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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삼별초의 대원항쟁]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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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대원항쟁]

삼별초는 1230년 고종 17년 무신정권 최우 집권시기에 설치한 야간 순찰과 도성내 치안유지 기능을 하던 야별초에서 시작한다.

이후 규모가 커져 좌우별초로 분리되고, 신의군이 추가로 편성되면서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된 삼별초가 된다.

원군과 전투에도 삼별초의 전신인 야별초의 기록들이 나온다.

하지만 일부는 최씨 집안의 사냥개라는 표현을 쓰면서 사병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김준이 최씨정권의 마지막 최의의 세력을 제거할 때, 임연이 김준을 제거할 때 정적 제거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1270년 원종 11년 6월 삼별초 해산령에 불만을 품고 개경환도를 거부한다.

당시 개경은 원 호위군에 둘러쌓인 원종이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원종이 파견한 김지저 장군이 삼별초 명부를 압수하자 삼별초는 개경에 돌아가서 벌어질 보복을 두려워 하게 된다.

배중손 장군과 노영희가 연합하여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새로운 국왕으로 내세우며 1270년 6월에 봉기한다.

1천여 척의 배들을 이끌고 진도로 향한다.

진도는 수도 개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경상도와 전라도 세곡들이 조운을 통해서 개경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전략적인 이점이 있었다.

삼별초는 진도 용장성을 거점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과 일부 내륙지역과 제주도를 확보하게 된다.

1270년 11월 삼별초는 이문경 부대를 제주로 보낸다.

원래 제주는 대원항쟁 기간 동안 항원 거점으로 삼을 만한 지역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무신 정권 말무렵 대원 항쟁의 연장을 위해 수도를 강화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로 옮기려는 시도를 세차례나 한다.

당시 지정학적 요지였던 제주를 거점으로 삼아 남송과 일본과 더불어서 대원 연합 전선을 이루고자 생각했던 것이다.

이들은 명월포(한림 인근)로 상륙하여 제주시 동쪽 동제원(화북 거로 마을 입구)에 주둔한다.

개경에서 보낸 제주 관군들을 송담천 전투에서 격파하고 조천포를 확보한다.

당시의 상황을 김태현 묘지명에 써있는 내용을 보면 제주 사람들은 당시 개경의 관군보다는 삼별초를 지지하고 도와 주었음을 알수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제주사람들은 관군과 삼별초간의 싸움에서 많은 피해를 보게 된다.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진도의 삼별초를 공격했으나 번번히 실패한다.

1271년 김방경, 흔도, 홍다구의 여몽 진압군이 공격에 배중손과 왕온이 희생된다.

김통정과 일부 삼별초는 제주도로 후퇴하고 방어진지 구축에 힘을 쏟고 해상권 확보에 노력하여 31개월 동안 제주를 거점으로 활동하게 된다.

 

방어시설로 삼별초 지휘부가 있었던 해발 150-200m에 길이 6km 면적 34만 4000여 평의 항파두리성, 삼별초 수군 병력의 거점이자 항파두리성에 이르는 주요 관문인 애월포에 설치한 애월목성, 제주 해안선을 따라 전체적으로 둘러싼 3백리 장성인 환해장성을 건설한다.

다시 세력을 키워가던 삼별초는 경상도와 전라도 연안까지 진출하며 세곡 약탈을 한다.

1273년 김방경, 흔도, 홍다구를 주축으로 병선 160척, 1만-1만 2천여 명(고려군 6,000 명, 몽골군 2,000 명, 한족군 2,000 명)의 병력으로 삼별초가 있는 제주를 20일 동안 공격하여 3년만에 삼별초를 완전히 진압한다.

제주에는 원나라 군사 500명을 거주시키며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제주는 원나라의 직할령이 된다.

몽골은 몽골의 국립목장인 동아막과 서아막을 제주에 설치한다.

