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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수교 60주년 맞아…조태열 "조선통신사는 신뢰 상징"
중앙일보 입력 2025.05.08 18:00
박현주 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34503
한·일 수교 60주년 맞아…조태열 "조선통신사는 신뢰 상징" | 중앙일보
조 장관은 이날 "조선통신사는 외교를 넘어 민간 교류까지 확대됐다"며 "이런 역사는 한·일 양국의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혔다. 외교부에 따르면 올해 한·일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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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는 한국과 일본 사이 신뢰와 평화, 그리고 우호의 상징입니다."
조태열 외교부장관은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조선통신사 관련 특별전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을 관람하고 이같이 말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 에도(江戶) 막부의 요청을 받아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12차례 파견된 외교사절단을 뜻한다.
조태열 외교부장관은 8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중인 조선시대 통신사 특별전 '마음의 사귐, 여운이 물결처럼'을 관람했다. 외교부
조 장관은 이날 "조선통신사는 외교를 넘어 민간 교류까지 확대됐다"며 "이런 역사는 한·일 양국의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밝혔다. 실제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은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한·일 공동 등재되기도 했다.
외교부에 따르면 이번 전시회는 올해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기념해 개최됐다. 양국 박물관이 협력해 마련된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 128점이 전시돼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조선 통신사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한·일 우호와 교류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8일 오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개최중인 조선시대 통신사 특별전을 보는 조태열 외교부 장관. 외교부
외교부에 따르면 올해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계기로 다양한 양국 공동 기념 행사와 정부, 지자체 차원 행사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날을 기준으로 민간 행사 55건을 비롯해 총 100여건의 기념사업이 승인돼 추진 중이다.
1965년 6월 22일은 한국이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20년 만에 한·일 양국이 한·일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한 날인데, 올해가 그로부터 60주년이 되는 해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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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교정상화
통신사 문간공 조경
용주유고 제23권 동사록(東槎錄)
동사록(東槎錄) |
1 그림 장식과 이층 다락이 있는 배 이야기〔畫樓船說〕 |
2 도춘(道春)에게 답한 편지〔答道春書〕 [주-D001] 도춘(道春) : 하야시 도슌(林道春), 즉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이다. 일본의 학자이다. 본명은 하야시 노부카츠(林信勝)이고, 도슌은 법명이다. 아들 및 손자와 함께 주자(朱子)의 사상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공식 통치이념으로 확립했다. 그는 도쿠가와 막부를 섬기며 학문 활동과 외교문서 작성에 종사했으며, 신도(神道)를 주자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
3 거듭 임도춘에게 답한 편지〔重答林道春書〕 |
4 관백 이야기〔關白說〕 |
5 《일본성씨록(日本姓氏錄)》에 쓰다〔題日本姓氏錄〕 [주-D001] 일본성씨록(日本姓氏錄) : 미상이다. 혹 일본 서적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신찬성씨록》은 고대 일본의 씨족 계보를 적은 것으로, 815년에 편찬되었다. |
6 왜국의 세 도읍 이야기〔倭國三都說〕 |
7 계미년(1643, 인조21) 2월 22일, 수원(水原) 관사에서 이몽택에게 주다〔癸未二月二十二日隋城館贈李夢澤〕 |
8 사창 가는 길〔社倉途中〕 |
9 청주 가는 길〔淸州途中〕 |
10 회인현을 지나며〔過懷仁縣〕 |
11 이른 아침에 상주(尙州)를 출발하다. 이때 봄눈이 산에 잔뜩 쌓이고 매섭게 춥기 이를 데 없었다〔早發商山時春雪漲山峭寒無比〕 |
12 삼월 삼짇날 길을 가다가〔三月三日途中〕 |
13 정사에게 주다〔贈正使〕 [주-D001] 정사(正使) : 윤순지(尹順之, 1591~1666)를 가리킨다. |
14 3월 7일에 경주에 머무르며〔三月初七日留慶州〕 |
15 3월 17일 부산에서 상사가 성첩에 올라 구경하기에 시를 써서 주다〔三月十七日在釜山上使登覽城堞以詩贈之〕 [주-D001] 상사(上使) : 정사(正使), 즉 윤순지를 가리킨다. |
16 진해관 현판에 걸린 시에 차운하다〔次鎭海館板上韻〕 |
17 대마도(對馬島 츠시마)를 바라보다〔望馬州〕 |
18 3월 26일, 해신에게 제를 지내다〔三月二十六日祭海神〕 |
19 3월 30일〔三月三十日〕 |
20 종사관의 시에 차운하다〔次從事韻〕 [주-D001] 종사관(從事官) : 여기서는 신유(申濡)를 가리킨다. |
21 이 울산 래 이 준 시를 차운하다〔次李蔚山 崍 贈韻〕 이날 이래와 함께 퇴옹(退翁 이황)과 고봉(高峯 기대승)의 이기서(理氣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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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마도 앞바다 배 위에서〔馬洋舟上〕 |
23 5월 2일, 대마도에 머물며〔五月初二日留馬島〕 |
24 종려나무〔椶櫚〕 |
25 모기장〔蚊帳〕 [주-D001] 모기장 : 1643년 5월 2일에 일본측에서 모기장 30부(部)를 보내 왔다는 기록이 있다. 《癸未東槎日記》 |
26 정사가 준 시를 차운하다〔次正使贈韻〕 |
27 비파편〔枇杷篇〕 [주-D001] 비파편(枇杷篇) : 1643년 5월 4일 저녁에 대마도주가 이 섬에서 나는 비파(枇杷)를 보내왔다. 《癸未東槎日記 5月 4日》 |
28 대마도에서 단옷날을 맞다〔馬島逢天中節〕 |
29 5월 7일,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연 잔치자리〔初七日島主宴席〕 |
30 서산사에 묵다광청사(光淸寺) 〔宿西山寺 光淸寺〕 절은 장주포(藏舟浦) 위에 있다. [주-D001] 서산사(西山寺)에 묵다 : 서산사는 세이잔지(西山寺)로 대마도의 사찰이다. 이즈하라(嚴原) 항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고우다케(國府嶽)의 언덕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한편 저자 일행이 이곳에 묵은 것은 1643년 5월 12일의 일로,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에 따르면 상사(上使)는 경운사(慶雲寺), 부사(副使)는 서산사(西山寺), 종사(從事)는 선응사(善應寺)에 머물렀다고 한다.[주-D002] 광청사(光淸寺) : 코세이지(光淸寺)를 말한다. 세이잔지 가까이에 있는 사찰이다. |
31 배안에서 행명의 배율에 빨리 차운하여 대마도 지방의 풍속에 대해 기술하다〔舟中走次涬溟排律述馬州地方風俗〕 [주-D001] 행명(涬溟) : 윤순지의 호이다. |
32 5월 15일에 일기해를 건너가다〔十五日渡一岐海〕 [주-D001] 일기해(一岐海) : 잇키(一岐) 섬 근방의 바다를 말한다. |
33 풍본포의 소나기〔風本浦驟雨〕 [주-D001] 풍본포(風本浦) : 가자모토우라(風本浦)를 말한다. 일본 잇키군(壱岐郡)에 속한 지명이다. 가츠모토우라(勝本浦)라고도 한다. |
34 명호도 어귀 오른편 언덕에 박다(博多 하카타)라는 곳이 있는데, 정포은(鄭圃隱 정몽주)이 사신의 명을 받들고 왔을 때 노닐며 구경한 곳으로 《포은집(圃隱集)》에서 ‘패가대(覇家臺)’라 한 곳이 바로 여기라 한다. 또 신라의 박제상이 그 아래 칠리탄에서 절의를 지키다 죽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신범옹(申泛翁 신숙주)도 사신의 명을 받들어 여기 왔다 한다.〔鳴護島口右岸地名博多鄭圃隱奉使時遊賞處集中霸家臺卽此地云又云新羅朴堤上死節于其下七里灘而申泛翁亦奉使到此云〕 [주-D001] 명호도(鳴護島) : 명호옥(鳴護屋)을 말한다. 잇키 섬 남쪽의 지명으로 히젠 주(肥前州)에 속해 있다. 《癸未東槎日記 5月 17日》 |
35 적간관에서 바람에 막혀〔赤間關阻風〕 [주-D001] 적간관(赤間關)에서 바람에 막혀 : 적간관은 아카마가세키(赤間關)로서 시모노세키(下關)라고도 한다. 일본 혼슈(本州) 야마구치현(山口縣)의 최대 도시다. 《계미동사일기》에 따르면 저자 일행은 5월 19일 저녁에 이곳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癸未東槎日記 5月 19日 條》 |
