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陽人행사자료❀

♣사은정보존회 정기총회♣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6. 16.
728x90

♣사은정보존회 정기총회♣

♠2024-06-15-토-11시~~~

(우) 17076  

경기 용인시 기흥구 사은로 161 

(지번)경기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615-1

[정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두암산에 있는 조선 전기 정자.

[개설]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정암 조광조, 방은 조광보, 회곡 조광좌, 음애 이자 등이 모여 학문을 논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을 사은(四隱)이라 한 것은 정암, 방은, 회곡, 음애가 서로 친하게 지내며 도의(道義)로써 사귀어 더불어 즐거워하고, 농사 짓고[耕], 나무하고[薪], 낚시질하며[釣], 나물 캐는[菜] 네 가지를 낙으로 삼아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정자를 지었기 때문이다.

[변천]

사은정은 1519년의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에 세웠으므로 16세기 초에 초창된 것으로 보인다. 「사은정 중수기」에는 1796년(정조 20)에 중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조 때 중수하면서 단청을 다시 하고 서재(書齋)를 짓고 승사(僧舍)를 두어 보호하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변에 사은정 외에도 다른 건물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899년(고종 36)에 이용구(李容九)가 지은 중수기에 “예부터 정자가 있었으므로 지금 새로 복원하면서도 편액은 옛날 그대로 사은이라 하였다”고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정조 때의 중수 이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락하였다가 조선 말기에 다시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에는 원래의 규모에 외벽을 시멘트벽으로 바꾸고 전퇴에도 벽을 막아 좌우 칸에는 유리창을 달고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다. 1989년에는 옛 문헌을 고증하여 전면 3칸, 측면 2칸 팔작집으로 중창하면서 마루를 높게 가설하여 누각처럼 꾸며 정자로서의 외관이 회복되었다.

[형태]

평면 구성을 보면 전면 3칸, 측면 2칸인데, 향좌측 두 칸에 걸쳐 누마루를 구성하고 오른쪽에는 방을 들였다. 측면 2칸 중 방 앞쪽을 반 칸으로 나누어 전퇴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양쪽 측면 전퇴칸과 앞면에는 쪽마루를 덧달고 계자각으로 꾸민 난간을 설치하였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누마루 바닥 높이까지 4단의 계단을 놓았는데, 내민 난간 때문에 마치 함입식 계단처럼 보인다. 지붕은 팔작으로 구성하였다. [현황]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산줄기의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은정 내에는 민종현(閔鍾顯)이 지은 「중수사은정기(重修四隱亭記)」, 이용구(李容九)가 지은「사은정 중수기(四隱亭 重修記)」, 정범조(鄭範祖)가 지은 「사은정기(四隱亭記)」가 전한다. 정자의 앞면 처마에는 “사은정(四隱亭)”이라는 현액이 걸려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四隱亭重修記▣

[정의]

조선 후기 이용구가 사은정의 중수를 기념하여 지은 기문.

[개설]

「사은정 중수기(四隱亭 重修記)」는 조국형(趙國衡)과 이인규(李麟珪)가 사은정(四隱亭)을 중수한 뒤에, 작자인 이용구(李容九)에게 중수기를 부탁하자 지어 준 기문(記文)이다. 글씨는 정영소(鄭榮韶)가 썼으며,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에 있는 사은정(四隱亭)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사은정은 정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하여 중종 때의 유학자로 식견이 높았던 조광보(趙光輔)와 조광좌(趙光佐)이자(李耔) 등 사현이 장수 강학하던 정자이다. 이곳을 사은이라 한 것은, "은거하면서 농사짓고, 나무하고, 고기를 낚고, 약초를 캐는 네 가지 즐거움의 뜻을 취한다"는 의미이다.

