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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중앙아시아 첫 정착지 바스토베 언덕, 토굴!!! 우슈토베, 조선족과 고려인 문화차이!!!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6. 17.

 

https://www.youtube.com/shorts/hf2ENHIuOYs?feature=sharehttps://www.youtube.com/shorts/hf2ENHIuOYs?feature=share

조선족 : 대한민국이 독립이 됐음에도 만주에 터를 잡고 살던 조선인들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주에 남게되고(중국을 선택) 이후, 중국에선 조선족으로 구분되어 한반도 남북전쟁때는 중공군으로 참전까지 했다고합니다.   중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걍 중국인이네?!

 

고려인 : 시작은 조선족과 동일하지만 1860년 청나라의 아편전쟁에서 러시아가 연해주와 외만주지역을 얻으며 연해주로 있던 조선인들은 러시아 정권에 편입되었고 이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으로 결국 중앙아시아로 옮겨지게 되며 이젠 우즈백키스탄,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분산되어 정착하게되었다고합니다.

커자흐스탄 Ushtobe의 바스토베 언덕 정상에서 바라본 고려인 공동묘지와 들판. 1937년 강제이주 열차에 실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역에 내린 고려인들은 추위를 피해 바스토베 언덕으로 와 토굴을 파고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봄 토굴에서 나온 고려인들은 맨손으로 황무지를 옥토로 일궈내는 등 강인한 생명력으로 새롭게 일어선다.

823Q+7M6 대한민국ㆍ카자흐스탄 우호공원 Ushtobe, 카자흐스탄

https://youtu.be/6go2ErUI1io

 

https://youtu.be/UlPGQaIEgCc

❗️조선족과 고려인 문화차이

■- 조선족 : 조선후기 조선에서 건너온 중화사상에 동화된 중국인​

* 중화사상 : 중국인 특유의 자문화중심 사상, 중국문화가 어떠한 다른 문명보다도 우수하다고 믿으며 다른문명을 오랑케라 낮잡아보는 사상​, 오히려 中和오랑캐라 하자!

- 고려인 : 힌국인의 정서를 유지중이며 한국에 친화적인 입장을 띔.​

* 한국의 음식/ 명절(설, 추석) 그대로 지내며 언어도 같으며 심지어 말도 통한다고 합니다.(조선시대 한국어느낌)그러나 2,3세대까지 내려가며 한국어를 쓰는 고려인들은 점점 적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TMI. 세계의 한국인 분포 미국계한국인(260만명)>조선족(250만명)>일본계한국인(90만명) >고려인(50만명)

https://youtu.be/aNL5I52nMBM

●고려인들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2024.06.03

1937년 9월 21일 -11월 15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 중앙아시아(6천㎞) 강제 이주당함.
우즈베키스탄 16,272가구 76,525명 이주, 카자흐스탄 20,170가구 총 95,256명 이주.(총 36,422가구. 총 171,781명 이주) 이주 전 한인 지식인 2,500명 총살형. 강제 이주는 지식인의 사전 처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간 수천 명에 달하는 한인 지도자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곧이어 진행된 강제 이주에 대한 통보 역시 출발 며칠 전에야 이루어졌다.

이주 통보 이후 여행이 중지된 상황에서 거의 맨몸으로 이들은 정든 땅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곡식의 씨앗은 잊지 않았다고 하니 한인들의 농사에 대한 집념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화물차와 가축 운반 차를 개조한 차량에 짐짝처럼 실린 이들은 매서운 시베리아의 삭풍 속을 한 달여 간 달려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먹을 것을 전혀 공급하지 않아'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보충하기 위해 역에 서면 간이 상점에 뛰어가 '빵 등 사람 먹는 것은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사다 먹으면서' 여행을 했다. 열차에 화장실이 없었으며 역 구내에 열차를 세우면 모두가 내려 대소변을 본다고 '역도 아닌 허허벌판'에 차를 세웠다.

