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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경기 파주)교하노씨 대부인개성왕씨(開城王氏大夫人) 노한(盧閈) 노사신(盧思愼) 묘 및 神道碑♣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6. 20.

♣(경기 파주)노한(盧閈) 노사신(盧思愼) 묘 및 神道碑♣

노사신 묘가 파주에 있어서 답사를 가야했는데 서울 대방동에서 옮겨온 묘라하여 갈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후배가 노사신 묘 간다고 해서 나는 노수신과 헷갈려서 얼른 따라 나섰는데 나중에 보니 노수신과 노사신은 본관도 다르고 시대가 연산군때와 선조 때로 거의 80여년 차이가 난다. 아무튼 두분 다 영의정을 지냈는데 언뜻 이름만 보면 형제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교하노씨는 근자에 노태우대통령을 배출한 가문으로 노대통령 시절에 이곳 효사재를 지었고 현판도 노태우대통령 친필이다. 한 가문에서 대통령을 배출했으니 큰 소리 칠만한 일이다.

이곳은 비록 옮겨온 묘역이지만 아늑한 국세에 수구도 잘 막아져 있어 무난한 터로 여겨진다.

[우의정 노한(盧閈)]

본관은 교하. 자는 유린, 호는 효사당. 증조부는 첨의정승 책이며, 아버지는 대리경 균(鈞)이다. 좌의정 민제의 사위로 태종과 동서간이다. 16세에 음서로 등용되었다. 지사간원사를 거쳐 1403년(태종 3) 좌부승지, 이듬해 이조전서·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439년(세종 21년) 母 개성왕씨대부인(開城王氏大夫人) 卒.

1405년 동지총제, 이듬해 풍해도관찰사 등을 거쳐 1408년 한성부윤이 되었다. 1409년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신극례와 함께 종친을 이간하는 불충한 언동을 했다고 이화(李和) 등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자, 이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당했다. 그뒤 양주별장에서 14년간 은거했다. 1422년(세종 4)에 상왕인 태종의 전교로 다시 한성부윤이 되었다. 그뒤 형조판서·참찬의정부사·판한성부사를 거쳐, 1432년에 찬성사, 1434년에 찬성사 겸 대사헌, 이듬해 우의정 등을 지낸 뒤 1437년에 사직했다. 시호는 공숙이다. 母 개성왕씨대부인(開城王氏大夫人)

[영의정 노사신(盧思愼)]

세종에서 성종 때까지 사서편찬과 번역사업에 공헌했으며, 유자광 등과 함께 무오사화를 주도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조예가 깊어 문과 급제 직후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글을 잘하여 명성이 높았고, 경서와 사서를 강론할 때 사리분별이 뚜렷하고 대답하는 데 막힘이 없어 세조가 친히 그와 토론하기를 즐겼다. 1465년 호조판서가 되어 최항과 함께 〈경국대전〉의 편찬을 주관하고 〈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삼국사절요〉 등의 편찬과 〈향약집성방〉의 국역에 참가했다. 1495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과거시험에 처족을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를 주도했을 때는 유자광 등이 옥사를 확대하려는 것을 적극 견제하여 사림파의 피해를 줄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사옥이 진행되던 그해 9월에 병사하였다.

<다음백과>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노한(盧閈) 노사신(盧思愼) 묘 및 신도비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백석리 131-1
관리자(연락처) 교하노씨 창성군파 공숙공종회

 

▼ 교하노씨 창성군파재실... 효사재... 노태우대통령 친필

노사신의 본관은 교하로 15세 손이 노태우 전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가계로 이곳 효사재 현판은 바로 노태우의 글씨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21.10.26일 서거하였으나 오늘까지도 장지를 구하지 못하여 유해를 검단사에 임시로 보관하고 있으며 후에 헤이리마를 위쪽에 있는 동화경모공원에 모신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곳 선산에 모시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노책(盧?; 10세, ? ~ 1356) : 고려의 문신으로 왕실의 평양공(平陽公) 왕현(王昡)의 딸 경녕옹주(慶寧翁主)와 혼인하였다.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경양부원군(慶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딸이 원나라의 순제비(順帝妃)가 되었으나,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기철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교하 노씨는 노책의 네 아들을 파조로 하는데, 노제(盧濟)의 후손이 서원군파(瑞原君派), 둘째 노진(盧稹)의 후손이 창성군파(昌城君派), 노은(盧訔)의 후손이 경원군파(慶原君派)이고 노영(盧渶)의 후손이 신양군파(新陽君派)로 나누어 진다.

 

노한(盧閈, 1376년 ~ 1443년) :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노진의 손자이자 노균의 아들이며 태종의 비 원경왕후의 제부가 된다. 증조부는 고려 좌정승을 지낸 노책이다. 1434년(세종 16)에 대사헌을 거쳐, 다음 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이 되어 판병조사를 겸했고, 1437년(세종 19)에 영경연사를 겸했다.

 

노사신(盧思愼, 1427년 ∼ 1498년) : 노한의 손자이며, 할머니는 원경왕후의 여동생으로 태종의 처제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의 여동생으로 세종의 처제로 2대에 걸쳐 왕실과 인척관계이다. 1451년(문종 1) 생원시, 1453년(단종 1)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박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집현전부수찬·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사헌부지평 등을 지냈으며, 1463년(세조 9)에는 도승지에 올라 국가의 기무(機務)를 관장하였다. 1465년에는 호조판서, 1492년(성종 23)에는 좌의정, 1494년(성종 25)에는 부원군(府院君)에 봉군, 1495년(연산군 1)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조카를 죽인 역적 이유(李瑈)에 영합하였다. 남이를 주살하는데 공을 세웠고 그 후대 역시 임사홍 등과 인척을 맺었으며 무오사화 때에도 역시 가담했다.

