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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도(乙巳年)시향제례❀

도봉서원 제445주년 추향제(秋享祭)

by 晛溪亭 斗井軒 2018.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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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서원 제445주년 추향제(秋享祭) 참석 후기] - 민정기      

오늘은 도봉서원 제445주년 추향제(秋享祭)에 다녀왔다.


도봉서원은 서울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서원으로서 본 추향제는 도봉서원 터의 발굴조사 작업 관계로 도봉산 제1 휴식처에서 봉행되었다.


특히, 도봉서원에 배향된 분은 정암(靜庵) 조광조 선생님과 우암(尤庵) 송시열 선생님이시다.

정암(靜庵)은 중종(中宗)때의 대유학자로 진보적인 정치가로 사림파의 영수로 잘 알려져 있는 분이며, 우암(尤庵)은 효종(孝宗)때의 대유학자로 사계 김장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보수적인 정치가로 노론의 영수로 잘 알려진 분이시다.


우암(尤庵) 송시열 선생은 정암(靜庵) 조광조 선생의 학문적 정신을 내면화 하신 분이었으나, 그 정치적 성향은 훈구파로서 사람파와의 극단적인 대립을 일으켜 혼란을 초래했고, 근래까지도 사화(士禍) 당쟁(黨爭)이라고 하는 병폐로 망국적인 정치 현상으로 불려왔음을 역사를 통해 잘 이해하여야 한다. 두 분모두가 다 역모로 몰려 전라도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된다. 두 선생의 학문적 차이점과 공통점을 찾아 상호 보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울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서원으로서의 가치가 돋보이는 것은 어찌하다가 이 두 분이 함께 도봉서원에 배향되었을까 하는 의문에서 비롯한다.

말하자면 공자 맹자 주자와 같이 우리나라의 주자학의 성인(聖人) 송자(宋子)”라고  불리면서 보수적인 명맥을 이어 오셨던 분과 유교적 도덕국가를 표방하며 부정부패를 일삼던 훈구세력"을 혁파하려는 진보세력의 개혁정치의 명맥을 보여주었던 분으로, 그 정치적 성향이 명확하게 분명 달랐던 두 분을 함께 도봉서원에 배향한 여력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측면에서 특색이 있다.


말하자면, 정치적 성향이 다른 보수와 개혁의 선조를 모두 한 곳에 배향해 그분들의 학문적 사상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에 충분한 위업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특히 도봉서원은 도봉산 만장봉 아래 의상스님이 창건한 옥천암[영국사(寧國寺)의 말사(末寺)]보다도 더 위쪽에 건설하였으며, 정암(靜庵) 선생님이 별세한 후 54년이 되는 1573(선조 6)에 도봉서원을 사액서원으로 창건하였다.

그후에 1696(숙종 22)에는 우암(尤庵) 송시열 선생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동일하게 배향되었다.

그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도봉서원이 훼철(毁撤)되었으나,

훼철후 127년만에 도봉문화원 주관으로 도봉서원복원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현재 한창 복원중에 있다.


오늘 추향제의 초헌관을 이동진 도봉구청장이 맡았는데, 그는 축사에서 말하기를,

"자신이 처음 구청장에 부임하면서 도봉서원 복원을 시작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완성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했다, "다만, 구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문화재위원회 심의 결과 불교유물의 77점 발굴 등의 문제로) 현재 사업추진이 보류된 상태이며, 특히, 절터 위에 서원이 건설된 것이기에 유불(儒彿)문화의 의견차이가 컸기 때문에 사업추진이 더디게 진행되었다."고 설명하였다.

특히, 그는 도봉서원은 영국사(寧國寺)절 터 보다도 더 높은 곳에 세워졌기에 보편적인 건축방식이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유물 발굴을 위해 더 이상 시간을 들여 발굴조사를 해 보았자 유교유물은 더이상 나올 것이 없고, 면적을 더 확대해 발굴한다고 하더래도 나온다면 불교유물이 더 나올 것으로 예상되니, 더 이상 발굴하자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서원 입장에서는 유물발굴은 더 이상 서원증건에 유리한 것이 아니므로, 의견을 모아 복원의 절차에 최선을 다해 정리해서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앞으로 서울시 협조를 받아 조속 복원되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너무 늦어져서 안타깝고 죄송하다는 점을 거듭 사과했다.


내 생각엔 정암(靜庵)과 우암(尤庵)이 함께 배향(配享)되었듯이 유불(儒彿)상생(相生)이 이루어졌으면 싶다.

이곳 도봉서원 중건과 관련하여, 불교가 세워졌던 자리를 허물고 유교가 세워졌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고, 지금 현재의 위치를 복원시키면서 유불상생의 도()를 찾아 가는 것이 어떠할까 생각한다.


오늘은 부대행사로서 조선시대의 선비행차하는 모습도 재연 했는데, 도봉산을 내려오는 길에 우연하게 그 행차대열을 만나 동영상을 찍을 수 있었다.

도봉산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특히, 주변의 은행나뭇잎 떨어지는 가을 정취에 빠져 흠뻑 적셔질 수 있었다.

다만, 2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에 급하게 쫓겨 점심도 먹는둥 마는둥 뛰어 다녀야 했지만,

다행하게도 도봉구의 이동진 구청장과 이성희 도봉구의회의장을 만나 같이 사진을 찍고 옛날 구청에서 지냈던 옛날 이야기도 언 듯 나누면서

재미난 성숙된 인간들의 흥겨움에 하루를 만끽하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할수 있었기에 매우 만족스러운 하루 일과였다.

그래서 내 기분은 최고다, 매우 즐겁고 좋아졌다. 내 모든 것을 다 내놓고 자연으로 돌아가리라. 도봉산으로 환희의 무릉도원으로 이제 가노라. 아듀~

 

 

 

 

 

 

 

 

 

 

 

 

 

 

 

 

 

 

 

 

 

 

 

 

 

 

 

 

 

 

이전에는 도봉서원에서 이 축제가 열렸다고 합니다. 도봉서원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드리자면, 도봉서원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512번지에 위치해 있습니다.

서기 673년 (신라 문무왕 13년) 도종산 만장봉 아래 의상스님이 옥천암을 창건하였습니다. 옥천감은 영국사의 마지막 절입니다. 옥천암은 서기 1398년(태조 7년) 크게 중창하고 천축사로 개명하였습니다. 정암 조광조 선생은 영국사를 자주 찾아 심신을 연마하였습니다. 1519년(중종 14년) 정암 조광조 선생이 별세한 후 54년 되는 1573년(선조 6년) 정암 조광조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의 뜻을 모아 양주목사 남언경이 영국사 절터에 도봉서원을 창건하고 조광조 선생을 배향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경북 영주군 순흥소수서원 창건 31년 후의 일이며 현존하는 서울의 유일한 서원입니다.


그런데 근방에 유물이 워낙 많이 나와서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라 이번 행사는
제1 휴식처에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날은 도봉서원 창건 445주년을 기념해서 정암 조광조, 우암 송시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님들의 후손 분들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이날 도봉구청장님, 도봉구의회 의장님 등도 함께하셔서 정암 조광조 선생, 우암 송시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였습니다. 저희 집안은 제사를 지낸 지가 꽤 되었는데, 이렇게 전통적인 문화를 다시 접하게 되어서 감회가 새롭고 이렇게 우리나라의 전통을 지키시는 분들께 정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마지막 기념사진 하나로 이번 후기를 여기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후 행사는 전혀 다른 행사가 이곳에서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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