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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흑치상치의 묘비문1604글자를 통해 보는 백제!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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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치의 묘비문1604글자를 통해 보는 백제!

‘대주고좌무위위대장군 검교좌우림군 증좌옥금위대장군 연국공흑치부군묘지문 병서(大周故左武威衛大將軍檢校左羽林軍贈左玉錦衛大將軍燕國公黑齒府君墓誌文幷序)’

https://youtu.be/W_Ddr5QHGkY

대륙백제추천 0조회 30304.05.16 11:04댓글 0

 

흑치상치의 묘비문1604글자를 통해 보는 백제1

고대 지나인들의 인식, 흔히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북망산 , 북망산은 중국 낙양에 있는 산이름이다 . 지나인들은 살아서 소주.항주.죽어서는 낙양의 북망 이라고 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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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

大周故左武威衛大將軍檢校左羽林軍贈左玉鈐衛大將軍燕國公黑齒府君墓誌文幷序

太淸上冠合其道者坤元至無高居參其用者師律不有命世之材傑其奚以應斯數哉然則求玉榮者必

遊乎密山之上蘊金聲者不恨乎魯門之下矣府君諱常之字恒元百濟人也其先出自扶餘氏封於黑齒

子孫因以爲氏焉其家世相承爲達率達率之職猶今兵部尙書於本國二品官也曾祖諱文大祖諱德顯

考諱沙次並官至達率府君少而雄爽機神敏絶所輕者嗜欲所重者名訓府深沈淸不見其涯域情軌

闊達遠不形其里數加之以謹慤重之以溫良由是親族敬之師長憚之年甫小學卽讀春秋左氏傳及班

馬兩史歎曰丘明恥之丘亦恥之誠吾師也過此何足多哉未弱官以地籍授達率唐顯慶中遣邢國公蘇

定方平其國与其主扶餘隆俱入朝隸爲萬年縣人也麟德初以人望授折衝都尉鎭熊津城大爲士衆所

悅咸亨三年以功加忠武將軍行帶方州長史尋遷使持節沙泮州諸軍事沙泮州刺史授上柱國以至公

爲己任以忘私爲大端天子嘉之轉左領軍將軍兼熊津都督府司馬加封浮陽郡開國公食邑二

千戶于時德音在物朝望日高屬蒲海生氛蘭河有事以府君充洮河道經略副使實有寄焉府君稟質英

毅資性明達力能翹關不以力自處智能禦寇不以智自聞每用晦而明以蒙養缶故其時行山立具瞻在

焉至於仁不長姦威不害物賞罰有必勸沮無違又五校之大經三軍之元吉故士不敢犯其令下不得容

其非高宗每稱其善故以士君子處之也及居西道大著勳庸于時中書令李敬玄爲河源道經略

大使諸軍取其節度亦水軍大使尙書劉審禮旣以敗沒諸將莫不憂懼府君獨立高崗之功以濟其難轉

左武衛將軍代敬玄爲大使從風聽也府君傍無聲色居絶翫好枕藉經書有祭遵之樽俎懷蘊明略同杜

預之旌旗胡塵肅淸而邊馬肥漢月昭亮而天狐滅出師有頌入凱成歌遷左鷹揚衛大將軍燕然道副大

摠管垂拱之季天命將革骨卒祿狂賊也旣不覩其微徐敬業逆惡也又不量其力南靜淮海北掃

旄頭並有力焉故威聲大振制曰局度溫雅機神爽晤夙踐仁義之途聿蹈廉貞之域言以昭行學

以潤躬屢摠戎麾每申誠效可封兼國公食邑三千戶仍改授右武威衛大將軍神武道經略大使餘如故

於是董玆哮勇剪彼凶狂胡馬無南牧之期漢使靜北遊之望靈夏衝要妖羯是贍君之威聲無以爲代又

轉爲懷遠軍經略大使以遏游氛也屬禍流群惡疊起孤標疑似一彰玉石斯混旣從下獄爰隔上穹義等

絶頏哀同仰藥春秋六十長子俊幼丁家難志雪遺憤誓命虜庭投軀漢節頻展誠效屢振功名聖曆元年

寃滯斯鑒爰下制曰故左武威衛大將軍檢校左羽林衛上柱國燕國公黑齒常之早襲衣

冠備經駈榮亟摠師律戴宣績效往遘飛言爰從訊獄幽憤殞命疑罪不分比加檢察曾無反狀言念非專

良深嗟憫宜從雪免庶慰塋魂增以寵章式光泉壤可贈左玉鈐衛大將軍勳封如故其男游擊將軍行蘭

州廣武鎭將上柱國俊自嬰家各屢效赤誠不避危亡捐軀徇國宜有裒錄以申優獎可右豹韜衛翊府左

郞將勳如故粤以聖曆二年壹月卄二日勅曰燕國公男俊所請改葬父者贈物一百段其葬事幔

幕手力一事以上官供仍令京官六品一人檢校卽用其年二月十七日奉遷于邙山南官道北禮也惟府

君孤峯偉絶材幹之表也懸鏡虛融理會之臺也言直而意忄尃無枝葉之多蔽謀動而事成有本末之盡美

夙夜非懈心存於事上歲寒不移志在於爲下非君子之所關懷必不入於思慮非先王之所貽訓必不出

於企想自推轂軍門建節邊塞善毁者不能加惡工譽者不能增美智者見之謂之智仁者見之謂之仁至

於推財忘己重義先物雖刎首不顧其利傾身不改其道由是懦夫爲之勇貪夫爲之廉猶權衡之不言而

斤兩定其謬騊駼之絶足而駑駘知其遠至於吏能貞幹走筆而雙璧自非鑒賞人倫守黙而千金成價固

非當世之可效盖拔萃之標准也榮辱必也死生命也苟同於歸何必終於婦人之手矣余嘗在軍得參義

 

所感其道頌其功乃爲銘曰

談五岳者不知天台之翠屛也觀四瀆者不晤雲洲之丹榮也恭聞日磾爲漢之鞞亦有里奚爲秦之梯苟

云明哲興衆殊絶所在成寶何往非晰惟公之自東兮如春之揚風兮文物資之以動色聲明佇之以成功

兮悠悠旌旆肅肅軒盖擊鴻鍾鼓鳴籟云誰之榮伊我德聲四郊無戎馬之患千里捍公侯之城勳積旣展

矣忠義旣顯矣物有忌乎貞罡刂行有高而則傷中峯落其仞幽壤淪其光天下爲之痛海內哀其良

天鑒斯孔裒及存亡余實感慕爲之頌章寄言不朽風聽無疆

 

============

 

흑치상지묘지명의 해설은 출전 :『譯註 韓國古代金石文』I (1992)의 송기호님의 것을

기본으로 했는데, 워낙 해석이 잘되어 있는 관계로 필자가 약간 수정 하고 주해를 달았다.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

 

대주(大周) 고(故)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군(檢校左羽林軍) 증 좌옥검위대장군(贈 左玉鈐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 흑치부군(黑齒府君) 묘지문(墓誌文) 및 서문(序文)

( 당나라가 아니고 대주大周 주나라라고 표현 되어 있는 것은, 이때에 측천무후가 동이족 주나라 후손이므로,

나라이름을 당에서 주나라로 변경했기 때문에, 대당이 아니라 대주가 된 것이다. 측천무후 사후 중종이

복위후 원래대로 당으로 나라 이름을 돌렸다.

 

좌무위위대장군 검교좌우림위(군) 사후 좌옥검위대장군 제수.

