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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한양조씨(시조중서공단소안내도))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05.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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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漢陽趙氏)▣

【시조】조지수(趙之壽)

【인구】307,746명 (2000년 현재)

 

1▲한풍군파(漢豊君派. 諱 琓)

2▲도제공파(都制公派. 諱 河)

3▲참판공파(參判公派. 諱 興)

4▲고사공파(庫使公派. 諱 育)

5▲총제공파(摠制公派. 諱 慕)

6▲돈녕공파(敦寧公派. 諱 慈)

7▲공안공파(恭安公派. 諱 惠)

8▲병참공파(兵參公派. 諱 憐)

9▲현령공파(縣令公派. 諱 孟發)

10▲현감공파(縣監公派. 諱 仲發)

11▲사정공파(司正公派. 諱 瑾)

12▲파서공파(坡西公派. 諱 順生)

13▲봉례공파(奉禮公派. 諱 觀生)

14▲사직공파(司直公派. 諱 孝生)

15▲정랑공파(正郞公派. 諱 德生)

16▲호의공파(戶議公派. 諱 旭生)

17▲현감공파(縣監公派. 諱 瑞)

18▲참의공파(參議公派. 諱 肅生)

19▲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諱 冲諝>

 

시조는 조지수(趙之壽). 고려때 벼슬하여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에 이르렀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선계(先系)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흔히 말하기를 시조 조지수(趙之壽)가 중국에서 건너왔는데, 그 동래(東來) 연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씨오천사년(趙氏五千史年)’에는 조지수(趙之壽)의 선대(先代)는 중국 전욱(인 조광윤(趙光胤)이 선조(先祖)이며, 그 후손인 조익(趙翼)의 둘째 아들이라는 기록이있다.  그러나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 서문에 보면, 조(趙)씨는 본래 한양(漢陽)의 명망있는 종족(宗族)으로 8세조에 조지수(趙之壽)가 있어 현족(顯族)이 되었다는 내용의 글이 있다.

 

아무튼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시조 조지수(趙之壽)의 아들인 조휘(趙暉)가 쌍성총관(雙城摠管)이 되고 손자인 동정군 부원수(東征軍 副元帥) 조양기(趙良琪)가 2대 쌍성총관(2代雙城摠管) 이 되였으며 증손자인 용천부원군(龍川府院君) 조림(趙琳)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조돈(趙暾)같은 걸출한 후손들을 낳아 명문귀족(名門貴族)의 반열(班列)에 오르게 되었다.

 

그뒤 조선조(朝鮮朝) 에서 개국공신(開國功臣) 조인옥(趙仁沃)

개국 정사 좌명 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

조온(趙溫) 命功臣)에 우의정(右議政)을 역임한 조연(趙涓) 등이 한양(漢陽)에서

명문귀족(名門貴族) 기반을 공고히 닦아 많은 명신현유(名臣賢儒) 들을 배출하였다.

 

●본관지 연혁

한양(漢陽)은 서울의 옛 지명이다. 이태조가 왕도(王都)로 삼은 이래 5백여년간 정치 ㆍ 경제 ㆍ 군사 ㆍ 문화 ㆍ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서울>이란 말은 신라 시대 이래 도읍(都邑)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해방 후 우리나라 수도의 고유명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지역적으로 반드시 지금의 서울과 같지는 않지만대략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명칭의 변천을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B.C. 18 (백제 온조왕 1) 위례성(慰禮城) (백제 서울), B.C. 5 (온조왕14)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371(근초고왕 26) 이후 한산(漢山) ㆍ 북한산(北漢山) ㆍ 북한성(北漢城) (백제 서울),

475 (고구려 장수왕 63, 백제 문주왕 1) 남평양(南平壤) (고구려), 554 (신라 진흥왕 15) 신주(新州),

557 (진흥왕 18) 북한산주(北漢山州), 568 (진흥왕 29) 남천주(南川州), 604 (진평왕 26) 북한산주(北漢山州),

575 (경덕왕 16) 한주(漢州), 904 (효공왕 8) 양주(楊州), 1067 (고려 문종 21) 남경(南京),

1308 (충렬왕 34) 한양부(漢陽府), 1395 (이태조 4) 한성부(漢城府), 1910년 경성부(京城府),

1945년 서울시, 1946년 서울특별시. 주요 성씨로는 조()씨 ㆍ 유()씨 ㆍ 문()씨 ㆍ 한()씨 등이 있었다.

