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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달래주는 향기

우봉 조희룡 趙熙龍 : 백매도 白梅圖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16.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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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 조희룡 趙熙龍 백매도 白梅圖 

식제선생(息齊先生) 난(蘭)화첩 중 1폭(幅) 화제


忽得十日五日之暇 對芳蘭 啜苦茗 時有微風細雨 潤澤于疎소리 仄經之間 俗客不來

홀득십일오일지가 대방난 취고명 시유미풍세우 윤택우속소리 측경지간 속객불래良友輒至適然 自驚 今日之難得 凡畵蘭畵石 用以慰 天下之勞人

양우첩지적연 자경 금일지난득 범화난화석 용이위 천하지노인

문득 열흘이나 닷새만에는 방난(芳蘭)을 대(對)하기도 하고 고차(苦茶)를 마시기도 한다. 때로는 미풍(微風)과 세우(細雨)로 성긴 울타리를 윤택하게 하고 측간(仄間)에 간 사이에도 속객(俗客)이 오지 않고 양우(良友)가 모이어 항상 스스로 놀란다. 오늘에 있어 얻기 어려운 일이다. 대저 난과 돌을 그림은 천하(天下)에 수고하는 이들을 위로 함에서 이다.

 

조선 매화그림 중 으뜸 '매화서옥도'와 화가 조희룡의 차 이야기

올 이른 봄에 핀 백매화. 사진=조상제

일생을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는 오랫동안 지성인, 그리고 차인이 가장 아끼는 꽃 중에서 하나다.

평생 매화를 귀하게 여긴 퇴계 이황(退溪 李滉) 이야기가 유명한데

그는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매화를 생각해 마지막 숨을 고르면서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키우던 분매(盆梅)에 보이기 싫어

“어매형불결 심자미안이(於梅兄不潔 心自未安耳 : 매형(매화를 존칭)에게

불결하면 내 마음이 미안해서 그렇다)”고 해 다른 방으로 옮기게 했으며,

평생의 벗으로 지냈던 매화에 대한 예우였다.

고려의 대학자 목은 이색(穆隱 李穡,1328년∼1396년),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년),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 등 차향과 매향에 흠뻑 취한 기라성 같은 선대 차인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매화를 아끼다 못해 스스로 '매화광인'이라고 칭했던 사람이

바로 우봉 조희룡(又峰 趙熙龍, 1789~1866년)이다.

그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제자였으나

독자적 화풍을 이룬 조선시대 후기 화가로 <매화서옥도>가 대표작이다.

우봉 조희룡의 매화서옥도.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매화편벽, 조희룡

 

“나는 매화에 대한 편벽(偏僻)이 있다. 스스로 매화대병(梅花大屛 : 매화그림의 큰 병풍)을 그려 침실에 두르고,

벼루는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매화시경연(梅花詩境硯)을 쓰고,

먹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을 쓴다.

 

매화백영(梅花百詠)과 같이 매화시 100수를 짓고 내가 거처하는 곳을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 편액을 단 것은

매화를 사랑하는 내 뜻을 흔쾌히 마땅한 것이지 갑자기 이룬 것이 아니다.

시를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마셨다.” -석우망년론(石友忘年錄)에서

매화시 100수 지을 것을 목표로 세우고는 머릿속에 온통 매화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오로지 매화그림을 그리고, 매화시를 짓고, 매화향기 흐르는 차를 마신다.

매화편차라는 매화모양을 찍은 덩어리차를 끓여 마셨을 것으로 보인다.

매화로 갖은 차를 마셨을 것이다.

매화를 띄운 찻 잔. 사진=김세리 차문화콘텐츠원장

 

찻잔에 꽃을 띄우기도 하고, 꽃과 차를 함께 우리기도 하고,

'매화광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매화에 미쳐 평생 동안 매화와 함께하다 흰머리가 된 사람이

바로 조선의 화가이자 차인이었던 조희룡(趙熙龍)이다.

무엇이든 너무 좋아서 눈만 뜨면 보고, 만지고,

주위를 온통 그것으로 치장하는 이런 현상을 ‘벽(癖)’이라고 하며, 미쳤다고 한다.

조희룡은 스스로 매화에 대한 편벽(偏僻), 매화미침을 자백했다.

그는 오위매화도백두(吾爲梅花到白頭 : 매화(梅花)를 그리다 흰머리가 되었을 만큼) 집요하게 열중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벽(癖)에 이른다고 스스로 말한다.

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습관이 굳어져 거의 병적으로 집착하는 상태인데

지금이야 도벽(盜癖)이니 주벽(酒癖)이니 주로 부정적인 것에 붙여 사용하고 있지만

옛날에는 서화골동(書畫骨董)이나 문예 쪽에 집착해 그만두지 못하는 것을 두고 말했다.

조희룡의 여러 호(號) 중에서 ‘매화두타(梅花頭陀)’는 매화에 대한 떨칠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뜻한다.

그는 매화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가 살아 숨 쉬는 모든 공간에서 매화를 만날 수 있도록 꾸몄다.

조희룡의 필묵매도(筆墨梅圖).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차 마시는 '매화광'

 

조희룡의 글에 의하면

향은 사람을 그윽하게 하고,

술은 사람을 원대하게 하고,

거문고는 사람을 고요하게 하고,

차는 사람을 상쾌하게 한다고 하였다.*

매화에 사심 가득한 조희룡이었지만 차에 대한 애정도 가득했다.