연국공 겸국공 상주국. 겸국공은 돌궐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후 나라를 구한 공로로 받은 연국공 한번 더 겸하는 작위.

상주국은 훈으로 정2품.

연국공 겸국공 작위를 두 차례 받음은 종1품으로서도 최고의 작위를 받은 것이. 국공 위에 군왕이 있는데 사실상 황실 사람이나 점령지 왕이었던 사람 중 일부만 군왕을 받는다. 정1품은 실제 왕의 품계다. 왕 위에 황제가 있다. 대방군왕 이었던 부여융과는 흑치상지의 실제 품계 등급은 같았다. 사실상 왕이 아닌 사람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것도 이중 작위를 받아 최고의 작위에 올라 사실상 군왕에 준했다.

국공 작위는 나라를 구한 뒤 받은 것으로, 총 4차례 나라를 구했으나 그 중 두번만 받았다.

한번은 서경업의 난에 황실사람 이효일이 공을 가로 챘고, 또 한번은 흑치상지 대총관은 찬보벽에게 출정하지 말라 명했지만, 찬보벽이 몰래 측천무후의 허락 제서를 받고 출정해 몰살 당한 것을 엉뚱하게 흑치상지의 책임으로 돌려 공을 평가해주지 않았다.

 

실 서열 1위의 대장군. 형식상 서열은 좌위대장군이 1위나 이는 원로가 총괄 감독하는 자리고

실제 서열은 흑치상지가 오랫동안 1위 였다. 전쟁에 관해서 흑치상지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황제 외는 없었다.

 

검교는 명예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명예직이 아닌, 부업무 관직 성격으로 겸하는 직책을 의미한다.

본래 좌우림위인데 좌우림군이라 묘지명에 써인 이유는 묘지명 쓸 당시는 684년의 16위의 대대적인 개편 영향으로, 좌우림군이 되었기 때문이다. 705년 다시 좌우림위로 돌아갔으므로 좌우림위라고 하는게 적정하다.

즉 좌우림(군)위대장군도 겸했다.

684년 개편으로 좌령군위가 좌옥검위로 바뀌었다. 또한 서열도 좌무위위보다 높게 되었다. 이는 황실 사람이

초대 좌옥검위대장군으로 임명된 때문이다. 서열상은 높아 흑치상지가 사후 좌옥검위대장군에 올랐지만

흑치상지 생전에는 좌무위위가 가장 쎈 군대이며 좌무위위대장군이 위상이 제일 높았다. 하지만 흑치상지 사후는

좌옥검위 중심으로 군의 편제가 바뀌어 좌옥검위가 가장 쎈 군대가 되었다. 군의 위상과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다르므로 다른 시대와 직접 비교하면 안된다.)

 

하늘을 위로 이고 있으면서 천도(天道)에 순응하는 것은 땅이고,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은 자라도 쓰여질 수 있는 것은 군율(軍律)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운수에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름다운 옥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밀산(密山) 위에서 노닐어야 하고,

지혜와 덕을 쌓은 사람이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면 한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부군(府君)은 이름이 상지(常之)이고 자(字)는 항원(恒元)으로 백제인(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부여씨(扶餘氏)로부터 나왔는데

흑치(黑齒)지역을 봉지로 하여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씨(氏)로 삼았다.

그 가문은 대대로 달솔(達率)을 역임하였으니,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같으며 백제에서 2품 관등에 해당한다.

( 원래 흑치씨는 백제 황실 성씨인 부여씨에서 무왕 시기 아버지 대에서 갈려 나왔다.

흑치지역은 백제의 식민지 2대방으로 당나라 남쪽 남만이라 부르던 곳을 뜻한다.

흑치지역의 중심은 사반이며 사반에 대륙백제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흑치상지를 부군이라 표현한 것은 흑치부 - 즉 사반주 지역과 식읍을 부府라하고 이곳의 군왕 같은 통치자 였기 때문이다.)

 

증조부는 이름이 문대(文大)이고, (부여문대)

할아버지는 덕현(德顯)이며, (부여덕현)

아버지는 사차(沙次)로서, (흑치사차)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부군은 어려서부터 고상하였고,

기질과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으니,

가벼이 여기는 것은 기호와 욕망이었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가르침이었다.

 

가슴 속에는 깊은 마음을 가졌으니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맑았고,

정감의 폭은 너무나 넓었으니 그 거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대하였다.

여기에 신중함과 성실함을 더하였고, 온화함과 선량함을 포개었다.

이런 까닭으로 친족들이 그를 존경하였으며, 스승과 어른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 어려서부터 너무 비범하여 어른들도 두려워 할 정도의 자질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인간됨이라든지 여러가지 재주라든지 하던 부문을 망라하고 있었다.

도저히 가늠이 안되는 인간의 깊은 폭을 누사덕은 감탄에 감탄을 하였다.)

 

나이 어려『소학(小學)』에서 공부할 적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및 반고(班固)의『한서(漢書)』와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를 읽었다.

( 어린 시절 수 많은 책을 보았으나, 당나라인 누사덕은 대외 시선을 생각해 한민족의 서적은 제외 했다.

묘지명이 조정에 보고가 되는 연고다. )

 

부군은 "가면으로 꾸미는 행동을, 좌구명(左丘明)은 부끄럽다고 하였고, 공자도 역시 부끄럽다 하였으니 , 진실로 나의 스승들이다. 이보다 나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어찌 많을 것인가" 하였다.

( 너무나 진실한 성격과 예에 맞는 행동을 하는 흑치상지에 대한 묘사를 흑치상지가 직접한 말을 인용했다.)

 

20세가 안되어 가문(家門)의 신분에 따라 달솔(達率)을 받았다.

( 19세에 달솔에 올랐다 )

 

당(唐) 현경(顯慶 : 656~660) 중에 당나라에서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백제를 평정하자,

그 임금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황제를 알현한 후, 흑치상지는 만년현 권세가(萬年縣人)의 노비가 되었다.

( 태자 부여융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660년 11월 의자왕이 죽고 부여융을 대방군왕백제왕으로 당고종이 책봉 했다. 흑치상지에게는 부여융이 주군이었다. 흑치상지가 당고종을 알현할 시점이 664년 초이므로 임금 부여융이 맞다. 알현후 수도 장안 만년현 권세가의 노비로 보내졌다. 노비로 보내진 이유는 백제 마지막 전쟁인

임존성 전투에서 흑치상지는 당군을 속이고 몰살 위기의 임존성 병사들을 구하기 위한 계략을 썼으므로, 결과적으로 임존성은 단시간에 점령 했지만 그간 죽어나간 10여만 나당군에 대한 복수를 하지 못해 당 장수들이 흑치상지를 죽이려 함에, 이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유인궤가 노비로 잠시 보낸 것이다. 유인궤가 믿고 맡길수 있는 권세가의 집에 노비로 갔다.

* 필자는 만년현을 낙양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나, 수도 장안의 남쪽 부분에 위치한 현이라 바로 잡는다.)