 

 

●주요 세거지

 '고려사(高麗史) 의 조휘(趙暉) 열전(列傳)’에 의하면, 한양조씨(漢陽趙氏) 는 시조 조지수(趙之壽) 전(前) 까지는 한양부(漢陽府)에서 대대로 살아오다가 고려말(高麗末) 시조 조지수(趙之壽)와 그 아들 조휘(趙暉)가 동북면(東北面) 용진현(龍津縣)으로 옮겨 그 후손들이 2~3대 그곳에서 살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다시 한양(漢陽)으로 복귀(復歸)하였다. 5세 조인벽(趙仁璧)의 맏아들인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의 자손들 중에서 7세 한풍군(漢豊君) 조완(趙琓)의 후계(後系)는 조완(趙琓)의 큰 아들 조증(趙璔)대 이래로. 홍성(洪城)에 11세 조지황(趙之璜) 조지거(趙之산(禮山) ㆍ 안성(安城) ㆍ 공주(公州) 등지에 세거했던 것을 비롯하여 13세 조석호(趙碩虎)의 대를 전후해서 청양(靑陽)의 정산(定山) ㆍ 음성(陰城) ㆍ 함평(咸平) ㆍ 장성(長城) ㆍ 부여(扶餘) ㆍ 곡성(谷城)의 옥과(玉果) ㆍ 전주(全州) ㆍ 남원(南原) ㆍ 영광(靈光) ㆍ 진도(珍島) 등지에 자리잡았다.

 

또한 7세 조하(趙河)의 후계(後系)는 일부가 11세 조세의(趙世義)의 대부터 고원(高原), 9세 조옥숭(趙玉崇) 이래로 문천(文川) ㆍ 북청(北靑)에 가 살았으며 일부는 10세 조숙(趙琡) 이래로 당진(唐津)의 면천(沔川), 17조시중(趙時重) 이래로 평창(平昌) ㆍ 단양(丹陽) 등지에 터를 굳혔던 것 같다.

 

조하(趙河)의 동생인 조흥(趙興)의 후계(後系) 9세 조철(趙澈)이 연산조 무오년(戊午年)에 의주(義州)로 유배된 이후 그 자손들이 의주(義州) ㆍ 철산(鐵山) 등지에 자리잡았던 것을 비롯해서 11세 조첨(趙詹) ㆍ 조규(趙圭)의 대부터 4~5대에 걸쳐 보령(保寧) ㆍ 공주(公州) ㆍ 충주(忠州) ㆍ 청주(淸州) ㆍ 아산(牙山) ㆍ 이천(利川)의 음죽(陰竹), 서산(瑞山)의 태안(泰安), 부안(扶安), 담양(潭陽) 등지와 용인(龍仁) ㆍ 평택(平澤) ㆍ 안성(安城) 등 경기도 일대에 산거했다.

 

그리고 7세 조육(趙育)으 후계(後系)는 조육(趙育)의 현손 조희헌(趙希憲)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해 공주(公州) 평창(平昌)으로 옮겨가 정착한 뒤에 그곳에 세거하였고, 문정공(文正公) 후손들은 용인(龍仁) 8세 조의손(趙義孫) 이래로 보령(保寧)에 ㆍ 아산(牙山) ㆍ 평창(平昌) 등지에 나뉘어 살았다.