마른 음식을 계속 먹으며 고통을 겪다가 열차가 섰을 때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지피고 국물이라도 끓이려고 하면 열차가 떠나곤 하여 제대로 끓여 먹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여린 노인과 어린이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여행 중에 아이들 사이에 홍역이 발생하여 유아 사망률이 60%를 상회하였다. 여행 중에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져 이산 가족도 다수 발생하였고 사고도 발생하였다. 한인들이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후 수용 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허허벌판에 내려 놓았다. 그 무서운 겨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1938년도의 인구 표본 조사를 보면 1천 명 당 42명이 사망했으며 유아 사망률은 20%나 되었다.

특히 고통스러웠던 기간은 이주 첫해 겨울부터 이듬해 농사를 짓기까지의 기간이었는데 토굴이나 창고, 마구간 등을 개조하여 겨울을 났으며 방바닥은 맨 땅이었다고 한다.
강제 이주 이후 한인의 거주 이전은 제한되었다. 한인들은 일정한 거주 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적어도 1953년까지 약 16년 간 집단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족 교육이 금지되었음은 물론 국가 기관 취업과 취학에도 제한이 있었다. 사회 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제한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인은 벼농사를 시작하여 우즈베키스탄은 주요 쌀 농사 지역으로 변화하였다. 한인은 목화 등 다른 작물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갔다. 전후 한인은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켰다. 소연방이 자랑하던 콜호즈는 모두 한인 콜호즈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력 영웅을 낳았음은 물론이다. 인구 대비 노력 영웅 비율은 모든 민족 가운데 최고를 자랑하였다.

강제이주에 관한 가장 정확한 증언자로 알려진 송희현씨(74)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얘기해 주었다.

“나는 1937년 10월 11일 오후에 블라디보스톡역에서 기차에 태워졌소. 사실은 그보다 앞서 태워지도록 되어 있었는데 아내가 출산하기 위해 입원하는 바람에 늦어졌소. 그래서 내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었고 그 같은 모자의 생이별은 그 후로 꼬박 5년 동안 중앙아시아 곳곳을 서로 찾아 헤매는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소. 강제 이주는 아주 치밀한 사전 계획과 철통 같은 감시 아래서 이뤄졌소. 국제적인 문제로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였소. 이주에 주로 이용된 철도는 시베리아 철도였소.

 시베리아 철도를 핵심 노선으로 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던 고려 사람들은 며칠 앞서서 소환장을 발부했소. 간단한 살림 도구만 챙겨서 전가족이 시간엄수 집합하라는 것이었소. 정말 어느 날 갑자기 통지서가 나온 거지요. 당황해할 겨를도 주지 않았소. 어떤 지역에서는 그 때 한창 가을걷이를 할 무렵이었는데 얼마간의 곡식값을 주기도 했소. 이사 비용이라면서 일률적으로 성인 1인당 160루블을 지급했소.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갔소. 하도 어이없는 일이어서 별다른 준비도 못하고 당황해하기만 하다가 기차를 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소. 기차는 맨 처음부터 태울 사람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한 곳에서 몽땅 태운 다음 출발했소. 사람들마다 탄 곳이 다 다르지요.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는 좀체 쉬지 않았소. 기차를 타고 보니 그것은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객차가 아니라 화물차였소. 벽은 두꺼운 판자를 가로질러 만들었고 바닥도 판자였소. 벽은 판자 틈서리가 제법 벌어져서 기차가 달리자 바람이 심하게 새어들었고 바닥도 그랬소. 안에는 출입문을 중앙으로 해서 좌우로 제법 선반을 질러놓았더랬소. 2층이지요. 한 층에 10명씩을 배정했소. 그러니까 한쪽에 20명이고 화물 객차 하나에 모두 40명이 타게 된 거지요. 대개 가족 단위로 태워졌소.

낮에는 그런대로 참아냈지만 저녁이 되어 기온이 뚝 떨어지자 기차 안은 얼음이 얼었소. 준비해온 이불이며 옷가지가 모두 변변찮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는 얼어붙기 시작했소. 나는 젖먹이가 딸린 아내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소.아내는 아직 몸이 덜 여문 상태였기 때문에 고통은 말할 수 없이 극심했소. 상상에 맡기겠소. 기차는 쉬지를 않았소. 대소변볼 틈도 안 주었소. 마실 물이며 끼니를 해결할 방도가 없었소. 한두 끼니는 가지고 온 음식으로 때웠는데 나는 아내에게 물이라도 마시게 해주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었소. 당신은 상상할 수 있겠소. 그런 상태로 꼬박 42일 동안을 실려갔소.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느냐고는 묻지 마시오. 우리가 살아난 것은 그냥 한(恨)때문이오.”

