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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려․몽 연합군 2차 일본 정벌!!!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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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1년(고려 충렬왕 7) 고려-몽고 연합군, 제2차 일본 정벌 출발

☞ 려․몽 연합군 2차 일본 정벌

몽골국인 ‘원나라’는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를 침공한다. 그리고 삼별초의 난으로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하자 고려는 그 치하에서 주체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1259년 여몽전쟁에서 패배하고 강화한 후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 역시 연합군으로서 동원되었으나, 원나라군의 전투의지 부족 및 태풍 등 자연재해의 발생과 막부의 반격 등으로 상당수 병력을 잃었으며,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1차 원정에서 패한 쿠빌라이 칸은 2차 원정을 계획한다. 그러나 푸젠성 및 광동성 일대가 전장인 남송 원정에 골몰한 데다 아리크부카와의 후계 다툼 및 카이두의 반란 등 내부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기 때문에 2차 일본 원정에 대한 결단을 미뤄야 했고 고려에게도 무기 제조와 군선 건조를 잠시 중단하도록 한다. 이후 1280년 8월, 남송 정벌을 끝낸 뒤 요양[랴오양시]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정동원수 훈둔, 홍다구, 범문호를 지휘관으로 대군을 모아 2차 일본 침공을 명령한다. 남송의 양주 등지에 일본 정벌을 위한 전함 600척을 만들라고 지시하고 고려에도 전함 900척을 건조하라고 지시한다.

고려에도 징발령이 떨어지자 충렬왕은 김방경을 사신으로 보내 어려운 형편을 설명하며 병력 동원과 군량 비축은 무리라고 호소했으나, 이미 일본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터라 쿠빌라이는 고려의 사정을 무시했다. 쿠빌라이가 재차 고려에 군함 건조를 명하자 결국 고려는 사신을 파견해 환영의 뜻을 밝혀 호의를 샀고 이에 쿠빌라이는 홍다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마침내 1281년 1월에 원정군을 동로군과 강남군으로 나뉘어서 편성했다. ‘동로군’은 원나라군과 고려군으로 구성되었는데 북중국 출신들로 구성된 원나라군 지휘관은 훈둔과 홍다구였고 고려군 지휘관은 김방경이었다. 대충 병력 4만 명에 전함 900척을 헤아렸다. 이들 속에 고려군은 군사 9,960명 사공과 수리공 등이 1만 7,029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리고 ‘강남군’은 남송의 항복한 군사 10만 명과 전함 3,500척으로 편성되었고 지휘관은 원의 아라칸과 항복한 남송의 장수 범문호였다. 강남군은 그 특성상 주로 수군이었다. 동로군은 합포에서 출발해 이키섬에 이르고 강남군은 절강성에서 출발해 6월 15일에 이키섬에서 합류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1281년 5월 3일, 원정 준비가 끝나자 여몽연합군은 합포를 출발했다.

5월 21일, 동로군이 쓰시마 섬을 공략했지만, 이번에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이전과 달리 저항이 심해서, 점령도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5월 26일, 이키섬으로 향했는데 큰바람을 만나 선군 113명과 뱃사공 36명이 풍랑에 떠내려 가버렸다. 조짐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키섬을 비롯하여 대명포 등 하카타만 일대를 공략하여 연거푸 승리를 이끌어냈다. 동로군은 일본군에게 격문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는 한편 세찬 공격을 퍼부었다. 이키 섬에 상륙한 동로군은 저항하는 막부군을 전멸시키고 섬을 점령했다.

10일 간 휴식을 취한 동로군은 6월 6일 하카타 만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때 동로군은 장벽에 부딪혔으니 1276년에 막부의 지시로 하카타 만 연안 20㎞에 축조된 높이 2m 전후의 방루가 그것이었다. 하카타 만 해안에 즉각 상륙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동로군은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는 시카노 섬에 상륙했고 같은 날, 오토모 가문의 당주이자 고케닌인 오토모 요리야스가 이끄는 막부군이 시카노 섬에 상륙한 동로군에 먼저 선공을 가했다. 시카노 섬 쟁탈전은 6월 8일까지 이틀 동안 지속되었는데, 동로군은 생각 외로 고전을 반복했다.