36 적간관에서 송운(松雲 사명당)의 〈안덕사〉 시 절구 3수를 차운하다〔赤間關次松雲安德祠三絶〕 [주-D001] 송운(松雲)의 안덕사(安德祠) 시(詩) : 안덕은 일본의 81대 천황인 안토쿠(安德)로서, 두 살 때 즉위하여 여덟 살 때인 1185년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단노우라에서 벌어진 유명한 해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사명당은 그를 추모하는 시를 쓴 바 있는데 안토쿠를 제사 지내는 사당에서는 그 시를 보관하고 있었다 한다. 《扶桑日錄 8月 12日》 |
37 홍장로가 시를 청하기에 장구의 시를 써 주다〔洪長老求詩贈以長句〕 |
38 적간관에서 종사 이선의 시를 차운하다〔赤間關次從事泥仙韻〕 [주-D001] 이선(泥仙) : 신유(申濡)의 호이다. |
39 삼전고〔三田尻〕 [주-D001] 삼전고(三田尻) : 미타지리(三田尻)이다. 야마구치현(山口縣) 중남부 지역으로 현재 호우부시(防府市)의 한 지명이기도 하다. 저자가 경유할 당시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작은 항구 마을이었다. |
40 상관〔上關〕 [주-D001] 상관(上關) : 카미노세키(上關)이다.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 서부에 있는 항구로서 지금의 야마구치현 남동부 지역에 해당한다. 이곳에 조선 통신사를 위한 영빈관이 있었다. |
41 욕실〔浴室〕 |
42 겸예의 인동주〔鎌刈忍冬酒〕 [주-D001] 겸예(鎌刈) : 카마가리(鎌刈)이다. 히로시마현(廣島縣) 남부, 세토나이카이 중앙부 해역에 있는 섬이다. ‘포예(蒲刈)’라고도 표기한다. |
43 양매〔楊梅〕 |
44 도포에서 행명의 시에 차운하다〔韜浦次涬溟韻〕 [주-D001] 도포(韜浦) : 토모노우라(韜浦)이다. 히로시마현에 속한 항구인데 ‘도(韜)’는 ‘병(鞆)’이라고도 표기한다. |
45 백석탄에 묵다〔宿白石灘〕 [주-D001] 백석탄(白石灘) : 일본 미야기 현(宮城縣) 시로이시시(白石市)에 시로이시카와(白石川)가 있는데 여기가 아닌가 한다. |
46 비미하에서 정사의 시를 차운하다〔比美河次正使韻〕 [주-D001] 비미하(比美河) : 일본 도야마현(富山縣) 히미시(氷見市)에 히미노에(比美乃江)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이 아닌가 한다. |
47 우창〔牛窓〕 [주-D001] 우창(牛窓) : 우시마도(牛窓)이다. 오카야마현(岡山県) 남동부의 항구 마을이다. |
48 실진〔室津〕 [주-D001] 실진(室津) : 무로츠(室津)이다. 효고현(兵庫縣)에 속한 지명으로 하리마 탄(播磨灘)을 면하고 있는 항구이다. |
49 실진에 머물다〔留室津〕 |
50 6월 7일에 대판(大坂 오사카)에 이르니 주장로라는 자가 영접사(迎接使)로 와서 배알하고 다음날 시를 청하기에 대판에 대해 가행체(歌行體)시를 지어 주다〔六月初七日到大坂周長老者爲儐事來投謁翌日求詩作大坂行贈之〕 |
51 좌화의 봉행이 칠언절구를 올리며 화답을 구하기에 급히 차운하여 주다〔佐和奉行呈七絶求和走次以贈〕 [주-D001] 좌화(佐和) : 사와(佐和)이다. 일본의 옛 지명으로, 현재 일본의 시가켄 현(滋賀縣) 히코네시(彦根市)에 해당한다. 이곳에 사와 산성(佐和山城)의 유적이 남아 있다.[주-D002] 봉행(奉行) : 일본의 벼슬 이름으로 가마쿠라(鎌倉) 시대 이후의 행정과 재판 사무 등을 담당하는 무사를 일컫는다. 혹은 상사의 명을 받들어 사무를 집행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
52 승산의 옛 전장을 지나다〔過僧山故戰場〕 [주-D001] 승산(僧山) : 정황상 오케하자마(桶狭間)로 추정되나 미상이다. 오케하자마는 나고야시(名古屋市)와 아이치현(愛知縣)에 걸쳐 있는 언덕인데 오케하자마 산이라고도 한다. 아래에 언급한 오케하자마 전투로 잘 알려진 곳이다. |
53 어린아이의 회선무를 보다〔觀小兒回旋舞〕 |
54 미장주〔尾張州〕 [주-D001] 미장주(尾張州) : 오와리(尾張)이다. 일본의 옛 지명인데, 현재의 나고야(名古屋) 부근이다. 전국 시대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등 거물급 무장(武將)의 출신지로서 이들의 영토에 편입된 바 있고, 에도 막부가 수립된 후 도쿠가와(徳川) 가문이 다스리는 영토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손꼽히는 대도회를 이루었다. |
55 비파호〔琵琶湖〕 [주-D001] 비파호(琵琶湖) : 비와호(琵琶湖)이다. 일본에서 가장 큰 담수호로 혼슈(本州) 중서부 시가현(滋賀縣)에 있다. 모양이 비파를 닮았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
56 강기 가는 길〔岡崎途中〕 [주-D001] 강기(岡崎) : 오카자키(岡崎)로 일본 아이치 현(愛知縣)에 속한 도시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다. |
57 길전〔吉田〕 [주-D001] 길전(吉田) : 요시다(吉田)이다. 현재의 도요하시(豊橋)로 일본 혼슈(本州) 아이치 현(愛知縣)에 있는 도시이다. |
58 빈송 가는 길〔濱松途中〕 [주-D001] 빈송(濱松) : 하마마츠(濱松)이다. 일본 시즈오카현(静岡縣) 하마마츠시(浜松市)에 해당하는 지명이다. |
59 금절하〔今絶河〕 [주-D001] 금절하(今絶河) : 이마기레(今切)로, 시즈오카 현(静岡縣) 하마나호(浜名湖)가 바다로 이어지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에도 시대에는 배를 타고 이곳을 건넜다 한다. |
60 천류천〔天流川〕 [주-D001] 천류천(天流川) : 텐류카와(天流川)로, 시즈오카 현(靜岡縣) 하마마츠 시(浜松市) 사쿠마(佐久間) 마을을 흐르는 강의 이름이다. |
61 대판(大坂 오사카) 고개〔大坂嶺〕 |
62 우진 고개〔宇津嶺〕 [주-D001] 우진(宇津) 고개 : 일본 시즈오카 현의 마리코(丸子)와 오카베(岡部)의 경계에 우츠산(宇津山)이 있는데 그곳을 가리키는 듯하다. |
63 주장로의 시를 차운하다〔次周長老韻〕 |
64 청견사〔淸見寺〕 [주-D001] 청견사(淸見寺) : 세이켄지(清見寺)이다. 일본 시즈오카시에 있는 절인데, 조선통신사가 이곳을 여러 차례 다녀간 바 있다. |
65 부사산〔富士山〕 |
66 상근(箱根 하코네)의 관사에서 홍장로의 시에 빨리 차운하다〔箱根館走次洪長老韻〕 |
67 상근 호수〔箱根湖〕 |
68 상근 고개〔箱根嶺〕 |
69 7월 12일 강호(江戶 에도)에 있는데 미농 수가 인동주를 가지고 와서 바치기에 따라 마시고 취하여 잠들었다가 문득 시를 지어 정사와 종사에게 화운해 달라 하다〔七月十二日在江戶美濃守以忍冬酒來呈酌而醉眠率爾成詩要正使從事和〕 [주-D001] 미농(美濃) : 미노(美濃)이다. 일본의 옛 지명으로 현재의 기부현(岐阜縣) 남부지방이다. |
70 7월 17일에 노두(老杜 두보)의 〈추흥(秋興)〉 8수를 차운하다〔十七日次老杜秋興八首〕 |
71 나부자(羅浮子 하야시 라잔의 별호)께서는 애초에 듣기로 육경의 진수를 음미하고 외적(外的)인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끊었다 하셨거늘 또한 험운(險韻)으로 시를 짓는 데도 능하시군요. 아픈 걸 무릅쓰고 운(韻)을 맞추어 보았지만 어찌 촌스러운 태를 면하겠습니까〔羅浮公始聞子咀嚼六經之腴而絶外慕又能競病之語乎強病攀和那免傖父面目〕 |
72 도춘의 두 아이를 만나고, 곧 근체시 한 수를 지어 도춘에게 주다〔見道春二兒仍以近體一首贈道春〕 |
73 7월 25일, 비 맞으며 석교의 찻집을 지나다〔七月二十五日被雨過石橋茶屋〕 [주-D001] 석교(石橋) : 이시바시(石橋)이다. 오사카 근방인 듯하다. |
74 신율교를 가며. 이날이 정사의 생일이라 율시 한 수를 지어 위로하다〔新栗橋途中是日正使初度遂賦一律以慰〕 [주-D001] 신율교(新栗橋) : 신쿠리하시(新栗橋)이다. 일본 사이타마현(埼玉縣)과 군마현(群馬縣) 사이를 흐르는 토네가와(利根川)를 건너기 위해 설치했던 교량인데 이 근방은 과거부터 요충지로 알려져 있다. |
75 월개곡 빗속에서〔越介谷雨中〕 [주-D001] 월개곡(越介谷) :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 7월 23일 조에 따르면 저자 일행은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
76 일광산에 읊다〔日光山題詠〕 |
77 일광사에 쓰다〔題日光寺〕 [주-D001] 일광사(日光寺) : 닛코 동조궁(日光東照宮),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유골과 위패가 안치된 사당이다. |
78 다시 청견사에 들르다〔重過淸見寺〕 |
79 명해 가는 길〔鳴海途中〕 [주-D001] 명해(鳴海) : 나루미(鳴海)를 이른다. 일본 아이치현(愛知縣) 나고야시(名古屋市)에 있다. 《계미동사일기》 8월 16일 조에 “아침에 강기를 떠나서 명해(鳴海)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명고옥(名古屋)에 도착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
80 하고 가는 길〔河股途中〕 [주-D001] 하고(河股) : 카와마타(川股)가 아닌가 한다. 참고로 《계미동사일기》 8월 17일 조에 “명고옥을 떠나서 주고(洲股)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대원(大垣)에 도착했다.”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여기 언급된 ‘주고(洲股)’가 ‘하고’와 같은 지역으로 추정된다. |
81 미장 가는 길〔尾張途中〕 [주-D001] 미장(尾張) : 오와리(尾張)이다. 일본의 옛 지명인데, 현재의 나고야(名古屋) 부근이다. 전국 시대에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등 거물급 무장(武將)의 출신지로서 이들의 영토에 편입된 바 있고, 에도 막부가 수립된 후 도쿠가와(徳川) 가문이 다스리는 영토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손꼽히는 대도회를 이루었다. |
82 소전원 태수가 대나무 병풍을 보내며 시를 청하다〔小田原太守送竹障請詩〕 [주-D001] 소전원(小田原) : 오다와라(小田原)로, 가나가와현(神奈川縣)에 있는 도시이다. 《계미동사일기》 8월 8일 조에 “아침에 등택을 떠나서 대기(大磯)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소전원(小田原)에 도착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
83 학을 그린 금병풍에 쓰다〔題畫鶴金屛〕 |