삼별초의 항전을 정부에 대한 반역으로서 대몽 항쟁보다는 단순히 고려 정부에 대한 항전이었다고 보기도 한다.(조선시대, 일제시대 일본학자들 주장)

하지만 현재 대다수 국사학자들의 입장과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시각으로 계속 이어지는 민족적 대몽항쟁과 민중들의 저항의식의 결집과 동조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삼별초가 여몽 진압군의 우세한 전력에도 3년간 버틸수 있었던 이유가 경험 많고 매우 우수한 삼별초군의 전투능력과 함께 당시 몽골에 의지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왕과 귀족세력들에 대한 반감으로 남부지역의 백성들의 적극적인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삼별초의 대몽항전의 결과로 반몽골적 정치 세력이 일소되고, 친원세력이 득세하게 된다.

출처: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jus898&logNo=221858905712&parentCategoryNo=&categoryNo=1&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한국사. 삼별초의 대몽항쟁

삼별초는 1230년 고종 17년 무신정권 최우 집권시기에 설치한 야간 순찰과 도성내 치안유지 기능을 하던 야...

blog.naver.com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항쟁(三別抄抗爭, 1270년 ~ 1273년)은 고려-몽골 전쟁이 끝나고서 삼별초가 원나라 및 고려 조정에 대항해 일으킨 항쟁이다. 고려 조정에 대한 반란의 성격을 강조하는 시각에서는 삼별초의 난(-亂)이라 부르고, 원나라에 대항한 것을 강조할 때는 삼별초의 대몽 항쟁(-對蒙 抗爭)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경

삼별초는 봉기하기 전에는 고려 조정의 휘하에 있었다. 원래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었고 군부독재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자 최씨 무신정권은 1232년에 강화도로 천도하고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 하지만 기반이 허약한 고려는 잦은 반란에 직면한다. 반란 중 일부는 평정되었지만, 북부 지역의 반란 무리는 몽골로 이탈하고 그 영토는 몽골 제국에 병합되었다. 최씨 무신정권이 붕괴하고 고려 원종과 원종에 기생한 일단의 문신을 비롯한 신료들은 몽골 제국에 항복하였다. 무신정권에게서 정치권력을 빼앗은 원종은 결국 1270년(원종 11년) 삼별초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배중손이 이끄는 강화도의 삼별초는 몽골 제국 및 몽골에 예속된 고려 원종의 조정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1][2]

경과

애초 고려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면서 대몽 항쟁에서 선봉에 섰던 삼별초는 고려와 몽골 사이의 강화(講和)와 굴복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즉각 반기를 들었다. 삼별초 지유(指諭) 배중손과 야별초(夜別抄) 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은 항쟁을 결의하였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교통을 끊었으며,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3]을 왕으로 추대하여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했다.[1]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여 경계가 어렵게 되자 함선 1000여 척을 징발하여 강화도의 재화와 백성을 모두 싣고 강화도를 떠났다. 이후 삼별초는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면서 남하하여 진도에 이르렀다. 그곳에 불변하고 오래가는 근거지를 두고 용장사를 행궁으로 삼았다. 그 뒤 용장사 주변에 산성을 쌓고 관아도 세웠으며, 제법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고 활발하게 움직였고 고려의 유일한 정통 조정이라고 주장했다.[2] 당시 진도와 인근 지역에는 과거 최씨 무신정권이 소유한 농장이 그때까지도 대규모로 존재했다. 또한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세곡이 수도로 운송되는 길목에 진도가 있었기 때문에 세곡으로 운반되는 식량과 자금을 자체 군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1]

또한 남해안과 각 도서·나주·장흥에서 동으로는 부산·김해·마산 등까지, 북으로는 전주에까지 출병하여 진압군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쳤으며, 그해 음력 11월에 이르러 삼별초군은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는 등[1] 1271년 초까지 진압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면서 개경 조정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1271년(원종 12년) 음력 5월 진압군이 세 방향(좌군·중군·우군)에서 진도를 침략한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했지만, 삼별초가 중군을 방어하는 동안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하였다.[1] 진도 정권이 수립된 지 9개월 만에 진도는 함락당하였다. 혼란에 빠진 삼별초는 순식간 무너졌고 배중손은 진도 남도진성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1271년 말,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지휘하는 잔여 세력은 탐라로 거점을 옮겨 계속 항쟁하였다. 탐라에서의 삼별초는 처음 1년간 자체 조직 정비와 방어 시설의 구축에 주력하였고 이후 약 반년간 전라도 연안에서 군사 활동을 전개하여 그 세력이 충청도와 경기도 연안까지 확대되었으며, 개경 근처까지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몽골제국과 진압군의 침략으로 1273년 원종 14년 음력 4월 탐라에서 결사 항전하던 삼별초도 무너지고 말았다.

