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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묘역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1.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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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묘-한양조씨-

(용인)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 묘-한양조씨-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서리 산3(서울공원묘원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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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서울공원묘원 )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 묘 -한양조씨-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서리 산3(서울공원묘원 D지구 45-1-2호)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서리 산3번지 서울공원묘원 D지구 45-1-2호●

◐제1대 대종약장 조종필 선조님(정암 조광조 선조님 직계후손 가족) 가족 납골당 : 용인 서울공원묘원◑

▣鍾弼종필▣

●字殷象號荷塘庚子生丁卯進壯己巳蔭都事歷縣監甲戌增廣文科歷三司春坊泮通三銓工判入耆社乙卯十二月四日卒◎墓龍仁郡水枝面上峴里深谷壬坐

자은상호하당경자생정묘진장기사음도사력현감갑술증광문과력삼사춘방반통삼전공판입기사을묘십이월사일졸◎묘룡인군수지면상현리심곡임좌

配豊山洪氏父蔭叅判承祖外祖文叅判廣州李敏會戊戌生

배풍산홍씨부음참판승조외조문참판광주리민회무술생

丁卯進壯己巳蔭都事歷縣監甲戌增廣文科歷三司春坊泮通三銓工判入 耆社

정묘진장기사음도사력현감갑술증광문과력삼사춘방반통삼전공판입 기사

龍仁郡水枝面上峴里深谷壬坐

용인군수지면상현리심곡임좌: 몇년전에 선영이 국가산단으로 흡수되여, 할수없시 현시대에 맞게 관리로 편한 서울공원묘원내에 납골묘당을 설치하여 모셨다.

女韓正愚文校理淸州人父文正字哲東子韓基岳

[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묘역 가는 길 /우측 첫번째 터진 곳으로 간다.]

[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묘역 가는 길/좌측 비탈길로 올라간다.]

[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납골묘역]

[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납골묘]

[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납골묘당]

 

조성교[趙性敎, 순조 18년(1818)~고종 13년(1876)], 자는 성유(聖惟), 시호는 문헌(文憲), 본관은 한양(漢陽), 증조는 조사근(趙思近), 조부는 교리 조수인(趙秀仁), 아버지는 조형만(趙亨晩), 생부는 조형관(趙亨觀), 어머니는 병조판서 한치응(韓致應)의 따님 청주한씨, 배위는 심흡(沈䨏)의 따님 청송심씨이다.

철종 10년(1859) 별시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고종 3년(1866)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동지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 7년(1870) 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한성부판윤 등을 거쳐 이듬해 예조판서에 올랐다. 이 해 다시 동지사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의정부좌참찬·대제학을 지내고 1873년 다시 예조판서로 임명되었다. 이때 경무대(景武臺)에서 실시된 정시문과의 독권관이 되어 고종에게서 시관으로 공평무사하라는 명을 받들었다. 또한 예조판서 재직 중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탄핵상소가 있자, 호조판서 김세균(金世均) 등과 연명상소하였다. 최익현의 상소 중 국왕에게 개혁을 건의하는 논의가 없다고 한 것은 자신들의 죄였으므로, 처벌을 바란다고 하여 월봉3등지전(越俸三等之典)에 처하여졌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당시 극심한 수재로 전주 등 각읍의 민호(民戶)가 피해가 많으므로, 각종 세납물의 상납 기일을 늦추어달라는 장계를 올렸다. 또 전라도에 면포가 부족하므로 병조의 각 군문(軍門)과 각 아문의 번포(番布)를 돈으로 대납할 수 있도록 하여달라는 장계를 올리는 등 선정을 위하여 힘썼다. 1876년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납골묘]

(용인)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묘-한양조씨-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서리 산3(서울공원묘원 D지구 45-1-2호)

조종필[趙鐘弼, 한종 6년(1840)~ ? ], 자는 은상(殷相), 본관은 한양(漢陽), 증조는 교리 조수인(趙秀仁), 조부는 조형만(趙亨晩), 아버지는 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 어머니는 심흡(沈䨏)의 따님 청송심씨, 배위는 참판 홍승조(洪承祖)의 따님 풍산홍씨이다.