- 까레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 중 223,224페이지 -

이주자들은 당시 짐을 챙기는데 24시간이 주어졌다고 한다. 일주일 전에 사실을 안 사람들도 묘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식탁, 의자 등 가구를 팔려 해도 이미 아무도 사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광주고려인마을 우크라이나 난민보고서](11)중앙아시아 첫 정착지 우슈토베

  • 기자명 김명식 기자 입력 2022.10.05 19:40

맨손 일군 수백만평 옥토…고려인의 혼이 깃들다
이유도 모른채 짐짝처럼 실려와
추위·배고픔 견디며 농토 일궈
바스토베 언덕 잠든 200여명 넋
스스로 일군 들녘 바라보며 누워

현재는 상당수 농토 휴역지 상태
이농 현상에 농사인구 감소 이유
고려인 관심자 외 방문객 드물어

카자흐·우즈벡 거주 고려인들
스탈린 사후 이주제한 해제되자
공부·고본질 위해 우크라 이동

바스토베 언덕 정상에서 바라본 고려인 공동묘지와 들판. 1937년 강제이주 열차에 실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역에 내린 고려인들은 추위를 피해 바스토베 언덕으로 와 토굴을 파고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 봄 토굴에서 나온 고려인들은 맨손으로 황무지를 옥토로 일궈내는 등 강인한 생명력으로 새롭게 일어선다. . /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광주고려인마을과 호남대학교는 올해 한국-중앙아시아 수교 30주년을 맞아 국제문화교류단을 구성해 지난달 30일부터 9박 10일 일정으로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에 첫 발을 내딘 지역이다. 방문기간 문화교류단은 자체 창제작한 뮤지컬 ‘나는 고려인이다’를 무대에 올려 호평 받았다. 또 디아스포라 한민족 공동체 방향성 모색을 위한 국제심포지엄를 개최해 주목받았다. 광주 광산구 우호교류단도 ‘고려인’을 매개로 경제·문화 교류를 추진했다.

남도일보는 우크라이나 전쟁난민이 대거 안착한 고려인마을의 발전 방향성을 모색하고자 문화교류단을 동행했다. 현지에서 취재한 강주이주 고려인의 아픔과 강인한 생명력, 우크라이나 이주 배경, 우호·문화교류단 방문 활동, 창립 90주년 ‘고려극장’, 국제심포지엄을 토대로 ▲우슈토베를 가다 ▲우호·문화교류 의미 ▲창립 90년 고려극장으로 나눠 3차례 싣는다.

우슈토베 역. 1937년 10월 9일 550명의 고려인을 실은 기차가 첫 도착한 뒤 123편의 이어지며 그해 12월까지 17만여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1주일 거리 한달 걸려 도착

우슈토베(Ushtobe). 고려인들로선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곳이다. 연해주에서 강제로 중앙아시아행 기차에 태워진 고려인이 첫 발을 디딘 지역이다. 카자흐스탄 옛 수도 알마티에서 서북쪽으로 360km 떨어진 우슈토베는 행정구역상 카자흐스탄 제티수 주 카라탈 군에 속한다.

1937년 9월 9일 고려인 550명을 실은 첫 기차가 블라디보스톡 북쪽 라즈돌노예역을 출발한다.우슈토베에 도착한 건 10월 9일. 꼬박 한달이나 걸려 도착했다. 우슈토베까지 6천500km의 기차길은 통상 1주일이면 도착한다. 하지만 기차가 오는 도중 한 번 정차하면 며칠씩 머무르는 게 다반사여서 4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고려인들은 이유도 모른채, 짐짝처럼 기차 화물칸에 실렸다. 종착지조차 모른째 한 달을 두려움과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시베리아 추위에 떨어야 했다. 먹을 것도 전혀 공급받지 못했다.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공급받기 위해서 역에 정차하면 간이상점에 뛰어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사다먹으면서 갔다.

