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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만곡집 : 월록서당기문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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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록서당(月麓書堂)에서

月麓書堂(월록서당)은 芝薰文學館(지훈문학관) 뒤쪽의 산 밑에 있는 한 채의 건물인데, 시인 조지훈이 어려서 다녔다는 서당이랍니다.

月麓書堂(월록서당), 存省齋(존성재), 克復齋(극복재)라는 편액이 양쪽의 방  위에 걸려 있습니다.

그 밖에 大山(대산) 李象靖(이상정)이 지은 月麓書堂記(월록서당기) 등 다섯 개의 편액이 걸려 있었습니다.

 

월록서당(月麓書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소재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이 서당은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 선생의 손자(孫子)인 월하(月下) 조운도(趙運道, 1718~1796) 선생의 발의(發議)로 한양조씨(漢陽趙氏)∙야성정씨(野城鄭氏)∙함양오씨(咸陽吳氏)가 주축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조선(朝鮮) 영조(英祖) 49년(1773)에 건립되어 많은 석학(碩學)을 배출(輩出)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일자형(一字形) 목조와가(木造瓦家)로 중앙에는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에 통칸방을 배치한 홑처마집으로 조선(朝鮮) 후기(後期)  건축구조 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건물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지은 월록서당기(月麓書堂記)의 원문을 한국고전종합DB에서 찾아보니 아래와 같습니다.

 

 

https://blog.naver.com/yjmuse1/223110683418

 

일월면 주곡리 주곡(主谷)의 '월록서당(月麓書堂)'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注谷里)는 예부터 주곡부곡(主谷部曲)의 소재지로 1530년에 편찬된 『신증...

blog.naver.com

◐月麓書堂記◑

日月之山。鬱然爲嶺之東紀。旁枝南走數十里。環抱而成一洞。其蜿蜒旖旎之氣。鍾而賦於人。至滄洲趙公先生兄弟者。以文章德行重於世。其流光賸馥。藹然被於一方。至今彬彬有君子之風焉。其孫運道,聖際與其二弟。皆秀而有文。間嘗過余而言曰。先故寖遠。所居僻奧。子弟後生。懼其無所觀效而能自振也。遂與宗族隣里。議就洞口溪上之盤石。規而爲燠室凉軒。旣成而洞之父兄與其子弟者遊。使讀書講業於其中。庶幾其有進矣。而所以導迪之方。則幸吾子之惠一言也。余惟黨庠家塾之制廢而書堂作。鄕里之間。在處有之。顧其所以爲敎則異乎先王之法矣。今諸公之用心已勤矣。然只如世俗之工文藝競葩藻。以資其進取。則象也不閑於此事。固無所辱命。若有意於庠塾之敎。則聖賢所以示人者具在。亦不可以他求也。幼而習於灑掃應對與夫六藝之術。長而進乎竆理正心成己淑人之法。學聚問辨。以博其理義之趣。體驗完養。以極其踐履之實。體用全而不倚於一偏。本末該而不躓於後先。急迫以求。則懼其揠而助也。徐緩以待。則恐其嬉而荒也。遵陟遐自邇之序。懷有初鮮終之戒。行之以篤厚。持之以悠久。則積累飽飫之餘。行解互資。理事相涵。逢眞源於造次。體妙用於酬酢。是則孟氏所謂深造自得而樂則烏可已者。古人所以玩樂而終身者已倏焉而在我矣。學之有得於敎養者如是。今堂成而敎始矣。未知父兄之所以詔。子弟之所以學者。果能出於此乎。苟舍此而惟文藝之是攻。進取之是圖。則棄甜桃而摘醋棃。避康莊而尋曲徑。用功愈勤而壞其心術者愈甚固。知諸公之不爲此也。象也未能一造其堂而與諸公揖。感二三公之屬意而爲之說。異日者聞嶺海之間有茂才異等者騈肩而立。亦足以自信吾言之不妄矣。若其溪山巖壑之勝。花卉魚鳥之樂。在齋居諸君。自得之耳。又奚待於余言。是爲記。[歲戊戌二月上浣韓山李象靖記]

-大山先生文集 卷之四十四 所收

월록서당 기문〔月麓書堂記〕

일월산(日月山)이 성대하게 영동(嶺東)의 벼리가 되어 그 옆으로 뻗은 가지가 남으로 수십 리를 달려가다가 빙 둘러 감싸서 골짝 하나를 이루었는데, 그 구불구불 성대하게 뻗어 나간 기가 모여서 이곳 인물에게 부여되었으니 바로 창주(滄洲) 조공(趙公) 선생 형제이다. 조공 형제는 문장과 덕행으로 세상의 추중을 받았으며, 그 전해 오는 광휘와 남은 향기가 성대히 한 지역을 뒤덮어 지금까지도 문질(文質)을 고루 갖춘 군자의 유풍이 남아 있다.

