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유득공(柳得恭, 1748~1807),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저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자는 혜보(惠甫) · 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 고운당(古芸堂) · 가상루(歌商樓) 등을 사용하였다. 한시를 잘 짓는 것으로 명성이 있어서 조선 후기 한시사가(漢詩四家)로 불리기도 했으며, 서얼 출신으로 정조(正祖)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어 초대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제4권]
●철령위〔鐵嶺衛〕
鐵嶺衛
[DCI]ITKC_GP_1550A_0040_000_0060_2021_001_XML DCI복사
《高麗史》:“辛禑十四年,偰長壽還自京師,口宣聖旨曰:‘鐵嶺以北,元屬元朝,竝令歸之遼東。’ 是時明欲建鐵嶺衛。禑遣密直提學朴宜中表請曰:‘鐵嶺迤北,歷文、高、和、定、咸等諸州以至公嶮鎭,自來係是本國之地。至元初,蒙古散吉大王、普只官人等收付女眞之時,本國定州叛民卓靑、龍津縣人趙暉以和州迤北之地迎降,聞知金朝遼東咸州路附近瀋陽有雙城縣。因本國咸州近處和州有舊築小城二坐,矇矓奏請,遂將和州冒稱雙城。伏望陛下遂使數州之地,仍爲下國之彊。’
西北面都安撫使崔元沚報:‘遼東都司遣指揮二人,以兵千餘來至江界,將立鐵嶺衛。帝豫令設本衛、鎭撫等官,皆至遼東。自遼東至鐵嶺置七十站,站置百戶。’ 後軍都督府遣百戶王得明來告立鐵嶺衛,後遂不果立衛。”
按: 金起於曷懶甸,今咸鏡南道咸興等地也。其盛也,西渡鴨淥,跨有遼、瀋。元自開元路歷今興京地方,東渡鴨淥,置合蘭府,今咸興府也。又置雙城摠管府於和州,今永興府也。然而遼東有咸州、雙城、鐵嶺之號,我咸鏡南道亦有咸州、雙城、鐵嶺之號,考《輿地》者,易致滋惑。明之欲立衛於和州,高麗之奏辨以此也。
ⓒ 한국고전번역원 | 2020
[DCI]ITKC_BT_1550A_0040_000_0060_2021_001_XML DCI복사 URL복사
《고려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신우 14년(1388) 설장수(偰長壽)가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황제의 명을 구두로 선포하기를 ‘철령(鐵嶺)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했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를 세우려고 하였다.
우(禑)가 밀직 제학(密直提學)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철령 이북으로 문주(文州 문천), 고주(高州 고원), 화주(和州 영흥), 정주(定州 정평), 함주(咸州 함흥) 등 여러 주를 지나 공험진(公嶮鎭)에 이르기까지는 본래 본국의 땅입니다. 원나라 초 몽고의 산길대왕과 보지관인(普只官人) 등이 여진을 복속시킬 때 본국 정주(定州)의 반민(叛民)인 탁청과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가 화주 이북의 땅을 가지고 영접하여 투항하면서 금조(金朝)의 요동 함주로(咸州路) 부근인 심양에 쌍성현(雙城縣)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본국의 함주 근처인 화주에 옛날 쌓았던 조그만 성 두 개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애매하게 주청하면서 끝내 화주를 가지고 쌍성이라고 모칭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부디 몇 개 고을 땅을 그대로 하국(下國)의 강토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서북면 도안무사(西北面都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 도사에서 지휘(指揮) 두 사람을 보내어 병사 1000여 명을 이끌고 강계(江界)에 가 철령위를 세우게 했는데, 황제가 미리 본위(本衛)와 진무(鎭撫) 등의 관원을 설치하도록 하여 그들이 모두 요동에 이르렀습니다. 요동에서 철령위까지 70개 참(站)을 설치하고 참마다 백호(百戶)를 두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백호 왕득명(王得明)을 보내와서 철령위를 세우겠다고 고했으나, 끝내 실현하지 못했다.”
살펴보건대 금나라는 갈라전에서 일어났는데, 지금 함경남도 함흥 등지이다. 그들이 강성할 적에는 서쪽으로 압록강을 넘어 요양과 심양을 차지하였다. 원나라 때는 개원로에서 지금의 흥경(興京) 지방을 넘고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 합란부(合蘭府)를 설치했는데, 지금의 함흥부이다. 또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했는데, 지금의 영흥부이다. 그러나 요동에 함주ㆍ쌍성ㆍ철령으로 불리는 곳이 있고, 우리나라 함경남도에도 함주ㆍ쌍성ㆍ철령으로 불리는 곳이 있으니, 《여지(輿地)》를 살펴보는 이는 쉽사리 많은 의혹에 휩싸인다. 명나라가 화주에 철령위를 세우려 하자 고려가 글을 올려 변무한 것은 이 때문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윤조 (역) | 2020


처음 기념패 / 나중에 금동판으로 최종 다뀜!!!
















728x90
반응형
'❀漢陽人문화유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9대 유송공 성원(性元)~10대(1~2기)석암(昔庵)공 영환(榮渙) (0) | 2025.04.05 |
---|---|
도봉산의 도봉서원은 1573년(선조 6년) 조광조의 영향으로 사액(賜額)을 받는 서원 (0) | 2025.03.30 |
조휘(趙暉) (0) | 2025.02.28 |
◈일영유원지주변 한양조씨 선조님 유적지◈ (0) | 2025.01.31 |
=조선3대명주 전주이강주(全州梨薑酒)= (0) | 2025.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