[내용]

"사은정의 연혁과 함께 조광조조광보조광좌이자 선생의 학덕과 의리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서울의 남쪽 구성면 두암 위에는 예부터 정자가 있었으므로, 지금 새로 지으면서도 편액은 옛날 그대로 사은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전하여 말하기를, “정자를 세우는 이유는 산수가 아름답기 때문에 짓는 것이며, 인물의 번성함으로 이름 붙인다.” 하였는데, 이 정자를 은(隱)이라 함에 일은(一隱)이라 하여도 가할 것을 어찌 사은(四隱)이라 하였는가.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 정암(靜岩) 조 선생과 당질 방은(方隱), 회곡(晦谷) 중계공(仲季公) 및 음애(陰涯) 이공이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네 분은 도의로써 계를 맺고 은거하여 그 뜻을 구하고자 경(耕)·장(莊)·조(釣)·채(菜) 네 가지 낙을 취하여 여기에 정자를 짓고 이름붙인 것이다. 정자 근처에는 선현의 묘소가 있고 전원의 취미를 깃들일 수 있었다.’ 하였다.……

뒤에 화를 당하여 정자 역시 폐해지고, 네 분이 서로 화답하여 지은 글과 서찰도 없어져 전하는 것이 없었다. 오직 음애공이 조수재(趙秀才)에게 보낸 글이 남아 있을 뿐인데, 같이 은거하고자 한 뜻이 나타나 있다. 네 집안의 후손들이 그 뜻을 흠모하여 이 정자를 중건하고, 상서 민종현(閔鍾顯)이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그 같은 일이 있은 지도 근 백여 년이 되었으니, 이번 중수함에도 기를 적을 만하리.……

갑자년 봄에 네 현인의 유손이 함께 꾀하여 자금을 내어서 옛 정자를 지음에, 조 문정공의 사당과 묘소가 또한 같은 군에 있으니 그 흠모함은 더욱 더하리라. 조국형(趙國衡), 이인규(李麟珪)가 그 일을 주도하고, 병인년 봄에 일을 마치었다. 모두 네 칸으로 전답이 두어 경이고, 옛날과 같게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사은정이다. 훗날 이 정자를 오르는 사람은 마땅히 옛 선현들이 여기서 행한 의례를 본받을진저."

[의의와 평가]

「사은정 중수기」에 따르면, 사은정 정암 조광조 선생이 은거하면서 처음 지었던 정자가 퇴락하자 민종현이 중창하였으며, 다시 백여 년 뒤에 중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사은정기(四隱亭記)」, 「중수사은정기(重修四隱亭記)」와 함께 사은정의 자취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유산이다.

 

▣深谷書院重建上樑文▣

 

[정의]

조선 중기에 김상헌 :  심곡서원 중건에 즈음하여 지은 상량문.

[개설]

「심곡서원 중건상량문(深谷書院 重建上樑文)」은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심곡서원 중건 상량식(上樑式)에 즈음하여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후손들이 글을 청하자 지어 준 상량문(上樑文)이다. 심곡서원 강당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심곡서원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으로, 조광조를 봉안한 곳이다. 조선 중기 효종 때 사액(賜額)되었다.

[내용]

김상헌은 상량문 서두에서 조광조 선생이 우리나라 도학의 계통을 이었으며, 그 연원이 김굉필(金宏弼)에 있음을 서술하고, 정암 선생의 학덕과 효행을 칭송하였다. 그리고 심곡서원을 중건하게 되어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향례를 다시 계승할 수 있음을 격려하고, 유학이 성행하기를 권장하였다. 이어서 상량문의 형식인 “아랑위포양동(兒郞偉抛梁東……)”이란 문구 다음에 제자 군자가 유학의 진작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의의와 평가]

심곡서원의 중건 사실과 정암 조광조의 학통 및 당대 용인 지역 유림들의 활동상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다.

 