 

 6세 조온(趙溫)의 동생인 양경공(良敬公) 조연(趙涓)의 자손들은 대체로 10세의 대를 전후하여 양주(楊州) ㆍ 고양(高陽) 등 경기지역에서 전국 각지로 산거해갔는데 7세 조모(趙慕)의 후계(後系)가 연천(漣川) ㆍ 영암(靈岩) ㆍ 무안(務安) ㆍ 광주(光州) ㆍ 함평(咸平) ㆍ 장성(長城) ㆍ 나주(羅州) 등지와 함남 이원(利原), 조혜(趙惠)의 후계(後系)는 남원(南原) ㆍ 장흥(長興) ㆍ 무안(務安) ㆍ 영광(靈光) ㆍ 단양(丹陽)의 영춘(永春) ㆍ 영월(寧越) 등지에 정착 ㆍ 세거하였다고 믿어진다.

 

또한 조연(趙涓)의 넷째 아들 조련(趙憐)의 후계(後系) 9세 조종(趙琮)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해 지금의 영풍(榮豊)으로 옮겨간 뒤에 영풍군(榮風郡) 일원과 안동(安東) ㆍ 봉화(奉化) ㆍ 청송(靑松) 등지, 평창(平昌) ㆍ 홍천(洪川) ㆍ 양양(襄陽) ㆍ 공주(公州) ㆍ 여주(驪州) ㆍ 평산(平山) 등지에 살게 되었던 것 같다.

 

 

6세 가천재공(嘉川齋公) 조사(趙師)의 자손들은 9세 조문림(趙文琳)의 대부터 15세 조무(趙懋)의 대에 걸쳐 용인(龍仁) ㆍ 제천(堤川) ㆍ 영천(永川) ㆍ 홍천(洪川) ㆍ 단양(丹陽) ㆍ 충주(忠州) ㆍ 해주(海州) ㆍ 횡성(橫城) ㆍ 이천(利川) 등지에 세거의 터를 굳혔고, 부사공(府使公) 조순(趙純)의 자손들은 단양(丹陽)과 제천(堤川)의 청풍(淸風) 등지에 많이 살았다.

 

한편 6새 조뢰(趙賚)의 자손들은 8세 조전(趙銓) 이래로 금산(錦山), 9세 조승손(趙承孫) ㆍ 조백운(趙伯雲) 이래로 상주(尙州)의 함창(咸昌) ㆍ 문경(聞慶) ㆍ 선산(善山) ㆍ 강진(康津) ㆍ 영암(靈岩) ㆍ 나주(羅州)에 살았으며 그밖에 한양(漢陽) ㆍ 청주(淸州) ㆍ 제천(堤川) 등지에도 일부 자손들이 가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참의공(參議公) 조재(䝴) 후손들이 단양(丹陽)의 영춘(永春) 등지에 세거 하였으며, 사평공(司評公) 조갱()대부터 함평(咸平), 16조국주(趙國柱) 이래로 곡성(谷城) ㆍ 정읍(井邑) ㆍ 장성(長城) ㆍ 진천(鎭川) 등지에 살게 되었다.

 

 

6세 판사공(判事公) 조관(趙貫)의 자손들은 11세 조공려(趙公呂)가 김제(金堤)로 가 나뉘어 살았다.

 

1930년 당시 한양조씨(漢陽趙氏) , 충북 청원군(淸原郡) 강내면(江內面), 음성군(陰城郡) 금왕읍(金旺邑), 단양군(丹陽郡) 영춘면(永春面), 충남 당진군(唐津郡) 면천면(沔川面), 전남 무안군(務安郡) 석곡면(石谷面), 경북 영양군(英陽郡) 일월면(日月面) ,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예천군(醴泉郡) 감천면(甘泉面),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일원, 옹진군(甕津郡) 용천면(龍泉面), 함남 북청군(北淸郡) 덕성면(德城面), 이원(利原郡) 동덕면(東德面) ㆍ 서면(西面), 영흥군(永興郡) 고원(高原)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씨족史

한양조씨(漢陽趙氏)는 고려 후기에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는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하는 씨족으로 본관(本貫)은 한양(漢陽)이다.