그 후손인 성제(聖際) 조운도(趙運道)와 두 아우가 모두 뛰어나고 문장이 있는데, 근자에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선조와 세대가 점점 멀어지고 사는 곳이 궁벽하니, 자제와 후손들이 그 보고 본받는 바가 없어서 스스로 떨치지 못할까 염려스러웠습니다. 마침내 일가, 이웃들과 의논하여 마을 어귀 시냇가의 반석에다가 규획하여 따뜻한 방과 시원한 마루를 만들었습니다. 낙성한 뒤에 마을의 부형들이 자제들과 함께 종유하며 그 안에서 독서하고 학업을 강구하게 하여 거의 진보가 있기를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을 이끌어 주는 방법을 그대가 한마디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향리의 당상(黨庠)과 가숙(家塾) 제도가 없어지고 나자 서당이 생겨 마을과 동네 곳곳마다 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살펴보면 선왕의 법과는 다르다. 이제 공들의 마음 씀이 부지런하기는 하나 단지 세속에서 하는 것처럼 문예의 솜씨를 닦고 문장의 화려함을 경주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데에만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나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 진실로 부탁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옛날 당상과 가숙에서 했던 가르침에 뜻을 둔 것이라면 성현이 후인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 책에 갖추어 실려 있으니 또한 달리 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려서는 청소하고 응대하는 예절과 육예(六藝)의 방법을 익히고, 자라서는 이치를 궁구하고 마음을 바로잡으며 자신을 성취하고 남을 선하게 하는 공부에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배워서 지식을 모으고 물어서 사물을 분별하여 의리의 취향을 넓히고, 체험하고 사려를 온전히 길러서 실천하는 실제를 지극히 하여야, 체와 용이 완전해져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본말이 다 갖추어져 선후에 차질이 없게 되는 것이다. 급박하게 구하면 맹자가 말한 것처럼 묘를 뽑아 조장(助長)할까 싶어 걱정스럽고, 느긋이 기다리면 놀기만 하다가 황음(荒淫)에 빠질까 염려스럽다. 먼 곳에 오를 적에는 가까운 곳서부터 시작하는 순서를 따르고, 처음은 잘하지만 끝을 잘하는 이가 드물다는 경계를 유념하여야 한다. 독실하게 행하고 오랫동안 지켜 나간다면, 충분히 축적된 뒤에는 행 공부와 지 공부가 서로 바탕이 되고 이치와 일이 서로 함양하여 급작스러운 순간에도 참된 근원을 만나고, 수작하는 사이에 오묘한 쓰임을 체득할 것이다. 이것이 맹자가 이른 바 ‘깊이 나아가 자득하는 것’이요, ‘즐거우면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니, 옛사람이 ‘완상하고 즐기어 몸을 마친다.’라는 경지가 어느새 나에게 있게 될 것이다. 학문이 가르치고 기르는 데서 얻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이제 서당이 완성되어 가르침이 시작되었는데, 모르겠지만 부형이 가르치는 바와 자제가 배우는 바가 과연 이런 방침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만일 이것을 버려두고 오직 문예만을 전적으로 공부하여 진취하기만을 도모한다면, 달콤한 복숭아를 버리고 신 돌배를 따는 격이며 사통팔달의 큰길을 피하고 꼬불꼬불한 오솔길을 찾는 격으로, 부지런히 공부할수록 더욱 굳게 그 심술을 무너뜨릴 것이니, 공들은 이런 짓을 하지 않을 줄 안다. 내가 한번 그 당에 나아가 공들과 인사를 나누지는 못하였으나 여러 공이 부탁한 뜻에 감격하여 그 설을 지은 것이다. 훗날 영해 사이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탁월한 인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배출된다면, 또한 내 말이 망녕되지 않았음을 자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산수와 바위, 골짝의 형승 및 화초, 조어(鳥魚)의 즐거움은 학재에 사는 제군들이 스스로 터득할 것이니, 또 어찌 내 말을 필요로 하겠는가. 이에 기문을 짓는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09