四隱亭記 丁範祖

四隱亭者。文正公靜菴趙先生講道之所也。亭在駒城之治南翠鳳,寶蓋兩山中。有峭壁層巖。淸川曲水之勝。亭名以四隱。耕於隱。採於隱。釣於隱。游於隱。先生之寓隱而樂者也。當中廟御極。則側席求賢。勵精圖治。有大有爲之志。而先生以直道正學。遭遇聖辟。訏謨日贊。以挽回三古爲己任。顧奚暇四隱之爲樂哉。自古。聖 賢出處顯晦。何常之有。亦隨時揭厲。適於義而已。故伊尹以阿衡之重而告歸。周公以叔父之親而明農。先生雖身處帷幄。志存經濟。而遐擧之想。未嘗一日忘邱壑。而況陰陽迭消。理亂相乘。群奸傍伺。駭機之發。迫在朝夕。以先生卓識明智。豈不思奉身而退。不俟終日。而感激主知。眷顧宗祊。有低徊未忍訣者。而北門之禍作矣。先生有道義友三人。陰崖李公,宗人方隱,晦谷兄弟二公。是已。先生休沐之暇。與三君子者。講明經旨於四隱亭中。甚相樂也。先生旣受禍。 晦谷公以力救士流。亦及焉。悲夫。隱而在下。非君子之願。而與其朝躋顯要。夕陷坎穽。寧隱約以保身。故易曰。天地閉而賢人隱。又曰。遯世而無悶。使先生不得優遊卒歲。以遂隱居之樂。而興受禍敗。爲世所悲者。豈氣數世運使然歟。先生之卒。已歷三百有餘年。而亭亦隨廢。先生之九世孫國仁。悲年代之寢遠。悼先基之永墜。迺與三君子之子孫。合議而重創之。亭旣成。屬範祖爲記。夫進而致澤君民。一變世道。退而讀書講學。樂而忘憂。是二者。先生之志。而卒之有遺 恨焉。爲先生之子孫者。率德遵敎。在家在邦。各盡其義。以克成先生未卒之志者。蓋亦先生之有望於子孫者。勉之哉。謹書其語。爲四隱亭記。

 

[정의]

조선 후기 정범조가 사은정의 중창을 기념하여 지은 기문.

[개설]

「사은정기(四隱亭記)」는 조광조의 9세손인 조국인(趙國仁)이 사은정(四隱亭)을 중창하고 나서 정범조(鄭範祖)[1833~1898]에게 부탁하자 지어준 기문(記文)이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에 있는 사은정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사은정은 정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하여 중종 때의 유학자로 식견이 높았던 조광보(趙光輔)와 조광좌(趙光佐)이자(李耔) 등 사현이 장수 강학하던 정자이다. 이곳을 사은이라 한 것은, "은거하면서 농사짓고, 나무하고, 고기를 낚고, 약초를 캐는 네 가지 즐거움의 뜻을 취한다"는 의미이다.

[내용]

사은정의 경치와 연혁, 조광조·조광보·조광좌·이자 선생의 학덕과 의리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사은정은 문정공 정암 조 선생이 도를 강론하던 곳이다. 정자는 구성(駒城)의 치소 남쪽 취봉, 보개 양산 가운데 있는데, 높은 벽과 층층한 바위, 맑은 시내와 굽은 물의 승경이 있다. 정자를 사은(四隱)이라 이름한 것은, 숨어서 농사짓고, 숨어서 나물하고, 숨어서 낚시질하고, 숨어서 놀기 때문에 선생께서 숨어서 즐긴다는 뜻을 붙인 것이다.……(중략)……

선생께서 도의로 맺은 친우가 세 사람 있는데, 음애(陰崖) 이공과 일가 사람에 방은(方隱)과 회곡(晦谷) 형제 두 분이다. 선생께서 휴양하실 때 세 군자와 함께 사은정에서 경서의 뜻을 강론하여 밝히면서 매우 즐거워하였다.……(중략)……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이미 3백 년이 지났고, 정자 역시 따라서 훼손되었다. 선생의 9세손 국인이 세월이 지나감이 더욱 오래됨을 슬퍼하고, 옛터가 영원히 없어짐을 안타깝게 여겨 세 분의 자손과 의논하여 중창하도록 하였다. 정자가 이윽고 이루어짐에 범조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하략)

[의의와 평가]

사은정의 연혁과 중창 당시의 사은정 주변의 정황을 가늠할 수 있어, 현존하는 「중수사은정기(重修四隱亭記)」·「사은정 중건기(四隱亭 重建記)」와 함께 사은정의 자취를 살필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유산이다.