84 실진에서 종사가 조그만 술자리를 열어 누각에 오르니 곧 중양절이었다. 각각 연구를 짓다〔室津從事設小酌登樓卽重陽也各賦聯句〕 [주-D001] 실진(室津) : 무로츠(室津)이다. 효고현(兵庫縣)에 속한 지명으로 하리마 탄(播磨灘)을 면하고 있는 항구이다.《계미동사일기》 9월 8일 조에 따르면 저자 일행은 이날 저녁 실진에 도착하였으나 밤이 늦어 그대로 배 위에서 잤다고 한다. |
85 대판성에서 종사의 시에 차운하다〔大坂城次從事韻〕 |
86 다시 부사천을 지나며〔再過富士川〕 [주-D001] 부사천(富士川) : 후지카와(富士川)이다. 나가노현(長野縣)과 야마나시현(山梨縣), 시즈오카현(静岡縣)에 걸쳐 흐르는 하천이다. |
87 국령에 올라〔登菊嶺〕 [주-D001] 국령(菊嶺) : 후지산 남쪽 산기슭에 있는 고개 가운데 하나이다. 《記言 卷36 東事 黑齒列傳》 |
88 등지 가는 길〔藤支途中〕 [주-D001] 등지(藤支) : 후지에다(藤枝)이다. 일본 시즈오카현(靜岡縣) 후지에다시(藤枝市)를 가리킨다. 《계미동사일기》 8월 11일에 “아침에 강구를 떠나 준하주(駿河州)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등지(藤枝)에 도착했다.”라고 했고, 8월 12일 조에는 “아침에 등지를 떠나서 금곡(金谷)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현천(懸川)에 도착했다.” 하였다. |
89 견부 들에서〔見付野中〕 [주-D001] 견부(見付) : 미츠케(見付)이다. 견부(見附)라고도 표기한다. 시즈오카현(静岡縣) 이와타시(磐田市)에 이 지명이 있다. 《계미동사일기》 8월 13일 조에 “아침에 현천을 떠나서 견부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빈송(濱松)에 도착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
90 황촌 가는 길〔荒村途中〕 [주-D001] 황촌(荒村) : 아라이(荒村), 황정(荒井)이라고도 표기한다. 《계미동사일기》 8월 14일 조에 “황정(荒井)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길전(吉田)에 도착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
91 8월 13일에 다시 금절하를 건넜다. 이곳은 바로 임자정과 김도원이 병자년(1636, 인조14) 봉사(奉使) 때 금을 던진 곳이다〔八月十三日還渡金絶河卽任子靜金道源丙子奉使時投金處〕 [주-D001] 8월 …… 곳이다 : 금절하(今絶河)는 이마기레(今切)로, 시즈오카현(静岡縣) 하마나호(浜名湖)가 바다와 이어지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임자정(任子靜)과 김도원(金道源)은 임광(任絖)과 김세렴(金世濂)으로 1636년 통신사행 때 각각 정사와 부사를 맡았던 이들이다. 사행이 끝나갈 무렵 이 일행이 일공미(日供米) 남은 것을 일본인들에게 돌려주자 일본인들이 그것을 금으로 바꾸어서 주었는데, 김세렴 등은 그 금을 이마기레 강물에 던져 버렸다. 한편 《계미동사일기》 8월 14일 조에 “아침에 빈송을 떠나서 금절하(今絕河)를 지나는데 빈송의 검문관이 와서 또 여인을 조사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는 저자의 기록과 하루 차이가 난다. |
92 황촌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고갯마루가 하나 있는데 마치 문을 낸 것처럼 뻥 뚫려 있다〔去荒村數十里有嶺鑿開呀吭如門〕 |
93 빈송 가는 길〔濱松途中〕 [주-D001] 빈송(濱松) : 하마마츠(濱松)이다. 일본 시즈오카현(静岡縣) 하마마츠시(浜松市)에 해당하는 지명이다. 《계미동사일기》 8월 13일 조에 “아침에 현천을 떠나서 견부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빈송(濱松)에 도착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
94 다시 품천을 지나며〔再過品川〕 [주-D001] 품천(品川) : 시나가와(品川)이다. 도쿄도(東京都)에 속한 지명이다. 《계미동사일기》 8월 6일 조에 저자의 일행이 시나가와를 지나 황천(荒川)에 도착하기까지 하루 동안 겪은 일들이 상세하게 나와 있다. |
95 신내천 가는 길〔神奈川途中〕 [주-D001] 신내천(神奈川) : 지금의 카나가와현(神奈川縣)에 해당한다. 일본 간토(關東) 지방 남서부에 위치하며 도쿄도 남쪽에 인접하는 현이다. 현청 소재지는 요코하마시(横浜市)이다. |
96 다시 상근 고개를 지나며〔重經箱根嶺〕 [주-D001] 다시 …… 지나며 : 귀로에 이곳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다는 말이다. 본서 권 23에 〈상근 고개(箱根嶺)〉라는 시가 있는데, 오는 길에 이곳을 경유하며 쓴 것이다. 한편 《계미동사일기》 8월 9일에 “아침에 소전원을 떠나서 상근령(箱根嶺)에서 점심을 먹었다.”라는 내용이 있어 참조된다. |
97 천황〔天皇〕 |
98 산성의 관사에서 오천 선생을 떠올리다〔山城館憶烏川先生〕 [주-D001] 산성(山城)의 …… 떠올리다 : 산성의 관사는 일본 야마시로주(山城州)에 있는 객관이고, 오천 선생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이다. |
99 왜경〔倭京〕 [주-D001] 왜경(倭京) : 지금의 일본 교토(京都)이다. 《계미동사일기》에 따르면 저자 일행은 8월 21일 저녁 무렵 이곳에 도착하였다. |
100 새로 갠 날씨〔新晴〕 |
101 다시 정포를 지나며〔再過碇浦〕 [주-D001] 정포(淀浦) : 요도우라(淀浦)이다. 오사카(大阪)에 있다. |
102 정사의 시에 차운하여 서(恕) 스님에게 주다〔次正使韻贈恕釋〕 |
103 박안기의 시에 차운하다〔次朴安期韻〕 |
104 종사의 시에 차운하여 최기남에게 주다〔次從事韻贈崔奇南〕 [주-D001] 최기남(崔奇南) : 1589~1671. 조선 중기의 위항시인이다. 본관은 천녕(川寧), 자는 영숙(英叔), 호는 구곡(龜谷)ㆍ묵헌(默軒)이다. 1643년 윤순지(尹順之)를 따라 일본에 가서 문명(文名)을 떨쳤다. |
105 다시 산성주를 지나며〔重過山城州〕 |
106 정하 배 안에서〔碇河舟中〕 [주-D001] 정하(碇河) : 오사카(大阪)의 요도우라(淀浦)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
107 아침에 정포를 떠나며 정사에게 장난삼아 주다〔朝發碇浦戲贈正使〕 |
108 주남장로를 작별하면서〔留別周南長老〕 [주-D001] 주남장로(周南長老)를 작별하면서 : 주남장로는 《계미동사일기》 8월 25일 조에 나오는 주단장로(周段長老)와 동일인인 듯하다. “주단장로가 만병회춘(萬病回春) 한 질과 당지(唐紙) 1백 50장, 피서격(皮書格) 한 벌을 보내서 사신들을 전별하는 예물로 주었다.” |
109 주남장로의 시에 차운하다〔次周南長老韻〕 |
110 다시 대판에 이르다〔重到大坂〕 [주-D001] 다시 대판에 이르다 : 《계미동사일기》 8월 27일 조에 “새벽에 비가 내리더니 아침엔 개었다. 일찍이 평방을 떠나 사시(巳時)쯤 대판에 도착했다. 본원사(本源寺)에 머무르니 인번수(因幡守)가 처음처럼 대접했다.” 하였다. |
111 9월 6일, 대판 하구를 출발하며 종사에게 주다〔九月初六日發大坂河口贈從事〕 [주-D001] 9월 …… 주다 : 《계미동사일기》 9월 6일 조의 내용이 참조된다. 한편 9월 4일 조의 내용에 따르면 원래 4일에 출발하려 했으나 저자에게 병이 있어 떠나지 못했다고 하였다. |
112 9월 9일 실진에서〔室津九日〕 [주-D001] 9월 9일 실진에서 : 《계미동사일기》에 따르면 저자 일행은 9월 8일부터 실진에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113 중양절 다음날〔重陽後一日〕 [주-D001] 중양절 다음날 : 《계미동사일기》 9월 10일 조에 “바람에 막혀 실진에 머물렀다.” 하였다. |
114 일찍 실진을 떠나며〔早發室津〕 [주-D001] 일찍 실진을 떠나며 : 《계미동사일기》 9월 13일 조에 아침에 실진을 떠나 신시(申時)에 우창(牛窓)에 도착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
115 9월 13일 밤에 우창을 떠나다〔九月十三日夜發牛窓〕 |
116 거듭 도포를 지나며〔重經韜浦〕 [주-D001] 거듭 도포를 지나며 : 《계미동사일기》 9월 14일 조에 “배를 띄워 1백 40리를 가서 신시 경에 도포(韜浦)에 도착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
117 겸예를 떠나며〔發鎌刈〕 |
118 종사의 9월 보름날 밤 시에 차운하다〔次從事九月望夜韻〕 [주-D001] 종사의 …… 차운하다 : 《계미동사일기》 9월 15일 조에 “밤중에 바람을 타서 돛을 달았다. 1백 20리를 가서 상관(上關)에 이르니 첫닭이 울었다.”라는 내용이 있어 이 날 상관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
119 9월 19일〔九月十九日〕 [주-D001] 9월 19일 : 《계미동사일기》 9월 19일 조에 “아침에 개었다가 늦게 흐렸다. 적간관을 떠나서 2백여 리를 갔다. 아직 남도(藍島)까지 가기는 30리쯤 남았는데 구름이 일고 비가 내렸다. 갈팡질팡 돛을 내리고 재촉하여 노를 저어 밤늦게 남도에 닿았다. 뭍에 내려 숙공을 들고 사관에서 잤다.”라고 하였다. |
120 이날 종사 이선에게 주다〔是日贈從事泥仙〕 [주-D001] 이선(泥仙) : 신유(申濡, 1610~1665)의 자이다. |
121 종사의 상관(上關) 시에 차운하다〔次從事上關韻〕 |
122 9월 21일 저녁 큰 풍랑이 쳤기에 시를 읊다〔九月二十一夕大風浪有吟〕 [주-D001] 9월 …… 읊다 : 《계미동사일기》 9월 21일 조에 풍랑으로 배가 부서진 사실이 실려 있다. |
123 종사의 시에 차운하다〔次從事示韻〕 |
124 서(恕) 스님의 화폭에 쓰다〔題恕釋畫幅〕 |
125 의성이 관백에게 하사받은 병풍 뒤에 쓰다〔題義成受賜關白障子後〕 |
126 의성의 닭을 그린 화폭에 쓰다〔題義成畫鷄幅〕 |
127 홍장로의 증별시에 차운하다〔次洪長老贈別韻〕 |
128 의성이 헤어지게 되자 시를 청하기에 이를 써서 남기다〔義成臨別求詩書此留之〕 |
129 종 태수의 호박개 단가〔宗太守下朴狗短歌〕 |
《용주유고(龍洲遺稿)》 해제(解題)
김문식|단국대학교 사학과
1. 조경(趙絅)의 생애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은 1586년(선조19)에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를 지낸 조익남(趙翼男)과 유개(柳愷)의 따님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일장(日章), 호(號)는 주봉(柱峰)ㆍ용주(龍洲)이다.