 

■晩谷先生文集序[鄭宗魯]■

大凡聖人之道。精微廣博。有未易洞見而實体之。然若語其要領則不過曰精思力踐而已。苟有能從事於此而擴充之。豈不卓然爲吾道中鉅匠而師表乎後世也哉。余於晩谷趙公謬蒙辱與之交。目其儀容。耳其辭氣。又得其書牘言論而心偉之。公殆所謂豪傑之士哉。盖其家庭之承襲。壎篪之唱和者。有異於他。而天姿卓越。地步超逸。不待師友之開發指引而便能覺俗學之外。有吾儒家眞的妙訣。專心一意於窮理盡性之工。平生所潛究默玩者。皆聖賢文字。而尤於子朱子之書。益致其力。如大全語類等書。反復繙閱。擧以告人。如誦己言。旣而從李大山,金九思兩先生質問講磨。以極其歸趣。則其於此學之大綱領。此理之大原頭。固已覷破之無餘矣。是故其服膺而發見於外者。衣冠常整齊也。居處常淨潔也。言語常正大也。行事常平易也。吐辭宏博而動輒根於義理。闡人潛德而未嘗浮於事實。嘗著雲橋問答。痛卞邪學於未及熾盛之時。居常訓誨後進。使不迷於趍向。則其深造自得之竗。固非人人之所能知。而大抵特立於頹波之中。直趍於上達之域。以撑拄夫東南半壁之天。而屹然爲障川之柱指南之車。若彼 其犖犖焉。倘非豪傑之士。其孰能如是乎。今觀其遺集凡數十卷。而皆可誦可法。不特其文詞有炳然者而已。則其得傳於後無疑。若公誠死而不朽者歟。余自哭公。常切後死之歎。公之猶子居信忠彦甫。要我校讐而爲一言以弁之。遂與公族孫根復共卒業。因書此以歸之。若其精思實踐之功。於聖人之道。有能默契而高詣者。則讀是集者當有以自識之矣。晉陽鄭宗魯撰。

 

 

 

■月麓書堂學䂓■

書堂已成。牕戶明㓗。庭宇淨殖。展宜棲息講道之所。凡我同學之士。盍懋所以自新之道。而旋念吾輩茅塞已久。放逸多年。卒然語之以仁義道德之實。不徒不入於心。亦且不切於聽。故姑取白鹿洞學規餘義。揭之壁上。以爲朝夕觀省之資云爾。

父子有親。君臣有義。夫婦有別。長幼有序。朋友有信。

右五敎之目。

家庭間。切勿疾言遽色。宗族中。切勿小事相難。尊長側。切勿儳錯言語。

入學之始。都不外於日用彝倫之間。故謹依五敎之目。補之如右。

博學之。審問之。愼思之。明辨之。篤行之。

右爲學之序。

勿觀雜書。恐分精力。勿主偏見。恐益葛藤。勿牽他說。恐亂正義。勿取急讀。恐不留住。勿憚溫習。恐失毫釐。

問學之要。亦不外於講硏尋索之工。故謹依爲學之目。補之如右。

言忠信。行篤敬。懲忿窒慾。遷善改過。

右修身之要。

心志必端正。衣冠必整飭。言語必徐緩。步履必安詳。

忿怒內萌。徐觀義理。淫慾外誘。斬斷根株。

操修之功。動靜無違。表裏交正。而七情之發。尤益難制。故謹依修身之目。補之如右。

正其義不謀其利。明其道不計其功。

右處事之要。

心安而身勞者爲之。義多而利少者爲之。

董江都二段語。惟朱夫子答蔡季通兩語可以解破。故謹依處事之目。補之如右。

己所不欲。勿施於人。行有不得。反求諸己。

右接物之要。

勿論人長短。勿言人過失。勿揀人賢愚。勿窺人隱密。勿羡人富貴。勿干人酒食。

洞䂓以其精者而言之。此目以其粗者而言之。由粗入精。亦循序漸進之道。故補之如右。

 

 

