥리 육태동에 있다. 묘갈명은 홍석희가 지었는데 비의 명문은 이렇다.

영령이 죽지 않으심이여,
휴암강은 만고에 푸르게 유유히 흐르며
혼백이 영구히 의탁하심이여.
육태산 六駄山은 천추에 높고 높게 서 있도다.
표창과 정려를 내리심이여,
임금의 은혜가 두터우시며 수풍 樹風의 소리 날카롭도다.
비석에 말씀을 새김이여,
영원토록 후세에 전해질 것이로다.

의병장 윤진과 변윤중의 신위는 화차를 만든 변이중과 함께 장성군 봉암서원에 모시어져 있다. 윤진과 변윤중, 이 두 사람은 고을 수령들이 모두 도망갔어도 의연하게 고을을 지킨 의인 義人의 표상이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사진

1. 봉암서원
2. 입암산성도 (규장각 소장)
3. 변씨 삼강정려각
4. 충신 변윤중 편액
무등일보 zmd@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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