 

인덕(麟德 : 664~665) 초년에 인망(人望)을 얻어 절충도위(折衝都尉)를 제수받고 웅진성(熊津城)에 진수(鎭守)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 배행검의 추천으로 몇달간의 노비 생활을 마치고 절충도위로 발탁된 것이다. 유인궤에게서 흑치상지의 백제에서의 활약을 전해 듣고 노비 신분인 흑치상지도 한번 만나본 뒤 그 인품과 무장으로서의 실력이 매우 뛰어남을 감탄하여 추천 했다. 노비시절 흑치상지는 중국어를 빠르게 익혔다. 절충도위는 지금의 예비군을 관할하는 직위다. 평시에 농사를 짓고 전시에 정규군을 지원하는 역할의 최고 책임자가 절충도위다. 웅진성으로 와서 1년가량 웅진성 성주로 있으면서 절충부 군사를 관리 감독하는 일을 했다. 절충부는 예비군의 당나라식 표현이다. 그런데 수 많은 사람이 크게 기뻐 했다라는 대목은, 흑치상지가 백제로 돌아오자 수 많은 백성들이 나와 열열히 환영했다. 백제말 가장 잘싸운 대장군이자, 임존성 3만 병사를 몰살 위기로 부터 살린, 백제 최고의 충혼이자 슈퍼스타였기 때문이다.)

 

함형(咸亨) 3년(672)에는 공적에 따라 충무장군(忠武將軍), 행대방주장사(行帶方州長史)를 더하였다.

( 665년 당으로 돌아간 뒤 번군 부대를 맡아 길렀다. 주로 백제유민과 대륙백제인들을 보살피는 일을 했다.

이 시기 흑치지역인 대방주를 주로 다니며 활약 했다.

당시 백제의 멸망으로 대방주는 원주민들의 끊없는 반란 기운이 있어 대륙 백제를 다스리던 백제인들은 대방주의 지배자에서 여러 원주민들로 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신세가 된 까닭이었다.

수년간 대방주를 다니며 안정 시켜, 이전과 같이 대륙백제인들이 다스리는 대방주가 되도록 했다.

이러한 활동에 백제왕으로서 부여융의 재가를 늘 받아 활동했으므로, 유인궤를 비롯한 당나라 내 다른 유명인들이 백제 보다는 당의 일원이 되었으니 당에 더 협조하는 일을 하는게 좋을 것이다 권했지만 고집스레 백제인들이 당나라에서 좋은 삶을 살수 있는데 흑치상지는 집중했다.

결국 그의 활동이 좋은 평가를 받고 충심이 인정을 받아 충무장군에 오르고 대방주장사 직책에 올랐다.

대방주장사는 대방주군사 바로 아랫 직급이다.

 

대방은 큰 벨트라는 뜻으로, 원래 백제는 중국 동쪽에 옛 고조선 영토였던 곳에 4대방 식민지와 중국 남부 흔히 남만으로 알려진 흑치지역의 2대방 지역을 이르는 말이나 백제말에는 남쪽 2대방만 남아 이곳을 이르는 말이 대방주이다. 4대방주는 고구려 영토였다가 수당 시대에 들어 빼앗겼다. 대방주의 이칭이 흑치 지역이므로 백제 무왕때 아버지 부여사차가 흑치 지역을 봉지로 하는 흑치 성씨를 하사 받아 흑치사차가 되었으니, 흑치 지역은 흑치상지의 봉지 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관장하는 서열2위 장군으로 임명한 것이다. 즉 당의 입장에서도 그의 봉지로 인정한 것이다. )

 

얼마 안 있어 사지절(使持節), 사반주제군사(沙泮州諸軍事), 사반주자사(沙泮州刺史)로 관직을 옮기고 상주국(上柱國)을 제수받았다.

( 충무장군으로 임명 받은 그 해에 사반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간 대체로 부드럽게

진정시켜 왔으나, 자기들을 수백년간 다스렸던 백제가 사라진 마당에 계속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사반주는 흑치지역의 중심지로 현 광동성 광주시 일대다. 이곳의 원주민 반란을 빠르게 평정한 공으로,

황제가 직접 황궁으로 불러 임명장을 주었다(사지절의 의미다).

황제가 직접 임명장을 주는 경우는 드물기에 그것을 의미하는 사지절이라 적었다.

이때 반란을 빠르게 평정하고 사반주를 안정시킨 것을 당고종이 매우 기뻐한 것은,

흑치지역 전체를 당에 편입 시키려는 당의 의도에 가장 중요한 핵심 지역인 사반주를 평정했기에

기뻐한 것이다. 이것이 전체 흑치 지역(남만으로 부르던 지역)의 거대한 땅이 당의 소유가 되게한

가장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흑치상지로서는 대륙백제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사반을 지키는 일이

또한 매우 중요 했었다. 대륙백제인들의 목숨을 지켜야 했으므로.

 

사반주의 자사 및 제군사로 흑치지역 중 대륙 백제인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살던 사반주의 자사 및

흑치지역을 아우르는 군사에 관한 총 군장으로 임명 되었다.

 

충무장군으로 임명된 후 몇달 지나지도 않아 다시 사반주자사 제군사로 임명된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에 지극히 공평한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사사로움을 잊어버리는 것을 커다란 강령으로 삼았다.

(이러한 흑치상지의 활동에는 사사로움 없이 일을 공의에 맞게 매우 잘 처리했음을 뜻한다.

이러한 흑치상지의 삶을 자세를 당고종은 계속적으로 이후에도 칭찬을 이어 갔다.)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겨 좌령군장군(左領軍將軍) 겸 웅진도독부사마(熊津都督府司馬)로 직책을 옮기게 하였고, 부양군(浮陽郡) 개국공(開國公)과 식읍(食邑) 2천 호(戶)를 더하여 봉하였다.

 

( 이때가 흑치지역의 사반주 반란에 이어 2차 반란이 일어난 때로, 사반주 바깥 전역에서 원주민들의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일어났는데, 흑치상지가 모두 빠르게 평정했기에, 실전 능력이 탁월함을 황제가 알고

좌령군장군으로 임명한 것이다. 즉 전선에서 매우 역량있는 장군으로 활동을 기대했다는 의미다.

부양군은 흑치지역 즉 대방주를 당나라 행정구역 체계에 맞게 부르는 호칭이다. 너무 더워 양기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곳 옛 백제의 식민지 2대방이 결과적으로 당나라 땅이 되었으니 그것에 대한 개국공과

식읍을 하사한 것이다. 즉 사반주와 식읍이 내려진 곳은 흑치부가 되는 것이며 흑치상지는 그 곳의 군(임금)과도 같은 위치라 하여 흑치부군이라 하였다.

좌령군장군으로 임명한 것은 멀리 사람도 얼마 안사는 사반주에만 있지 말고 좌령군장군으로 큰 전쟁에 나서라는 의미다. 그러면서 웅진도독부사마로 임명했는데 이미 이때 웅진도독부는 백제가 신라에 편입되었으므로 이름 뿐인 것이었다. 본디 사마는 총사령관을 이르는 말이었지만 이때의 사마는 도둑 및 장사 밑 자리다.

흑치지역의 2차 반란후 흑치상지가 확실하게 평정하여, 당의 땅이 확실히 된 것 때문에

식읍을 내리고 부양군 개국공에 봉한 것이다.

부양군 개국공은 확실하게 당의 땅이 되었다는 선언이다.

지금까지는 백제 식민지 2대방 지역에서 백제가 망함에 따라 과도기의 혼란 속에 있다가 2차 반란을 흑치상지가 빠르게 진압하여, 확실하게 당의 땅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황제라는 표현은 당고종을 가르키고, 천자라는 표현은 측천무후를 이르는 말이다. 주나라 천자에 스스로 올랐으므로 천자로 표현 되었다 )

 

 

이때에 좋은 평판으로 물망(物望)에 오르내렸고, 조정의 인망이 날로 높아졌다.