먹고, 싸고, 자고를 한 공간에서 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 숫자가 무려 2만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운이 나쁜 주검은 속절없이 달리는 기차에서 내던져졌다고 한다. 조금 운이 좋으면 기차가 멈출때 황량한 벌판에 그대로 버려졌다.

고려인을 태운 기차는 그해 12월까지 123편이 추가로 도착한다. 17만명이 넘는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실어나른다. 고려인들은 이곳을 시작으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전 지역으로 흩어졌다. 1937년 10월 25일 예조프 소련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은 당중앙에 극동의 고려인 3만6천442가구 17만1천781명이 중앙아시아로 이송됐다고 보고한 바 있다.

바스토베 토굴 입구에 세워진 기념석과 비문. 우슈토베 도착한 뒤 이듬해 봄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823Q+7M6 대한민국ㆍ카자흐스탄 우호공원 Ushtobe, 카자흐스탄

◇토굴서 시베리아 추위 버텨

우슈토베역에 짐짝처럼 버려진 고려인들은 혹독한 추위부터 피해야 했다. 이 시기는 한국에선 가을이지만, 시베리아와 인접한 카자흐스탄은 겨울이었다. 더구나 우슈토베 지역은 온통 평지였다. 바람을 조금이라도 막아줄 언덕부터 찾았다. 가장 가깝게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몰려갔다.

‘바스토베’ 언덕이다. 우슈토베역에서 북쪽으로 2㎞ 정도 떨어진 언덕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고려인들은 언덕의 경사면을 바람막이로 삼아 토굴을 파고, 주변의 갈대로 지붕을 만들어 겨울의 추위를 이겨냈다. 추위와 굶주림에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다. 특히 어린 아이들의 희생이 많았다. 고려인 중 도착 첫 해와 이듬해 출생자가 다른 해에 비해 유독 적을 정도였다.

 

토굴 옆은 바로 공동묘지가 됐다. 많은 고려인들이 묻혔다. 맨 앞줄에는 1세대들의 한글 묘지명이 나란하다. 쇠로 만든 묘지명은 머나먼 이국땅에서의 풍파를 오롯이 간직한 듯 붉은 녹만 가득하다.

봄이 오자 토굴에서 나온 고려인들은 지금의 우슈토베 마을로 옮겨왔다. 황무지를 일궈 논밭을 만들고 소중히 간직한 종자로 농사를 지었다. 멀리 떨어진 카라탈강에서 물을 끌어왔다. 한 알의 씨앗이 많은 결실을 맺듯이 그렇게 고려인들은 고난의 삶을 이겨내기 시작했다.

황무지로 버려져있던 수백만평이 농토로 변했다. 고국에서 보던 황금벌판이 다시 펼쳐졌다. 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다시 끌어올렸다. 블라디보스톡의 위도가 43도이고 우슈토베가 45도이니 2도를 끌어올린 것이다. 이런 자긍심 때문인지 묘지 비석은 하나같이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드넓은 농토를 향해 있다. 죽어서도 자신들이 일군 땅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싶었던 듯하다.

 

고려인들의 교육열은 동토에서도 식지 않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이들부터 가르쳐야 한다며 학교를 세웠다.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픔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교육이라 생각했다. 마을 입구 제일 좋은 땅에 학교를 지었다. 이름은 ‘원동학교’, 강제이주 전 연해주에 있던 학교이름을 그대로 썼다.

고려인이 살았던 바스토베 토굴. 현재 복원중이다.

◇모진 고난에도 남다른 교육열

고려인들은 스탈린 통치 시절에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후 차별대우를 받았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주거 환경은 집단수용소나 다름없었다. 국가기관 취업 등 사회진출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모진 학대와 고생을 이겨내며 농토를 개간하고 볍씨를 심어 대풍작을 이루었다. 3년 만에 자립기반을 이루는 기적을 일궈냈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새롭게 일어난 것이다. 바스토베 공동묘지에 노동영웅 묘지가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인은 여타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많은 노동영웅을 배출했다.