고종 4년(1867) 진사, 187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사간원의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쳐 성균관대사성 및 이조참의, 한성부좌우윤·형조참판·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93년 정부당상에 올랐으며, 1895년 중추원1등의관, 1897년 태의원경·궁내부특진관이 되고, 강화도관찰사를 시작으로 함경남도·경기도·전라남도의 관찰사를 두루 역임하였다. 1901년에는 장례원경으로 정헌대부 정2품에 승진되었다. 1903년 다시 충청남도와 황해도 관찰사에 이어 지계아문감독을 역임하였다.

 

【관찰사 조종필(趙鍾弼) 선정비】

관찰사 조종필(趙鍾弼) 선정비는 비갈의 형태로, 비좌는 시멘트로 만들었으며, 비신 하단부에 총탄흔이 남아 있다.

-앞면- 「觀察使趙公鍾弼愛民善政碑」

-뒷면- 글자 새기지 않음

-비좌 : 높이-14㎝, 폭-77×51㎝

-비신 : 높이-138㎝, 폭-51×18㎝

 

[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묘 후경]

[대제학·예조판서 조성교(趙性敎)/공조판서 조종필(趙鍾弼) 묘 후경]

 

▣ 한양조씨 주요 세계도 ▣

 

(시조) 조지수(趙之壽) : 중서사中書事(???), ※단소-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노은동(매산)이하 2~5세조단소 조성[충남 홍성군 홍북읍 대인리 559-2 ]

(02세)조 휘(趙 暉) : 雙城摠管

 

●쌍성총관부고(雙城摠管府考)(상(上))

◐방동인

발행기관 : 관동사학회 간행물 : 관동사학 1권0호 간행물구분 : 연속간행물 발행년월 : 1982년 09월 페이지 : 19-36(18pages)

高麗 雙城摠管府에 관한 硏究

충남대학교 도서관 모바일 홈페이지 장재성. 서명/저자사항 高麗 雙城摠管府에 관한 硏究/張在盛. 전주:全北大學校,1985. 58 p.;26 cm. 학위논문주기 학위논문(석사)--全北大學校 敎育大學院,1985. 학위논문(석사)

쌍성총관부 / 雙城摠管府

쌍성총관부 / Ssangseong Chonggwan-bu

쌍성총관부 / Ssangsŏng Ch'onggwanbu

쌍성총관부 / Ssangsŏng Commandery

· 분야 : 정치·법제/법제·행정

· 유형 : 제도/관청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고려 후기 몽고가 고려의 화주 이북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관부. 화주에 치소가 있었으며, 등주·정주·장주·예주·고주·문주·의주와 선덕진·원흥진·영인진·요덕진·정변진 등을 관할하였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1258년) 설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1258년에 원나라가 함경남도 화주에 설치한 통치기구로써 고려인의 배반으로 원나라에 직송령이 되는 영토입니다. 쌍성총관부의 통치는 100년간 유지되었고, 공민왕의 주권회복 및 영토회복을 위한 북벌정책의 핵심으로 이 쌍성총관부(조소생)를 무력으로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1258년(고종 45년)에 원나라의 장수에 의해 동여진을 경유하여 천리장성 이남을 침공했습니다. 이들이 화주에 이르자 당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은 주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저도(楮島)에 들어가 지키다가 죽도(竹島)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등주 부사 박인기(朴仁起), 화주 부사 김선보(金宣甫) 및 동북면병마사 신집평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바치며, 원나라에 투항 했습니다. 위에 주황색칠되어 있는 부분이 원나라에 땅을 바치고 투항한 지역 입니다.