(이때에 흑치상지는 당고종과 많은 신려들의 좋은 평가를 많이 받은 시기로,

당에 와서도 백제와 백제왕에 대한 충성심을 놓지 않았으며 대륙백제인와 백제 유민을 보살피는 일을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겼다. 그러면서 당황제와 당에 대한 충성심과 여러 공적을 세우던 시기 였기 때문이었다. 항상 출정 할때는 부여융 백제왕의 재가를 받았으며, 개인적인 이득 보다는 백제인 중심으로 생각하고, 대의에 기초한 당나라의 일에 기여하는 일을 중시했다. 한마디로 충의와 대의를 쫓는 인간이었다. 이미 사라진 백제와 당의 번장으로써의 최선을 길을 구했다.)

 

마침 포해(蒲海)에서 재앙이 일어나고 난하(蘭河)에서 사변이 벌어져 부군으로 하여금 조하도경략부사(洮河道經略副使)로 삼았으니, 실로 그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다.

( 토번의 침략이 지금까지와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토번 희대의 명장이요 불패의 장군이라 불린 가르친링은 당 최고 명장이라 불렸던 설인귀 11만 대군을

고원으로 유인하여 몰살 시키고 설인귀도 생포한뒤 풀어주며 패전 소식을 장안 황궁에 전하게 했다.

토번 가르친링의 침략이 본격화 되는데 당군은 연전연패 하므로, 흑치상지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다는 뜻이다. )

 

부군은 품성이 빼어나고 굳셌으며, 자질이 뛰어나 사리에 통달하였다.

( 사리에 통달 했다는 괜히 추켜 세우는 문장이 아니라 실제로 흑치상지는 박람박식하여 못하는 것이 거의 없고 모든 일에 매우 능숙 했다. 토번을 몰아 낸후 둔전을 개간하여 엄청난 식량을 수확했는데, 이는 당시 어느 농부도 해내지 못한 엄청난 기록 이었다)

 

힘으로는 능히 무거운 성문빗장을 들어올릴 수 있었으나 힘센 것을 자랑하지 않았고,

( 그 시절 당의 무과 시험에 성문빗장 들어 올리는 항목이 있었다.)

 

지혜로는 능히 외적을 방비할 수 있었으나 지혜있는 것을 떠벌리지 않았다.

 

매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드러나게 하였고, 어리석은 듯이 함으로써 인격을 도야하였다.

그러므로 그 때에 행실이 산처럼 똑바로 서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 일심자의 전형이다 )

 

어질되 간사함을 기르지 않았고, 위엄을 갖추되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니, 상주고 벌주는 것은 반드시 원칙에 따랐고, 선을 권하고 악을 말리는 데에는 어긋남이 없었다.

 

또한 5륜(倫)의 커다란 본보기를 이루었고, 3군(軍)의 크나큰 복이 되었으니, 이에 병사들은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고, 아랫사람들은 그 잘못을 용납받을 수 없었다.

( 묘지명 찬자 누사덕은 흑치상지가 하원에 있을 때 그의 부장으로 활약했는데 이때 참의소를 담당했다. 군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일을 하는데, 어려운 일은 흑치상지에게 판단을 청했는데, 언제나 흑치상지의 공명정대한 판결이 놀라울 정도라 감탄한 경험담이다)

 

고종(高宗)이 매번 그의 선함을 칭찬하여 그를 지조와 학식있는 사군자(士君子)로서 대우하였다.

( 고종은 임존성 마지막 전투에서 흑치상지가 자신의 목숨을 생각지 않고, 3만 병사를 구해낸 솜씨며, 주군 부여융을 배신치 않은 성품이며, 대륙 백제인을 위해 헌신함이며 등이 무척 인상 깊어 귀감이 될만한 인물이라 계속적으로 칭찬 했다 )

 

하원(청해(靑海))에 있을 때에는 크게 공훈을 세웠다. 이 때에 중서령(中書令) 이경현(李敬玄)이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가 되자 군사들이 그의 지휘권을 빼앗았고, 역시 수군대사(水軍大使), 상서(尙書) 유심례(劉審禮)가 이미 패하여 죽자 장수들 중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 중에 부군이 홀로 높은 산마루와 같은 공훈을 세우면서 그 곤경을 극복함에 따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직책을 옮기고 이경현을 대신하여 대사(大使)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에 대한 풍문에 따른 것이다.

( 승풍령 대첩의 묘사인데, 역사적인 대첩으로 당시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대단 했기에, 누사덕이 이렇게 강조해 묘사한 것이다.)

부군은 곁에 음악과 여색(女色)을 두지 않았고, 평상시에 노리개를 가지고 즐기지 않았다.

( 기본 성품은 이러 했으나 백제풍 군가와 음악을 임존성에서 같이 온 장수에게 만들게 해 당나라에서 유행할 정도로 대히트를 했다. 여자는 가까이할 시간 자체가 없었다. )

 

경서(經書)를 베개 삼았으니 제준(祭遵)과 같이 예의를 중시하였고, 뛰어난 지략을 품었으니 두예(杜預)가 깃발을 많이 세워 적을 혼란에 빠뜨린 것과 같은 꾀를 지녔다.

( 인문 서적도 안 본 것이 없을 정도로 흑치상지는 문과 무에 통달했다 )

 

오랑캐의 티끌이 깨끗하게 치워지니 변방의 말이 살찌고, 중원의 달이 훤하게 비치게 되니 하늘의 여우 기운이 사라졌다.

( 흑치상지의 양비천 대첩으로 토번을 완전히 당에서 몰아내고 잃었던 땅이 모두 되찾은 상황이다 )

 

전쟁터에 출정하면 칭송이 뒤따랐고, 전쟁터에서 개선하면 노래가 절로 나왔다.

( 흑치상지가 유행 시킨 백제풍 노래가 개선가로 많이 쓰였고 민가에서도 곧장 따라 불렀다. 이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흑치 대장군은 절대 패하지 않은 불패지장이라는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이리하여 좌응양위대장군(左鷹揚衛大將軍) 연연도부대총관(燕然道副大摠管)으로 벼슬을 옮겼다.

( 이는 돌궐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다. 돌궐이 소규모 침략을 이어가며 당나라의 간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본격 침략이 아닌데도 대부분의 당군을 패하기만 했다. 돌궐 기병이 워낙 위력적이었기 때문이다. )

 

수공(垂拱 : 685~688) 말년에 천명(天命)이 장차 바뀌려 하였는데, 돌궐의 골졸록(骨卒祿)은 미친 도적으로 이미 자신의 미미함을 살피지 못하였고, 서경업(徐敬業)은 반역자로서 또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남쪽으로 회음(淮陰)과 해릉(海陵)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오랑캐 군사를 섬멸하는 데에 모두 큰 힘이 되었으니, 그의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 서경업의 난은 684년이므로 이 부분은 시기를 약간 착각 했다. 서경업의 난은 고우와 회음 해릉에서 최종 평정되었다. 원래 임무를 맡은 이는 황실사람 이효일 좌옥검위대장군으로 30만 대군으로 난을 평정하러 갔으나 연전연패하여 반란군이 수도로 진격할 상황이 되자 측천무후는 급히 흑치상지를 대총관으로 임명해 진압하도록 했다.

그 다음해에 돌궐의 본격적인 침략이 있었다. )

 

이에 천자가 제(制)를 내려 이르기를

“재간과 도량이 온화하고 우아하며, 기질과 정기가 고상하고 밝았으며, 일찍부터 어질고 의로운 길을 밟았고, 마침내 깨끗하고 곧은 곳을 밟았구나.