결과

고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 대몽항전의 최후를 장식한 것으로서 그 후 고려는 14세기 중반까지 원나라의 간섭에 시달렸다. 그러나 당시 고려 백성 중에서 삼별초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원나라

몽골은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1273년부터 1290년까지 탐라를 직할하고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으며, 1277년(충렬왕 3)에는 목마장을 설치하여 자신들의 마필 수요를 충당했다.

평가

오늘날 삼별초의 항쟁은 외세 침략에 완강히 대항한 영웅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왕조에 대한 무인 사병 집단의 반란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1978년 삼별초의 항쟁을 기리는 기념물이 제주도에 세워졌다. 진도에 있는 용장산성 같은 유적지는 관광지로 유지된다.

읽을거리

각주

  1. ↑ 이동:가     박남일 자유기고가 (2008년 2월 13일). “호국항쟁의 화신이 되다”. 조선일보. 2008년 12월 11일에 확인함.
  2. ↑ 이동:가  이철영 (2004년 9월 14일). “[이철영의 전라도 기행 33] 진도 삼별초 항쟁 - 진도에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HTML). 오마이뉴스. 2008년 12월 11일에 확인함.
  3.  承化侯(?-1271) 王溫은 고려朝 왕족으로서 고려 현종의 팔대손이고 永寧公 王綧의 長兄이다. 1270년 원종 11년에 원종 자신과 원종에게 기생하는 일단의 문신들이 정권을 거머쥐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고려가 오랜 對몽戰을 종식하게 하려고 開京으로 환도한다는 명목을 내세울 때, 이것을 반대하던 三別抄의 裵仲孫 ·盧永禧 등에 의하여 고려 왕으로서 추대되었다. 이 삼별초를 따라 강화도를 뒤로 하고 전라도 珍島로 옮겨 결사 항전하였으나 익년 진압군에게 대패하여 아들 王桓과 함께 元의 장수 洪茶丘에게 피살했다.

《 강화도의 역사 》 2. 중세편 ⑹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가?(아니면 안쳤는가?)

김학사

안녕하십니까? 집현전의 김학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선원사와 팔만대장경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이번 시간에는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①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가? 치지 않았는가?
유라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몽골이 쳐들어오자 무너졌습니다. 버텨낸 나라가 거의 없었지요. 이런 나라들 중 고려가 드물게 수십 년 항쟁을 계속하며 나라를 지켜냈습니다. 물론 고려만 유난하게 수십 년 항쟁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요. 중국(남송), 베트남(쩐 왕조)도 몽골에 대항해 수십년간 항쟁했고 베트남과 이집트(맘루크 왕조)는 아예 승리를 거두어 몽골의 침략의지를 꺾었습니다.

 

맘루크 왕조(주황색)

고려의 장기적인 항쟁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고려의 새로운 도읍인 강화도의 존재에 주목합니다. 몽골군은 고려 전 국토를 짓밟았지만, 고려의 새로운 심장부인 강화도는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못했)지요. 몽골군이 강화도를 치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최근의 경향은 몽골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거나 치지 않았다는 설이 다소 강하게 제시되는 편이기는 하지만요.

몽골이 강화도를 ‘칠 수 없었다’는 생각도 다시 여럿으로 나뉘어집니다. 첫째로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대로 몽골군에게 수전 혹은 해전에 대한 공포가 있다는 점이고요. 둘째로 중원대륙이나 동유럽, 서남아시아 같은 지역들이 우선이었다는 점입니다. 금나라, 남송, 키예프 공국(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압바스 왕조 등의 경우 말이지요.

앞에서 언급한 이런 ‘주 전선’ 때문에 고려 전선은 다분히 ‘부차적’인 경우입니다. 셋째로 촉박한 일정도 문제였지요. 몽골은 보통 가을에 고려를 침략해들어와서 보통 다음 해 봄에는 귀환해야 했습니다. 수나라나 당나라와 달리 몽골은 추위에 강하고 더위에 취약했으니까 말입니다. 어떻든 몽골은 고려에서 해를 넘기는 장기전을 수행하기에는 불편한 상황이었지요.