 

한양조씨(漢陽趙氏)조지수(趙之壽)의 아들대에 이르러 크게 변화를 맞이한다. 몽고족이 고려를 침략하던 고려 고종말에 동북면(東北面) 지역을 점령한 원()이 이곳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趙暉)를 초대 총관(摠管)으로 임명한 뒤 총관(摠管)직을 세습하면서 이 지역의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조씨가(趙氏家)조지수(趙之壽) 이전에는 한양(漢陽)에 세거 하였다. 13세기 초반에 몽고족은 대거 고려를 침략해온 이래 수십년동안 전국토를 유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 많은 주현민(州縣民)들이 살던 곳을 떠나 유리하게 되었는데, 한양(漢陽)의 조씨가(趙氏家)도 그런 유리민 중의 한 부류였던 것 같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조휘(趙暉)대에 동북면(東北面)지방으로 이거하여 용진현(龍津縣)에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알려져 있듯이 원()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공민왕 5년 고려의 군사정벌에 의해 고려에 수복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근거지로 삼던 지방세력들은 통치권의 변화에 따라 그 향배가 문제시되게 되었다. 대부분의 세3력이 고려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여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 이자춘(李子春)처럼 영토수복전쟁에서 고려에 협력, 공을 세우고 이후 고려에 벼슬하여 가문의 세력을 키우는 세력도 있었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후손들도 대개는 고려의 통치 아래 들어왔는데, 조돈(趙暾)과 그 아들들이 그러하다. 반면 쌍성총관(雙城摠管)직을 세습해온 조소생(趙小生)측은 고려에 불복, 여진족이 사는 지역으로 도망가 계속 원()의 세력으로 남고자 하기도 했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인물들은 공민왕 5년 이후 고려에 벼슬하여 고관에까지 오르기도 하였으니 조돈(趙暾)과 그의 아들인 조인벽(趙仁璧)형제들이 그러하다. 한편 조인벽(趙仁璧)은 역시 동북면(東北面)에 세력기반을 두고 있던 이자춘(李子春)의 딸과 결혼하여 이성계(李成桂)와 혼인관계로 맺어고 있었는데, 고려말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으로 권력을 잡고 이어 조선을 세우는데 적극적으로 참여, 조선개국 이후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조인벽(趙仁璧)의 동생인 조인옥(趙仁沃), 아들인 조온(趙溫)은 개국공신 52명 중에 포함되었고, 이어 조온(趙溫)은 정종 태종정권에도 공을 세워 정사(定社). 좌명(佐命)공신이 되었으며. 조연(趙涓)은 좌명공신으로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한양조씨(漢陽趙氏)는 조선초에 가장 번창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한양조씨(漢陽趙氏)는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벌족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중종조의 인물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배출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한양조씨(漢陽趙氏) 2대 쌍성총관(雙城摠管)이었던 조양기(趙良琪)에 이르러 조림(趙琳), 조돈(趙暾)의 두 아들이 있었다. 총관(摠管)직을 세습한 조림(趙琳)의 후손은 조소생(趙小生)에 이르렀으나 그 이후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돈(趙暾)의 후손들로 어어져오고 있다.

 

한양조씨(漢陽趙氏)의 분파는 조돈(趙暾)의 네 아들 인벽(仁璧), 인경(仁瓊), 인규(仁珪), 인옥(仁沃)의 후손에서 자손이 끊어진 조인경(趙仁瓊)을 제외하고 각각 후손이 양렬공파(襄烈公派), 검한성공파(檢漢城公派), 충정공파(忠靖公派)로 나누어진다.

 

양렬공파(襄烈公派)는 양렬공(襄烈公)의 큰 아들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의 후손이 아들인 조완(趙琓), 조하(趙河), 조흥(趙興), 조육(趙育)을 파조(派祖)로 하여 각각 한풍군파(漢豊君派), 도제공파(都制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고사공파(庫使公派)로 나누어지고, 둘째 아들인 양경공(良敬公) 조연(趙涓)의 아들인 조모(趙慕), 조자(趙慈), 조혜(趙惠), 조련(趙憐)을 파조(派祖)로 하여 각기 총제공파(摠制公派), 돈녕공파(敦寧公派), 공안공파(恭安公派), 병참공파(兵參公派)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셋째 아들인 조후(趙侯)의 후손은 안정공파(安靖公派), 절손이 되고 넷째 아들인 가천재공(嘉川齋公) 조사(趙師)의 후손은 아들인 조맹발(趙孟發), 조중발(趙仲發)을 파조(派朝)로 하여 각각 현령공파(縣令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로 나누어진다.