 

●重修四隱亭記●

=閔鍾顯=

隱居以求其志。行義以達其道。斯聖人之論出處也。然間有道未及行而厄於時。身未及隱而罹於禍。若本朝己卯諸賢所値。可謂悲夫。方北門禍作。一時諸賢。騈首就戮。其或幸而得免。亦且流離顚沛。以沒其世。如巖霜一下。百卉不榮。使斯民不復見三代之盛。而志士仁人。齎恨於無窮。若是者。天也。或者。以諸賢名太高。進太早。發太銳。恨未能蓄德用晦。俟時而見。夫豈以諸公之賢。而智有所未周哉。余讀陰崖李先生與趙秀才書。固知諸賢之志。未始不在於隱也。書稱靜菴趙先生,方隱,晦谷兄弟曁陰崖公。爲道義契。相得歡甚。又以其邱墓田園之相近也。卜築于漢南之龍仁。名其亭曰四隱。蓋有取於耕薪釣採四者之樂。爲終老計。而亦以見四賢偕隱之志。未幾。靜菴,晦谷。次第遘禍。方隱下世。幷其詞章筆札。翳然無傳。陰崖沒最後。而流寓湖縣。不克畢命松楸。爲臨死恨。獨是書在集中。敍述遊從。感念存沒。覽者涕下。亭亦間廢。鞠爲荒草。至頃歲。諸賢後孫之居是邑者。相與出力重新之。塗以丹雘。刱書齋。置僧舍以護焉。工役旣完。規模漸備。仍屬余記其事。余惟靜菴先生。以正學倡群賢。陰崖以德望重朝野。晦谷,方隱。於靜菴爲四從。而見推甚盛。雖不克進而大行於時。退猶將講明斯道。以傳諸後。而乃備經厄運。天禍人亡。卽其朋儕盛衰之際。上下往復。無不可悲。嗚呼。茲曷故焉。蓋聞賢之爲敎也。始於事親敬長。終於尊主庇民。輔之以師友講習。仁義是秉。道學是崇。其於禍禍之來。未嘗切切焉計較。故摧敗而名益隆。湮鬱而道益彰。家誦其言。戶服其訓。天理明。人心淑。則向之暫出而行義者。其功化之盛。爲如何哉。始方隱在己卯前。沈晦谷愚。雖靜菴當朝。而卒不能致。禍亦不及焉。可謂隱者也。易曰。君子之道。或出或處。或默或語。同心之言。其臭如蘭。心之同者。未必其迹皆同也。以方隱之不同。而求諸賢之所以異。則異者。不必異。而同者。固自如也。後之人。求觀諸賢之道。不以迹而以心。則其於四隱之義。庶幾有發焉爾。亭在龍仁治南斗巖之上。有溪山之勝。去陰崖先墓。不數里而近。靜菴俎豆之享。若衣履之藏。俱在是縣。亭之重建也。靜菴後孫國仁。陰崖後孫斗演。晦谷後孫弘述。咸得其事。而其中弘述。主張幹事。以終其役。後之觀斯亭者。亦知斯人之有功也夫。

출처: https://sugisa.tistory.com/15717007 [晛溪 斗井軒 Sugisa:티스토리]

◐사은정[四隱亭, Saeunjeong Pavilion]

사은정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615번지[기흥구 사은로 161]에 있다. 2001년 3월 17일 용인시의 향토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사은정(四隱亭)은 본래 조선 중종 조의 명현이며, 동방4현 중의 한 사람인 정암 조광조 선생을 비롯하여 중종 때 유학자로 식견이 높았던 방은 조광보, 기묘명현 회곡 조광좌, 목은 이색(한산인(韓山人,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의 후손인 음애 이자 등 4현(四賢)이 모여 학문을 논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음애가 조수재(趙秀才)에게 보낸 글 중에 “정암, 방은.회곡 형제와 음애가 도의로써 사귐을 맺어 서로 더불어 즐거워하였고, 또 그 선대 산소와 전원이 가까운 곳으로서 한양 남쪽 용인에 터를 잡아서 정자를 짓고 사은이라 하였는데 대개 농사(耕)짓고, 나무(薪)하고, 낚시질(釣)하며, 나물(菜)캐는 네 가지의 뜻을 취한 것이다”고 하였다. 보존회 관계자는 “지은지 500년이 지난 사은정을 외형을 보존하고 현인들 가르침을 후세에 전해주기 위해 사적비를 건립했다”고 했다. [2020.06.15.월.건립]

 

경(耕) 신(薪) 조(釣) 채(菜)의 즐거움을 위한 정자. 사은정은 네 가지 즐거움을 뜻한다. 즉 밭을 갈고, 나무를 하고, 낚시질을 하며, 나물을 캔다는 뜻이다. 이 네 가지 즐거움이야말로 노년의 인생을 더욱 윤택하게 할 수가 있다. 사은정은 이 네 가지 즐거움을 함께 즐기기 위해서 세워진 정자이다. 그리고 네 분의 선조들을 위하여, 후손들이 몇 번을 중수하면서 그 뜻을 기린 정자이기도 하다.