넷째로 이 경우는 다른 침략받는 나라들도 마찬가지지만 몽골의 대칸 즉 황제가 자리를 비우게 되는 공위 시대가 있는 경우입니다. 원나라 이전의 몽골은 자동적으로 부자상속이 되지 않는 나라라 이런 공위 시대가 있었고 고려도 이 혜택(!)을 본 적이 있지요. 내부가 어수선한 이 시기에는 몽골의 대외원정이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런 ‘외부적 요인’만으로는 고려의 수십 년 항쟁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과연 고려에는 어떤 남다른 점이 있어 몽골에 이토록 저항할 수 있었을까요?

② 강력한 무기인 고려의 지리
몽골의 마형(馬亨)이라는 인물은 고려의 지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들이 강과 산의 험함을 믿고 바다에 식량을 쌓아 가만히 지키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 (몽골이) 무슨 계책으로 (고려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가 서기 1269년의 일입니다. 이때는 고려의 전쟁 수행능력이 현격히 떨어져 있을 때였지요. 이런 시기에도 고려의 만만찮음에 대해 마형이 이야기하는 판국입니다. 근거자료는 『원사(元史)』 권(卷) 208 「열전(列傳) 95」이고요. 같은 책에서 마형 외에 마희기(馬希驥)라는 원나라 인물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지금의 고려는 곧 고신라(古新羅)·백제(百濟)·고구려(高句麗) 삼국이 합하여, 하나가 된 것입니다.”(후략)

몽골도 나름대로 고려에 대해 잘 파악한 듯합니다. 한반도의 산악지형과 그것을 활용한 많은 산성들의 존재, 거기서 항전하는 백성들의 의지 등을 말이지요. 몽골이 어디까지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외적의 침입을 막기에 적합한 강화도의 지형조건이나 강화도 정부의 수비 능력도 상당했던 점도 감안 요인입니다. 물론 최씨 무신정권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요.

③ 고려와 조선의 차이 

자연환경이 외적을 방어하기에 아무리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지켜내는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원나라(몽골)와 청나라(만주)가 해양민족도 아닌데 결과가 판이하게 달리 나타나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아무리 유목민(몽골)과 수렵민(여진·만주)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들이 육상 위주인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만.

물론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인은 시대적 상황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요인으로 원나라가 수군 전력 자체가 부족했거나 동원할 상황이 아니었던 반면 청나라는 명나라에서 항복한 수군 전력을 동원할 수 있었지요. 이것이 앞에서 몽골이 강화도를 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몽골이 수군을 양성하는 시기는 빨라도 금나라 멸망 시기인 서기 1234년이니까요.

두 번째 요인으로는 원나라와 달리 청나라는 홍이포라는 장거리 대포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몽골도 비화조나 회회포 같은 그 당시의 첨단무기가 있었지만 자연 그 자체를 극복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청나라의 홍이포도 그런 점은 마찬가지지만 나름대로 성능을 발휘할 여지는 있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병기가 발전한 것이지요. 

세 번째 요인으로 고려와 조선의 방비 태세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최씨 무신정권의 최우는 사악한 권력자가 맞지요. 인성으로만 보자면 조선 인조보다 하나 나을 것 없는, 아니 훨씬 교활한 집권자가 맞습니다. 다만 같은 악인이라도 최소한도의 통치능력은 있는 권력자와 없는 권력자의 차이라 하겠지요. 조선 인조에게는 그러한 통치능력이 도통 없었습니다.

똑같이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된 권력자라 해도 최우는 최소한의 준비 정도는 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아울러 자존심을 누를 때는 누를 줄도 아는 인물이었지요. 반면 인조는 최우와 달리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적어도 강화도 방비만큼은 철저했던 최우에 비해 인조는 큰소리만 쳤지 왕조 아니 정권을 지키기 위한 방비도 제대로 하지 못했지요.

