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우리역사 통설에 대한 문제 제기]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국보 287호)'

by 晛溪亭 斗井軒 2025. 5. 9.
728x90

[우리역사 통설에 대한 문제 제기]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국보 287호)

중앙일보입력 2001.08.25 00:00
최근 출판계는 대학 강단에 서지 않는 '독립 학자군(群)' 의 활약이 돋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주로 젊은층으로 이뤄진 이들은 황당무계한 소리의 동어반복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문의 코스워크를 밟아 방법론을 갖춘 점도 새로운 변화다. 사학계의 경우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 사관을 벗어나 다원주의적 사관을 견지한다는 공통점도 갖는다.

여기 신간 두 종이 그걸 생생하게 보여준다. 철학도 서정록씨는 『백제금동대향로』에서 초특급 국보로 꼽히는 이 향로(香爐)에 대한 기존의 불교 관련설을 뒤집으며, 향로 연구의 새 지평으로 중앙아사이아.북방 시베리아 문화를 제시하고 있다.

사학도 이희근씨의 『한국사는 없다』는 저자가 몇년간 잇따라 펴낸 대중적 역사물의 중간 결산이라 할 만하다. 이씨는 한국 고대사에서 조선 후기 실학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연구의 구멍' 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도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두 저작을 들여다 보자.

1천5백년간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국보 287호)에 다시 향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 향내가 독특하다. 지금껏 우리 후각에 익숙한 불교 연화(蓮花)나 도교 신선사상의 향기가 아니다. 저 멀리 만주 벌판과 고구려, 그리고 실크로드를 넘어 서역의 향내가 짙다. "당시 백제인들은 코스모폴리턴이었다. "

저자 서정록(47)씨는 "높이 62.5㎝의 이 향로엔 고대 동북아시아 지역의 이상적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 말한다. 저자는 1993년 발굴된 이 향로에서 고대 문화의 다양한 징표를 읽어낸다. 예컨대 향로에 장식된 연꽃만 보고 불교 의식에 쓰인 유물이라고 예단하는 것을 공박한다. "연꽃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고대 동북아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태양꽃으로 여겨졌다. "

아울러 동북아 샤머니즘과의 관련에 주목한 저자는 부여 능산리 유적지의 '절터' 로 알려졌던 건물터를 백제 왕실의 조상신과 각종 신령을 모신 '신궁(神宮)' 이라고 주장한다.

기실 연꽃 이외엔 이 향로에 불교와 연관지을 만한 것이 없다. 향로의 윗부분에 장식된 봉황과 기러기, 그리고 다섯 명의 악사 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향로가 고대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초특급 국보라고 말해 왔으면서도 향로의 장식물이 함장한 풍부한 상징성을 연꽃 하나에 의지해 불교와 연관해 풀어 온 것이 기존의 학설이다.

저자의 결론부터 말하면 "부여와 고구려에서 남하한 사람들이 지배층을 형성한 백제의 이 향로는 고구려 고분벽화, 북방과 서역의 유목문화 등과 복합적으로 연결된 백제 왕실의 제기(祭器)다. " 왕을 상징하는 봉황과 백성을 상징하는 기러기, 그리고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다섯명 악사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 핵심인데, 그것은 바로 "음악의 조화를 통해 정치적 화합의 음률을 조정하려 했던 고대인의 정신세계를 구현한 것" 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눈 밝은 사람은 이 대목에서 시인 김지하가 몇 해 전부터 말해 온 '율려(律呂)' 사상을 연상할 것이다.

신간 『백제금동대향로』의 저자는 이 향로를 통해 중국 중심의 '중화(中華)적 세계관' 이 곧 동양적인 것으로 간주해 온 시각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백제의 향로를 중국 한나라의 향로와 같은 계열로 보는 기존의 통설을 배격하는 것이다. 한나라 멸망 후 수백년이 지나 백제가 한나라의 양식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연꽃장식 등을 매개로 고구려 고분벽화와 북방 유목민족의 문화와 연결시킨다.

더욱이 향로 자체도 중국 고유의 것이 아니다. "중국 고대 향로의 출현은 전국시대 말기에 서역에서 전래되기 시작한 향료(香料)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

향을 피우는 문화는 중동지방에서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시작된 반면, 고대 중국에는 그러한 향료문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 중심의 실크로드 이외의 수많은 동서 교역로를 통해 서역의 향료가 중국에 전해졌다는 주장은 도교의 신선사상과의 관련설도 부정하는 주장이다.