■三守堂記■

太白文殊之山。其氣淸淑。下多賢士大夫。世所稱川城四老。茅山李公先生其一也。公人品高邁。朗然如玄圃絳雪。閬苑琪花。無一點世俗氣。爲文章亦如其人。嘗與荷塘,蒼雪,龜厓三君子。生幷一縣。結爲道義交。每穠春素秋。步屧來𨓏於靑霞水石之間。相與講貫切劘以爲樂。間又走一千里。西到漣水之上。謁眉 叟許先生。先生一見公。悅其臭味而樂之。告以行己之方曰守心無妄念。守口無妄言。守身無妄動。公再拜跪受敎。退而講問於南嶽先生。先生又演其說曰夫無妄者誠也。欲其心之無妄。必格致以誠其意。欲其言之無妄。必修辭以立其誠。欲其身之無妄。必明善以誠其身。噫眉翁之旨。嶽老已盡之矣。夫由中而應外。制外而養中。此表裏之功也。而守者執而勿失之謂也。大易以天地之无妄。爲聖人之誠。而君子下學之方則程夫子四勿箴。朱夫子敬齋箴。備言三守之義。兩先生之所以示公者。豈無以哉。公平生服膺其敎。爲一身之佩符。幷眉叟先生守身謹行四大字。揭之座右以自警。而于今去公之歿已近百餘年矣。歲晏叢桂。猿鶴無主。而一區遺宅。寶唾䵝昧。廼者公之四代承孫延祚甫。悼歲月之愈遷。悲嗣徽之莫徵。遂灑埽故宇而新之。扁三大字曰三守堂。嗚呼。公之亭亭物表。欱山水之輕淸。塡義理之骨髓。蟬蛻於汚濁之中者。雖不可復見。而公之精微心法。承受於兩先生之音旨者。宛然照暎於風簾月簷之間。怵然愴然。如復見公於千載之下。則公之子孫所以守心而守口。守口而守身。寧有忽於蹞步之間。而凡其一念一語。以及一動。常自點檢曰吾先祖以爲何如。而吾子孫得以無忝乎云爾。則扁楣之三大字。其有勝於盤盂几杖之銘也審矣。不佞非敢文也。於延祚甫有通家之誼。且聞延祚甫斤斤守家法。能以爲三守主人者。不佞旣以爲記。且誦大易之繫曰知至至之。可與幾也。知終終之。可與存義也。此眞三先生守之之義也。第以勉延祚甫。而以爲自警之資云爾。

 

 

■書族大父柱江公庭誡後■

嗚呼。公之此書二十四條。皆切於日用倫常之道。誠使後之人。服膺而勿失。則奚翅於盤盂几杖之戒。而公以二十四條中。獨闕忠君上務稼穡二欵。設爲問答。多至百餘言。其忠君上一條。答以移孝之道而忠於君。則忠孝本無二道。未有學養子而後嫁者也。其務稼穡一條。答以農者天下之大本。治生之要道。吾夫子豈不知此。而於樊遲之問。必曰不如老農老圃者。以禮義之最急而農務之不必先之也。蓋嘗遡公之旨而論之。不遺其親者。亦必不遺其君。篤於親親者。亦必忠於長上。百行之源旣備則萬務之推。奚難哉。且今之爲士者。衣食切於目前。孰肯捨其田而芸人之田哉。不敎而自能。不率而自勉。人皆知服先疇之畎畞而能遵守乎高曾之規矩者幾人哉。公之苦心可見於此。而惜其墜失於煨燼之中。誠使今日之爲公子孫者。知此意之鄭重而幷爲體行於二十四戒之中。則亦可謂得公之志而肖公之業矣。嗚呼尙勉之哉。

 

 