 

검한성공파(檢漢城公派)는 자손이 사정공(司正公) 조근(趙瑾) 단파(單派)로 이어진다.

 

충정공파(忠靖公派)는 충정공(忠靖公)의 네 아들 조뢰(趙賚), 조재(䝴), 조갱(), 조관(趙貫)으로 하여 각각 절효공파(節孝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사평공파(司評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로 나누어진다. 절효공(節孝公)의 후손은 아들대에 이르러 다시 조순생(趙順生)의 후손인 파서공파(坡西公派), 조관생(趙觀生)의 후손인 봉례공파(奉禮公派), 조효생(趙孝生)의 후손인 사직공파(司直公派), 조덕생(趙德生)의 후손인 정랑공파(正郞公派)로 나누어지고, 참의공파(參議公派)는 호의공(戶議公) 조욱생(趙旭生) 단파(單派)로 이어지고 사평공파(司評公派)는 현감공(縣監公) 조서(趙瑞) 단파(單派)로 이어지고 판사공(判事公)의 후손 역시 그 아들인 조숙생(趙肅生), 조충서()를 派祖로 하여 참의공파(參議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로 나누어진다.

 

조휘(趙暉)는 한양부(漢陽府)에서 살다가 동북면(東北面)용진현(龍津縣)에 옮겨 살았다. 한양의 호족(호족)으로 그 손녀(李椿 度祖妃)가 고려의 왕족(高麗王族)이라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총서(總書)에 씌여진 것으로 보아 조씨가문(趙氏家門)은 지배계층인 귀족(貴族) 신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1231년 이래 몽고병이 고려 전국토를 침략하던 고종조에 중앙정부에서는 군현민(郡縣民)을 몽고병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쉽고, 또 방어에 유리한 산성(山城)이나, 섬에 옮기게 하였다.

 

동북면(東北面)의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 15주인(十五州人)들도 저도(猪島)에 피난하였는데 동북면(東北面) 병마사(兵馬使)가 섬은크고 사람은 적어 섬을 지키기 어렵다고 15주인(十五州人)을 모두 죽도(竹島)에 옮기게 하였다. 죽도(竹島)는 섬이 좁을뿐더러 우물도 없고 식량이 모자라서 사람들이 모두 죽도(竹島)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병마사(兵馬使)가 강제로 섬에 몰아넣으려고 하니 도망(逃亡)가는 사람이 많았다. 이 때 조휘(趙暉)와 탁정(卓靑)이 중심이되어 백성들의 뜻에따라 병마사(兵馬使)를 제거하고 고성(高城)을 정벌하고 화주(和州)이북을 평정하였다. 몽고는 이 지역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고 조휘(趙暉)를 총관(摠管), 탁청(卓靑)을 천호(千戶)에 임명, 이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조휘(趙暉)의 총관(摠管)직은 그의 자손인 조양기(趙良琪)-조림(趙琳)-조소생(趙小生) 4대에 걸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고려에 탈환될 때까지 세습되었다. 원세조(元世祖)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일본(日本)만이 복종하지 않으므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7(1281.辛巳) 원의 도원수(都元帥) 흔독(하여 몽고. (). 고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때 쌍성총관(雙城摠管) 조양기(趙良琪)는 동정군(東征軍)의 부원수(副元帥)로서 일본정벌(日本征伐)에 출정(出征)하여 원의 원수 흔독(패전하였어도 조총관(趙摠管)과 고려의 원수 김방경(金方慶)은 적을 이기고 군사를 보전하여 돌아왔으므로 원세조(元世祖)가 크게 기특히 여겨 옥대(玉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하였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존속한 99년 동안 총관가문(摠管家門)에서는 고려에 벼슬하는 자도 있었는데, 3代총관(摠管)이었던 조림(趙琳)과 그의 동생 조돈(趙暾)의 경우가 그러하다.