7월 27일, 히라도에서 합류한 동로군과 강남군은 다카시마에 상륙해 진영을 축조하는 한편, 다시 하카타 만 공략을 준비했다. 동로군과 강남군이 합류한 비슷한 시기 일본 본토에서는 호죠 토키무네의 직명을 받은 우츠노미야 사다츠나[宇都宮貞綱]가 산요 산이 지방 등지의 고케닌들로부터 소집한 6만의 대군을 이끌고 기타큐슈를 향해 출전했다. 그러나 7월 30일, 다카시마 근해에 강풍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고, 3500여 척의 배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바위에 부딪혀 대부분 침몰하거나 떠내려 가버렸다. 또 태풍이 불어와 연합군의 함선은 파괴․침몰되어 원정은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번의 정벌은 원의 공주와 결혼해 원의 부마국이 된 우리 역사상 최초로 대륙국가 황실과 정식 혼인관계를 맺은 충렬왕이 원나라 방문 때의 원의 정치적 양보에 대한 보답으로 스스로 자청한 일본정벌이었다. 이 원정은 고려에 인명과 재산상의 손해를 끼쳤고 특히 농민들이 입은 피해는 대단한 것이었다. 더욱이 일본 원정 때 설치하였던 정동행성은 그대로 남아 내정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1293년 왕은 공주와 함께 동정의 불가함을 직접 호소하고자 원나라로 갔는데 이듬해 원세조의 죽음으로 동정은 그쳤다.♣​

▶ 정동행성 설치, 원정 준비 독려
합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배들이 건조되고 있었고 곳곳에서 군사 합동훈련이 실시되기도 했다. 이러한 원정 준비를 지휘한 곳은 합포에 설치된 정동행성(征東行省)이었다.
정동행성의 정식명칭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바로 일본의 정벌을 상징하는 ‘정동’과 중앙정부의 지방파견 기관을 의미하는 ‘행중서성’이라는 말이 합쳐서 만들어진 기구다.
쿠빌라이는 1280년 일본 정벌을 위한 전방 사령부로 이 기구를 설치했다.  

정동행성이 설치된 곳은 환주산(環珠山)으로 지금 마산의 무학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산이다. 정동행성 터의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몽고정(蒙古井)이 나타난다. 정확히 얘기하면 몽골정이지만 과거에는 몽골을 중국이 부르는 대로 몽고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굳어졌다.
3.15 소공원 앞에서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다.
몽골군이 정동행성 근처에서 주둔했을 때 군마의 식수를 공급했던 우물로 알려진 곳이다.
당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이곳을 기지로 삼아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 일본, 재침공 대비 방어진지 구축
같은 시기 일본의 하카다 지역 일대에서도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1차 원정 때 여몽 연합군이 상륙했던 이 일대에는 예상되는 적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석축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위쪽 해안 지역의 기타큐슈와 혼슈 등지에도 방어망이 구축되고 군사들이 새롭게 포진됐다. 비록 태풍의 덕분이기는 했지만 여몽 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친 일본의 싯켄 도키무네는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그래서 다음해 쿠빌라이의 친서를 가지고 방문한 두세충(杜世忠)을 비롯한 몽골의 사절단을 카마쿠라에서 접견한 뒤 모두 처형해 버렸다.
1279년에는 일본과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남송 출신의 주복(周福) 등 시절단이 방문하자 아예 가마쿠라에 들이지도 않고 다이자후에서 처형했다.
하문저(何文著), 사투르 웃딘 등 사신들도 마찬가지로 참형에 처해졌다.
사신을 살해했다는 것은 교전을 불사한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일단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나타난 이상 예상되는 공격에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차 때와는 달리 두 번째 격돌 앞두고 쌍방이 충분한 준비를 갖춰가고 있었다.
전쟁 준비는 중국 땅 강남에서도 추진되고 있었다. 

▶ 천주만 일대의 대규모 선박 건조
남송을 접수하면서 항주와 광주, 복주, 천주 등 해안 지역을 손에 넣은 몽골은 이 지역을 이용해 배를 건조하고 인원을 충당함으로써 대규모 함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준비된 배는 3천 5백여 척, 원정군은 10만 명이었다.
강남을 접수한 지 5년 만에 10만의 원정군을 한꺼번에 출진시킨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겉모습과 달리 허점이 있었다.  

그들은 정예부대가 아니라 전투력이 결여된 잡군(雜軍)이었다.
늙은 병사와 소년 병사, 실업자 등이 대부분으로 어느 정도 전투력을 발휘할지가 의문스러웠
다.
그들은 바로 접수된 남송 병사들 가운데 가장 전투력이 쳐지는 하급 군인과 잡부들이었다. 

 

▶ 대부분 약졸로 구성된 강남 원정군
남송을 접수하면서 거의 전투도 없이 그냥 몽골의 그늘 아래로 들어온 남송 병사들은 백만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 그 가운데 우수한 병사들을 뽑아 황궁 친위대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분쟁지역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에 배치했다. 