조경의 생애는 수학기(修學期)와 사환기(仕宦期), 은퇴기(隱退期)라는 세 개의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먼저 수학기(1589~1623)는 한양의 숭교방(崇敎坊)에서 태어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가기까지의 시기이다. 조경은 아주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광해군이 집권했을 때에는 벼슬길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조경은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문하에서 문장 수업을 받았다. 당시 윤근수의 문하에는 이정귀(李廷龜), 김상헌(金尙憲), 김육(金堉), 김좌명(金左明)과 같은 서인계 인사들이 있어 그들과 교유하는 기회가 되었다.
사환기(1623~1653)는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문과에 급제하고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한 시기이다. 조경은 내직으로 형조 좌랑, 사간원 헌납, 대사간, 대사헌, 양관(兩館)의 대제학, 도승지, 이조 판서, 의정부 좌참찬, 형조 판서, 예조 판서를 역임했고, 외직으로 지례 현감, 목천 현감, 흥해 군수, 김제 군수, 전주 부윤, 회양 부사를 역임했다.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그는 소현세자의 분조(分朝)에 참여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과천의 관악산에서 피란민을 모아 청나라 군대를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인조가 사망한 후 《인조실록》 찬집청(撰集廳)의 당상관을 역임하고 만사(輓詞)를 지었으며, 효종이 즉위한 직후의 반교문(頒敎文)을 작성했다. 1643년에는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을 다녀왔다.
은퇴기(1654~1669)는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 포천에서 모친을 모시고 살며 말년을 보낸 시기이다. 조경이 벼슬길에서 물러난 것은 청나라 정부로부터 척화신(斥和臣)으로 지목받아 배척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그를 예우하여 계속 월봉(月俸)을 지급했고, 1661년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그는 70세가 되던 1655년(효종6)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3년 후에는 김육(金堉), 윤경(尹坰), 윤이지(尹履之), 오준(吳竣)과 함께 기소오로회(耆所五老會)를 만들었다. 효종이 사망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지었고, 기해예송(己亥禮訟)이 일어나자 윤선도(尹善道)의 설을 지지하여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과 같은 서인계 인사들과 틈이 벌어졌다. 1668년 4월에 품계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정1품)까지 올랐고, 1669년(현종10) 2월에 사망하여 포천의 선영 아래에 장사 지냈다. 그는 춘천의 문암서원(文岩書院),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흥해(興海)의 곡강서원(曲江書院)에 차례로 배향되었다.
조경의 졸기(卒記)는 《현종실록(顯宗實錄)》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전자는 1677년에 남인이 주도하여 편찬했고, 후자는 1683년에 서인이 주도하여 편찬한 책이다. 두 글을 비교하면 그의 생애에 대한 서술은 비슷하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기해예송에서 윤선도를 옹호한 것을 비판하고 효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가 출향(黜享)된 일을 강조했다. 서인계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행 부호군 조경(趙絅)이 졸하였다. 조경의 자(字)는 일장(日章)이며 청문 고절(淸文苦節)로 한 시대의 추앙을 받았다. 총재(冢宰)의 지위에 올랐고 문형(文衡)을 지냈는데, 경인년(1650)에 청나라에게 죄를 받아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돌아온 뒤에는 서용하지 못하게 하므로 부모를 위해 회양 부사(淮陽府使)를 청하여 나갔는데, 얼마 후 포천(抱川)으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지성으로 계모(繼母)를 섬겼는데, 나이 80세에 상(喪)을 당했으나 남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예를 잘 수행하였다. 고령으로 품계가 승급되었고 음식물의 하사도 있었다. 이때 84세로 졸하였다.
조경의 문장은 고상하면서 기운이 넘쳐 고문(古文)에 가까웠으며, 그의 맑은 명성과 굳은 절개는 당세에 추앙을 받았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를 구하는 상소를 올린 일 때문에 크게 시의(時議)에 거슬림을 받아 사특하다고까지 지목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사인(邪人)이 정인(正人)을 가리켜 사특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금상 병진년(1676, 숙종2) 현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전 판중추부사 조경(趙絅)이 죽었다. 조경의 자는 일장(日章)으로, 인조 초에 장원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화직(華職)과 현직(顯職)을 두루 거쳐, 지위가 총재에 이르렀고 문형을 잡기도 했다. 만년에 이웃 청나라의 떠들어대는 말로 인해 변방에 유배되었고 풀려나서도 거두어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조정에 서지 못했다. 어버이를 위하여 고을 수령을 원하여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었고, 체임된 뒤에는 포천에 은퇴하여 돌아갔다. 계모를 효성으로 섬겨 소문이 났고, 나이 80에 상을 만났는데 예를 그래도 부지런하게 지켰다. 기로(耆老)로 조정에서 우대하여 특별히 1품의 품계를 더해주고 월름(月廩)을 하사했다. 이때 이르러 84세로 졸하였다.
조경은 문장이 화려하고 행실이 있어서 세상에 칭송받았지만, 강퍅하고 자신의 의견대로 하였으며 논의가 매우 편벽되었다. 병술년(1646, 인조24) 강씨의 옥사가 있었을 때, 조경은 대사헌으로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를 진달하여 《춘추》의 군친(君親)에게는 반역을 일으킬 수 없다는 의리를 인용하였다. 현저하게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작태가 있어 누차 총애를 입어 발탁되었으므로 사론(士論)이 더럽게 여겼다. 경자년(1660, 현종1)에 윤선도가 상소하여 예론을 무함했다가 죄를 얻어 쫓겨났는데, 조경은 상소를 올려 구원하면서 심지어는 효종을 위해 윤선도의 견해에 동의하겠다는 말까지 하였으므로, 온 세상이 비로소 그의 간악한 실상을 믿게 되었다. 갑인년(1674, 숙종 즉위년) 이후 간흉들이 정권을 도둑질하고 조경이 예론에 공로가 있다 하여 묘정에 배향했다. 여론이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 여러 해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 정권이 바뀐 이후 공의가 다시 펴져 묘정에서 내쫓겼다.
2. 주변 인물
조경의 조부와 부친은 독자(獨子)였으며, 조경 대에 이르러 형제가 태어났다. 조부 조현(趙玹, 1543~1606 자 군미(君美))은 공조 좌랑, 임실 현감, 직산 현감을 역임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모집했다. 부친 조익남(趙翼男)은 효행으로 사섬시 봉사가 되었다가 1613년(광해군5)에 사망했다. 조익남은 조경이 현달하게 되자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조경의 모친은 두 분이다. 생모(生母)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조경이 13세이던 1598년에 사망했고, 계모인 진천 송씨(鎭川宋氏)는 1665년(현종6)에 사망했다.
조경은 부친이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모친을 봉양하는 데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그는 관리 생활을 하면서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임지를 옮기거나 사직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모친을 봉양하는 데에는 아우 조구(趙緱)도 참여했고, 1640년(인조18) 아우가 사망한 후에는 조경이 모셨다.
신은 일찍이 아비를 여의고 동생 하나만 있었는데 동생마저 지난해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노모를 보살필 사람이라곤 신 한 사람뿐인데 지금 어미의 병이 이와 같으니, 신의 사정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서둘러 달려가 치료하는 것을 차마 한 시각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훗날 허목은 ‘조경이 70년 동안 정성을 다해 모친을 봉양했고, 80의 나이에도 모친의 장례를 직접 치렀다’고 칭찬했다.
다음은 조경의 가계도(家系圖)이다.

조경은 이황에서 김성일, 정구로 이어지는 남인 학통을 중시했다. 그는 이황이 사도(師道)의 엄격함과 유학의 도(道)를 수호한 공덕이 있다고 평가했고, 이황이 남긴 글들을 꼼꼼히 읽었다.
선조 대에 이르러 더욱 유술(儒術)을 중시했다. 퇴계(退溪) 이 선생을 도산(陶山)에서 예우로 초빙하여 나라 사람들이 법식으로 삼을 바가 있게 되자 학자들이 각자 분발하여 그 문하로 몰려들었다. 위로 요(堯)와 순(舜)을 이야기하고, 아래로는 상(商)과 주(周)를 이야기하며, 관중(管仲)과 상앙(商鞅)의 공리(功利), 장의(張儀)와 소진(蘇秦)의 패합(捭闔)은 논하지 않고, 도교와 불교의 허무지학(虛無之學)은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문장을 지을 때도 정(正)에 귀일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았으니, 이 선생의 사도(師道)의 엄격함과 도를 보호하는 공덕이 어떠한가? 나는 항상 그 때에 미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고, 선생의 글과 문도들이 문답한 것을 즐겨보면서 비록 한마디라도 도(道)에 가까운 것을 버리지 않았다.
1655년에 조경은 영양에 건립된 영산서원(英山書院)에 이황과 김성일의 위판을 봉안하는 제문을 작성했다. 그는 이황이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과 함께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음을 강조하고, 이황과 김성일의 관계를 공자와 그 제자인 자유(子游), 자하(子夏)의 관계에 비유했다. 또한 그는 조선에 전해진 성리학이 이황에 이르러 성대해졌고, 정구는 그 문하를 출입하며 어려서부터 승당(升堂)한 것으로 평가했다.
