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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陽 趙 氏 由 來 碑◈
漢陽趙氏는 漢陽에서 累代 世居해 온 士族으로서 高麗朝 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낸 趙之壽公을 始祖로 하여 그후 悠久한 家門의 歷史를 통하여 忠과 孝의 名家로서 많은 出衆한 名臣 儒賢 著名한 經世家 大學者 등을 排出한 자랑스로운 名門 巨族이다 현재 漢陽趙氏는 約十萬家口에 三十餘萬名의 家族이 전국 京鄕各地에서 定住活動하며 繁昌하고 있는 大姓이다之壽公의 子 暉는 雙城摠管으로 十二城을 四代 九十九年間 世襲 統治하였으며 良琪는 摠管에 襲位되고 副元帥로서 日本征伐과 哈丹의 侵入을 大破한 功으로 元 世祖로부터 錦袍와 玉帶를 下賜받아 玉帶는 宗家에 世寶로 傳해온다 暾은 西京의 紅巾賊을 擊退하여 一等功臣에 策祿되고 工部尙書와 禮儀判書 三重大匡 龍城君에 封하고 府院君 門下左侍中에 追贈되었다 仁璧은 元帥로 紅巾賊을 물리쳐 西京을 回復하고 金鏞을 擊退하고 數次 倭寇를 討伐하였고 太祖의 妹夫로 龍源府院君에 封하였으나 朝鮮開國에 不事二君의 節義를 지키니 儒林이 東溟書院을 세워 모시고 朝鮮朝에서 左政丞 漢山伯 諡 襄烈을 下賜하였다 仁瓊은 檢贊成이며 仁珪는 檢漢城府使로 高麗가 亡하자 朝鮮朝에는 出仕하지 않았다 仁沃은 開國一等功臣으로 大提學과 吏判으로 斥佛과 田制改革에 앞장섰고 漢山府院君에 封하고 諡는 忠靖이며 溫은 開國 定社 佐命功臣으로 隨州에 侵入한 倭寇를 擊破하고 義州道의 壯丁들을 軍籍에 登錄시켜 軍事力을 强化하고 吏 兵曹의 判書와 輔國崇祿大夫 議政府 贊成事에 이르고 漢川府院君에 封하고 諡는 良節이다 涓은 大將軍으로 太祖를 護衛하고 野人 侵入에 敵將 巴兒孫을 죽이고 豆滿江을 건너 敵의 根居地를 파괴하였으며 佐命功臣 右議政 漢平府院君에 封하고 諡는 良敬이다 侯는 知敦寧으로 諡는 安靖이며 師의 號는 嘉川齋로 孝로써 東溟書院에 追配되었다 賚는 禮判으로 諡는 節孝이며 賡 司評과 貫 判事 兄弟는 癸酉政難때 南海 流配後 杜門不出하였다 七世 十九宗派로 分派하니 琓은 資憲大夫 知中樞院事로 兄인 僉知中樞 儀가 无后卒함에 嫡統을 받아 漢豊君으로 追封되어 趙門의 大宗이며 河는 都制이며 興은 參判이고 育은 庫使이다 慕는 摠制이며 慈는 敦寧이며 惠는 刑判 判中樞로 諡는 恭安이며 憐은 兵參이다 孟發은 縣令이고 仲發은 縣監이며 瑾은 司正이다 癸酉靖難때 죽음을 당한 坡西 順生과 그의 아들 仁村 銘이 있으며 觀生은 奉禮이며 孝生 副司直과 德生 文科 吏郞은 癸甲之禍를 당했으며 旭生은 戶議이며 瑞는 縣監인데 癸甲之禍로 아들 元基와 終身토록 挺節을 지켰다 肅生은 參議이며 冲諝는 大護軍이다 裔孫으로 璔은 功臣嫡長 大護軍 知中樞이며 衷孫은 司藝로 癸酉政難에 禍를 당한 뒤 禮判에 追贈되고 之周는 世祖때 原從功臣 刑議에 오르고 元紀는 燕山君이 史草보는 것을 막아 流配된 뒤 刑判 判義禁府事에 이르고 淸白吏로 最初의 族譜 甲申單卷譜를 創刊하였고 諡는 文節이다 邦禎은 判決事이고 邦彦은 副提學과 江原 全羅 觀察使를 거쳐 禮參에 이르렀다 高邁한 政治思想 深奧한 儒學 決斷力 강한 改革性向 등을 미루어 볼 때 漢陽趙氏 門中史上 最高의 人物은 靜菴 光祖(成宗3年~中宗 14年)를 指目하는데에 異論이 없을 것이다 士林의 領袖 靜菴은 道學政治에 바탕을 둔 王道政治를 力說하였다 大司憲에 있으면서 昭格署를 革罷하고 賢良科를 設置하며 新進士類를 登用하고 勳舊派를 몰아내는 등 改革을 斷行하다가 南袞 沈貞의 己卯士禍에 被禍되어 綾州에 流配 賜死되었다 性理學의 基礎를 確立한 