 

말한 것은 분명히 행하고 배운 것으로 자신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여러 차례 군사를 통솔하여 매번 충성스러움을 드러냈도다.

 

그러므로 겸국공(兼國公)과 식읍(食邑) 3천 호를 봉할 만하다. 그리고 다시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를 내리고 나머지는 그 전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 겸국공을 연국공燕國公의 기재 미스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미 토번 침략을 완전히 뿌리 뽑아 연국공에 오른 후, 다시 한번 국공 작위를 받는 것이라 국공작위를 한번 더 겸한다는 의미에서 겸국공이라 한 것이다. 연국공만 해도 연나라 왕에 봉함과 같은 작위인데 한번 더 받은 것이라, 사실 이 때 부터 흑치상지는 종1품 중에서도 상위 품계를 받은 것이다. 사실상 일반인이 오를수 있는 끝이 국공 종1품인데, 왕만 해당하는 정1품을 줄수는 없으니 작위를 한번 더 내리고 식읍을 내리는 것으로 대신 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대접은 왕이 아닌 사람으로 최고 중에 최고로 경외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이곳의 포효하는 용감한 병사들을 통솔하여 저곳의 흉악하고 미친 무리들을 전멸시킴으로써, 오랑캐의 말이 남쪽에서 목축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중국의 사신들이 북쪽으로 가는 원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영주(靈州)와 하주(夏州)는 요충지로서 요사스런 오랑캐들이 가득하였으나, 부군의 위세와 명성은 이를 대신할 자가 없었다.

( 황하퇴 대첩으로 완전히 북쪽이 평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세상 어느 누가 물어도 최고 중에 최고의 명장은 흑치상지라는데 이견을 달수 있는 사람은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

 

다시 회원군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로 자리를 옮겨 떠도는 요기를 막기도 하였다.

( 이때는 회원군을 지키기만 했다. 침략해 올 무리가 없기에. )

 

마침 재앙이 악한 무리로부터 흘러나와 고고한 품격을 가진 부군에게 거듭 미치니, 의심이 마치 명백한 사실인 양 되어버려 옥과 돌이 섞여 구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옥에 갇혀 이윽고 하늘을 등지게 되니,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러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

( 악질간신 3인방이 측천무후의 은근한 사주를 받고 흑치상지를 무고하여

조회절의 역모에 엮어 같이 죽였다. 이는 당을 위협한 대외의 큰 적들이 완전 제압된 상태에서 정치적으로 측천무후는 권력에 위협이 될 인물을 많이 죽였다. 이민족 장수가 많이 죽어나간 시기라고 하는데 이민족이라서 죽인게 아니라 권력에 위협이 될 인물이면 가리지 않고 죽였다. )

 

이 때 나이 60세였다.

 

맏아들 흑치준(俊)은 어려서 집안이 재난을 당하자 아버지의 분함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세웠다.

아버지는 백제 조정에서 목숨바칠 것을 맹세하다가 천자가 보낸 사신에게 몸을 맡기니, 여러 차례 충성스러움을 드러냈고 누차 공명을 떨쳤다.

 

성력(聖曆) 원년(698)에 원한이 쌓여 풀지 못함을 천자가 바르게 살피시고 제(制)를 내려 이르기를,

(원래 측천무후가 토사구팽 시킨 것이지만 예의상 이렇게 기술했다. 묘지명은 조종에 보고되기 때문이었다.)

 

“고인이 된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위(檢校左羽林衛) 상주국(上柱國) 연국공(燕國公)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일찍이 가문의 지위에 따라 벼슬을 이어받아 군진(軍陳)에서의 영예를 두루 거쳤으며, 누차 군율(軍律)을 담당하여 공훈을 받들어 떨쳤도다.

지난 번에 사실 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더니,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지만 의심받았던 죄는 판별되지 못하였었다.

근래에 이를 검토하여 살펴보니 일찍이 모반하였던 증거가 없고, 오로지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실로 한탄스럽기 그지없도다.

마땅히 분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니, 총애하는 표시로 관작을 더하여 삼가 죽은 이를 영광스럽게 만드노라.

따라서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으로 추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노라.

 

그 아들 유격장군(游擊將軍) 행난주광무진장(行蘭州廣武鎭將) 상주국(上柱國) 준(俊)은 어려서부터 흑치 집안의 명성을 날렸고, 누차 진실된 정성을 드러냈으며, 아주 위급한 상황에도 이를 피하지 않았고,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도다. 마땅히 이를 포상하여 기록해둠으로써 크게 칭송함을 보이고자 하노니, 우표도위익부좌랑장(右豹韜衛翊府左郞將)에 봉할 만하다.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이는 측천무후의 교서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 옮겨 적은 것이다.

제서에 검교좌우림위라고 되어 있는 것은, 측천무후도 그 시점에 좌우림군으로 바뀐 것을 깜빡 했던 것이다.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흑치상지를 악질간신3인방에서 사주하여 죽이고는, 뒤에 이런 뻔뻔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에 방해 된다면 자신의 아들 딸도 직접 죽인 잔인한 성품에 이 정도 뻔뻔함은 일상이었다.

여기서 훈봉을 복구 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역모로 몰려 죽을때 훈과 봉은 회수 되었으나 다시 이전처럼 복구 되었다.

훈은 상주국 봉은 식읍 봉지를 뜻한다. 이 시점에 흑치지역 사반주는 사실상 당에 완전한 편입으로 흑치부의 관할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흑치준의 활약도 대단했음을 적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대단한 활약 때문에 위험 인물로 견제하던 측천무후의 측근에 의해 독살되고 만 것이었다. )

 

아아, 성력(聖曆) 2년(699) 1월 22일에 천자가 칙을 내려 이르기를,

 

“연국공(燕國公)의 아들 준(俊)이 아버지를 이장(移葬)하겠다고 요청하였으니, 물건 100가지를 내리고, 그 장례 일에 필요한 휘장, 일꾼 등 일체를 관청에서 공급하라. 그리고 6품에 해당하는 경관(京官) 1명으로 하여금 가서 살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즉 그 해 2월 17일에 망산(邙山)의 남쪽, 관도(官道)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에 받들어 이장하였으니, 이것은 예에 맞는 것이다.

 

(누사덕 내가) 생각컨대,

부군은 외따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처럼 뛰어나기 이를 데 없었으니 재간있는 사람들 사이에 표상이 되었고, 거울을 걸어 놓은 것처럼 허상과 융화되었으니 선인의 도리와 합치되는 사람들 사이에 우러름의 대상이 되었다.

말은 곧고 뜻은 넓었으니 지엽적인 일들이 근본적인 것을 가리는 일이 없었고,

계획을 세우면 일이 이루어졌으니 처음의 일들이 마지막과 일치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밤낮으로 나태하지 않았고 마음은 항상 윗사람을 섬기는 데에 두었으며,

곤경에 처하여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고 뜻은 항상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데에 두었다.

군자가 관여할 바가 아니면 그 생각은 아예 고려도 하지 않았고, 선왕이 물려준 바가 아니면 그 교훈은 아예 마음속에 두지 않았다.

군문(軍門)에서 스스로 수레를 밀어 변방에서 절개를 이루었다.

그러니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나쁜 말을 하지 못하였고, 아무리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좋은 말을 찾지 못하였다.

지혜있는 사람이 그를 보면 지혜롭다 하였고, 어진 사람이 그를 보면 어질다 하였다. 재물을 멀리하고 자신을 잊어버렸으며, 의를 중시하고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목이 달아날지라도 이해를 따지지 않았고, 몸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올바른 길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겁 많은 사람도 그로 인해 용감하게 되었고, 탐욕스런 사람도 그로 인해 청렴하게 되었다.

