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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조광조,학포양팽손◑

♣용인 문정공 정암 조광조 묘소 및 신도비와 가족묘원!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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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문정공 정암 조광조 묘소 및 신도비와 가족묘원!

▣역사의 흔적을 가다…정치 격변기로 단명▣

심온, 조광조 묘…수원‧용인에 위치하며 2km 떨어져 있어...

 

위인 !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역사의 인물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를 사이에 두고 약 2km의 거리에 두 인물이 잠들어 있다. 수원의 광교에는 심온 선생의 묘가 있고, 용인의 광교에는 조광조 선생의 묘가 있다. 두 선생의 묘소는 불과 2km의 거리에 있으며, 걸어서 30여분이면 오갈 수 있다.

심온 선생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세종대왕의 장인이다.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개국에 참여했다. 이후 이조판서 등 요직에 등용되어 정치를 펼쳤지만 권력의 소용돌이에 밀려 44세의 젊은 나이에 수원으로 압송되어 사약을 받았다.

그러면 조광조는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심온 선생보다 1세기(심온 1375년 출생, 조광조 1482년 출생) 후의 사람으로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하여 유교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 하였으나 시대를 앞서간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나뭇잎 글자로 인해 유배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심온 선생과 조광조 선생은 살아온 시대는 다르지만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은 것과 정치의 정점을 달리다 생을 마감한 것, 광교산 줄기에 잠들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 벌써부터 찾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지난 10월 30일 오전에 심온 선생의 묘소가 있는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을 찾았다.

선생의 묘소는 한눈에 보아도 대수롭지 않다. 인근에는 광교 박물관과 혜령군 이지의 묘소가 있으며, 역사공원으로 관리되고 있어 많은 관람객들이 찾는 곳이다. 혜령군 이지는 세종대왕의 이복동생이다. 광교 박물관은 수원 이의동과 용인 상현동이 광교 신도시로 개발 되면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는 지역 역사박물관이다.

박물관 뒤쪽에 있는 혜령군 이지의 묘는 처음 수원화성 동문 안에 있던 것을 국가가 심온선생의 묘와 함께 관리하기 위해 여우골 산자락 수원 국궁장(활터) 인근에 옮겨져 있었다. 그러다 광교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전 됐다.


심온 선생의 묘소 입구는 홍예문이 설치되어 있고, 연못과 작은 정자, 관리동이 있는데 입구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하고 주변을 산책 했다. 선생의 묘소는 몇 번 둘러보아 아쉬움은 없다. 묘소를 오르는 길은 비탈이 심하다. 도시가 들어서기 전에는 앞이 탁 트인 시야로 시원한 느낌 이었는데 지금은 어떠한 모습인지 궁금하다.

발길을 돌려 조광조 선생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영동 고속도로와 서울 용인 고속도로 아래 43번 국도를 따라 걷는다. 광교신도시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곳을 걸었는데 그때는 인도가 없어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변을 걸어 위험했는데 인도가 만들어져 있어 안전한 보행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사실은 그 때와 같이 인도가 없으면 어쩌나 하고 조바심을 하며 다리 아래 까지 왔다. 30여분을 걸어 조광조 선생의 묘소에 도착했다. 도로 입구에 '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 화살표 안내판이 있다. 입구를 따라 돌계단을 내려가니 공사가 진행 중인지 곳곳에 잔디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조광조 선생 묘]

잔디밭에 조광조의 시문과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을 때의 기록과 훗날 숙종대왕(肅宗大王)은 정암집(靜蓭集) 발간에 즈음하여 시(詩)로 슬회한 글이 표석에 기록되어 있다.『임금님 섬겨 사랑하기를 어버이 섬겨 사랑하듯 하였노라 백성 걱정 돌보기를 식구 걱정 돌보듯 하였노라....... 섣달 스무날 아침이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산과 들이 온통 하얗게 눈부신데 맑게 갠 전라도 능주벌 선생의 유배지에 느닷없이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고 당도하여..... 멀리 북녘을 향하여 임금께 큰절을 올린 후 정성껏 수발해준 주인 농부에게 작별을 고한다 미안하오 신세보답도 못하고 흉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으니 민망하기 그지 없구려.....』

훗날 세종대왕은 『죽음에 임하시어 남긴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어리더니 이제 선생의 글을 읽음에 도덕의 밝고 높으심을 더 더욱 알겠노라...』라고 적혀 있다.


[조광조 시 표석]

[정암 조광조 선조님 신도비각]

묘역 안내도와 신도비각(2022년말에 신도비각공사가 시작되여 완성되였다)를 따라 올라가니 작은 돌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묘역은 가족 묘지로 이뤄져 있다. 제일 위쪽이 문정공 조광조 묘이고, 아래쪽으로 바라보면서 왼쪽에 돌아선 능선에 증조부모 그 아래가 조부모, 부모, 형님, 아들 묘가 있다. "조광조는 후사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로 잘못 알려진 이야기가 전해져 있다.

조광조 가족묘지 조성이 언제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묘소를 찾은 인근 주민은 "조광조가 어린 시절 형님과 함께 이곳 상현동 인근에서 생활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들었다"고 전해준다. 이곳에 가족묘지가 조성된 것은 선생이 돌아가시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후손들이 뜻을 모아 묘지를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묘지를 둘러보고 내려와 이곳저곳을 살피던 중 『이곳 묘역은 1950년 6.25사변 이후 반세기간 거의 방치되어 오다 시피 해 왔다. 아 ! 이제 그 누구를 탓하랴? 1997년 초입에 석축(石築)을 쌓고 표석비 설치를 시발로 이어서 시비를 세우고 돌계단을 조성하고 반세기 동안 자생하여 우거진 잡목을 제거하면서.....』 2010년 후손 종회가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 선생과 심온 선생의 묘소를 찾아 느낀 것은 권력의 소용돌이를 평가하기보다는 선생의 삶을 담아 보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분명 역사적 인물이다. 

 

용인 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와 한양조씨 ..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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