조경이 서인계 학자였던 윤근수의 문하에 출입하였음에도 남인계 학자로 비정되는 데에는 장인 김찬(金瓚, 1543~1599)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김찬은 임진왜란 때 대사헌을 역임했고, 가장 가깝게 지낸 인물은 유성룡과 김성일이었다. 김성일은 1591년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김찬에게만 편지를 보내 속내를 털어놓았고, 유성룡은 김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제문을 지으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조경이 가깝게 지낸 동료는 이시백(李時白)과 남이웅(南以雄)이었다. 이시백(1592〜1660 자(字) 돈시(敦詩), 호(號) 조암(釣岩))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이귀(李貴)의 아들로 이괄의 난을 토벌하고 영의정을 역임했고, 남이웅(南以雄, 1575〜1648 자(字) 적만(敵萬), 호(號) 시북(市北))도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우고 좌의정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조경은 이들과 50년 이상 친분을 유지했으며, 그들이 사망한 후 제문과 묘표, 신도비명 등을 지어 애도했다. 이중에서 이시백은 성혼, 김장생, 이항복에게 학문을 배운 서인계 인사였다.
허목은 조경 집안의 묘도문자를 많이 남긴 인물이다. 그는 조경의 부친인 조익남의 묘갈명을 지었고 비의 전서(篆書)를 썼으며, 모친인 진천 송씨의 만시 서(輓詩序)를 지었다. 허목은 조경의 묘지명과 신도비명, 조경의 아우인 조구의 묘지명을 지었다.
조경의 교유 인물을 보면, 초기에는 남인 및 서인계 인사와 두루 교유하다가 후기로 갈수록 남인계 중심으로 변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3. 《용주유고》와 관련 자료
조경에 관한 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목판본 《용주선생유고(龍洲先生遺稿)》 23권 9책이다. 이 책은 1703년(숙종29) 1월에 조경의 손자인 조구원(趙九畹)이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부임하면서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용주선생유고》를 간행하는 작업은 1703년 8월에 시작하여 그해 12월〔臘月〕에 마무리했고, 문집을 인쇄한 목판은 조계산(曹溪山) 송광사(宋廣寺)에 보관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1671년에 허목은 조경의 ‘문집 10권’이 집안에 남아있다고 했다. 1674년(숙종 즉위년) 10월에 조경의 아들 조위봉(趙威鳳)은 능주 목사(綾州牧使 전남 화순)로 부임하면서 부친의 문집을 정서해 두었지만 결국 간행하지는 못하고 돌아왔다. 현재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된 문집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본이며(한46-가1182), 규장각, 고려대학교 도서관에도 같은 본이 소장되어 있다.
조경이 작성한 자료에는 필사본 《용주일기(龍洲日記)》도 있다. 여기에는 정유일기(丁酉日記), 을해남정일기(乙亥南征日記), 병정일기(丙丁日記), 경인일기(庚寅日記), 신묘일기(辛卯日記)가 포함되어 있다. 정유일기는 1627년 정묘호란 때의 기록이고, 을해남정일기는 1635년 암행 어사로 전라도를 순찰할 때의 기록이다. 병정일기는 1636~1637년까지 병자호란 때의 기록이고, 경인일기와 신묘일기는 1650~1651년까지 의주의 백마산성에 유배되었던 시기의 기록이다. 《용주일기》의 필사본은 조경의 후손인 조영원(趙永元 호(號) 각산(覺山))의 손자인 조인행(趙寅行)씨가 소장한 본과 조경의 후손인 조국원(趙國元 호(號) 심재(心齋))이 필사한 본이 있다. 이 자료는 최근에 번역이 이루어져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조경의 생애에 관한 자료에는 필사본 《용주조선생연보(龍洲趙先生年譜)》 2권이 있다. 조경의 아들 조위봉이 편찬한 것으로, 후손 조석주(趙錫疇)가 봉사손(奉祀孫)인 조제화(趙濟華)의 집에서 원고를 찾아 간행했다고 한다. 1786년(정조10) 여름에 예조 참판 이헌경(李獻慶)이 그 서문을 썼고, 1859년에 허전(許傳)과 조석주(趙錫疇)가 발문을 썼다. 이헌경은 조위봉의 장인인 이명웅(李命雄)의 4세손이다. 《용주조선생연보》의 권1은 조경의 생애를 연도순으로 정리했고, 권2 부록에는 사제문(賜祭文, 1669), 태묘배향교문(太廟配享敎文, 1676), 용연서원선사사제문(龍淵書院宣賜賜祭文, 1692), 언행총록(言行總錄, 조위봉(趙威鳳)), 묘지명(墓誌銘, 허목(許穆), 1671), 신도비명(神道碑銘, 허목(許穆), 1671), 시장(諡狀, 허목(許穆)), 발문(跋文, 허전(許傳), 1859), 발문(跋文, 조석주(趙錫疇)) 등 조경이 사망한 후에 작성된 글들이 편집되어 있다. 이 자료 역시 최근에 번역이 이루어져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조경의 간찰을 모은 자료로 《용주척독(龍洲尺牘)》 1책과 《문간공간독(文簡公簡牘)》 1책이 있다. 전자는 조경의 친필 필사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한古朝44-다3), 후자는 조국원(趙國元 호(號) 심재(心齋))이 필사한 것이다. 《용주척독》에는 조경이 이경석(李景奭), 허목(許穆), 목내선(睦來善), 윤선도(尹善道), 이연년(李延年) 등에게 보낸 63건의 서간이 수록되었고, 《문간공간독》에는 허목, 목내선, 이경석, 조속(趙涑), 김만중(金萬重), 이명웅(李命雄) 등에게 보낸 180건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용주선생유고》에서 누락된 서간을 모은 것이라 매우 유용한 자료로 판단된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산견되는 자료를 수집하여 수신자가 뒤섞여 있고 시간 순으로 편집되어 있지도 않다. 현재 번역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추후 재정리 작업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조경의 후손 가에는 그가 자제들에게 보낸 서간과 다수의 고문서가 있다. 그중에서 《삼부유병풍화폭시문등본(三釜遊屛風畵幅詩文謄本)》은 1664년(현종5)에 조경과 조위봉 부자, 허목(許穆 전 삼척 부사), 이진(李袗 겸순찰사), 허립(許岦 전 함창 현감), 이회(李襘 전 춘천 부사), 이연년(李延年 철원 부사)이 강원도 철원에 있는 삼부연(三釜淵)을 유람하면서 작성한 글을 베낀 것이다. 허목이 서문을 작성했으며, 조국원이 필사하고 발문을 썼다. 이 자료는 조경의 만년 생활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자료이다.
4. 《용주유고》의 내용
《용주유고》는 23권 9책의 목판본이다. 권두에는 총목(總目)이 있으며 서문이나 발문은 없다.
권1~5에는 630여 수의 시가 편집되어 있다. 권1에는 오언절구(五言絶句) 14수, 칠언절구(七言絶句) 52수, 오언율시(五言律詩) 87수가 있으며, 권2에서 권4까지는 칠언율시(七言律詩) 422수, 권5에는 오언고시(五言古詩) 43수와 칠언고시(七言古詩) 17수가 있다. 일상생활의 느낌이나 여행지의 풍경을 읊은 시가 많고, 《근사록(近思錄)》ㆍ《심경(心經)》ㆍ《이정전서(二程全書)》ㆍ《한집(韓集)》ㆍ《두집(杜集)》ㆍ《동포록(東圃錄)》을 읽은 후에 지은 시가 있다. 시로 교유한 인물에는 정온(鄭蘊), 이경전(李慶全), 김원립(金元立), 민성휘(閔聖徽), 홍응원(洪應元), 허목(許穆), 목내선(睦來善), 신유(申濡), 목대흠(睦大欽), 조속(趙涑), 정구(鄭球), 유희경(劉希慶), 김광욱(金光煜), 양만고(楊萬古), 이정영(李正英), 이경석(李景奭), 채유후(蔡裕後), 남이웅(南以雄), 홍영(洪霙), 이경용(李景容), 민응회(閔應恢), 이명한(李明漢), 홍립(洪雴), 김광현(金光炫), 심동귀(沈東龜), 김육(金堉), 민응형(閔應亨), 정세규(鄭世規), 정사룡(鄭士龍), 심택(沈澤), 오준(吳竣), 강백년(姜栢年), 이회(李禬), 정태화(鄭太和), 김효건(金孝健), 홍명하(洪命夏), 이식(李植) 등이 있고, 인조(仁祖), 인평대군(麟坪大君), 남이웅(南以雄), 이성원(李性源), 이명웅(李命雄), 이식(李植), 조익(趙翼), 목서흠(睦敍欽), 민응회(閔應恢), 허휘(許徽), 김염조(金念祖), 최유연(崔有淵), 박길응(朴吉應), 이경여(李敬輿), 이시백(李時白), 목행선(睦行善), 심광수(沈光洙), 최명길(崔鳴吉), 강학년(姜鶴年), 심대부(沈大孚), 신혼(申混), 김주(金周), 민응형(閔應亨) 등의 죽음을 슬퍼하는 만시(挽詩)가 있다. 이를 보면 조경의 교유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권6~22는 문(文)에 해당한다. 권6~10에는 소차(疏箚) 86편과 계사(啓辭) 26편이 연대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여기에는 조경이 형조 좌랑, 지평, 홍문관 교리, 사간, 형조 참의, 대사간, 대제학, 대사헌, 형조 판서, 도승지, 예조 판서, 내의사(內醫司) 제조, 이조 판서, 실록 찬수 당상(實錄撰修堂上), 시책(諡冊) 제술을 사직하는 상소가 있다. 또한 왜인(倭人) 접위관(接慰官)을 거절하거나 응지(應旨)하는 상소,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지방관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는 상소, 재난을 만나 수성(修省)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 원손(元孫) 책봉을 요청하는 상소, 장릉(長陵)의 지문(誌文)을 찬진(撰進)하는 상소, 김육(金堉)을 구하고 심대부(沈大孚)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 기민(饑民) 구제를 요청하는 상소도 있다. 계사(啓辭)는 주로 혐의를 피하려는 피혐(避嫌) 계사이다.
권11에는 서(序) 20편과 기(記) 5편이 있다. 서문에는 《한양조씨족보(漢陽趙氏族譜)》ㆍ《학봉선생집(鶴峯先生集)》ㆍ《농암선생집(聾巖先生集)》ㆍ《한음선생문집(漢陰先生文集)》ㆍ《소재선생문집(蘇齋先生文集)》ㆍ《구암집(龜巖集)》ㆍ《육신유고(六臣遺稿)》ㆍ《현곡집(玄谷集)》ㆍ《초암집(初菴集)》ㆍ《동계선생집(桐溪先生集)》에 대한 것이 있고, 기문에는 포천의 선영 사당, 회양향교(淮陽鄕校) 수리, 제주 장수당(藏修堂), 연송재(鍊松齋), 낙전재(樂全齋)에 관한 것이 있다. 서문을 작성한 대상은 주로 동인이나 남인계 인물의 문집이었다.