조림(趙琳)은 총관(摠管)직을 세습하기 전에 충숙왕에게 벼슬하였다. 원도(元都)에서 충숙왕을 5년간 시종하였고, 그 공으로 삼한대호군(三韓大護軍)이 되었다. 뒤에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에 올랐다. 그뒤 가업(家業)을 이어 쌍성총관(雙城摠管)이 되었다.

 

조돈(趙暾) 역시 충숙왕조에 벼슬하였다. 이때 고려의 유민들이 조세와 요역을 피해 여진족이 사는 지역인 홍긍(洪肯)(홍원(洪原)), 삼철(三撤)(북청(北靑)), 독노올(禿魯兀)(단천(端川)), 해양(海陽)(길주(吉州))등지로 도망가고 있었는데, 조돈(趙暾)은 충숙왕의 명을 받아 길주(吉州)지역에 가서 고려유민을 추쇄해오고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에 임명되었다. 충숙왕이 죽은 뒤 용진(龍津)에 들어가 살았다.

조돈(趙暾)은 공민왕 5년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수복 때 아들 인벽(仁璧) 등과 함께 고려에 협조, 민심수습을 돕고 그 공으로 예빈경(禮賓卿)이 되었다. 그뒤 판사농사사(判司農寺事), 공부상서(工部尙書), 예의판서(禮儀判書), 검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를 지냈다. 홍건적 격퇴 1등 공신이 되고 우왕 1년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양렬공(襄烈公) 조인벽(趙仁璧)은 쌍성(雙城)수복에 공을 세워 호군(護軍)이 되고, 1363김용(金鏞) 토벌(討伐)에 공을 세워 2등공신(等功臣)이 되었다. 함주(咸州) ㆍ 북청(北靑)에서 왜구(倭寇)를 격파,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우왕 2년 판밀직(判密直)으로서 화포(火砲)를 사용하여 수군(水軍)을 훈련시키고, 1383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체찰사(東北面體察使)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에 가담, 그 공신이 되고,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가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누이인 정화공주(貞和公主)를 아내로 맞았는데, 뒤에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봉해졌다.

 

 

조인옥(趙仁沃)은 공민왕 22년 음보로 산원(散員)이 되어 관직에 나갔다.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의 공신이되고 이후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승진, 조준(趙浚)과 함께 고려유신의 경제적 몰락을 가져온 전제(田制)개혁론의 대표자였다. 정몽주 ㆍ 이색과 같은 고려유신의 거두가 모두 제거된 다음 밀직제학(密直提學)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오르고, 조선개국 1등공신으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태조 4년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지고, 죽은 뒤 태조묘정에 배향되었다.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 1392년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2()이 되고 한천군(漢川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수주(隋州)에 쳐들어온 왜구(倭寇)를 격파했고, 1차 왕자(王子)의 난에 친군위도진무(親軍衛都鎭撫)로 방원(芳遠)을 도와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이 되었다. 중추원사(中樞院使), 의흥삼군부좌군동지절제사(義興三軍府左軍同知節制事),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를 역임하고 제2차 왕자(王子)의 난 때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서 방간(芳幹) 등의 군사(軍士)를 평정,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다. 다음 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좌명공신(佐命功臣) 4()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청렴 ㆍ 검소하기로 이름이 있었다.

 

양경공(良敬公) 조연(趙涓)은 우왕 13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공양왕 4년 공조총랑(工曹摠郞)을 거쳐, 이해 조선이 개국되자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으로 별운검(別雲劍)이 되어 왕을 호위했다. 2차 왕자(王子)의 난에 방원(方遠)을 도운 공으로 좌명공신(佐命功臣) 4()이 되고 한평군(漢平君)에 봉해졌다.