원나라의 새로 점령한 지구를 다스릴 기구로 쌍성총관부를 설치한 것입니다. 이때 초대 총관으로 나라를 배반하고 땅을 원나라에 바친 조휘(원사엔 왕준???)가 임명되었고, 탁청은 천호(千戶)에 임명 되었습니다. 이후 총관은 한양 조씨 집안이 세습하여 조휘의 아들 조양기, 손자 조림, 종증손 조소생이 세습하였고, 천호도 탁청의 후손이 세습 하였습니다. 만호도 이성계 선조가문이 세습되였다. 여담으로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총관부 정벌에 공을 세웠고 이자춘은 이 덕분에 동북병마사가 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10년 뒤인 1269년에 최탄은 반란을 일으킨 후, 서경을 비롯한 북계 54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 6성을 원나라에 바쳤고, 원나라는 서경을 동녕부로 개칭하여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 때는 원나라의 침입과도 무관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줄줄이 땅을 원나라에 갖다 바치고 좋은 관직으로 임명되는 이들은 정말 대단한 인물들 같습니다.

 

쌍성총관위치는 식민사관학자놈들이 한반도로 내려와 보시를 하였다. 요즘 고대 중국지도가 발견이 되여 쌍성총관위치가 요동반도에서도 원나라 갔가이 있선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일제시대때 2세조 조휘 선조 유택부터 4세조 조돈 선조님의 유택이 있다는 설이 성립이 않되고 있다.

▣쌍성총관부의 탈환

쌍성총관부 탈환은 1356년(공민왕 5년)에 시작되었습니다. 1356년 음력 4월에서 음력 8월 사이에 추밀원부사였던 유인우(柳仁雨)는 동북병마사가 되어, 공민왕으로부터 쌍성총관부 탈환을 명령받고 대호군 공부보(貢夫甫), 종부령 김원봉(金元鳳),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 이인임 등과 함께 출정했습니다. 요즘 정도전에서 나오는 이인임도 쌍성총관부를 탈환하는데 큰힘이 되었던 인물로 남아있습니다.

▣이인임 ( ?~ 1388년)

이때 조휘의 증손자인 총관 조소생과 천호 탁도경은 필사적으로 반격했으나 조휘의 손자인 조돈(趙暾)과 이자춘과 그의 아들 이성계가 내부에서 고려군과 내통하여 쌍성총관부의 성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쌍성총관부는 함락되었고, 조소생은 만주쪽으로 도망 갔습니다.

이후 유인우는 화주목(和州牧)을 설치하여 나머지 쌍성총관부가 관할하던 관할 지역을 수복하였고 쌍성총관부 함락에 공을 세운 이자춘(이성계의 부)은 동북병마사가 되어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었고, 쌍성총관부의 초대 총관이었던 조휘의 후손인 조돈도 쌍성총관부 함락에 적극 협력하여 공을 세움으로써 조상의 배신을 청산하고 새로이 고려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이후 조돈은 조선 건국에도 관여하여 개국 공신에까지 이르렀다. 이성계가 나중에 태종을 싫어하여 함흥으로 떠나버린 것도 그의 출신지가 이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쌍성총관부는 고종때 빼앗긴 화주 이남땅들 그리고 여러 고려의 배신자 들이 갖다 바친 땅을 관리하는 기관이었습니다. 화주에 설치 되었고 원나라의 고려 관리차 설치된 기구이며 공민왕이 100년후에 탈환하였습니다. 쌍성총관부 이외에도 동녕부 및 탐라총관부가 있었고 원나라에 지배 기관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쌍성 총관부는 원나라에서 1258년 함경남도 화주(영흥군)에 설치한 통치 기구이다. 원래 이곳은 고려의 영토이긴 했지만 여진족과 얽혀져서 관리가 잘 되지 않던 지역이다. 1258년, 조휘와 탁청이라는 사람이 이 지역 고려 관리를 죽이고 원에 항복하여 원이 직접 관리 및 통치를 하게 되었다. 이때 조휘는 초대 쌍성 총관이 된다. 한양 조씨 문서 참조. 공민왕의 무력 정벌로 1356년에 4대 쌍성 총관인 조소생 (만주쪽으로 도망감, 현재 후손들이 만주족이 살고있다는 소문이 돌고있는데, 그들은 송태조후손이라고 하면서 족보도 발행하고 한 모양인데, 확신한 고증도 없는 상태이며, 이미 송태조후손관 연관이 없다는 고증을 한양조씨정통대종회에서 이미 문헌으로 발간하였기에 왈가왈부한 이야기가 아닌든 십다.)이 패배하여 없어질 때까지 약 100여 년 간 유지되었다. 여담으로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 총관부 정벌에 공을 세웠고 이자춘은 이 덕분에 동북 병마사가 되어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고려인의 배반으로 원나라의 직속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동녕부와 유사하다.