三棣堂行錄贊幷序

吾宗人。世居興州之卧丹山中。丹丘公以下諸房。皆簡朴淵愨。隱德不耀。世之知不知顯不顯。蓋不屑也。丹丘公六世孫有子三人。伯諱奎瑞字文彥。叔諱台瑞字邦彥。季諱斗瑞字樞彥。性皆恪謹。早喪父。奉七耋老母。甘脆無所闕。其色愉愉翼翼如也。暑則扇枕。寒則以身藉溫。與兄弟友愛篤至。聯被而卧。剖甘而食。每秋成。通三家之穀而貯之一庫。凡吉凶賓祭之供。必稟于家長。其用餘之贏。弟讓于兄。兄讓于弟。恂恂有萬春鄕風焉。尤於追遠。有著存之誠。諱日必哀痛謹齊之色達於面目。蘋藻之品。備極水陸。不計家之饒乏也。六代祖忠義公墓在北洞外先祖僉知權公墓下。年代寖遠。岡域崩圮。伯公一日與議門老曰吾聞吾先祖禦侮公。以端午日生子。不宜於父母。忠義公受之襁褓而乳養之。以及於余乎。此不肖輩刻心傷感處。遂改築其堋。優寘祭田。至今以爲定式焉。公於先輩長德。心慕而篤向之。嘗爲崇禎處士杜谷洪公治表石。石在榮川同樂亭。將掘輒有風䨓之變。人不敢近者百餘秊。公不怵於色。躬自斸掘。天不風以䨓。人皆服公有定力。嗚呼。吾聞躬孝悌者天必福之。公旣孝且悌。構其堂曰三棣。與叔季二公。枕藉其中。誦法先王日用彝倫之道。人不知其爲異身也。伯公季公卒以死於服中矣。自其後叔公落托無意世事。怨具爾之多喪。悼來日之無多。不復治公車業。詩酒自廢。枕席嘗有隱涕處也。惟賓祭必謹。家法繩繩有條理。伯公無子。以其子子之。季公亦無子。謀取宗人之子而子之。其敎養之方。靡不用極。至其子重新三棣堂而廓大之。子孫甚秀而文。三公未艾之福。不食之報。固於是焉在。遂爲之贊曰。

旣孝且弟。吾家之法。三棣堂存。宜後人之矜且式兮。

 

 

晩谷先生文集卷之十七 / 遺事

◐成均生員丹丘趙公遺事◑

公諱貞字正卿。以寓居興州之丹丘。自號丹丘。趙氏系出漢陽。六世祖襄烈公諱仁璧。仕麗朝累著勳庸。位至三重大匡。以太祖姊壻。晩見王業漸隆。因退居于襄陽。堅不事二姓之志。襄人爲立忠賢祠以祀之。歷良敬公諱涓。生諱憐兵曹參判。子諱云從郡守。廼公曾祖也。祖諱琮淸河縣監。考諱仁琬進士直長。公生于弘治戊午。幼有至性。天資雅飭。靜庵先生廼公族叔父也。早受業于門下。聞學問大端。及行己爲人之方。心悅而服膺焉。秊十九成進士。時公家在漢陽之興仁門外。先生居駱洞新第。聞榜之夕。先生親至爲典客。懽然樂甚。乃引公戒之曰若於吾宗族中秊最少而偶參省試。勿以小得自足。益自撿束身心。爲門戶光。公跽受敎。自是日擩染於典訓之內。尤講明禮書。所點竄有大明禮要等書。己卯北門禍作。先生首先被禍。一時門族士友幷就虀粉。公侍祖父淸河公。遯于大嶺之南。寓止榮川。讀書之外。躳自釣弋。歡奉甘脆。於當世事漠然無意。俄又淸河公及直長公棄世。廼自榮川又移興州之丹丘村。樂其宅幽勢阻。抱究墳典。因有終焉之志。繼又遭祖母黃夫人喪。廬墓三秊。不脫絰帶。蔬食水飮。不近滋味。爨婢每別貯什器以供具。及服闋。安榮二邑人士以公學行薦于使臺。將轉聞于朝。其薦目有曰潛心正學。誠孝出天。人皆以爲公實行過之。無不及也。公之所與遊。皆一時知名士。如趙龍門昱,林石川億齡,金潛庵義貞皆同秊友也。又與琴竹牕梧,權東江士溫爲莫逆交。還往無間焉。己丑考終于正寢。享秊纔三十二。嗚呼惜哉。夫以公資質之美。行誼之厚。頭角早成。學問有方。使天假之秊。其所成就。必有可聞可傳於世者。而中因患難。繼以荼毒。使崑山之玉鄧林之材。居蔽而不章。夭閼而不展。世代久遠。雲仍僅存。累經兵燹。文籍闕漏。遡而上之。無端的可據之實。然而幸可徵信者。以其早秊薰陶於大賢之門。則有一言終身之敎。晩歲切磋於麗澤之間。則有四方取友之益。孝敬戚易之行。潛究力索之功。至騰於薦剡之章。以此而竊迹公平生。亦可以槩其一二矣。是以龍洲文簡公刊定世譜時。其條例極爲簡明。而於公之事。不厭其詳細備錄。以爲發潛闡幽之地者。豈無以哉。間者遠近宗族。采一方士論。以襄烈公峴山遺祠頹剝已盡。重謀營建。廼卽太白山下丹丘之陽。以定厥位。寔公桑梓之鄕也。遂以公升祔于從祀之列。以待日後之公議。公之裔孫玄道氏。以述道爲淸河公姓孫。於公有袒免之義。強以公遺事要責不置。顧述道晩生耳。識見單淺。何敢有所稱重。姑陳其所聞於平日者如此。以俟當世君子之辱有所采摭而有所去取焉。