권12에는 발(跋) 8편, 변(辨) 1편, 설(說) 4편, 잡저(雜著) 9편, 상량문(上樑文) 2편, 시책문(諡冊文) 1편, 죽책문(竹冊文) 1편, 교서(敎書) 2편이 있다. 이 중 발문에는 《죽창집(竹窓集)》, 중간(重刊)한 《주례(周禮)》, 《강정대왕어필첩(康靖大王御筆帖)》, 이언적의 《대학보유(大學補遺)》에 대한 것이 있고, 잡저에 포함된 책문(策問)에는 예(禮), 경전(經傳), 춘추(春秋), 어적지책(禦敵之策)을 주제로 했다. 시책문은 효종의 시책이고, 죽책문은 현종을 왕세손으로 책봉하는 죽책문이다.
권13에는 제문(祭文) 31편과 기우제문(祈雨祭文) 9편, 뇌문(誄文) 1편이 있다. 제문에는 인열왕후(仁烈王后), 목릉(穆陵) 보토(補土), 퇴계(退溪)와 학봉(鶴峰)을 모신 영산서원(英山書院)에 관한 것이 있으며, 이시백(李時白), 채유후(蔡裕後), 한흥일(韓興一), 유백증(兪伯曾), 남이웅(南以雄), 김육(金堉), 이완(李梡)을 추모하는 제문과 관악산신(冠岳山神)과 기우(祈雨) 제문이 있다. 뇌문은 김응조(金應祖)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권14~21에는 묘지(墓誌) 6편, 묘갈(墓碣) 27편, 묘표(墓表) 2편, 신도비명(神道碑銘) 20편을 합하여 총 55명의 묘도문자가 있다. 묘지명에는 인조(仁祖), 정구(鄭球), 김지남(金止男), 김육(金堉), 묘갈명에는 조현趙玹), 정수곤(鄭壽崑), 양사언(楊士彦), 이성중(李誠中), 이시백(李時白), 윤황(尹煌), 정개립(鄭介立), 신도비명에는 김식(金湜), 조식(曺植), 이덕형(李德馨), 정경세(鄭經世), 정온(鄭蘊), 김응하(金應河), 한흥일(韓興一), 권협(權悏), 전식(全湜), 김시양(金時讓), 민응형(閔應亨), 남이웅(南以雄), 이덕형(李德泂)에 대한 것이 있다. 마지막에 홍주청난비명(洪州淸難碑銘)이 있는데 이는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한 홍가신(洪可臣)의 공을 기리는 것이다.
권22에는 정온(鄭蘊)과 이원익(李元翼)의 시장(諡狀)이 있다.
권23은 동사록(東槎錄)이다. 이는 1643년에 조경이 통신부사의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온 기록으로, 화루선(畵樓船), 관백(關伯), 왜국(倭國)의 삼도(三都)에 대한 설(說)이 있고, 일본을 대표하는 유학자였던 임라산(林羅山 도춘(道春))과 주고받은 편지가 있다. 또한 조경이 서울을 떠나 부산과 대마도를 경유하여 강호(江戶)와 일광산(日光山)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까지 주고받은 시가 이동경로를 따라 수록되어 있다.
《용주유고》의 편차는 다른 문집과 비슷하지만 서간(書簡)이 전혀 수록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5. 《용주유고》에 나타나는 조경의 활동
1) 민생 안정과 대동법 실시 건의
조경은 병자호란이 끝난 후 민생의 피폐함을 주목하고 재난과 흉년을 구휼하여 민생을 안정시킬 방책을 제안했다. 1645년(인조23)에 조경은 가뭄이 이어지고 전염병이 잇달아 발생함에 따라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려 사방을 떠돌며 도적이 되는 상황임을 보고했다.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구휼하며 새벽에 일어나 크게 덕을 밝히기를 반드시 전보다 배나 더하셨는데도 천심(天心)이 화평하지 못하여 재이(災異)가 거듭 내리는 것이 또한 전보다 배나 심합니다. 가뭄이 해마다 이어지고 전염병이 잇달아 발생하니, 마을 밭둑 사이에 보이는 굶주린 사람들의 근심어린 기색을 성상께서는 반드시 다 살필 수 없을 것입니다. 백성이 삼태기와 들것을 서로 끌어가니, 길가 풀숲에 묻은 시체 사이에 들리는 고아와 과부들의 통곡 소리를 성상(聖上 인조)께서는 반드시 다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수많은 배가 북쪽으로 가느라 뱃사공들은 전염병에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이 열에 두셋은 됩니다. 불쌍한 우리 백성은 적의 칼날에 죽지 않으면 전염병에 죽었으며, 굶주림에 죽지 않으면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다행히 살아남은 자들은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도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1647년이 되어서도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다. 조경은 연이은 흉년과 관리들의 가렴주구로 살길을 찾지 못한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는 정황을 보고했다. 그는 조정에서 효과가 없는 진휼(賑恤) 정책을 펴기보다 지방에서 진상(進上)하는 물품을 줄이거나 백성의 신역(身役)을 감면하는 것 같은 실질적 정책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때를 맞아 크게 하교하여 자신에게 허물을 돌리고 직언을 구하셔야 합니다. 모든 일에 내실이 있는 덕을 쌓기에 힘쓰고 헛된 형식을 제거하기에 주력하며, 진상하는 물선(物膳)이라도 임시로 적절히 줄이며, 고르지 못한 백성들의 요역을 고르게 하고, 감면할 만한 요역을 감하십시오. 그러면 민심이 기뻐할 것이며 백성들의 힘도 얼마간 펴질 것입니다.
조경은 1650년(효종1) 4월에 이경석과 함께 척화신으로 지목되어 의주의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2월에 서울로 돌아왔다. 현지에서 그는 평안도 백성들이 일 년에도 여러 번 왕래하는 청의 사신들을 접대하느라 고역인데다 흉년까지 겹쳐 심각한 상황임을 목격했다. 이때 그는 평안도 지역 관아에 있는 곡식 창고를 개방하여 무상으로 백성들을 구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평안도의 백성은 골수가 말랐습니다. 십수년 이래로 사신을 전송하고 영접한 적이 몇 번이나 되는지 모릅니다. 작년과 금년에는 사신 대여섯에서 일고여덟 무리가 몇 달 동안 이어졌고, 연향(宴享)을 베푸느라 고혈이 다하고 역참(驛站)에서 근력이 다하였습니다. 성근 베로 몸을 가려 손발이 부르트고 얼굴에는 사람 기색이 없으니, 추위를 참고 굶주림을 참는 모습은 모진 사람이 보아도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게다가 참혹한 흉년을 당하여 굶주림 때문에 동요하여 노약자를 지거나 안고 길에 떠도는 자가 그치지 않습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굶어죽은 시체가 도랑에 쌓일 것이 분명합니다.
삼가 들으니, 평안도 여러 고을의 창고에는 아직 10여만 섬의 곡식이 있다고 합니다. 창고를 열어 굶주린 이들을 진휼하는 일을 하루도 늦춰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만약 조적(糶糴)이라는 명목으로 준다면, 은혜가 두루 미치지 못하고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옛날에 흉년을 만나 창고의 곡식을 모두 내놓아 백성에게 주었던 것이 과연 추수한 뒤에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갚기 바랐던 것입니까.
조경은 민생을 안정시키는 최선의 방법으로 대동법을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조경은 대동법을 처음 건의한 사람은 이원익(李元翼)이며, 대동법을 시행하면 방납(防納)의 폐단이 없어져 백성들은 이익을 보지만 거가대족(巨家大族)과 재물이 넉넉한 사람, 각 관사의 사주인(私主人)들은 피해를 본다고 했다. 따라서 이들은 대동법을 막으려 갖은 노력을 다하며, 대동법을 시행하는 지역이 경기도를 넘어서지 않는 것도 이들의 농간 때문으로 보았다.
광해군이 육경(六卿)을 자택으로 보내어 백성의 일 가운데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 묻자, 공(公 이원익)은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대동법을 시행하도록 청하였다. 그 방법은 매년 봄가을에 백성의 전지 1결마다 여덟 말의 쌀을 거두어 서울의 창고로 운송하고, 때때로 각 관사의 사주인(私主人)에게 나눠주어 공상하는 물건을 알아서 사다 바치게 하는 것이었다. 시장 가격의 높고 낮음을 보아 그 수를 넉넉히 하여 사주인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이밖에는 한 자의 베나 한 되의 쌀도 백성에게 추가로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열 배로 방납하는 폐단을 혁파했다. 조목이 정밀하여 오랫동안 시행할 만하였다.
광해군이 먼저 경기에 시험하라고 명하자 거가대족(巨家大族)과 세력이 있고 재물이 넉넉한 백성 및 사주인들은 방납의 큰 이익을 잃게 되었기에 백방으로 저지하였다. 광해군이 누차 혁파하려 하였으나 경기 백성이 다투어 편하다고 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시행하고 있다. 하지만 공이 처음 대동법을 설행하라고 한 것은 온 나라에 공통적으로 시행하라는 말이었으니 어찌 경기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조경은 대동법을 확산시킨 사람은 영의정 김육(金堉)으로 보았다. 조경은 대동법은 정전제의 뜻을 계승하여 균평한 부세를 이루려는 것이며, 김육이 대동법을 확산시킴으로서 조선이 거의 다스려지게 된 것으로 평가했다.
(영의정) 임명 받은 초기에 / 拜命之初
균평한 부세를 먼저 아뢰었네 / 平賦首陳
균평한 부세란 어떤 제도인가 / 平賦何制
정전제의 뜻을 계승한 것이지 / 井田遺意
근대의 어진 재상 / 近代賢相
오리공(梧里公)이 이를 창시했고 / 梧里刱此
공이 그 계획 확충하니 / 公廓其猷
동국이 거의 다스려지게 되었네 / 東國庶幾
조경은 김육의 제문에서도 백성들이 극도로 피폐한 것은 토지와 조세가 균등하지 않기 때문이며, 백성을 지키는 방법은 대동법을 실시하는 것이라 강조했다.