 

이것은 굳이 저울을 논하지 않아도 잘못된 무게를 바로잡는 것과 같았고, 준족을 가진 빠른 말로 인하여 느린 말이 원대함을 알게 되는 것과 같았다.

 

관리로서 마음이 곧고 재간이 있었으니, 글을 쓰매 쌍벽을 이룰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스스로 자책하였고, 인륜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능력을 갖추었으니, 잠자코 있더라도 천금이 그 값어치를 발휘하였다.

 

진실로 지금의 시대에만 본받을 바가 아니었고, 대체로 뭇사람으로부터 우뚝 솟은 인물의 표준이 되었다.

( 누사덕 오랫동안 흑치상지를 봐온 느낌을 그대로 적었다 )

 

영예와 굴욕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삶과 죽음은 타고난 것인데, 어차피 귀착하는 바가 동일하다면 어찌 부인의 품안에서 목숨을 마치겠는가?

( 사내 대장부의 장쾌한 삶이 부인의 품에서 죽는 것일 수는 없다는 누사덕의 말이다. )

 

내가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참의소(參義所)에 있었는데,

그의 도리에 감복하였고 그의 공훈을 칭송하였었다.

( 누사덕이 다시금 흑치상지의 성품과 인품을 자세히 열거한 것은,

그에게서 감복 받음이 매우 컸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누사덕 뿐만 아니다.

흑치상지의 노래 성주풀이를 보면 흑치상지를 절대가인으로 표현했는데,

우주의 완전성을 이어받아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인간이라는 뜻으로,

얼마나 대륙 백제인들이나 주변에서 흑치상지의 인품에 감복 감탄하고

우러러 봤는가 하는 것을 알수 있다. 이는 다른 묘지명의 인품 칭송과는 달리

흑치상지의 인품 부분은 실제 그러한 인물이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

 

이에 다음과 같이 명문(서문)을 짓는다.

( 여기서 명문은 금석에 새긴 글을 뜻하며 전체 흑치상지묘지명 중에

서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시와 같은 형식으로 노래 했다

위에 까지는 흑치부군묘지문으로 일대기를 적은 것이라면, 아래 명문은 누사덕의 평가와 소감을 적은 것이다.

서문이 지금 시대와 뜻이 다소 틀리다.

대부분의 묘지명은 간단한 주인공에 대한 소개와 시 형식의 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흑치상지묘지명은 긴 일대기 이지만 중요한 부분이 여럿빠져 있어 공적 조차도 다 적지 못했다.)

 

5악(嶽)을 말하는 사람은 천태산(天台山)이 병풍처럼 첩첩이 서 있는 모습을 알지 못하고, 4독(瀆)을 바라보는 사람은 운주(雲洲)에 핀 붉은 꽃을 깨닫지 못하네.

( 참으로 화씨벽 같은 보석은 따로 있다네)

 

삼가 듣건대 김일제(金日磾)는 한나라의 칼집이 되었고, 백리해(百里奚)는 진나라의 사다리가 되었도다.

( 김일제는 이민족으로서 가장 공이 큰 사람을 이를때 쓰는 대표적 비교 대상이다. 김일제는 신라와 가야의 조상으로 그의 5대손이 각각 신라와 가야를 건국 했다.

김일제를 여기서 언급함은 흑치상지의 김일제와 백리해를 합친 것 같은 공적을 세웠다는 뜻이다. )

 

참으로 사리에 밝다 말할 수 있으니 뭇사람을 즐겁게 할 정도로 뛰어났고,

 

가는 곳마다 보배가 되었으니 어디에 간들 명석하다 아니할 것인가.

 

공이 동쪽으로부터 왔도다,

( 백제를 말한다 )

 

마치 봄바람 불어 오듯이. 예악(禮樂) 제도가 그로 인해 본색을 드러냈고, 소리와 광채가 그를 기다려 뜻을 이루었도다.

( 백제풍 노래 대유행을 말한다)

 

끝이 없구나 군사들의 깃발이여, 가지런하구나 수레들의 덮개여. 커다란 종을 치니 북이 울고 퉁소가 화답하는구나.

( 흑치 군의 위세를 말한다)

 

이는 누구의 영화인가 나를 두고 덕이 있다 하는 소리도다.

 

사방에 걸쳐 오랑캐의 근심을 없앴고, 천 리에 걸쳐 공(公)과 후(侯)들의 성을 지켰도다.

 

공훈을 이미 펼치니 충성과 의로움이 벌써 드러났도다.

 

그러나 만물에는 곧고 굳건한 것을 꺼리는 일도 있고, 행실이 높으면 도리어 해를 당하는 일도 있구나.

( 측천무후의 토사구팽을 우아하게 표현했다)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그 높이를 잃게 되었고, 어두운 무덤 속에는 빛이 사라지게 되었구나.

 

천하가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고, 4해(海) 사람이 그의 드높았던 기량을 애처롭게 여겼도다.

( 죽음과 세상 사람들의 여론에 대한 묘사다)

 

천자가 이를 깊이 헤아리니, 살아있을 때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포상이 미쳤도다.

 

 

내가 실로 감모하여 그를 기리는 글을 짓노라.

그에게 바쳐진 말들이 영원할 것이며, 그의 명성은 끝이 없을 것이로다.

( 누사덕이 흑치상지를 마음깊이 존경해, 자발적으로 나서서 묘지명을 썼음을 밝히고 있다 )

 

 

<누사덕 :> 삼가 묘지명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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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발견된 흑치상지 비석]

이렇듯 흑치상지는 당나라에 항복하여 오히려 임존성을 공격하는 역장(逆將)이 되었다.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도 흑치상지를 백제 복국운동의 배신자로 낙인찍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 조에는 그를 훌륭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의 사대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부하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덕장의 풍모로 부각시킨 것이다.

“한 군사가 흑치상지가 타는 말에 매질을 했다. 부하 장수가 그 자를 죄주고자 하니, 상지가 ‘어찌 내가 타는 말을 매질하였다는 이유로 관병을 매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받은 상은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재물을 차지하지 않았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모두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며 매우 슬퍼했다(<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흑치상지조. 前略. 所乘馬爲士所箠 或請罪之 答曰 何遽以私 馬鞭官兵乎 前後賞賜 分麾下無留貲 及死 人皆哀基枉).”

그런데 재미있게도 1929년 흑치상지의 묘지석이 중국 낙양 북망산에서 발견됐다. 북망산은 중국 사람들에게 있어 ‘살아서는 항주(杭州), 죽어서는 북망’이라 할 정도로 특별한 곳이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흑치상지가 어떻게 묻히게 된 것일까?