 

 

◐皆巖趙公遺事◑

吾宗老八十二歲翁。修其先人行蹟一通。屬于宗人述道曰吾先人有志事。可傳於後。而不肖孤朝暮近死。恐遂昧昧。重貽後死之恨。子以一門衆昆弟。習聞先子事。願記其實。述道跽辭以不文。再三不已。遂勉爲之撰次曰公諱弘道字能彥。後改以一道而以舊諱行於世已久。吾趙氏起自漢陽。在麗朝冠冕赫舃。十三代祖襄烈公諱仁璧。輔理功臣門下左政丞。見麗運將訖。退老襄陽。砥礪風節。子良敬公諱涓。以 太祖親甥。入本朝官至右議政。曾孫縣監諱琮始落南居榮川。至孫贈參判諱源。復遷于英陽。曾祖諱頍成均生員。文雅淸高有士望。嘗入薦剡不果用。祖諱德培。考諱裖。卓犖夷曠。人士歸之。妣襄陽權氏。諱昪之女。以明陵乙亥生。卒以元陵乙亥。壽六十一。公自少容貌秀瑩。儀觀偉然。性又簡高。不拘邊幅。初上學不煩敎督。駸駸有步趣。旣長風格秀拔。標望迥絶。文華筆法。翩翩美少秊。如魏晉間人物也。居家孝友謹嚴。營私第于葭湖。與大宅相距稍間。雖甚風雨及之。越大江奉寒暄。朝夕不廢也。壬戌仲兄遘癘蚤歿。其餘大小八九喪。一時幷出。公殮葬恤孤。一無憾怨。癸亥丁外艱。甲子又丁大夫人憂。前後喪間三日。公大痛幾絶。柴毁內傷。遂致右目昏翳。不復辨物也。自是一切世念斷置。制除後構小亭於立巖之上。左右石壁嵬峩。淸流瀉其下。鄭石門遺墅隔水一帶。芝坪舊宅在一舍而近。每風朝月夕。倚牕寄傲。或 日暖春溫。負杖往候於伯氏。或沿江上下。俯淵臨流。行旅之過而望之者。翛然如世外仙人。述道兄磨巖翁嘗曰如公標致。置於山澤間。無一點塵陋。堪作畫看云。洪知事晟嘗過公宿。拈韻賦詩。意甚樂之。名其亭曰皆巖。九思金公樂行亦曰江山之勝。必與其人相稱。冷泉李公猷遠。於公歿後嘗到其亭。詠古詩曰人亡餘舊宅。空有荷花生。公之謂矣。乙亥宗家染沴。二親喪餘之日。公於所居房舍。略設盤供祭。以平生孺慕之誠意。慘慘不樂。旋卽示憊。招末子居廣。敎誡曰吾病如此。汝與兒孫讀書飭行。無忝所生。因正枕悠然而逝。乃其秊正月也。葬于安東東山里負壬之原。配完山柳氏。與公同秊生。拙庵諱㮨之曾孫樸齋諱錫斗之女。涉歷圖史。訓子女以義方。後公十九秊終。葬與公同原異壙。男居易僉樞,居誼,居廣。女李宇鑑,朴啓周。僉樞男仁復,休復蚤卒,綏復出繼。女李養正生員,南處陽,李致寅,柳宇文。居誼男圭復。女權煦。居廣男信復。女李海暾。嗚呼。公以偉麗之材。曠達之風標高揭。已迥脫流俗。放情溪山。忘形魚鳥。且嘯且詠。以終其身。其篤孝之心。至於因毁而喪明。感慕而嬰疾。秊纔踰於下壽。志不滿於平生。而器度軒昂。風采動人。顧眄之餘。莫不傾心而畏憚。酬酢之際。莫不愛慕而欽服。鄕人子弟。或有過差。諄諄敎飭。使之自化。門族中以某事失和。至於相阻。則公執左右手。俾令自解。門族聞之。相與歎曰非我公。吾族幾羞人聽聞也。平生未嘗畜財營產。性淸高。手不能琴而每遇解曲者。使之彈而聽之。意氣軒宕。咳唾迭發。宛若琴中有人也。述道旣感老人之請。又念公志行可記。略綴平日見聞之梗槩。以俟後之知德者取考焉。