 

우군총제(右軍摠制), 도총제(都摠制)를 거쳐 1409년 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按撫察里使)로 나가 다음해 모련위(毛憐衛) 야인(野人)이 쳐들어오자 적장(敵將) 파아손(巴兒孫)을 유인하여 죽인 후에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적의 근거지까지 쳐부수고 돌아왔다. 그후 공조판서(工曹判書), 판좌군부사(判左軍府事),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 세종 4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1426년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한풍군(漢豊君) 조완(趙琓)은 양절공 조온(趙溫)의 아들로 1420년 판홍주목사(判洪州牧使)우군총제(右軍摠制)를 거처 1430년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고 그 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였다가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올랐다

 

한양조씨(漢陽趙氏) 후손들은 수양대군의 집권과정에서 많은 화를 입었다.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지낸 조관(趙貫)은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일당으로 몰려 남해에 귀양갔다가 사면되였다. 세종 때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오른 조순생(趙順生)은 안평대군(安平大君), 황보인(皇甫仁)과 친교가 깊었는데 계유정난 때 고성에 유배, 사사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지주(趙之周)는 세조의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첨지중추(僉知中樞), 형조참의(刑曹參議),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조원기(趙元紀)는 연산군 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관(史官)으로 재직 중 사초(史草)를 보고자 하는 연산군(燕山君)에 반대, 파직당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사성(司成)이 되고, 뒤에 경원부사(慶源府使)로 나가 민심(民心)을 안정시켰다. 그 공으로 대사간(大司諫)에 승진,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재직중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형조판서(刑曹判書), 좌참찬(左參贊)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조문절공유고(趙文節公遺稿)’가 남아 있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세 때 어천도찰방(魚川都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희천(熙川)에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修學), 이때부터 성리학(性理學)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중종 10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 ㆍ 감찰(監察)을 역임하며 왕의 신임을 얻고, 입시(入侍)할 때마다 유교(儒敎)로써 정치와 교화(敎化)의 근본을 삼을 것을 역설했다. 1517년 교리(校理)로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 ㆍ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임, 향촌(鄕村)의 질서를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 8()에 실시케 했다. 다음해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奏請),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없애게 했다.

1519년 대사헌(大司憲)에 승진,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했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여 사림파(士林派)의 신진인사를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勳舊派)를 외직(外職)으로 몰아내어 훈구파(勳舊派)의 반발을 샀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는 유교적 도학(道學)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훈구파(勳舊派)의 남곤(南袞) ㆍ 심정(沈貞) 등이 중심이 되어 조광조(趙光祖)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케한다고 공격하는 한편, 궁중 안에서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로 왕에게 올려 충격을 주었다. 이에 조광조(趙光祖)의 도학적(道學的) 언행(言行)에 구속감과 염증을 느낀 왕도 사림파(士林派)의 체포에 동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조광조는 능주(陵州)에 귀양갔다가 곧 사약을 받고 죽었고, 많은 사림파(士林派) 인사들이 유배갔다. 이 기묘사화 이후 사림(士林)의 등용문이었던 현량과(賢良科)가 폐지되었다.

뒤에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유고로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중종 때 대사간(大司諫)·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된 현곡공(玄谷公) 위한(緯韓)과 그의 동생으로 시문에 능한 현주공(玄州公) 찬한(纘韓)이 유명했다. 공근(公謹)은 선조(宣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위성공신에 오르고 한흥군에 봉해졌으며, 인조 때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간 조경(趙絅)은 인조 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인조 25년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고, 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어 이도(吏道)를 쇄신(刷新), 관리등용(官吏登用)의 공정을 기해 명망을 얻었다. 1648년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효종초에 노인직(老人職)으로 행부호군(行副護軍)을 거쳐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극선(克善)은 호 야곡(冶谷)으로 도덕과 학행으로 세인의 추존을 받을뿐만 아니라 대효로 정려와 어찰을 하사받고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목공(文穆公)이다

 

 장령 중여의 아들 종저(宗著)는 사학·천문·산수·의학에까지 박통하여 문명을 날렸으며, 충정공 인옥(仁沃)의 아들 ()는 예조판서(禮曹判書)을 지내고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안평대군 일파로 몰려 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한 파서공(坡西公) 순생(順生)과 그의 아들 (), 시인 수삼(秀三), 화가로 이름난 중묵(重默) 등이 유명했는데, 수삼(秀三)은 현종 때 문장과 시로써 여섯 차례나 중국을 왕래하여 명성이 높았으며, 서예와 중국어에도 능통했다. 그의 손자 중묵(重默)은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으며 희원 이한철과 더불어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알려졌다.