 

(03세)조양기(趙良琪) : 쌍성총관, 부원수, 자녀-①림(琳, 쌍성총관, 용천부원군) ②돈(暾) ③사위-도조(度祖) 이춘(李椿) ※족보에 충렬왕 7년(1281) 2차 일본정벌 때 도원수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부원수로서 출전한 것으로 기록되다.

(04세-②)조 돈(趙 暾) : 용성군, 아들-①인벽(仁璧) ②인경(仁瓊) ③인규(仁珪) ④인옥(仁沃)

▣(05세-①)조인벽(趙仁璧) : 도원수, 용원부원군, 양열공, 아들-①온(溫) ②연(涓)사(師) ④박(薄), 배-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의 따님 정화공주[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자형]

□(06세-①)조 온(趙 溫) : 의정부찬성사, 동북면찰리사, 한천부원군, 양절공, 아들-①의(儀)無後 ②완(捖) ③하(河) ④흥(興) ⑤육(育)

■(07세-①)조 의(趙 儀) : 부친 생존시[태종 17년(1417) 下世]에 무후(武后), 태종 3년(1403) 36세로 조졸(早卒)하여, 부친 온(溫)이 사후 7세 종손은 2자 완(玩) 한풍군(漢豊君)으로 이어졌다.《출처:한양인 우리는 누구인가? p146/한양조씨대종회/2005》

 

■(07세-②)조 완(趙 捖) : 지중추부사, 한풍군(漢豊君)

(08세)조 증(趙 璔) : 아들-①윤선(允瑄) ②윤찬(允瓚) ③윤영(允瑛)

 

■(07세-⑤)조 육(趙 育) : 의영고사, 아들-①충손(衷孫) ②신손(信孫) ③의손(義孫)

(08세-①)조충손(趙衷孫) : 사예, 아들-①원강(元綱) ②원기(元紀) ③원규(元糺)

◉(09세-①)조원강(趙元綱) : 감찰, 아들-①영조(榮祖) ②광조(光祖) ③숭조(崇祖)

(10세-②)조광조(趙光祖) : 호-정암, 대사헌, 문정공, 사림파 영수, 동방4현

(11세)조 용(趙 容) : 군수

(12세)조순남(趙舜男) :

(13세)조의현(趙義賢) : 감역

(14세)조송년(趙松年) :

(15세)조위수(趙渭叟) : 부사

(16세)조십붕(趙十朋) :

(17세)조제보(趙濟普) :

(18세)조사근(趙思近) :

(19세)조수인(趙秀仁) : 교리

(20세)조형만(趙衡晩) :

(21세)조성교(趙性敎) : 대제학, 예조판서, 좌참찬, 문헌공, 생부-조형관(趙衡觀)

(22세)조종필(趙鍾弼) : 공조판서, 장례원경, 궁내부특진관

 

(10세-③)조숭조(趙崇祖) : 원주목사

 

◉(09세-②)조원기(趙元紀) : 형조판서, 좌참찬, 參番淸白吏, 문절공

 

□(06세-②)조 사(趙 師) : 첨의중추부사

(07세)조 유(趙 瑠) : 군수

(08세)조수창(趙壽昌) : 호군

(09세)조방언(趙邦彦) : 부제학

(10세)조 옥(趙 玉) : 현령

(11세)조위한(趙緯韓) : 공조참판, 예조판서

 