그래도 아직 많은 숫자가 남아 있었다.
일본 원정군으로 선발된 병사들은 남아 있던 사람들로 대부분 약졸(弱卒)이었다.
몽골로서는 대거 보내면서도 그들을 잃어도 별 손해가 없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다.
지휘관으로 별 이름도 없는 중급 장수를 내세운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 강남군은 ‘버리는 카드’의 성격이 짙었다.
그렇다고 보면 역시 주력부대는 ‘동로군’이라고 부르는 합포에서 출발하는 여몽 연합군이었다. 정예부대인 이들이 먼저 일본을 공격하면 강남군이 합류해 힘을 보탠다는 것이 대략의 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일본 저항으로 상륙하지 못한 채 고전
1281년 5월, 4만의 동로군과 9백 척의 선박이 합포를 출발했다.
1차 때보다 원정군의 숫자가 다소 많아졌지만 보급 요원 등이 많아 전력은 1차 때와 비슷했다. 이어서 항주 바깥 경원항(慶元港)에서 10만 명을 태운 3천여 척의 함대가 출발했다.
신안 유물선이 일본을 향해 출발했던 바로 그 항구, 지금의 영파(寧波:닝보)다.
함대의 편성 내용이 어떻게 됐건 전례 없는 초대형 함대로 바다로 나서는 장관을 짐작할 만하다. 

하카다에 도착한 동로군은 이번에는 쉽게 상륙하지 못하고 물 위에서 싸워야만 했다.
일본군은 미리 돌로 구축한 방어진지 뒤에서 뭍에 오르는 것을 강력히 저지했기 때문에 연합군은 물 위에 배를 띄운 채 고전했다.
6월 기타큐슈에 도착한 강남군은 전투력이 약했기 때문에 더욱 접근이 어려웠던 것은 당연했다.
4천 척이 넘는 배들이 일본 앞 바다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시간만 보내는 상황이 빚어졌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7주나 됐다. 

▶ 다시 덮친 태풍으로 원정 실패
8월 초 다시 한번 불청객, 태풍이 이들을 덮쳤다.
거대한 풍랑 속에 수많은 배들이 부서지고 엄청난 사람들이 물속에 수장됐다.
이때 잃은 병력은 거의 10만에 육박했다.
주로 강남군이었고 주력부대인 여몽 연합군과 전함들은 대부분 무사했다.
어차피 버리려 했던 카드가 버려진 것이어서 이때의 상실에 몽골이 별로 상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두 번에 걸친 일본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것도 두 번 모두 직접적인 원인은 태풍이었다.
일본은 이를 두고 하늘이 보낸 바람이라고 해서 ‘신의 바람’ 즉 가미카제(神風)라는 이름을 붙였다.
과연 그게 ‘신의 바람’일까? 

▶ 태풍 만난 것 당연한 결과
8월 초에 큐슈 앞 바다로 태풍이 지날 확률은 4% 정도 된다고 한다.
한 시점을 놓고 보면 확률이 낮아 보이지만 여름철 한 달 이상을 바다에서 오고 가지도 못했다면 태풍을 만날 확률은 엄청나게 높아진다.
지난 50년 동안의 통계를 보면 1년에 평균 27개 전후의 태풍이 발생했다.
7월에서 9월 사이에 발생하는 태풍이 그 가운데 70%가량 된다.
그 태풍이 가장 많이 지나는 지역이 일본이다.
태풍과 장마와 지진이 많은 나라가 일본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래서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원정군이 태풍을 만난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거의 태풍에 몸을 내놓고 ‘날 잡아 잡수’ 한 꼴이었다.
오히려 바다 위에서 7주를 보낼 때까지 용케 태풍을 만나지 않고 버티었던 것이 신기할 정도다. 