 

 

◐處士趙公遺事◑

公諱喜采字士亮。漢陽之趙。上世諱之壽。麗朝僉議中書事。歷龍城府院君諱暾。至襄烈公諱仁璧。爲輔理功臣。見麗祚將訖。退老襄陽。子諱涓入我朝官右議政諡良敬。曾祖諱廷珩成均進士。丙子亂後。絶不赴擧。託情詩酒以自終。祖諱頩有隱德馴行。家居敎授。考諱德久成均進士。妣載寧李氏。之炯之女。副提學孟賢之後。進士公伯氏生員公諱德厚。有文行蚤卒無子。進士公承遺志。以公出繼于生員公。妣眞城李氏。參奉簠女。後夫人聞韶金氏。厚基之女。鶴峯文忠公之五代孫也。公以明陵丙子二月三十日生。以元陵丙子四月十六日卒。享秊六十一。墓在縣北興霖山向巳之原。公爲人魁顔方面。肌肉白晳。風調夷曠。軒軒有丈夫氣也。少豪縱若不可羈笯。而習聞進士公義方。從叔父玉川府君尤賞其器局。數提撕之。公之有得於家庭者爲多。自少時折節爲恭遜孝謹之行。奉金夫人須臾不離側。晝侍進士公應酬賓客。退供甘毳。不計家之有無。進士公或有不安色。公逡巡立庭下。色不滿容。足不正履。多方以溫之。時玉川府君在江舍。當壬子儉歲。廚烟屢空。公齎糗挈壺。往調其急。玉川府君每歎曰汝兩庭之間。何暇及於余邪。有大事。必曰此子可與語。謂進士公曰君有幹蠱子。可謂百不憂也。金夫人力貧支憊。晩秊家計稍優。公奉承而廓大之。爲親事事不推於家弟。進士公晩卜一小室。其本家無以猷爲。公割腴田捐僮僕。以順適親意。撫愛一家諸子姪。稍有將來成就者。喜若己出。恤其竆匱。恣其啗噱。若父子之煦煦然。公少有文才。亦不屑爲功令家言。嘗入試圍。揎袖掀髥。置試券腿上。手自寫曰如此好文字。誰能吾倩手者。一場人皆笑。以爲風流不可及。丁巳遭金夫人憂。又遭玉川府君海康之禍。後二秊己未。疊遭進士公喪。六秊之間。痛毒以幷。送往諸節。詳密無憾。自是無意世事。或秋高氣淸。使兩僮臂蒼牽黃。逍遙於雲岡雪山之中。落落多豪興。每當良朋在座。肴樽不空。一場諧笑。使滿座皆春。聞人急難。若己恫癏。無物我畦畛之意。見事之不是處則嚴辭峻斥。然未嘗芥蔕於胷中。人亦不甚怨之。平生惟以勸課子孫。刻心著慮。凡有科則躳自拚具。不計遠近。蕫督以送。而子孫未及公在時得一成名。或身不享者有後。其信然邪。嗚呼。公以磊落之姿。俊爽之局。享有百秊。使習性檢柙。識慮老成。豈不爲一家之幈幪。鄕黨之矜式。而毒沴乘之。大限俄竆。惜哉。配聞韶金氏。命錫之女。參奉台重之孫。生一男二女。男純道僉樞。女權正魯,柳明源。繼配務安朴氏。泰升之女。生一男存道。屢擧不中。純道男居陽。女南景烈,申駿烈,邊以璜。存道男居述。女南大樛。權正魯繼子思義。柳明源子鳳休。女金以載。居陽男恒復。方以文學有來望者。升復出繼。女鄭之樑金樂曾。居述有一男一女幼。述道幼少從諸兄之後。每肄業於公之下室。或夕陽下山。公岸巾逍遙。笑謂諸生曰得好句。未輒諷誦。古人名家語以勸之。愔愔如昨日事。而倐已四十寒暑矣。今僉樞公翯然老白首。秊踰八十二。而扶杖累垂。儼然造吾石塢。猥請無能之辭。雖靡兄言。豈敢忘諸。而第文辭短淺。何能徵信百世。謹綴平日耳目之所逮及者。以塞孝子之悲。幸知言君子采擇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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