서울대 철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우리 전통사상에 심취해 온 저자는 지난 7년간 백제의 이 향로를 연구하며 우리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시인 김지하와 고(故)장일순 선생과 함께 '한살림운동' 을 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강단 사학자들의 연구와 구분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가 민족주의적 느낌의 개연성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다.

기실 연꽃의 유래라든가 향로의 발달사, 그리고 고대 중앙아시아 지역의 동향에 대한 저자의 말들은 동서양의 최근 연구흐름인 다원주의적 역사관을 반영한 것이다.

고대 동북아의 연꽃문화에 대해선 일본의 하야시 미나오(林巳奈夫)의 영향이 크다. 고대인들은 "하늘에는 지상의 연못에 대응하는 하늘연못이 있으며, 지상의 연꽃은 이 하늘연못에 거꾸로 심어진 연꽃(또는 태양)의 광휘를 받아 이 세상을 환히 밝힌다고 여겼다. "

그래서 "왕궁이나 고분 천정에 하늘연못, 즉 천정(天井)을 만들고 거기에 연꽂을 거꾸로 심었던 것이다. 중국 한나라의 기남화상석묘(沂南畵像石墓)나 고구려고분의 천장에 장식된 연꽃이 그러한 예" 라고 저자는 밝힌다. 불교 관련설을 부정하는 대목이다.

방대한 자료의 뒷받침을 받고 있는 저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고대사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한 재야학자의 등장을 알린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고대 '율려' 사상에 대한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으도 볼 수 있기에 더욱 주목된다. 그러나 율려사상 그 자체가 아직 논의가 분분한 분야다. 관련 학계의 심도있는 논의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배영대 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4122494

 

[우리역사 통설에 대한 문제 제기] '백제금동대향로' | 중앙일보

최근 출판계는 대학 강단에 서지 않는 '독립 학자군(群)' 의 활약이 돋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주로 젊은층으로 이뤄진 이들은 황당무계한 소리의 동어반복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학문

www.joongang.co.kr

 

1. 개요[편집]

대전 MBC 모든 것 연구소 올랩 ‘1500년의 세월 백제금동대향로’ (2018년 5월 20일 방영분)


백제금동대향로(이하 '대향로')는 1993년 12월 12일(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주차장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백제 향로이다. 이후 조사 결과 해당 향로가 발견된 주차장 공사 현장이 백제 시대 왕실의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밝혀졌다.

대향로를 언제 제작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세기 말-7세기 초라고 추정한다.[1]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이래 내정의 혼란을 거듭하던 백제가 안정을 되찾고 꽃피운 문화를 상징하는 유물이다.

2. 상세[편집]

2.1. 발견[편집]

백제금동대향로는 안 그래도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모두 뛰어난 국보이지만 하마터면 발견되지 못 한 채 영원히 땅속에 묻힐 뻔했다가 극적으로 발견된 비하인드 스토리 때문에 더욱 이야깃거리가 된다. 1993년, 능산리 고분군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늘면서 당시 막 발굴이 시작된 능산리 절터 인근에 주차장 공사를 하기로 했는데, 주차장 공사를 하기 전 혹시나 있을 유물 발굴을 위해 주차장 부지로 지정된 논을 사전시굴조사를 하기로 하였다. 유물이 가장 없을만 한 곳을 주차장 부지로 지정했기 때문에 예상대로 첫 조사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그대로 묻고 주차장 공사를 진행할 뻔했다가 발굴책임자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당시 부여군 문화재보호국 과장에게 추가예산집행을 요청했고, 해당 과장이 허락하면서 추가 조사가 진행되었다.[2]