▶ 잘못된 신화 가미카제
그런데도 일본이 주장하는 가미카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지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태풍의 덕으로 적을 물리친 일본으로서는 외적 격퇴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일 법하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https://sugisa.tistory.com/15720569 [晛溪 斗井軒 Sugisa:티스토리]

■1281년 2차 원정■

●원나라 황제(皇帝)
- 쿠빌라이 (忽必烈) 

●총사령관
일본행성좌승상(日本行省左丞相)
- 아라칸 (阿剌罕) → 아타카이 (阿塔海) 

●동로군(東路軍)
동정도원수(東征都元帥)
- 힌두 (忻都)
- 홍다구 (洪茶丘) 

●정일본도원수(征日本都元帥)」
- 김방경 (金方慶) 

●동정좌부도원수(東征左副都元帥)
- 아랄첨목아(阿剌帖木兒) 전사 

●관고려국정일본군만호(管高麗国征日本軍万戸)
- 박구 (朴球)
- 김주정 (金周鼎) 

●관군만호(管軍万戸)
- 예스다르 (也速䚟兒)
- 왕모 (王某) 

●관군천호(管軍千戸)
- 다이타셰 (大塔失)
- 이행리 (李行里)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증조할아버지로, 이성계 즉위 후 익조[翼祖]로 추존됨) 

●관군상백호(管軍上百戸)
- 장성 (張成) 

●낭장(郎将)
- 강언 (康彦) 전사
- 강사자 (康師子) 전사 

●강남군(江南軍)
일본행성우승(日本行省右丞)
- 범문호 (范文虎) 

●일본행성좌승(日本行省左丞)
- 이정(李庭) 

●도원수
- 낭갸다이 (囊加歹)
- 하라다이 (哈剌䚟)
- 장희 (張禧) 

●관군만호(管軍万戸)
- 카라다이 (葛剌歹)
- 여덕표 (厲徳彪) 

●관군부만호(管軍副万戸)
- 케이다락다이 (刑答剌忽台) 

●수춘부만호(寿春副万戸)
- 오안민 (呉安民) 

●관군총관(管軍総管)
- 초정 (楚鼎) 

 

●초토사(招討使)
- 왕국좌 (王国佐) 

●수수총관(水手総管)
- 육문정 (陸文政) 

●지주총파(池州総把)
- 마하마드 (馬馬) 

소속불명
●초토사(招討使)
- 쿠두하스 (忽都哈思) 전사

 

■13세기 여몽 연합군 일본 정벌, 태풍 때문에 실패했어요!!!■

원에 항복한 고려도 전쟁에 참가, 두 번 원정 모두 풍랑에 배 침몰

전세 역전한 日, 가슴 쓸어내렸어요…

이 태풍을 후에 '가미카제'라 불렀죠

 

지난 15일 수퍼 태풍 '망쿳'이 필리핀과 홍콩, 중국 남부를 휩쓸고 지나갔어요.

필리핀이 가장 피해가 컸어요.

필리핀에서만 최소 64명이 목숨을 잃고 45명이 행방불명됐다고 해요.

미국에서는

허리케인 '플로렌스'가 남동부를 강타해 사람들이 10명 넘게 숨졌어요.

미국 정부가 허리케인이 지나는 길목에 사는 사람들 150만명에게 대피하라고

경고했지만, 자연의 위력을 이기진 못했죠.

 

때로는 인간이 손쓸 수 없는

자연재해가 세계사 흐름을 통째로 바꿔버리기도 한답니다.

일본을 전쟁 위기에서 구해준 태풍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어요.

 

◇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

 

13세기 후반 쿠빌라이 칸이 몽골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원나라'로 바꾸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어요.

몽골 제국의 전성기였죠.

 

몽골 제국이 힘을 얻기 전, 중국 대륙의 주인이었던

송나라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몽골 제국에 중국 대륙 남쪽으로 밀려난 상태였어요. '남송'이라고 해요.

쿠빌라이는 남송을 마저 정복하고 싶어 했어요.

그는 우선 남송과 가깝게 지내던 일본을 몽골 제국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어요.

하지만 일본은 몽골 제국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쿠빌라이는 일본을 괘씸하게 여겨,

몽골 제국과 일본의 중간에 있는 고려에 "길을 안내하라"고 했어요.

 

고려는 고민에 빠졌어요.

고려는 몽골 제국 침략에 맞서 30년 동안 싸우다가 항복한 터라,

몽골 제국의 말을 거역하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고려 정부는 몽골 제국 사신들에게 잔뜩 겁을 줬어요.

바다가 험하고 풍랑이 심해 군대가 일본까지 무사히 가기 힘들다고요.

그래도 쿠빌라이는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고려는 하는 수 없이 일본 남부 규슈까지 가는 바닷길을 몽골 제국에 알려줬어요.

 

◇ 여몽 연합군 덮친 태풍

 

쿠빌라이가 일본 정벌을 벼르는 중에도,

일본은 쿠빌라이가 보낸 외교 문서와 사신을 모두 무시했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원나라 군대가 정말로 쳐들어올까 봐

신에게 계속 기도를 올렸어요.