이 비석이 한국 사학계에 알려진 것은 뒤늦은 1990년대다. 묘지석에는 모두 1604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묘지석의 발견은 이제까지 중국 고대사인 <신당서>나 <구당서>에서 알 수 없던 흑치상지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黑齒常之墓誌銘

大周故左武威衛大將軍檢校左羽林軍贈左玉鈐衛大將軍燕國公黑齒府君墓誌文幷序」
太淸上冠合其道者坤元至無高居參其用者師律不有命世之材傑其奚以應斯數哉然則求玉榮者必」
遊乎密山之上蘊金聲者不恨乎魯門之下矣府君諱常之字恒元百濟人也其先出自扶餘氏封於黑齒」
子孫因以爲氏焉其家世相承爲達率達率之職猶今兵部尙書於本國二品官也曾祖諱文大祖諱德顯」
考諱沙次並官至達率府君少而雄爽機神敏絶所輕者嗜欲所重者名訓府深沈淸不見其涯域情軌」
闊達遠不形其里數加之以謹慤重之以溫良由是親族敬之師長憚之年甫小學卽讀春秋左氏傳及班」
馬兩史歎曰丘明恥之丘亦恥之誠吾師也過此何足多哉未弱官以地籍授達率唐顯慶中遣邢國公蘇」
定方平其國与其主扶餘隆俱入朝隸爲萬年縣人也麟德初以人望授折衝都尉鎭熊津城大爲士衆所」
悅咸亨三年以功加忠武將軍行帶方州長史尋遷使持節沙泮州諸軍事沙泮州刺史授上柱國以至公」
爲己任以忘私爲大端天子嘉之轉左領軍將軍兼熊津都督府司馬加封浮陽郡開國公食邑二」
千戶于時德音在物朝望日高屬蒲海生氛蘭河有事以府君充洮河道經略副使實有寄焉府君稟質英」
毅資性明達力能翹關不以力自處智能禦寇不以智自聞每用晦而明以蒙養缶故其時行山立具瞻在」
焉至於仁不長姦威不害物賞罰有必勸沮無違又五校之大經三軍之元吉故士不敢犯其令下不得容」
其非高宗每稱其善故以士君子處之也及居西道大著勳庸于時中書令李敬玄爲河源道經略」
大使諸軍取其節度亦水軍大使尙書劉審禮旣以敗沒諸將莫不憂懼府君獨立高崗之功以濟其難轉」
左武衛將軍代敬玄爲大使從風聽也府君傍無聲色居絶翫好枕藉經書有祭遵之樽俎懷蘊明略同杜」
預之旌旗胡塵肅淸而邊馬肥漢月昭亮而天狐滅出師有頌入凱成歌遷左鷹揚衛大將軍燕然道副大」
摠管垂拱之季天命將革骨卒祿狂賊也旣不覩其微徐敬業逆惡也又不量其力南靜淮海北掃」
旄頭並有力焉故威聲大振制曰局度溫雅機神爽晤夙踐仁義之途聿蹈廉貞之域言以昭行學」
以潤躬屢摠戎麾每申誠效可封兼國公食邑三千戶仍改授右武威衛大將軍神武道經略大使餘如故」
於是董玆哮勇剪彼凶狂胡馬無南牧之期漢使靜北遊之望靈夏衝要妖羯是贍君之威聲無以爲代又」
轉爲懷遠軍經略大使以遏游氛也屬禍流群惡疊起孤標疑似一彰玉石斯混旣從下獄爰隔上穹義等」
絶頏哀同仰藥春秋六十長子俊幼丁家難志雪遺憤誓命虜庭投軀漢節頻展誠效屢振功名聖曆元年」
寃滯斯鑒爰下制曰故左武威衛大將軍檢校左羽林衛上柱國燕國公黑齒常之早襲衣」
冠備經駈榮亟摠師律戴宣績效往遘飛言爰從訊獄幽憤殞命疑罪不分比加檢察曾無反狀言念非專」
良深嗟憫宜從雪免庶慰塋魂增以寵章式光泉壤可贈左玉鈐衛大將軍勳封如故其男游擊將軍行蘭」
州廣武鎭將上柱國俊自嬰家各屢效赤誠不避危亡捐軀徇國宜有裒錄以申優獎可右豹韜衛翊府左」
郞將勳如故粤以聖曆二年壹月卄二日勅曰燕國公男俊所請改葬父者贈物一百段其葬事幔」
幕手力一事以上官供仍令京官六品一人檢校卽用其年二月十七日奉遷于邙山南官道北禮也惟府」
君孤峯偉絶材幹之表也懸鏡虛融理會之臺也言直而意忄尃無枝葉之多蔽謀動而事成有本末之盡美」
夙夜非懈心存於事上歲寒不移志在於爲下非君子之所關懷必不入於思慮非先王之所貽訓必不出」
於企想自推轂軍門建節邊塞善毁者不能加惡工譽者不能增美智者見之謂之智仁者見之謂之仁至」
於推財忘己重義先物雖刎首不顧其利傾身不改其道由是懦夫爲之勇貪夫爲之廉猶權衡之不言而」
斤兩定其謬騊駼之絶足而駑駘知其遠至於吏能貞幹走筆而雙璧自非鑒賞人倫守黙而千金成價固」
非當世之可效盖拔萃之標准也榮辱必也死生命也苟同於歸何必終於婦人之手矣余嘗在軍得參義」
所感其道頌其功乃爲銘曰」
談五岳者不知天台之翠屛也觀四瀆者不晤雲洲之丹榮也恭聞日磾爲漢之鞞亦有里奚爲秦之梯苟」
云明哲興衆殊絶所在成寶何往非晰惟公之自東兮如春之揚風兮文物資之以動色聲明佇之以成功」
兮悠悠旌旆肅肅軒盖擊鴻鍾鼓鳴籟云誰之榮伊我德聲四郊無戎馬之患千里捍公侯之城勳積旣展」
矣忠義旣顯矣物有忌乎貞罡刂行有高而則傷中峯落其仞幽壤淪其光天下爲之痛海內哀其良」
天鑒斯孔裒及存亡余實感慕爲之頌章寄言不朽風聽無疆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1992)
비문 가운데 백제와 관련이 있는 부분을 의역(意譯)해 본다.

“(전략) 부군(흑치상지)은 어려서부터 고상하였고, 기질과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다. 가벼이 여기는 것은 기호와 욕망이었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가르침이었다. 가슴 속에는 깊은 마음을 가졌으니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정감의 폭은 너무나 넓었으니 그 거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대하였다. 20세가 안되어 가문의 신분에 따라 달솔(達率)을 받았다.

당(唐) 현경(顯慶: 656~660) 중에 당나라에서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그 나라를 평정하자, 그 임금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천자를 알현하였으니, 당에서는 이들을 만년현인(萬年縣人)에 소속시켰다. (하략)”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배반하고 당나라의 관리가 되어 직급이 높이 올라갔으나 결국은 토사구팽 당하고 말았다. 비문에는 689년 조회절(趙懷節)의 반란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흑치상지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귀부자 흑치상지의 군부 내 입지 등을 우려한 조정이 역모로 죽인 것이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지 10년 뒤, 흑치상지는 아들 준의 노력으로 누명을 벗게 된다. 그래서 이 같은 묘지석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만약 당군에 항복하지 않고 지수신과 더불어 마지막까지 임존성을 사수했다면 역사 평가는 달라졌을 게다.

출처 : 천지일보(https://www.newscj.com)

 

 

고대 지나인들의 인식, 흔히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북망산 ,
북망산은 중국 낙양에 있는 산이름이다 . 지나인들은 살아서 소주.항주.죽어서는 낙양의 북망 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북망에서 흑치상치의 묘가발견돼었다.


<흑치상치 모지석 1604자의 비밀>

흑치상지는
백제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던 660년 ,
분연히 일어나 백제 부흥운동의 기수로 활약했던 인물중의 한명 정도로
이름만 거론될 정돕니다 .


이곳 북망산에는 황제나 고관대작이 아니면 묻히기가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부흥운동에 앞장섰던 흑치상지가
어떻게 이곳에 묻힐 수 있었던 것일까요 ?