 

[이승준 기자]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동의 한강변 언덕에 있는 정자로, 효사정(孝思亭)은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지금의 노량진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때때로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고,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개성에 묘를 쓴 아버지를 추모했다 한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이었던 이조판서 강석덕(姜碩德)이 붙였고, 그의 아들 강희맹(姜希孟)은 효사정기(孝思亭記)를 남겼다. 강희맹의 이 기문(記文)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금천현 누정조에 기록돼 있다. 정인지(鄭麟趾), 서거정(徐居正), 신숙주(申叔舟), 김수온(金守溫) 등 조선 초기의 학자와 문신들도 효사정과 관련된 시문(詩文)을 남겼다.

 

옛 효사정은 사라졌다. 지금의 효사정은 1993년 흑석동 한강변을 끼고 있는 낮은 산에 신축한 것으로, 일제강점기 때에 그 자리에는 한강신사(일본의 신사로, 웅진신사라고도 하였다)가 있었다. 효사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러 시문을 참고해 원래 효사정이 있었던 터를 찾았으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옛터와 가까운 자리를 택해 정자를 세웠다.

 

▲ 효사정 현판/사진-이승준 기자

 

현재의 효사정은 넓이 46.98㎡의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로, 온돌방 1칸을 들인 건물로, 민도리집 구조의 5량집이고 난간을 두르고, 팔작지붕을 얹었다. 효사정은 예로부터 효도의 상징으로 유명했고,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현재의 효사정 역시 서울특별시 우수경관 조망명소 중 하나로 선정됐을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정자에 오르면 탁 트인 한강의 경관과 함께 북한산, 남산, 응봉산, 동작대교, 한강시민공원이 한눈에 들어오고, 특히 야경이 아름다워 사진 출사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 효사정

 

효사정은 조선 초 우의정 노한의 정자이다. 노한(1376-1443)은 교하노씨 13세손으로 자(字)는 유린(有隣)이며 호(號)는 효사정(孝思亭), 시호(諡號)는 공숙공(恭肅公)이다.

▲ 효사정의 측면/사진-이승준 기자

 

16세에 출사((出仕)해 33세에 한성부윤(漢城府尹), 1433년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우의정에 올라 백성(百姓)을 안위 (安慰)하는데 공헌(貢獻)했다.

 

1439년(세종 21년) 어머니 개성왕씨대부인(開城王氏大夫人, 父 노균(盧鈞)이 경원군(慶原郡)에 봉해져서 경원군파(慶原君派)祖)의 상을 당해 선영에 예장(禮葬)하고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3년간을 시묘(侍墓)하고도 서러워서 그 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 자리에 별장을 지어 일생을 살면서 등을 밝혀 추모하고 자신도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묘지 북쪽 깎아지른 듯한 언덕위에 정자를 세우고 때때로 올라 어머니를 생각하고 북쪽 개성의 아버지 묘소를 바라보며 효성을 다하지 못한 것을 슬퍼했다.

 

▲ 사진-이승준 기자

 

효사정은 효도의 상징으로 유명했고 한강을 끼고 있는 정자 중 경관이 제일 좋은 곳으로 칭송됐다. 그 후에도 손자 노사신과 정인지, 신숙주, 김수은, 서거정, 중국사진 채수, 기순 등이 효사정의 정취를 시로 읆었다.

 

오늘의 효사정은 조선 성종 대에 헐린 것을 1993년 7월 복원한 것으로 ‘孝思亭’ 현판 글씨는 공숙공 노 한의 17대손인 당시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의 친필이다.

 

# 효사정기(孝思亭記)

 

▲ 정인지, 김수은이 남긴 효사정과 관련된 시문/사진-이승준 기자

 

효사정이란 이름을 지은 호조참판 강석덕의 아들 강희맹은 효사정기를 남겼다. 이 기문은 ‘신증동국여지승락’ 10권 금천현 노정로에 기록됐다. 따라서 여러 자료와 시문을 참고해 효사정이 있던 터를 찾았으나 주변 환경의 변화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옛터에 가까운 자리를 정해 정자를 세웠다. 조선 초기의 학자와 문신들인 정인지, 신숙주, 서거정, 김수은 등과 효사정과 관련된 시문을 남겼는데 일부를 소개했다.

 

▲ 호조참판 강석덕의 아들 강희맹이 남긴 효사정기/사진-이승준 기자

 

# 효의 상징 노한(盧閈)

 

노한(1376-1443)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교하이며 자는 유린, 호는 효사당이다. 아버지는 대리경 균이며, 좌의정 민제의 사위로 태종과는 동서간이다. 16세에 음보로 등용돼 지사간원사를 거쳐 태종 3년에 좌부승지가 됐고, 이듬해 이조전서.경기도관찰사를 역임했고, 풍해도관찰사 등을 거쳐 1408년에 한성부윤에 이르렀다. 이듬해 처남 민무구, 무질 형제가 신극례와 함께 종친을 이간하고 불충의 언동이 있었다고 해 유배, 사사(賜死)되자 이에 연좌돼 1409년에 파직 당했다.

▲ 사진-이승준 기자

그후 고향 양주별장에서 14년간을 은거했는데, 세종 4년(1422)에 상왕 태종이 “노한이 민씨에게 장가를 들었다고 고신(告身)까지 거두게 된 것은 그의 죄가 아니니 급히 불러들이라”는 천교에 의하여 다시 한성부윤에 복관됐다.

그 뒤 형조판서, 참찬의정부사, 판한성부사를 거쳐 1432년에 찬성사, 1434년에 찬성사 겸 대사헌, 이듬해 우의정 등을 지내고, 1437년에 사직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묘는 노량진동에 있었으나 1940년에 파주시로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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