네 번째 요인으로 강화도의 수비환경이 조선 때에 이르러 형편없이 취약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란이 많았던 고려와 전란이 적었던 조선을 평면 비교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요. 임진왜란 직후 조선 정부에서는 전쟁 중에 떠도는 백성을 안주시키기 위해 농경지 개간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역설적으로 강화도를 침공하기 좋은 요건이 된 것이지요. 이렇게 여러 요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그 유명한 삼별초 항쟁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지요.

 

《 강화도의 역사 》 2. 중세편 ⑺ 삼별초 항쟁과 강화도

 

안녕하십니까? 집현전의 김학사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왜 몽골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지요. 이번 시간에는 강화도와 관련한 삼별초 항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작해보도록 하지요.

① 삼별초의 기원
고려에서는 원래 특별히 선정해 뽑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별초(別抄)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최씨 무신정권 시절에 제2대 집권자 최우[崔瑀, ?~1249, 훗날 최이(崔怡)로 개명함]는 힘세고 기골이 장대한 장정들을 뽑아 야별초라는 사병조직을 만들었지요. 자신의 권력을 보호하고 신변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 몽골과의 전쟁이 계속되자 최이는 야별초를 확대해 정규군 조직으로 재편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눴습니다. 여기에 몽골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거나 도로 돌려보내진 사람들을 모은 신의군까지 합쳐서 마침내 삼별초가 만들어졌지요. 정리하자면 이들의 시작은 무신정권의 권신이 부리던 사병조직 야별초였습니다. 

삼별초의 뿌리는 당장 가동할 수 있는 정예부대였던 야별초에게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하면서 정규군화된 군대였던 것입니다. 각지에서 변란이 일어나고 도적떼가 준동하며 몽골군까지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정규군이 붕괴하자 새롭게 만들어진 군대지요. 여기서 주의할 점은 최씨 정권의 진짜(혹은 알짜) 사병은 내외도방이라는 조직으로 따로 존재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고려-몽골전쟁에도 동원되지 않고 말 그대로 정권 유지만을 목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최씨무신정권이 후세의 비난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지요. 여하튼 강도로 옮겨간 고려 조정의 새로운 중앙군으로 삼별초의 영향력은 무시 못 할 수준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아예 집권한 무인을 제거하고 그 일파를 숙청하려고 삼별초가 통째로 동원되기도 했지요. 

그 대표적인 예로 김준은 삼별초를 동원해 최의 세력을 모조리 무찌르고(무오정변), 60년 유지된 최씨 무인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뒤에는 임연도 삼별초를 이용해 김준 세력을 없애버렸지요(무진정변). 나중에는 고려 원종이 삼별초를 이용해 당시 실권자인 임유무의 목숨을 거둠으로써 100년 동안 이어진 무신정권을 끝내버렸습니다(경오정변). 

이를 보면 삼별초의 역사적 흔적이 로마 제국의 근위대, 오스만 제국 혼란기 예니체리의 행보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 자체로 국가지도자를 선택할 권리가 생긴다는 점에서요. 그렇지만 삼별초도 결국은 외부에서 선택을 강요당했습니다. 고려 원종이 이번에는 몽골과 손을 잡고 삼별초를 몰아내려 했던 것이지요.

② 파워 게임이 만들어낸 삼별초 항쟁?
어떤 이유에서든 대몽항쟁 일선에서 활동하던 삼별초 처지에서는 고려 원종에게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원종과 고려 조정도 이 과정에서 실수를 했지요. 원래 이런 거대한 그것도 군사 조직을 해산할 때에는 내부에 포섭자도 만들고 부대별로 쪼개 놓고 반목하게 하여 저희끼리 알아서 해체되게끔 유도하는 방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만 원종과 고려 조정은 삼별초를 대뜸 해산하고, 능력에 따라 재등용을 하거나 안 하겠다며 대놓고 선언해버렸습니다. 이 말은 너희 중에 못마땅한 자는 다 해고내지 숙청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았지요. 이때까지 최씨무신정권의 무력 기반으로 활용되어 왕실부터 문신들에게 이르기까지 원한을 쌓아 온 삼별초 안의 불안과 불만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왕실과 문신 입장에서 보자면 삼별초에 대한 신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서기 1270년에 고려 원종이 해산령을 내리게 되었지요. 그러자 삼별초는 당시 지도자였던 배중손과 노영희를 중심으로 뭉쳐 삼별초 항쟁(원종 입장에서는 삼별초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아마도 노영희는 명목상 지도자이고 배중손이 실권자였던 모양이고요.