조위명(趙威明)은 도승지(都承旨) ㆍ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냈는데, 예론(禮論)에 밝고 글씨, 문장에 뛰어났다. 소론계 정치인이었던 조덕린(趙德隣)은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고 서원남설(書院濫說)을 반대하다 노론의 탄핵으로 귀양길에 죽었다.

 

득남(得男)은 공조정랑으로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서 외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여 정려 충신각과 경기병마사를 추증받았으며, ()은 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아 탄금대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여 정려 충신각과 병조참판을 추증받았고, 경남(慶男)은 호가 산서(山西)로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물리쳐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주포서원에 배향되었다. 성교(性敎)는 대제학과 예의판서를 역임하고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이며 그의 아들 종필(鍾弼)은 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지내고 융희2(1908) 한양조씨 대종회를 창립하였다.

 

이렇게 조선조에서 세도를 떨친 한양 조씨는 근대에 와서도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나라와 가문을 위해 공헌했다. 독립운동가 인원(仁元)의 아들인 유석 병옥(炳玉)은 대학생으로 한인회·흥사단 등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이 되자 한국민주당을 창당하여 내무부장관으로 치안유지 및 6.25전쟁때 대구를 사수하였다. 그 후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 1955년 민주국민당이 민주당으로 개편될 때 최고위원이 되어 야당을 영도했으며,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신병으로 미국 육군병원에서 영면하였다. 저서로「민주주의와 나」·「나의 회고록」등이 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으며 한양조씨 3대 도유사(대종회장)로 『기해대보』를 발간하였다.

 

청록파 시인 및 지조론으로 널리 알려진 지훈(芝薰)도 해방 후부터 6·25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문단의 선구자로 민족적 정서운동에 앞장섰으며, 종신토록 고려대학교단에서 문학을 피력하였고, 사회활동에 이바지함이 지대하여 후에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여러곳에 세워졌으며, 2006년 5월에 고향 마을인 주실마을에 국비로 지훈문학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2子인 태열씨는 현재 스페인대사로 재직하고 있다. 

 

시인 병화(炳華)는 명예철학 문학박사, 경희대(학장,교육대학원장)와 인하대(학장,부총장,대학원장)교수, 시인협회장,문인협회이사장,세계시인대회장 등 역임하였으며, 예술원회장, 계관시인, 아시아자유문학상, 국민훈장모란장, 금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하였으며, 고향 난실리 부모유택 옆으로 편운문학관을 이어령장관 재임시 세워졌다.

 

이 밖에도 법무부장관과 대법원장을 지낸 진만(鎭滿), 제헌의원을 지낸 헌영(憲泳), 법무부장관을 지낸 병일(炳日), 국방부장관을 지낸 성태(誠泰),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과 국회의원 주일대사 제10대 한양조씨대종회장을 역임한 세형(世衡), 유석 병옥박사의 아들로 민한당 총재를 지내고 국회부의장에 이른 윤형(尹衡)과 그 아우 민주당 대표 국회의원 순형(舜衡), 검사 국회의원 헌법재판관을 역임하고 현재 11대 한양조씨대종회장인 승형(昇衡), 치안본부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종석(鍾奭), 검사와 국회의원을 지낸 찬형(贊衡), 국회의원을 지낸 종호(鍾昊), 시형(始衡), 경목(庚穆), 병봉(炳鳳), 일문(一文), 진형(鎭衡), 성준(誠俊),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지내고 한양조씨대종회 종통수호위원장인 홍은(弘殷), 남부대학교와 광주과학대학을 설립한 재형(載衡), 세계문화사의 권위자 동일(東一)교수, 사학계의 권위자 동걸(東杰)교수 등 많은 유명인사를 배출시킨 한양조씨는 선현의 유지에 맥을 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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