 

고려인들에 의해 중앙아시아의 농업은 크게 발전했다. 우즈베키스탄의 폴리토젤과 김병화 콜호즈,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 아방가르트 소프호즈 등 소련 전역에서 최고의 모범 집단 농장을 이들이 일궈냈다. 척박한 땅을 옥토로 바꾼 한인들은 소비에트 농업생산의 주요 축이 되었다. 한인들의 강인한 생명력은 중앙아시아에서도 빛을 발했다.

고려인들이 농사를 잘 짓는다게 알려지면서 소련 정부는 투르메니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크스탄 등에 고려인들을 이주시킨다. 그곳에도 콜호즈라는 집단농장을 만들어 고려인들이 농사짓게 했다.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있던 고려인들은 아랄해 인근을 비롯 아스트라한 지역까지 둥지를 틀게 된 배경이다.

고려인들이 피땀흘려 일궜던 그 농토는 현재 상당수 휴경 상태다. 우리나라처럼 도시화에 따른 이농 인구가 늘면서 농사짓는 사람이 줄어든 까닭이다. 알마티에서 우슈토배 가는 차량도 드물어 간혹가다가 한 두대씩 만날 뿐이다. 바스토베 언덕은 고려인에 관심있는 국내 사람들만 어쩌다가 방문한다. 여행차 카자흐스탄을 방문한 사람들도 어지간해선 들르지 않는다는 게 현지 한국인 관광가이드 설명이다.

알마티에서 만난 고려인 3세 유가이 콘스탄틴(57)씨는 “고려인들은 버려진 땅을 논으로 만들어 많은 쌀을 수확하자 농사를 잘 짓는다고 소문이 났다. 우즈벡과 카작에 살던 많은 고려인들이 소련 곳곳으로 이동했다. 우리 가족도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다가 정부 명령에 의해 투르크매니스탄 집단 농장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7년을 살았다. 공부와 일자리를 위해 알마티로 왔다”고 설명했다.

바스토베 공동묘지에 있는 조수만 씨 비문.

◇보다 나은 환경찾아 우크라이나로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대부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거주한다. 2021년 12월 기준 카자흐스탄에는 10만여명, 우즈베키스탄에는 17만여명이 살고 있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문화는 이전의 수도였던 알마티를 중심으로 한다. 3만 8천여명이 거주중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농촌 지역에 넓게 흩어져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크라이나까지 갔을까. 강제이주 당시 우크라이나에 갔다는 기록은 없다. 1953년 스탈린 사후 거주이동 제한이 풀리면서 이주한 것으로 관측된다. 김석원 국립키이브대 교수가 지난 7월 국내 한 신문사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스탈린 사후 이주 제한이 풀리자 고려인은 보다 나은 환경을 찾아 유학생 중심으로 우크라이나에 이주한다. 이어 1980년대 중반 고르바초프 집권기부터 1991년 구소련 붕괴와 여러 나라 독립으로 혼란이 생기고, 중앙아시아에서 우크라이나 흑토지대에서 농업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우크라이나 남부지방과 크림 지방에 중앙아시아 고려인이 대량으로 유입됐다.

 

이들은 고본질(계절농)이라고 들에 움막을 짓고 일하고 생활하며 돈을 벌었다. 우크라이나 남부지방 헤르손 니콜라예프 등지와 현재 러시아가 강점하고 있는 크림 지방에 많은 사람이 모여 농사지으며 생활 터전을 넓혔다.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봄 여름 일하고 가을에 수확하여 중앙아시아로 갔다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인 신조야 광주고려인 대표도 농사철에서 우크라이나를 갔다 오곤 했다. 러시아 침공을 피해서 광주에 온 우크라이나 고려인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첫 둥지를 튼 고려인 후손들인 셈이다.

남도일보가 전쟁이후 광주에 온 우크라이나 고려인 35가족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절반 이상이 남부지역 출신이었다. 또 우크라이나 거주 이유와 관련해선 ▲고본질 ▲가족 영향이라는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신조야 고려인마을 대표는 “현재 우크라이나에 몇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쟁을 피해 광주에 온 사람들 말로는 한 2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면서 “고려인이 우크라이나까지 간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우크라는 카작이나 우즈벡보다도 농사에 적합한 땅이 많다. 나도 우크라이나까지 가서 농사를 짓곤 했다”고 말했다.

알마티/김명식 기자 msk@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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