이들은 1270년 여름 6월에 삼별초를 대동하고 강화도에서 승화후 왕온(자신은 전혀 원하지 않았습니다만)을 새로운 국왕으로 추대한 후 봉기했습니다. 두 장수는 사람을 시켜 오랑캐 군사가 이르러 백성들을 살해할 것이니 나라를 돕고자 한다면 격구장으로 모이라 말했지요. 그런 후에 강화도를 지키는 삼별초 군사들이 이주하여 진도로 들어가게 됩니다.

③ 삼별초 항쟁의 진행과 결과
이에 분노한 고려 원종은 진압을 명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장식품으로 전락한 관군은 삼별초에게 속수무책으로 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 사이 삼별초는 나주에 이르는 전라도와 남해안의 주요한 지역, 제주도를 석권하면서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 조정이라고 대내외에 선전했습니다. 성즉군왕패즉역적(成則君王敗則逆賊)이라는 말이 고스란히 반영된 시대였지요.

성공하면 임금이요 패배하면 역적이라는 약육강식의 논리는 준엄했습니다. 결국 고려 원종은 서둘러 진압과 왕정 복위를 위해 원나라에 원병을 요청했지요. 원나라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서기 1271년 원나라군과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이 고려-몽골연합군을 결성하고 진도를 향해 진격해 들어갔지요. 

진도에 도착한 연합군은 불창화포를 쏟아부었고 삼별초는 죽을 각오로 항전했습니다. 불창화포는 서기 1232년에 등장한 무기로 비화창(날으는 불창)이라고도 하지요. 이것을 세계 최초의 로켓무기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여하튼 연합군의 공세로 인해 삼별초는 결국 패배해 진도가 함락되었지요. 이 과정에서 배중손은 전사하고 승화후 왕온마저 살해당했습니다. 

이때 왕온을 살해한 인물은 바로 매국노 홍다구였습니다. 삼별초의 잔존한 세력은 김통정의 지휘하에 제주도로 피신하여 항전을 이어갔지요. 참고로 집현전의 학사님들은 제주도로 사전답사를 다녀온 바 있습니다. 여하튼 서기 1273년 삼별초는 연합군의 공격에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고려에서 서기 1270년 5월부터 1273년 4월까지 삼별초가 벌인 항쟁은 고려-몽골전쟁의 마무리 격으로 여겨지지요. 

역사에서 삼별초와 같은 항쟁이 ‘필연적’이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별초와 관계없이 고려 무신정권(특히 김준)은 강화도가 몽골군의 위협을 받거나 혹은 함락당할 위기에 처한다면, 몽골군을 피해 제주도로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 자체는 세우고 있었지요. 여하간 삼별초 항쟁 이후의 고려는 원 간섭기라는 큰 변화를 맞이하였고 이후에 조선이 건국되지요. 다음 글에서는 조선 시대 강화도와 인접한 교동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진도 용장성 전투

by 에이구몬 2023. 1. 26.
 
삼별초의 대몽항전

[고려사] -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진도, 제주에서의 전투

 

마지막 무신정권의 권력자였던 임유무가 몽골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고려 원종에 의해 살해되면서 고려 조정은 개경으로의 환도를 준비한다. 그러나 강화도 대몽항쟁의 주역이었던 삼별초들은 몽골에게 보복 받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본디 좌별초, 우별초로 구성된 야별초에 신의군이 더해져 3개의 별초로 구성된 군대로 최우 집권기에 나타나 대몽항쟁의 선두에서 활약하였다. 최항 집권기에 창설된 신의군은 몽골에 붙잡혔다 돌아온 이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삼별초는 반몽적 성격이 강했으며 당시 고려의 가장 최선봉에 있는 정예부대였다. 이들의 명부가 왕에게 압수당한 상황에서 몽골군에 넘어간다면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에 1270년 6월 삼별초 수장 배중손은 환도를 거부하고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고 배 1,000여 척을 동원하여 강화도로 부터 탈출하였다. 1270년 8월 배중손 일행은 진도에 입성하여 일대를 평정하고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진도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세곡이 조운을 통해 운반되는 곳으로,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실제로 삼별초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개경 정부는 경제적 타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곳은 무신정권의 대규모 농장이 형성되어 있던 곳으로 삼별초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진도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삼별초는 용장성을 거점으로 삼고 제반시설과 관아를 경영하였다. 삼별초가 진도에 자리를 잡자 그 세력은 제주도를 포함한 남해안 일대에 미쳤다. 고려 조정은 이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여몽연합군이 편성되어 진압을 시도했다. 병력은 6천, 병선은 약 400척에 가까운 수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삼별초 대몽항쟁- 항파두성을 가다