지금 백성의 초췌함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 초췌함의 이유를 궁구해 보면 정지(井地)가 균등하지 못하여 그렇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전토에서 상중하의 척박하고 비옥한 정도가 뒤섞여 경중을 따지지 않고 세금을 부과하는 데다 그 사이에 변통이 끼어드니 백성들이 탄식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마을마다 넘쳐나는 것입니다. 공이 한눈에 간파하고 익숙히 들어 알게 된 것은 반드시 여기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신(重臣)의 책임을 맡아 마침내 백성을 지킬 길을 세웠으니 백성을 지킬 길이란 대동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조경은 대동법을 실시하는 것이 전쟁과 전염병, 흉년과 가혹한 세금에게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판단했다.
2) 대명의리론과 국방강화책 건의
조경은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을 바탕으로 청과의 강화를 반대하고 척화신을 표창하자고 했다. 1631년에 그는 명과 조선은 군신, 부자의 관계에 있으며, 명이 구원병을 요청하면 조선은 이해나 성패를 따지지 말고 의리로 달려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은 청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나라는 천조(天朝 명)에 대해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고 부자(父子)의 도리가 있습니다. 지금 오랑캐가 영원(寧遠)을 침략한 것도 부족하여 우리 서쪽 땅을 유린하며 가도(椵島)를 공격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가도의 백성은 천자의 백성이고, 가도의 장수는 천자의 명을 받은 관리입니다. 우리의 도리로서는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말고 마땅히 갑옷을 말아들고 서둘러 달려가고 갓끈을 동여맬 겨를도 없이 구원하여야 합니다. 강약은 말할 바가 아니고, 이해는 논할 바가 아니며, 성패는 고려할 바가 아닙니다. 의리가 달려있는 것으로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중략) 우리나라가 비록 동편에 치우쳐 있어 언어가 중화(中華)와 같지 않고 의관을 비롯한 문물이 중화에 훨씬 못 미치지만, 군신과 부자의 도리는 중화에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중화의 도리를 가장 깊이 체득하여 열성(列聖)이 스스로를 다스린 것은 오직 충(忠)과 효(孝)를 근본으로 하였으니, 온 나라가 이에 교화되어 비록 비천한 자나 농투성이라 할지라도 우리 왕이 대국을 섬기는 성심을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조 대왕께서 성심껏 천자를 섬겨 결국 황조(皇朝)의 힘에 의뢰하여 번방(藩邦)을 거듭 부흥시켰으니, 지금까지도 칭송하는 노래 소리가 장로들의 입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 두려워하며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병자호란이 끝나자 조경은 대명의리를 지킨 인물을 표창하자고 했다.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 때 무과에 급제하여 삼도수군통제사까지 역임했고, 병자호란 때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를 따라 참전했다가 용인의 험천(險川)에서 전사한 무장이었다. 조경은 최진립의 공적이 1618년(광해군10) 심하(深河) 전투에서 사망한 김응하(金應河)의 공적에 비길 만하며 그의 공적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경은 병자호란 때 척화신이었던 윤황(尹煌)의 공적도 중시했다. 그는 윤황이 청과의 화친을 배척한 것은 조선이 충분한 군량과 병력을 갖출 것을 건의한 이후의 일이고, 청에서 척화신을 내 놓으라고 할 때 윤황이 제일 먼저 나서는 기개를 보인 것을 평가했다.
조경이 가장 표창하려고 한 인물은 정온(鄭蘊)이었다. 조경은 정온의 행적을 거론하며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해치는 것을 반대했다가 반년동안 옥에 갇히고 10년 동안 제주도에 안치되었으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扈從)한 것을 평가했다. 조경은 조선이 청에 항복했을 때 정온이 자기 배를 칼로 찌른 것은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의리를 실천한 것이고, 정온과 김상헌(金尙憲)은 평생의 절개를 지킨 행적이 동일하므로 그 충절(忠節)을 포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정온은 1652년(효종3)에 이조 판서로 추증되고, 1657년에 문간(文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조경은 청과 일본의 재침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고 요충지의 방어를 강화할 것을 건의했다. 1640년(인조18)에 조경은 병자호란 때 사망한 사람들의 자제를 모아 ‘복수의병군(復讐義兵軍)’을 조직하고, 재상이나 장령(將領)의 자제 중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통솔하게 하면, 청을 방어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우리나라의 백성과 사족(士族) 및 공사천(公私賤) 가운데 호란(胡亂)에 죽은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들의 고아나 형제들 중에 원통한 생각으로 창을 베고 자는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이들을 모두 불러 모아 하나의 군대를 만들되, 그들 가운데 재상이나 장령(將領)들의 자제로 장수(將帥)가 될만한 사람을 뽑아 통솔하게 하여 위급할 때 쓸 수 있게 하면, 죽음을 돌보지 않는 의열(義烈)을 어찌 보통 사람과 비교하겠습니까. 선조 때의 복수 의병(復讐義兵)이 바로 이것입니다.
1647년(인조25)에 조경은 서북 지역과 남해안의 방어를 강화하자고 건의했다. 그는 부산, 동래와 통영 사이는 뱃길로 300리가 넘어 유사시 연합하기 어려우므로 전선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이곳에 소속된 수군과 격졸(格卒)들이 변장(邊將)의 포악함 때문에 원한을 품고 이반하려는 상황임을 지적하고, 강직한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탐학하고 무능한 변장을 제거하고 청렴한 사졸 가운데 인심을 얻은 사람을 발탁해야 한다고 했다.
1648년에 조경은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천연의 요충지로 보고, 이곳의 방어력을 키우자고 했다. 그는 병자호란 때 조선군이 이곳을 지키지 못한 것은 전략이 부족했기 때문이며, 외적의 재침을 막으려면 군사의 숫자를 늘려 훈련시키고 전함, 화포, 궁시(弓矢)의 비축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가 보장(保障)으로 삼을 곳은 강화도와 남한산성뿐인데, 남한산성은 외부의 지원이 끊어지기 쉬운 곳입니다. 강화도로 말하면 삼남으로 가는 뱃길이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나루도 험하니 참으로 하늘이 내린 험지입니다. 병자년(1636)에 지키지 못한 것은 땅의 죄가 아니라 사람의 꾀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찌 한 번 목이 메었다는 이유로 식음을 전폐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앞일을 경계삼아 뒷일을 삼가며 진양(晉陽 국가의 방비를 강화한다는 뜻)에 전념할 때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비해 군사를 늘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예전보다 전함을 더 만들었다는 말도 듣지 못했으며, 화포(火砲)와 궁시(弓矢)를 준비하고 군사를 선발하여 훈련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요해처의 방비가 고려 말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런데도 보장이라 하면 헛소리가 아니겠습니까.
청이 북경을 장악한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경은 청이나 일본이 조선을 재침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는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대비를 촉구했다.
3) 일본과의 협력 구상과 외교활동
병자호란 이후 청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맺고 자신들이 명을 공격할 때 구원병을 보내라는 압력을 넣었다. 조선과 명이 협력하여 청의 후방을 공격할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였다. 1638년(인조16) 5월에 조경은 일본의 협조를 받아 청을 공격하자는 독특한 주장을 했다. 일본은 조선과 30년간 우호를 유지해 왔고 명과도 협력할 가능성도 있으므로, 조선의 구원 요청을 하면 들어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조선은 명과의 공식 외교를 단절했지만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원수를 갚고 치욕을 푸는 데에는 반드시 이웃의 도움에 힘입었습니다. 우리의 이웃나라는 일본뿐인데 서로 성신(誠信)으로 사귀지 않았습니다. 근래에 들으니 천조(天朝 명)가 일본과 서로 통한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는 모르겠으나 그럴 이치가 없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저들(일본)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도리어 중원(中原)에 쓰이게 될 것입니다. 이때 만약 재변(才辯) 있는 사람을 택하여 행장을 꾸리고 가서 정세를 탐지하고 우리의 실상을 알린다면 저들은 삼십 년간 사귀어온 나라인데 어찌 와서 돕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640년에도 조경은 일본의 위세를 빌어 청에 대항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이 청에 곤욕을 당하고 있음을 알리면 일본이 조선을 도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조선과 일본이 힘을 합쳐 청을 공격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선과 일본이 협력 관계에 있음을 청에 과시함으로써 청이 조선을 다시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일본은 이미 우리와 국교를 맺었으니 처음으로 우호를 도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심과 신의로 대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만약 한 차례 사신을 보내어 우리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하는 상황을 분명히 알린다면, 일본은 우리나라를 돕겠다고 허락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일본은 믿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오랑캐는 믿을 만하단 말입니까? 오랑캐를 섬기거나 일본과 교린하는 것은 모두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모두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이미 화친을 맺은 형세를 이용하여 오랑캐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신의 계책은 오직 성세(聲勢)에 보탬이 되게 하자는 것일 뿐, 왜병(倭兵)을 청해 우리와 함께 쳐들어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 오랑캐도 항상 왜사(倭使)가 왔는가를 묻으며 ‘우리도 사신을 일본에 보내려 한다.’고 합니다. 이는 일본을 꺼려서입니다. 참으로 이런 사정을 몰래 일본에 알려 그들로 하여금 오랑캐에게 한 장의 글을 보내 우리 이웃의 우호를 해친 것을 따지게 합니다. 오랑캐들은 비록 처음에는 우리가 그렇게 시켰다고 화를 낼 것이나 우리가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고 끝내 가볍게 우리나라를 쳐들어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른바 그들의 관건을 제압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경은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청에 대항할 것을 구상했지만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1643년(인조21)에 조경은 통신부사(通信副使)의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동행한 상사(上使)는 병조 참의 윤순지(尹順之)였고, 종사관(從事官)은 이조 정랑 신유(申濡)였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파견한 것은 관백(關白) 원가광(源家光 덕천가광(德川家光))이 아들〔源家綱〕을 낳자 이를 축하하는 사절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는 매우 미묘했다. 청의 우세가 계속되자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고, 청은 북경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일본과의 우호를 유지해야 했다. 남북 양쪽에 적을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조선 정부는 몇 가지 민감한 사안을 의논했다. 관백의 사당이 있는 일광산(日光山)에서 제사하는 절차와 약군(若君), 즉 관백의 아들을 대면할 때의 의례,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포로의 쇄환이 문제였다. 약군을 대면하는 절차에 대해, 조경은 이미 관백에게 절을 한 후 강보에 쌓인 어린아이를 만나는 것이므로 관대(冠帶)를 갖추지 않은 사람은 그냥 만나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인조는 일광산 제사가 끝나고 저들이 수충(秀忠)의 원당(願堂)을 들리자고 하면 들어주고, 약군을 만날 때 재배(再拜)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심각한 요구가 아니면 수용하여 우호 관계를 유지하자는 입장이었다.