그렇게 추가 조사를 위해 터를 파던 도중 12월 12일 오후 4시 30분, 물이 고인 진흙 웅덩이 속에서 무언가가 발견되었다. 발굴단은 그것이 향로인 줄은 몰랐지만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유물임을 확신했고 도굴을 우려해 인부들을 모두 귀가시킨 후 학예연구직만 남아 장장 4시간에 걸쳐 유물을 온전하게 발굴해냈다. 부랴부랴 유물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뚜껑과 몸통을 짜맞추고 이물질을 닦아내는 유물처리를 하고나서야 향로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났다. 기나긴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혔음에도 불구하고 진흙에 잠겨 산소가 차단된 덕에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된 상태로 발견된 것이다. 미지근한 물에 담근 면봉으로 향로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내는 과정에서 하나하나 그 자태를 드러내는 향로에 발굴단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이후 추가적인 조사 결과 대향로가 발굴된 곳은 사찰에 부속된 대장간 자리였으며 향로가 출토된 웅덩이는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구유형 목제 수조가 있던 자리였음이 밝혀졌다.[3]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 보아, 해당 사찰은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고자 왕실 차원에서 세운 원찰인 듯하다.[4] 그리고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자 어느 백제인이 나당연합군의 약탈을 피해 대향로를 땅속에 묻어 숨겨둔 것이 1,300여 년이 지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대향로가 묻혀있던 바닥에서는 기와와 토기 조각 등이 함께 발견되었고 주변에서는 섬유 조각도 발굴되었는데 대향로를 감싼 천이 세월이 지나 삭은 것으로 추정된다.

발견 이후 10일간의 긴급보존처리를 마친 12월 22일, 현장설명회를 통해 대향로의 존재가 공개되었고 다음날인 12월 23일, 여러 주요 일간지에서 일제히 국보급 백제 유물이 발견되었음을 대서특필하였다.

2.2. 특징[편집]

대향로의 디지털복원도 (by 문화유산기술연구소보러 가기


대향로는 전체 높이가 61.8 cm이고 크게 4개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모양 향로 받침, 연꽃이 새겨진 향로의 몸체, 산악도가 솟아오른 향로 뚜껑, 뚜껑 위 봉황 장식이다.

향로에 뚫린 구멍들은 직경 0.6 cm 정도지만, 개중 몇 개는 1 cm 정도로 조금 더 넓게 확장되어 뚫렸다. 구멍은 향로 꼭대기 봉황의 가슴에 2개, 향로 뚜껑 상부에 5개, 그리고 중부에는 5개로 총 12개가 있다. 이중 중부에 있는 구멍은 향의 연기를 배출하는 용도가 아니라 바깥에서 공기가 들어오도록 하는 용도이다. 이렇게 바깥 공기가 들어옴으로써 향로 안에서 대류가 일어나 향의 연소시간이 길어지게 했다.

향로의 맨 아래에는 용이 발톱으로 땅을 디디고 입으로는 향로의 본체를 문 형상으로 향로를 떠받친다. 용의 발톱은 5개인데, 다리 3개는 땅을 디디고 한 개는 하늘로 치켜올려들어 매우 역동적이다. 본체의 아랫부분에는 연꽃잎을 8개씩 3층으로 배열하여 연꽃잎과 남은 공간에 동물 25마리에 인물 2명을 섬세하게 부조했다. 본체의 아랫부분과 윗부분(뚜껑)이 서로 맞닿는 부분에는 구름 문양으로 띄를 두 겹으로 둘렀다. 본체의 윗부분(뚜껑)에는 산 봉우리들이 여럿 있다. 산과 계곡에는 동물이 42마리, 인물 17명이 부조되었는데, 묘사된 동물들 중에는 우리나라에는 살지 않는 코끼리, 원숭이, 악어도 있고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상상의 동물들도 있다. 향로의 정상 바로 아래쪽에는 신선으로 보이는 다섯 사람이 완함, 북, 거문고, 배소, 종적 등 악기를 연주하며 앉아 있다.

산 꼭대기에 해당하는 정상에는 어떤 새가 날개를 편 채로 있다. 보통 이 새를 봉황이라고 말하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학문적 소견도 있다. 백제 왕실을 상징하는 천계(天鷄)라는 것이다. 불교  도교의 영향을 다수 받은 것이 백제 후기 유물들인데 여타 신수와 영물에 비해 이러한 조류 조각이 많다는 점과 더불어 그중 다수의 조류 조각에서 며느리 발톱으로 추정되는 묘사가 보인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다.