처음 사은정이 지어진 것은 1,500년대 초일 것으로 보인다. 이 정자를 처음 지은 이유는 조선조 중종 때의 명현이자, 성리학의 대가인 동방사현 중 일인인 정암 조광조(1482 ~ 1519), 중종 때의 유학자인 방은 조광보, 회곡 조광좌,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기묘사화 때 연루되어 화를 당한 임애 이자(1480 ~ 1533) 등이, 도의로 친우를 맺고 노년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정조 20년인 1796년에 정암과 음애. 회곡 선생의 후손들이 중건을 하면서, 서재를 짓고 방을 드렸으며 단청도 다시 하였다고 하였다. 아마도 처음에 사은정을 건립하였을 때는 단순한 정자만 있었던 것 같다. 그 뒤 고종 13년인 1876년에 정자가 퇴락하여 후손들이 중창하였으며, 1925년과 1988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였다.

사은정은 기묘명현들의 생존시부터인 16세기초부터 이 고장에 전해오는 유서깊은 정자이며 지금도 정범조, 이용구, 조철, 민종현등의 묵적이 중수기에 남아있고 2백여년전에 현액한 현판이 현존하고 있다.

용인 정신병원에서 신갈 오거리 길을 비켜서, 민속촌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지곡동이 된다. 이 길로 가다가 민속촌이 나타나기 전 우측에 주유소가 있고, 그 옆길로 들어가면 사은정이 있다. 사은정은 민속촌의 옆 야산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소나무와 바위들이 흰 눈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전국의 정자들은 사계절 언제 찾아가든지,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다. 사은정 역시 겨울 경치도 아름답다.

사은정의 앞으로는 지곡리의 들이 펼쳐진다. 주변에는 낮은 야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쌓아 아늑하다. 뒤 야산에서 나무를 하고, 들판으로 나가 나물을 캤을 것이다. 그리고 앞의 너른 곳에 밭을 갈아 먹거리를 장만하고, 멀지 않은 내로 나가 낚시를 하면서 하루해를 즐겼을 것이다. 사은정은 그런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어 네 분의 선조들이 마련한 정자이다.

겨울에 보는 사은정은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사은정은 중앙에 계단을 놓았다. 중앙의 계단은 장대석으로 하였으며, 계단 양 옆이 돌출이 되게 하여 멋을 냈다. 마름모꼴의 잘 다듬은 주춧돌을 놓고, 전면과 측면은 계자각 난간을 둘렀다. 우측으로는 한 칸 방을 드려 겨울철에도 묵을 수 있게 하였으며, 방과 대청을 나란히 놓고, 좌우에 개방된 툇간을 놓았다. 툇간은 본 건물보다 돌출이 되게 구성해 여유를 보인다.

       중원야유감(中元夜有感)

                                            =음애(陰崖) 이자(李耔, 14801533)=

中元佳會墮微茫不獨人違天亦荒

중원가회타미망부독인위천역황

月漏頑雲光暗淡夢驚孤枕氣凄涼

월루완운광암담몽경고침기처량

餘生落落同漂梗萬事悠悠合面墻

여생락락동표경만사유유합면장

獨抱幽懷仍不寐村鷄催曉替寒螿

독포유회잉불매촌계최효체한장

칠월 보름 아름다운 모임이 가득한데

홀로 사람이 어긴 것만 아니라 하늘도 또한 거칠었네.

달이 두꺼운 구름 속에서 새어나오니 빛이 어둡고 희미하고

꿈이 외로운 베개에서 놀라니 기운이 처량하네.

남은 생애가 쓸쓸하여 떠도는 것과 같고

만가지 일은 아득하여 벽을 마주보는 것과 같으네.

홀로 그윽한 회표를 안고 그대로 잠 못 이루니

마을 닭이 새벽을 재촉하여 찬 매미를 대신하네.

 

=한산이씨종친 변호사시험 합격, 회장님이 위로금 전달식=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