현지에 도착한 통신사는 약군을 만나지 못했고 복귀할 때 데려온 포로는 14명에 불과했다. 왜란이 있은 지 60년이 지나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이미 사망했거나 현지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조경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했다.
조경은 《동사록(東槎錄)》이란 여행기를 통해 일본의 실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정세를 판단했다. 조경은 조선의 국서를 받는 관백은 산성주(山城主 천황(天皇))의 신하임이 분명하며, 외국에 서계(書契)를 보낼 때만 ‘국왕(國王)’이라 쓴다고 했다. 그는 이런 관백에게 조선 국왕이 항례(抗禮)를 인정하고 명에서 일본의 국왕이라 지칭한 것은 교활한 오랑캐의 농간에 빠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관백이 비록 높지만 명위(名位)는 아직 제신(諸臣)의 반열에 있다. 비록 등원(藤源)씨처럼 세습하고, 원뢰조(源賴朝)처럼 강대하며, 평청성(平淸盛)처럼 전권을 행사하고, 평수길(平秀吉) 같은 걸물이라도 북면(北面)하여 모두 산성주(山城主)를 섬겼다. 감히 나라 안에서 왕이라 일컫지 못하고 이웃 나라와 서계(書契)를 통할 때에만 ‘국왕’이라 쓴다. 이웃 나라에서 왕과 대등한 예로 허락하여 이웃 나라의 대신으로 대우하지 않으니, 이런 일이 어느 대(代)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이웃 나라만 그랬을 뿐 아니라 중국 천자의 존엄으로도 새서(璽書)를 내릴 때에는 일본 국왕 양회도의(良懷道義)라 하였다. 이는 온 천하가 모두 교활한 오랑캐의 농간에 빠지고도 깨닫지 못한 것이 통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조경은 일본의 세 도읍으로 산성주(山城州 경도(京都)), 대판(大坂 난파(難波)), 강호(江戶)를 꼽았다. 그 중 산성주는 험난한 지형이 없어 용무(用武)의 땅이 되기 어렵고, 대판은 성곽이나 해자가 뛰어나지만 서쪽에 치우친 결점이 있으며, 강호는 지형적 조건이 뛰어나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하는 바탕이 된다고 평가했다.
조경은 강호에서 태학두(太學頭)로 있는 임라산(林羅山)과 그의 두 아들을 만났고, 이들과 시와 편지를 왕래하며 교유했다. 조경은 임라산의 두 아들이 승려처럼 머리를 깎은 것을 보고 관혼상제의 예를 제대로 실천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이때 조경은 조선이 정주학을 숭상하면서 기자 이후로 관혼상제의 예를 실천함을 자랑했고, 조선의 대표적 학자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거론했다. 정주학을 학문의 기반으로 삼고 《주자가례》의 실천을 중시했던 그의 태도는 일본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용주유고》는 조선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던 시기에 중앙 관리와 외교관으로 활동한 조경의 행적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자료이다. 이와 별도로 조경의 행적을 기록한 《용주일기(龍洲日記)》와 《용주조선생연보(龍洲趙先生年譜)》의 완역본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이번에 《용주선생유고》의 완역본이 간행됨으로써 그의 행적을 더욱 정밀하게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앞으로 관련 연구자들의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2015년 4월 30일
[주D-001]조경의 …… 되었다 : 鄭敬薰, 〈龍洲 趙絅의 文學觀에 대한 硏究〉 《韓國漢文學硏究》 34, 2004, 319~321쪽.
[주D-002]사환기는 …… 세웠다 : 《龍洲先生遺稿》 권13, 〈祭閔尙書應亨文〉(1652).
[주D-003]효종이 …… 지었고 : 《孝宗實錄》 卷末, 〈諡冊文〉.
[주D-004]1668년 …… 배향되었다 : 龍洲硏究會, 《漢陽趙氏系譜》.
[주D-005]행 부호군 …… 배향되었다 : 《顯宗實錄》 권16, 顯宗 10년 2월 戊辰(5일).
[주D-006]전 판중추부사 …… 내쫓겼다 : 《顯宗改修實錄》 권20, 顯宗 10년 2월 己巳(6일).
[주D-007]조부 …… 모집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5, 〈祖考贈吏曹參判行工曹佐郞府君墓碣陰記〉.
[주D-008]신은 …… 없습니다 : 《龍洲先生遺稿》 권7, 〈請覲病親疏〉.
[주D-009]다음은 조경의 가계도(家系圖)이다 : 진하게 표시한 이름은 조경의 문집 및 자료를 편집한 인물이다.
[주D-010]선조 …… 않았다 : 《龍洲先生遺稿》 권11, 序, 〈龜巖集序〉.
[주D-011]1655년에 …… 비유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3, 〈英山書院退陶鶴峯兩先生奉安祭文〉 ; 〈英山書院春秋享文〉.
[주D-012]조선에 …… 평가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3, 〈祭茅溪文先生緯文〉
[주D-013]조경이 …… 한다 : 《龍洲先生遺稿》 권15, 〈吏曹判書訥庵金公墓碣幷序〉.
[주D-014]조경은 …… 애도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3, 〈祭延陽李相敦詩文 時白〉(1660) ; 권16, 〈延陽府院君李公墓表〉 ; 권13, 〈祭南相公以雄文〉(1648) ; 권21, 〈左議政春城府院君市北南公神道碑銘 幷序〉.
[주D-015]허목은 …… 썼으며 : 《記言別集》 권24, 丘墓文, 〈贈左贊成趙公墓碣銘〉.
[주D-016]조경의 묘지명과 신도비명 : 《記言》 권40, 〈龍洲神道碑〉.
[주D-017]조구의 …… 지었다 : 《記言別集》 권21, 丘墓文, 〈趙君士晉墓銘〉.
[주D-018]이 책은 …… 한다 : 규장각본 《龍洲先生遺稿》에는 “歲在昭陽恊洽(1703)之正月 孫九畹 蒙恩授順天府使 八月始役 臘月工訖 藏板于府之曹溪山松廣寺”라는 간기(刊記)가 있다.
[주D-019]현재 …… 있다 : 金成愛, 〈龍洲遺稿 해제〉.
[주D-020]조경이 …… 간행되었다 : 조경 지음, 권오영 옮김, 《용주일기》, 용주연구회, 2014.
[주D-021]조경의 …… 간행되었다 : 조위봉 엮음, 정선용 옮김, 《용주연보》, 용주연구회, 2014.
[주D-022]전하께서 …… 하였습니다. : 《龍洲先生遺稿》 권7, 〈辭大諫仍陳所懷疏〉(1645).
[주D-023]신의 …… 것입니다 : 《仁祖實錄》 권48, 仁祖 25년 4월 丙子(5일).
[주D-024]지금 …… 것입니까 : 《龍洲先生遺稿》 권8, 〈還朝後疏〉(1651) ; 《承政院日記》 孝宗 2년 2월 18일.
[주D-025]광해군이 육경(六卿)을 …… 뿐이었겠는가 : 《龍洲先生遺稿》 권22, 〈領議政完平府院君李公諡狀〉.
[주D-026]조경은 대동법을 …… 평가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3, 〈耆老所祭潛谷相公文〉.
[주D-027]지금 …… 무엇이겠습니까 : 《龍洲先生遺稿》 권13, 〈祭金相公堉文〉.
[주D-028]우리나라는 …… 되겠습니까 : 《龍洲先生遺稿》 권6, 〈玉堂時斥和箚〉(1631).
[주D-029]최진립의 …… 주장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5, 〈工曹參判貞武崔公墓碣銘幷序〉.
[주D-030]윤황이 …… 평가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6, 〈大司諫八松尹公墓碣銘幷序〉.
[주D-031]정온의 …… 평가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19, 〈桐溪鄭先生神道碑銘幷序〉 ; 권22, 〈贈吏曹判書桐溪鄭公諡狀〉.
[주D-032]조선이 …… 주장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8, 〈褒忠節疏〉(1652) ; 《孝宗實錄》 권9, 孝宗 3년 11월 辛巳(13일).
[주D-033]정온은 …… 받았다 : 鄭蘊 사후의 追崇 논의에 대해서는 이기순, 〈鄭蘊에 대한 追崇과 평가〉 《南冥學》 16, 2011, 215~230쪽.
[주D-034]우리나라의 …… 이것입니다 : 《仁祖實錄》 권40, 仁祖 18년 5월 己丑(9일).
[주D-035]1647년에 …… 했다 : 《仁祖實錄》 권48, 仁祖 25년 4월 丙子(5일).
[주D-036]우리나라가 …… 아니겠습니까 : 《龍洲先生遺稿》 권8, 〈憲府修省箚〉(1648).
[주D-037]예로부터 …… 있겠습니까 : 《仁祖實錄》 권36, 仁祖 16년 5월 乙亥(13일).
[주D-038]저 오랑캐도 …… 아니겠습니까 : 《仁祖實錄》 권40, 仁祖 18년 5월 己丑(9일).
[주D-039]1643년에 …… 신유였다 : 《仁祖實錄》 권44, 仁祖 21년 1월 辛丑(6일).
[주D-040]이미 …… 판단했다 : 《龍洲趙先生年譜》 권1, 癸未 - 先生五十八歲.
[주D-041]현지에 …… 때문이다 : 《仁祖實錄》 권44, 인조 21년 1월 辛丑(6일) ; 1월 戊午(23일) ; 2월 甲申(20일) ; 10월 己丑(29일) ; 11월 癸巳(3일).
[주D-042]관백이 …… 있겠는가 : 《龍洲先生遺稿》 권23, 東槎錄, 〈關白說〉.
[주D-043]조경은 …… 평가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23, 東槎錄, 〈倭國三都說〉.
[주D-044]조경은 …… 거론했다 : 《龍洲先生遺稿》 권23, 東槎錄, 〈重答林道春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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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sugisa.tistory.com/entry/용주유고龍洲遺稿-1 [晛溪 斗井軒 Sugisa: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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