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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도시향제례❀

◈太祖朝回軍功臣)佐命開國功臣/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忠靖公諱仁沃不祧廟祭享(22.10.9.陰9.14)◈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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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靖公諱仁沃不祧廟祭享(22.10.9.陰9.14)◈

=충북 음성군 금왕읍 유촌로232번길 23-8번지 忠靖祠=

태조조회군공신(太祖朝回軍功臣)佐命開國功臣)

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

[국불천위 선조님]

불천위(不遷位)란 큰 공훈을 세워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사람의 신위를 이르는 말이다. 부조묘(不祧廟)란 불천위를 받은 사람이 죽은 뒤 4대봉사가 끝나도 신주를 묻지(埋安) 않고 사당(祠堂)에 모셔놓고 영구히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신위(神位)를 모신 곳으로 별묘(別廟)라고도 한다. 불천위는 나라에서 정한 국불천위(國不遷位), 유림의 발의로 정한 유불천위(儒不遷位) 또는 향불천위(鄕不遷位), 문중에서 유명한 조상을 자체적으로 정한 사불천위(私不遷位)로 구분한다. 심지어 집안에서 정한 가불천위(家不遷位)도 있다. 한양조문의 국불천위 선조님은 7위로 개국·정사·좌명 3훈공신 한산부원군 충정공 (5세, 휘 仁沃), 한천부원군 양절공(6세, 휘 溫), 한평부원군 우의정 양경공(6세, 휘 涓), 문묘에 배향된 문정공(10세, 휘 光祖), 동지중추부사 한흥군(12세, 휘 公瑾), 판중추부사 문간공(13세, 휘 絅) 선조님들을 알아본다.


① 한산부원군 충정공 (5세, 휘 仁沃) 위화도회군 공신으로 척불숭유와 전제개혁을 지지해 신진세력 기반구축에 기여하셨고, 1392년 이조판서로 조선개국을 도왔으며 원훈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에 책록되셨고 태조묘정에 배향되셨다. 가정대부(嘉靖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오르셨고, 충정(忠靖)의 시호와 부조묘를 하사받으셨다. 부조묘(忠靖祠)는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다.


② 한천부원군 양절공(6세, 휘 溫) 개국(開國)이등공신, 정사(定社)이등공신, 좌명(佐命)사등공신이시며 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내자시사를 지내셨고,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에 진봉되셨다.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서 1품까지 올랐으나 청백하고 스스로 제어해 빈한한 선비와 같으셨다. 양절(良節)의 시호와 부조묘를 하사받으셨다.


③ 한평부원군 우의정 양경공(6세, 휘 涓) 1386년(우왕12) 반궁(泮宮, 성균관)에 들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1392년(공양왕4) 공조총랑을 지내셨으며, 제2차 왕자의 난(1400년) 때 좌명(佐命)사등공신이 되셨다. 1417년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지셨고, 1426년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하셨다. 양경(良敬)의 시호와 부조묘를 하사받으셨다. 부조묘(甫羅齋)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보라동에 있다.


④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諡號)는 문정(文政, 10세, 諱 光祖), 감찰(監察) 원강(元綱)의 아들, 14세 때 어천도 찰방(魚川道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희천(熙川)에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修學), 이때부터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1510년(중종 5) 진사(進士)가 되고, 1515년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로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전적(全的)·감찰(監察)을 역임하며 왕의 신임을 얻고, 입시(入侍)할 때마다 유교(儒敎)로써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해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역설했다. 

이해 정언(正言)으로서,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계비 책봉 문제가 논의될 때 박 상(朴 祥)·김 정(金 淨) 등이 앞서 폐위된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다 대사간(大司諫) 이 행(李 荇)의 탄핵으로 유배되자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言路)를 막는 결과가 되어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다고 주장, 오히려 이 행(李 荇)을 파직케 함으로써 그에 대한 왕의 신임을 입증 받았다.

그후 수찬(修撰)에 이어, 호조(戶曹)·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거쳐 1517년 교리(校理)로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 향촌(鄕村)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呂氏 鄕約)을 8도에 실시케 하였다.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없애게 했다.

 

1519년 대사헌(大司憲)에 승진,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했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자기 일파의 신진사류(新進士類)인 소장학자를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勳舊派)를 외직에 몰아내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훈구파의 결정적 반발을 야기했다.

훈구파의 홍경주(洪景舟)·남 곤(南 袞)·심 정(沈 貞) 등은 경빈(敬嬪) 박씨(朴氏) 등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게 하고,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다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는 한편, 밤에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비밀리에 왕을 만나서 위협에 가까운 논조(論調)로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무고했다.

이에 조광조의 도학적(道學的)인 언행에 염증을 느껴 오던 왕은 그를 투옥, 영의정(領議政)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일단 사형이 면제되었으나, 능주(綾州)에 유배, 훈구파의 끈덕진 공격으로 마침내 사사(賜死)되었다.


선조(宣祖) 초 신원(伸寃)되어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능주(綾州)의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洋酒)의 도봉서원(道峰書院), 희천(熙川)의 양현사(兩賢祠)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동지중추부사 한흥군(12세, 諱 公瑾): 위성공신 동지중추부사 한흥군 (12세, 양경공파, 휘 公瑾) 자는 회보(懷甫), 호는 소옹(梳翁)이시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사직서(社稷署) 참봉으로 묘사주(廟社主)를 받들어 피난할 때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대소조정(大小朝廷)으로 나누자 미비점을 상주하여 분조의 체면을 갖추게 하셨다.
1612년 광해군을 시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에 녹훈되셨고 한흥군(漢興君)에 봉해지셨다. 1593년에 부솔(副率)로 시작하시어 진원·결성 현감, 형조·호조 정랑, 옥천·평창·온양 군수,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지내셨다. 162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셨다.

 

판중추부사 문간공(13세, 諱 絅) : 문과 장원, 호당, 문형, 청백리, 판중추부사 문간공 (13세, 양경공파, 휘 絅)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이시다.
1626년(인조4) 문과에 장원급제하시어 정언, 헌납 등을 거쳐 사가독서를 하셨다. 1643년 일본에 통신부사로 다녀오셔서 전주부윤, 도승지,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대사헌,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역임하셨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 사문사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 요구로 1650년(효종1) 의주 백마산성에 유배되셨다가 풀려나 신묘삼권보의 서문을 쓰셨다.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셨고, 1661년(현종2)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셨다.
영의정에 추증되셨고 문간(文簡)의 시호를 받으셨으며 현종 묘정과 포천 용연서원(龍淵書院), 춘천 문암서원(文巖書院), 흥해 곡강서원(曲江書院)에 배향되셨다. 1695년(숙종21) 청백리에 뽑히셨다. 글씨에 뛰어나셨고 『용주집(龍洲集)』과 일본 견문록인『동사록(東槎錄)』을 남기셨으며 포천의 사찬(私撰) 군읍지인 『견성지(堅城誌)』 편찬에 최초로 참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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