우리나라의 진영아는 <동아시아불교문화> 2020년 42호에 발표한 논문 "백제 금동대향로 정상부의 새 도상 재검토- 금시조 가능성에 대한 모색 -"에서 대향로 정상에 있는 새가 봉황도 천계도 아닌 금시조(金翅鳥), 즉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가루다라고 주장했다. 가루다의 목에 구슬이 있다고 하는데, 대향로 뚜껑 위에 앉은 새 또한 목과 부리로 구슬 하나를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제 내에 도교가 얼마나 퍼졌는지, 불교계에서 도교에 호의적이었는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실제 불전(佛典) 내에서는 도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금동대향로 내에 존재한다고 간주되는 오악사 역시 여러 불교 경전에 나타난다. 논문 "백제 금동대향로 정상부의 새 도상 재검토 -금시조 가능성에 대한 모색-"의 각주 61, 63에서 제기한 것처럼, 백제에 유통되었다는 『대반열반경』 중 '신선이 기악을 연주한다[神仙呪術,作倡伎樂]'는 기록이 있고, 『묘법연화경』에도 '사람이 북, 퉁소, 거문고, 비파 등을 연주한다[若使人作樂, 擊鼓吹角貝, 簫笛琴箜篌, 琵琶鐃銅鈸]'라는 문구가 있다. 따라서 향로에 표현된 각각의 상징물 역시 불교 경전에서 근거한 것으로 본다. 향로의 도상에 대해 지나친 추정과 상상은 지양되어야 하고, 향후 구체적인 전거를 들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2.3. 종교 관련 루머[편집]

이름 그대로 향로는 향을 피우기 위한 물건으로, 뚜껑을 열고 안에 향을 재어 넣은 뒤 불을 붙여 뚜껑에 있는 12개 구멍에서 향이 피어나게 만든 물건이다. 이 물건은 그냥 전시하기보다는 향 연기가 구멍에서 피어 오르도록 할 때 가장 향로답고 아름다운 물건이다. 그래서 부여박물관에서는 복제품에 향을 피워놓고 전시하는 기획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박물관 측에 종교적인 이유로 항의가 들어와서 중단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

셋은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해 작은 ‘난상토론’을 벌였다. 나는 진품은 보관해야 하니까 가장 유사한 모조품을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실제로 황홀한 연기의 흐름을 보여주는게 최상이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차 선생님은 그렇잖아도 발견 직후 그런 시도를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유로 박물관에 강력한 항의가 들어와 중단했다고 한다. 깜짝 놀랐다. 이걸 굳이 종교의식으로 봐야 하는가 싶었다. 백제인들의 혼이 담긴 예술품이자 문화유산인데 후손들은 그 작품을 감상할 최고의 가치를 또다시 못보고 묻어둬야 하나 싶어 상실감이 너무 컸다.

그러나 이 기사의 신뢰성에는 의문이 있다. 기사를 보면 기자가 만나 전시에 관련해 토론을 한 사람을 두고 "국립부여박물관 문화재와 2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온 차선미 선생님"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물관 고고학팀, 발굴단, 문화재연구소 발굴팀 등등에서 유물을 발견하면 보수 작업을 완료한 후 바로 전시에 들어가지 못한다. 적어도 2년 이상 연구기간이 소요되고, 이 유물에 대한 연구가 고고학계, 미술사학계, 역사학계에서 다각도로 연구를 한 후 전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업계의 열악한 사정 때문에 학예사가 아니더라도 민간에서 향토사학자등을 초빙하여 교류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 경우를 가정해도 '차 선생'이 직접 그런 항의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박물관의 누군가에게 그런 카더라를 들었다.'는 수준일 뿐이다. 기사의 내용은 1차 소스도 아니고 '차 선생'이 누군가에게 들은 것을 기자에게 말해주고 기자가 기사로 옮긴 것이다. 게다가 항의가 들어온 때는 발견 직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때는 1993년이고 해당 기사는 2013년 것이라 세월이 20년이나 차이난다.

정리하면 발견 직후(1993년? 94년?) 박물관에 항의가 들어왔고. 이 내용을 박물관의 모 직원이 차 선생에게 이야기했으며, 그걸 차 선생이 다시 기자에게 말해서 기자가 기사로 옮겼다는 것이다. 직접 들은 얘기를 쓰는 기사에서도 온갖 문제가 발생하는 마당에, 이렇게 오랜 기간을 거쳐 여러 번 전달된 내용이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할까? 신뢰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상술한 신뢰성 문제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향로에 향을 피우는 전시는 하지 않고 있으며, 이전부터 종교적 이유로 각종 문화재에 대해 비슷한 어그로를 끊임없이 끌어온 특정 종교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 때문인지 위 루머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대향로의 발굴과정과 전시내용 등에 대해 유명 주요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중심으로 아직도 위 루머가 사실처럼 적힌 글들이 많이 돌아다니며 댓글에는 특정 종교에 대한 비난과 비아냥이 난무하는 상황이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