事實과 뜻깊은 上疏文을 수없이 올린 일 등도 그의 크나큰 功績이라 할 것이다 以後 伸寃되어 領議政에 追贈되고 諡는 文正이며 文廟와 深谷書院 竹樹書院에 配享되었고 栗谷은 靜菴과 李彦迪 金宏弼 鄭汝昌을 東邦四賢이라 하여 그들을 稱頌하였다 抃은 己卯士禍에 流配後 左贊成에 追贈되고 諡는 貞翼이며 刑判을 지내고 淸白吏에 錄選된 玄谷 緯韓과 詩文에 能하고 承旨를 지낸 玄州 纘韓이 有名하다 公謹은 宣祖때 衛聖功臣 漢興君에 封하고 同知中樞에 이르고 絅의 號는 龍州이며 大司諫 大提學 刑 吏判과 淸白吏에 錄選되고 諡는 文簡이다 詡는 領議政에 追贈되고 誼는 扈聖功臣과 領議政에 追贈되었으며 克善의 號는 冶谷이며 孝로 旌閭와 御札을 下賜받고 吏判에 追贈되고 諡는 文穆이다 威明은 都承旨 禮參으로 禮論에 밝고 글씨 文章에 뛰어났으며 宗著는 史學 天文 算數 醫學에 博通하여 文名을 날렸다 國弼은 吏參으로 扈聖功臣이며 明漢은 戶參으로 漢原君에 封하고 得男은 丙子湖亂때 南漢山城에서 殉國하여 旌閭 忠臣閣과 定略將軍에 追贈되었고 光庭의 號는 慕村이니 義兵을 募集하여 延安城에서 倭敵을 擊退하여 顯忠祠에 配享되었으며 熊은 白旗堂將軍으로 義兵을 모아 彈琴臺에서 倭敵과 싸우다 殉節하니 忠臣閣과 兵參을 追贈받았고 慶男의 號는 山西로 義兵將이 되어 倭敵을 물리쳐 兵參에 追贈되고 義忠祠 周浦書院에 配享되었다 玏은 勤儉과 救恤精神의 慈仁考碑 逸話로 有名하며 性敎는 大提學과 禮判으로 諡는 文憲이며 그의 아들 鍾弼은 大司成과 六道의 觀察使와 工判으로 一九0八年 漢陽趙氏大宗會를 創立하였다
이렇게 勢道를 떨친 漢陽趙門은 近現代에 와서도 많은 人物들이 輩出되어 政官界 敎育界 學界 經濟界 文化 藝術 體育界 등에서 중요한 活動을 하면서 國家와 家門을 위해 貢獻하였다 鼎允은 副卿과 都有司로 雙城閣을 創建하고 甲子大譜와 一統世譜를 自負擔發刊하였고 維石 炳玉博士는 獨立運動家로 民主黨을 創黨하고 內務部長官으로서 韓國戰爭때 큰 功勳을 세웠다 그 뒤 反獨裁 鬪爭에 野黨을 領導했으며 大統領에 立候補하였으나 急患으로 忽然 永眠함으로써 그 큰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國家와 門中 그리고 본인을 위하여 哀惜하기 이를데 없다 建國勳章이 授與되었고 都有司로 己亥大譜를 發刊하였다 炳華는 號가 片雲이며 大韓民國藝術院會長 桂冠詩人으로 金冠文化勳章을 받았다 世衡은 國民會議 代表와 大宗會長을 昇衡은 憲法裁判官으로 大宗會長때 乙酉大譜를 發刊하였고 一衡은 始祖 中書公以下 二~五世祖의 設壇에 큰 役割을 하였고 그의 아우 龍沂博士는 南部大學校와 全南科學大學校 設立者이며 靑鹿派 詩人 東卓의 號는 芝薰으로 여러곳에 詩碑가 있다 기타 여기에 登載하지 못한 人物이 多士濟濟하나 記錄空間의 制約으로 이를 모두 記錄치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漢陽趙氏 家門은 高麗朝 朝鮮朝 近現代에 걸쳐 先賢들의 遺志를 성실하게 받들면서 忠과 孝의 理念에 서서 나라와 겨례와 宗族을 위해 最善을 다함으로써 大姓으로서의 體統을 굳건히 지키고 크나큰 發展을 해왔다 우리 漢陽趙氏 同族一同은 앞으로 崇祖敦宗의 精神을 굳건히 하면서 和睦 協同하여 우리 家門과 宗族에 더욱 榮光스러운 發展과 歷史를 쌓아가기를 다같이 다짐한다
二千二十一年 十月 二日
第20代 國務總理 第16代 서울大學校總長 全州後人 李賢宰 謹撰
國展招待作家 忠靖公派 松友 趙成弼 大字 謹書
漢陽趙氏大宗會 會長 月岩 趙成珍 謹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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