 

몇 번이나 사신을 보내도 일본이 제대로 답하지 않자,

마침내 쿠빌라이는 전쟁을 결심했어요.

고려에 전쟁 물자를 준비하라고 지시했지요.

고려는 몽골의 독촉에 쫓겨 4개월간 일본 원정에 쓸 군함 900척을 만들었어요.

몽골군 2만5000명, 고려군 1만5000명이 모인 '여몽 연합군'이 생겼죠.

 

▲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이 군함을 이끌고 두 차례 일본 정벌에 나섰어요.

그때 엄청난 태풍이 불어닥쳐 연합군 배가 침몰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일본에선 이 바람을 신이 보냈다고 믿었지요. /게티이미지코리아

 

1274년 여몽 연합군이 경남 마산을 출발해 일본 쓰시마섬으로 향했어요.

1차 원정이 시작된 거죠.

연합군이 섬을 점령하는 데 두 시간도 채 안 걸렸다고 해요.

연합군은 쓰시마섬을 점령한 뒤 다시 배를 타고 일본 남부 규슈에 상륙했어요.

일본이 저항했지만 대부분의 전투에서 여몽 연합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어요.

일본은 충격에 빠졌어요.

 

승리를 이어가던 연합군은 병사들을 쉬게 해주려고

바다에 정박한 함대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새벽에 갑자기 연합군 함대가 닻을 내리고 있던

하카타 만에 엄청난 태풍이 몰아쳤어요.

하룻밤 새 군함 200척이 침몰하고 수없이 많은 병사가 바닷속으로 사라졌어요.

여몽 연합군은 결국 철수를 결정했어요.

 

◇ 신이 보낸 바람일까요?

 

일본 사람들은 자기네가 연합군을 물리치도록

신이 태풍을 보내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몽 연합군을 덮친 태풍에 '가미카제(神風)'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신이 보낸 바람'이라는 뜻이죠.

 

1차 원정에 실패한 쿠빌라이는 항복을 권유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보냈어요.

이번엔 일본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일본은 쿠빌라이가 보낸 사신 30여 명을 모조리 처형했어요.

몽골은 그런 줄도 모르고 다시 한 번 사신단을 보냈어요.

일본은 두 번째 사신단도 모조리 죽였어요.

 

뒤늦게 소식을 들은 쿠빌라이가 격분해 2차 원정을 준비했어요.

고려가 "1차 원정에서 이미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1281년 2차 원정에 나선

여몽 연합군은 모두 15만명으로 1차 때보다 규모가 훨씬 컸어요.

하지만 일본은 지난번의 패배를 교훈 삼아 전쟁을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어요.

일본 정부가 전국에서 불러 모은 무사들이 여몽 연합군에 맞섰어요.

 

이때 연합군이 머무르던

규슈 북서쪽 다카시마(鷹島) 섬에 다시 한 번 태풍이 불어왔어요.

2000척이나 되는 군함이 이리저리 부딪쳐 아비규환이 벌어졌어요.

병사들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가까스로 육지에 도달해 산속에 숨었어요.

살아남은 자들에게 닥친 운명은 가혹했어요.

일본에 붙잡힌 여몽 연합군 병사들은 사형을 당하거나 노예가 됐어요.

 

◇ 모두에게 큰 상처 남긴 정벌

 

전쟁을 두 번이나 겪으며 몽골도, 고려도, 일본도 모두가 상처를 입었어요.

몽골은 성과 없이 국력만 낭비해 나라가 휘청했어요.

고려는 억지로 전쟁에 나가느라 배를 만들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 고생했어요.

연합군을 막아낸 일본도 자기 땅을 지켰을 뿐 전리품은 없었어요.

전쟁에 참가한 무사들이 갈수록 가난해져 몰락하고,

무사들을 지휘하던 막부(일본 특유의 무사 정부)도 무너졌어요.

 

일본은 이후 '가미카제'라는 말을 한 번 더 역사 속에서 불러냈어요.

몽골 침략으로부터 650년 정도 흐른 1930~40년대,

이번엔 일본이 군대를 일으켜 이웃 나라들을 침공했어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일본군을 반격해

전세가 일본에 불리하게 기울어지자,

일본은 자기네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연합군 항공모함에 비행기를 몰고 가서 부딪쳐

'인간 폭탄'이 되라"고 명령했어요.

그러면서 이 자살 특공대에게 옛날 여몽 연합군을 물리쳤던

'가미카제'란 이름을 붙였지요.

 

하지만 전세를 뒤집진 못했어요.

신도 일본의 무리한 침략 전쟁까진 도와주진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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