탐방일: 2022. 4. 5.(화)작성자: 문탐10기 고화옥

'옹알옹알 속닥대던 벚나무 더미에

화약고가 터지듯 봄이 터졌다

세상 어느 거사가 저리도 파워풀하랴

봄,봄,봄이터졌네

꽃폭탄이 터졌네!'

-박미리의 시에서-

싯귀처럼 터지고 무르익는 봄, 청명날 아침 항파두성으로 향했다. 오늘은 탐방 5주차로 선사시대와 개벽신화에 이어 고려시대 제주 역사를 공부하는 날이다. 제주인으로서 삼별초의 항몽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를 자문해본다. 양가적 감정으로 혼란하던 마음이었는지 네비게이션 안내를 이탈하고 말았다. 정신을 집중하고 유수암 골목길을 다시 돌아서다 보니 항파두리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약속한 시간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즈넉한 항파두리 벚꽃은 꽃잎을 날리며 탐방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한 몫하더니 벚꽃도 질세라 봄을 화사하게 수놓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어울러진 유적지임을 실감하며 일행들과 합류했다. 인원을 점검한 뒤 교수님의 안내와 설명으로 걷는 독서가 시작되었다.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삼별초의 최후 항쟁지로 사적 제396호로 등록되어 있는 곳이다.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와 상귀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옛날에 성이 있었던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항파두리 토성길 안내

항파두리는 내성을 석성으로 쌓았고, 외성은 토성으로 만들었다. 항파두리라는 이름은 항아리 테두리 모양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설에는 홍다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삼별초를 막으려 했던 김수와 고여림의 관군이 시작했던 축성공사를 삼별초가 이어받아 완성했다. 이게 방어용 긴 성벽 환해장성이다.

누군가 '도루묵' 이라는 말을 해서 그 유래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그 쓰임새에 따라 유래와  단초가 될만한 이야기가 있다. 오늘의 항몽유적지 답사도 우리 제주 역사를 공부하는 단초가 되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성에는 중요한 건물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둘레는 약 750m, 높이는 약 1~1.5m이다. 내부에는 삼별초의 중심 지휘부로 추정되는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축조형태나 배치는 이전 항전 거점인 진도 용장성 건물터와 유사하다. 이 성을 쌓으며 옛 제주인들이 흘린 땀방울과 눈물을 생각하니, 동전의 양면처럼 아픔과 아름다움이 교차된다.

 

정자에서 간식타임을 하며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다. 고려와 몽고가 부마국으로 화친을 맺고, 고려 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세조구제 불계토풍하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맺었다. 고려 원종은 무신정권에서 벗어나고자 몽고와  조약을 맺었던 것이다. 그러자 무신정권의 삼별초는 강화도로 가서 토성을 쌓으며 본거지를 만든다. 승화후 왕온을 내세워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을 추대한 배중손을 따라 진도에서 항전하다가 홍다구에게 살해되었다. 

외성으로 가늘 길에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남색 꽃잎이 앙증맞은 봄까치꽃이다. 이맘때 들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들꽃이다.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나자, 처음 보는 꽃마냥 카메라를 들이대어 본다. 학명, 국명, 향명도 곁들이며 개불알꽃이라고도 불려진다고해서 웃음 포인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제비꽃, 광대나물, 민들레들이 외성 가는 길을 장식하고 있었다.