그의 글과 그림에서 차는 생활의 일부인 듯 등장한다.

중인 출신이었던 조희룡은 조선 차문화의 대가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기에 차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조희룡의 유배시절 화가 친구 만취 이팔원과 나눈 서신의 일부를 보자.

이팔원은 새해가 되면 편지를 보내 안부를 전했으며,

자주 시(詩)를 써 보내 조희룡을 위로했다.

“나의 객지 생활은 지난번 편지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못가를 거닐고 읊조리며 갈매기와 세상 밖의 인연을 맺을 뿐입니다.

보내온 오차(午茶) 여덟 봉지는 양쪽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을 일으켜

일곱 잔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그들의 우정 나눔은 종종 시를 써 보내 감상과 평을 나누었고,

차를 보내 서로의 마음을 위로했다.

일곱 잔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말은 노동(盧同)이

맹간의(孟諫議)에게 보낸 '칠완다가(七碗茶歌)'의 시를 인용한 것이다.

원문에서 일곱 번째 잔의 차는 양쪽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이 솔솔 일어난다고 했다.

차의 맑음도 중요하겠지만 보낸 사람의 정성과 맑은 마음이 청풍이 되어 부는 것이다.

노동의 칠완다가(七碗茶歌)는 중국 당나라 시대이후 문인과 차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시(茶詩)다.

일완후문윤(一碗喉吻潤) 

첫 번째 잔은 목과 입술을 적시고

이완파고민(二碗破孤悶) 

두 번째 잔은 고독과 번민을 없애주네

삼완수고장 유유문자오천권(三碗搜枯腸 惟有文字五千卷) 

세 번째 잔은 메마른 창자를 찾으니 오천권의 문자가 생각나네

사완발경한 평생불평사 진향모공산(四碗發輕汗 平生不平事 盡向毛孔散)

네 번째 잔은 가벼운 땀이 흘러 평생 불평한 일들이 땀구멍으로 모두 흩어지네

오완기골청(五碗肌骨淸) 

다섯 번째 잔은 살과 뼈가 맑아지고

◐육완통선령(六碗通仙靈) 

여섯 번째 잔은 신령과 통하네

◑칠완계부득 유각양액습습경풍생(七碗契不得 惟覺兩腋習習輕風生) 

일곱 번째 잔은 마시기도 전에 양겨드랑이에 가벼운 바람이 솔솔 부는 것을 느끼네

임자도 유배 시절 조희룡이 가장 그리워한 이는 벽오사(碧梧社) 동인들이다.

조희룡을 비롯한 벗들은 유최진의 벽오당에 자주 모여 시와 그림과 차를 즐겼다.

‘벽오사소집도(碧梧社小集圖)’는 유숙이 그렸는데

조희룡을 비롯한 중인 친구들이 벽오당에 모여 풍류를 즐기고 있는 모습으로 한가한 듯 평화스러워 보인다.

한쪽 옆에서 열심히 부채질을 하며 차 달이는 다동이 인상적이다.

가장 편한 벗들과 차 한잔 즐기는 시간만큼 소중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있을까?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일생에서 가장 향기롭고 달콤했던 시절은

바로 마음 맞는 벗들과 차 한잔 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서옥(書屋)속에 그 사람, 조희룡

 

‘매화가 흩날리는 숲속에 있는 책이 가득한 집’이란 뜻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는 조선의 모든 매화 그림을 통틀어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온통 매화로 둘러싸인 서옥. 어두운 밤 백매(白梅) 가지 위에 매화 꽃송이가 흰 눈발 날리듯 가득하다.

자그마한 초옥엔 한 선비가 앉아 병에 꽂힌 일지매(一枝梅)를 지긋하게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조희룡 자신이 그곳에서 매화병풍을 치고,

매화벼루에 매화먹을 갈아 매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매화꽃 향기 가득한 차로 목을 적시고 매화 시를 읊조리곤 했을 것이다.

조희룡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리 살고 싶은 마음을 반영했던 듯 싶다.

<매화서옥도>를 그리고 나서 그림은 한동안 깊은 장속에 있었는지

이십년 후에 다시 펼친 그림에 다음과 같은 제발(題跋)을 추가하게 된다.

“두과중득일고지 내이십재전 소작매화서옥도야 개유희지필

이파유기기 위연매소혼 태약백년물 화매여차

황인호 피불지여 불각삼생석상지감 단로

 

(竇窠中得一故紙 乃二十載前 所作梅花書屋圖也 蓋遊戱之筆

而頗有奇氣 爲烟煤所昏 殆若百年物 畵梅如此

況人乎 披拂之餘 不覺三生石上之感 丹老

 

 : 좀이 먹은 벽장 속에서 묵은 그림을 얻었다.

바로 스무 해 전에 그린 <매화서옥도>였다.

그저 장난스러운 손놀림이나 기이함이 있고,

연기에 그을려 거의 백년은 된 것 같으니.

매화 그림이 이런데 하물며 사람이랴!

펴보고 나니 죽었던 친구를 다시 보는 느낌이구나! 단노)”

라고 그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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