□(06세-③)조 연(趙 涓) : 우의정, 한평부원군, 양경공, 아들-①모(慕) ②자(慈) ③혜(惠) ④련(憐)

 

■(07세-③)조 혜(趙 惠) : 판중추원사, 공안공

 

■(07세-④)조 련(趙 憐) : 병조참판

(08세)조운명(趙云明) : 판관

(09세)조영걸(趙英傑) : 현감

(10세)조수곤(趙壽崐) : 절충장군

(11세)조 현(趙 玹) : 공조좌랑

(12세)조익남(趙翼男) : 봉사, 아들-①경(絅) ②구(구)

◉(13세)조 구(趙 구)

(14세)조위명(趙威明) : 예조참판

 

◉(13세)조 경(趙 絅) : 대제학, 이조·형조판서, 판중추부사, 청백리, 문간공, 배-익원공파 이조판서 눌암 김찬(金瓚)의 따님 안동김씨

 

▣(05세-④)조인옥(趙仁沃) : 이조판서, 중추원부사, 개국1등공신, 한산군, 충정공

(06세-①)조 뢰(趙 賚) : 판한성부사, 예조판서, 절효공, 배-좌의정 이귀령(李貴齡)의 따님 연안이씨, 자녀-①효생(孝生) ②순생(順生) ③관생(觀生) ④덕생(德生), 의정궁주(태종의 후궁)

(07세-②)조순생(趙順生) :

(08세-①)조 명(趙 銘) : 병조정랑

(09세)조백형(趙伯亨) :

(10세)조 수(趙 璲) : 대호군

(11세)조승윤(趙承胤) :

(12세)조 강(趙 綱) : 현감

(13세)조광필(趙光弼) : 부사과

(14세)조 형(趙 浻) : 교위

(15세)조유도(趙惟道) :

(16세)조 창(趙 昌) : 충훈부도사

(17세)조덕용(趙德容) :

(18세)조태징(趙台徵) :

(19세)조종복(趙宗福) :

(20세)조완규(趙完圭) :

(21세)조진달(趙鎭達) :

(22세)조재형(趙載衡) :

(23세)조택원(趙宅元,仁元) : 3.1운동 순국, 애족장 수훈

(24세)조병옥(趙炳玉) :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경제학박사, 내부부장관, 2선민의원, 민주당 대표최고의원, 민주당 대통령후보

◉(25세-①)조윤형(趙尹衡) :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수료, 6선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26세-②)조순형(趙舜衡) :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수료, 3선 국회의원, 민주당대표

 

(06세-④)조 관(趙 貫) : 중추부판사

※ 충무공 우의정 조영무(趙英茂) 가계를 《『한양인 우리는 누구인가?』/한양조씨대종회》에 의거 한양조씨 주요 세계도에서 제외하였다. 즉 (1)한양조씨 세거지는 한양에서 함경도 용진현으로 이거한 반면, 조영무의 세거지(2대)는 처음부터 함경도 영흥이다. (2)한양조씨는 고려 왕족의 신분인 반면, 조영무 가문은 노비출신 번상군 군졸의 신분이었다. (3)피차 조선개국공신으로 잘 아는 사이였음에도 한양조씨 원보(가정갑신보)에 조영무 가계를 싣지 않았고, 두번째 신묘보발간후 9년후에도 별책 또는 사기.위조보로 실었다. (4)조영무 가문 스스로도 영흥조씨임을 자인(영흥조씨 최초족보 1799기미세보 서문내용에 자세히 기록)한 바 있다. 등 한양조씨대종회에서 근거를 갖고 합리적 주장을 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소위 似而非한양조씨統合대종회쪽에선 奴婢출신 상군(番上軍)이였던 조영무를 대종손으로 보시고 있어,  이들은 漢陽趙氏 "志操論"을 어디에다 엿받까 처먹어 세간에서 우습꺼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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