성 아래 서서 설명하는 모습

삼별초가 제주도로 온 까닭과 항몽에 대한 강의에 귀 기울였다. 파군봉(바굼지오름)은 항파두성 방어를 위한 전초기지였다. 그 전초 기지선이 너무나 쉽게 뚫어버렸다. 곧바로 관군은 항파두성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삼별초군은 사흘만에 패하고 만다. 그러자 김통정 등 70여명의 병력만이 한라산 붉은오름으로 도피하여 저항하다 최후를 맞았다. 고려정부와 지방관들의 수탈을 받았던 제주인들은 삼별초군에게는 호의를 가지고 지원했다. 그러나 삼별초가 항몽에서 패한 뒤, 제주는 100년동안 원나라(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몽골의 지배에 제주인들의 고난은 지속되었다. 오죽하면 제주에서 가장 심한 욕으로 치자면 '몽곤놈의 새끼'라고 했을까! 

외성 걷기가 끝날 무렵 오방색기와 나홀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오방색기는 성문의 방향을 알려주는 색의 깃발이다.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노랑은 중앙이다. 오방색은 우리나라 전통색으로 음양오행설 나타나는 색으로 우리생활에 밀접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도 육지의 성에는 깃발의 색으로 문의 방향을 나타내고 있다. 항파두성에는 한 곳에 다 모여있었다.

항파두성 설명비

항파두성을 설명하는 비문으로 깔끔하게 단장되어 외성 세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첫 문장에 약 700년 전이라는 되어있다. 그렇다면 지금도, 100년 후에도 700년 전이란 말인가라는 교수님의 지적에 모두 공감하며 문화재나 유적지를 복원할 때는 검증과 고증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명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외성은 완만한 구릉위에 6Km의 토성으로 구성되었고, 동쪽과 서쪽에 흐르는 하천으로 자연적인 해자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애월항과 그 앞바다가 훤히 보여서 적의 침입에 대비 할 수 있는 천혜의 방어적 입지를 가추고 있다. 인위적으로 해자를 파서 만든 성으로 유명한 오사카성을 예로 들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쟁에 이용했다고 생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전쟁하는 나라의 소식을 들어서인지 더욱 그랬다.

박정희 정권은 삼별초의 항쟁을 자신의 군사쿠테타의 합리화 도구로 활용하였다. 비문의 글씨도 친필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는 힘과 정권이 지배하는데로 쓰여진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를 읽는 다양한 접근과 이해가 필요함을 느낀다.

▶삼별초의 항몽과 목호의 난 이해하기

# 무신정권

고려시대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간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이며, 실세는 정중부, 이의방, 최충헌으로 이어진다. 

몽고군 침입시에 정권 유지를 위해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향락을 일삼기도 하였다.

 

#당시 고려의 상황

나라 안에서는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무신들의 권력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나라 밖에서는 원이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성장하여 고려를 위협하고 있었다.

원이 전쟁을 끝내는 조건으로 고려에게 개경환도를 강요하자 고려는 개경으로 돌아왔다.

 

#삼별초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이었는데 원의 침략에 대항하는 정규군으로 편성되어 마지막까지 항쟁한 부대로 야별초와 신의군이다.

야별초는 사병수가 늘어나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눠졌다. 신의군은 원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고려 병사이다.

 

#삼별초 항파두리 항쟁

삼별초는 개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원과 계속 싸우기로 했다.  근거지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기고 남해안 지역에서 세력을 펼쳤다. 여원연합군에게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 항파두리로 옮겨 항쟁하였다. 그러나 3일만에 함락되고 그 후 제주는 100년 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침략역사의 시작점이 되었다.

 

#목호의 난

 고려 공민왕 때 제주의 목호(목장토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원나라는 삼별초난을 진압하고 군민총관부를 설치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제주는 자기네 것이라고 하며 말 2,000필 공출을 요구하자, 공민왕이 사신을 죽이게 한다. 이에 반란을 시작되었다. 최영장군이 목호의 난을 토벌하고, 개경으로 돌아가자 우왕이 최영장군을 놓아주지 않아 요동정벌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관계를 보면 목호의 난이 고려멸망과 조선건국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 걷는 독서를 통해 교수님의 강의에  문탐반 모두가 염화시중의 미소를 지을 수 있길 바래본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평화로의 새별오름은 오늘도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좌정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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