< 신당서 >와 < 구당서 > 라면 역대 중국의 ,
국가가 편찬한 25개의 정사에 속하는 책입니다 .
이 책에는 열전이라고 해서 중국 역사에 기록할만한 인물의 생애에 대해서
적어놓은 부분이 있습니다,

구당서가 열리면 - 흑치상지 열전 > 나타나고 .

이 두책에 모두 흑치상지 생애가 따로 기록이 돼 있습니다 .
우리나라 인물가운데 < 신당서 >와 < 구당서 >에
열전이 오른 인물은 매우 드문 편입니다 .



자 그러면 흑치상치의 묘비문에 대해서 이야기 해봅시다.



군데 군데 낡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1300여년의 세월치고
대체로 글귀가 선명한 편입니다 .
이 흑치상지 묘지석에는 모두 1604자의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
특히 이 묘지석의 발견은 이제까지 < 신당서 >나 < 구당서 >에서
알 수 없던 흑치상지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고 있어서 주목이 됩니다.(묘지문은 현재 중국남경박물원에 소장)


검을 흑, 이빨치 ".
사실 그동안 흑치가 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습니다 .
그래서 이 흑치상지란 인물이 검은이빨을 가진 남방계통의 사람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묘지석에서는 바로 이 흑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흑치상지의 집안에 관한 기록입니다.
흑치상지가 백제시대 어떤 가문의 출신이었는지를 이 묘지석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 이 묘지석을 중심으로 흑치상지란 어떤 인물이었는지 좀 더 다가가 보도록 합시다.


<묘비1604글자의 내용>

그 조상은 부여씨(백제왕족)로부터 나왔는데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흑치를 성으로 삼았다. "

여기서 흑치씨의 분파문제.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하자면 일본서기에
백제 부흥운동의 핵심인물중의 한명인
복신의 경우도 원래 성씨가 부여씨인데
귀실씨로 바뀐 기록을 볼 수 있다

역사상 흑치라는 성을 가진 인물은
흑치상지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
그런데, 묘지석에서
흑치상지의 아버지, 조부, 증조부를 밝히고 있어
흑치의 가계가 파악이 됐다 .

이들 흑치가문은 대대로 백제 제2 관등인
달솔(고위관리직)을 역임했다고 묘지석은 적고 있다 .

중국 사서중의 하나인
< 주서 백제전 > 에 의하면 백제에는 모두
16 관등이 있는 걸로 나타난다 .

그중 1품 좌평은 5명, 2품 달솔은 30명으로
제한했다고 하는데,
흑치 가문은 대대로 달솔을 역임했다고 한다

묘지석에서는 흑치상지가 어린 시절
읽었던 책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백제의 귀족들이 어린 시절,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전형적인 백제의 귀족으로 성장한
흑치상지는 그의 나이 31살이 되던 해인 660년,
조국 백제의 멸망을 맞게 된다 .

당시 지방 한 개 군의 최고책임자인
풍달군장의 자리에 있었던 흑치상지는
의자왕을 따라 함께 항복을 한다 .

-일몰보이면 묘지석은, 이후 흑치상지가 바로
당나라로 들어온 것으로 적고 있다 .
흑치상지의 부흥운동에 관한 부분을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

삼국사기 >의자왕기 20 (19) 그러나 < 삼국사기 > 를 보면 흑치상지의 백제부흥군으로 활약했던 기록이 나온다.

망국의 설움을 안은 백제인들에게
부흥운동의 열기는 무섭게 퍼져나갔다 .
흑치상지와 더불어 부흥운동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의자왕의 4촌인 복신과 승려 도침 .
3 년여 동안 부흥운동을
핵심적으로 이끌던 이들은
663년 무렵이 되면 심각한
내분을 일으킨다 .

663년 6월, 도침은
부흥운동의 동지였던 복신에 의해
살해당한다 .

-복신 얼마 지나지 않아 복신 역시
일본에서 건너온 백제왕자, 부여풍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

이로써 망국의 설움을 안고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의 백제멸망 이후
3년여를 끌던 부흥운동은 막바지로 치닫게 된다.
이 무렵 흑치상지는
권력쟁탈의 핵심에 선 부여풍을 버리고
당에서 파견된 의자왕의 맏아들
부여융의 편에 서게 된다 .
결국 당에 항복을 하게 된 것이다 .

당의 기록에는 백제를 멸망시켰다는기록이 나옵니다.그리고
의자왕을 비롯한 태자융, 왕자효 13인, 대수령등 사비성에 남아있던 700여인을
천자에 알현시켰다 "
패망한 나라의 왕과 귀족들을 당나라로 끌고 갔다는 얘깁니다 .

백제가 부흥운동에서도 완전히 실패를 한 후
흑치상지도 당의 장수 유인궤를 따라 당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
그후 한동안 흑치상지의 궤적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
그러나 , 668년경 무렵이 되면 당나라의 무장으로서 맹활약을 하는
흑치상지의 이름을 역사서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흑치상치의 묘비문1604글자를 통해 보는 백제!

 
대륙백제추천 0조회 17904.05.16 11:04댓글 0
 

흑치상치의 묘비문1604글자를 통해 보는 백제2

중국 당나라역사를 전공하고 있는 마치교수(섬서사범대학 역사학 교수)는 백제장수 흑치상지에 관심을 가지고 오래전부터 흑치상지 연구를 해 오고 있다 . 태평광기 마치교수는 송나라때 책인

cafe.daum.net

중국 당나라역사를 전공하고 있는 마치교수(섬서사범대학 역사학 교수)는
백제장수 흑치상지에 관심을 가지고
오래전부터 흑치상지 연구를 해 오고 있다 .

태평광기 마치교수는 송나라때 책인
< 태평광기 >에 흑치상지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고 말하였다.

<태평광기>6권

마리의 늑대가 군대 주변을 맴도니
불길하다고 여겨 떠났다 .
흑치상지가 매우 총명하여 선견지명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태평광기의 기록이 암시하듯
흑치상지는 당에서 뛰어난 장수로
활약을 하게 된다 .

그의 활약이 돋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티벳이 당의 서역을
침공해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607년, 통일 왕국를 이룬
토번은 점차 영토확장을 꾀한다 .
670년에는 당의 속국이던 토욕혼까지 점령해
당을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적이 되었다 .
그러자, 당은 접경지대인 지금의 서녕에,
하원군이라는 군사령부를 설치한다 .
흑치상지가 하원군으로 온 것이
바로 이 무렵, 677년경이다 .

678년, 당시 토번과 전투중이던
하원군의 우두머리인 경락대사 이경현은
토번군대의 공세를 피해 후퇴하던중
이곳 승풍령 아래의 골짜기로
왔다. 그런데, 티벳군이 봉우리를 둘러싸고
압박을 가하자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당군은 몰살당할 위기.... 흑치상지가 5백명을
데리고 티벳의 군대를 습격 ,
수백명이 수만명의 토번군대를 물리쳤다 .

. 이때의 전투상황을 < 자치통감 > 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

계곡에 주둔한 당군은
높은 봉우리에 포진한 토번군에 의해
포위돼 있었다 .
이때 후방에 있던 흑치상지가 야밤에
결사대 5백명을 이끌고 토번군을 공격해
위험에 빠진 당군을 구해낸 것이다 .

<구당서> .
막강한 토번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이 전투를
계기로 흑치상지의 이름은 당의 조정에까지
알려진다.
(승전보를 들은 당 고종은 흑치상지에게
금 500냥과 비단 500필을 내려주었고
일반장수인 흑치상지를 하원군부사로
승진시켰다 .)

흑치상지가 청해성 일대에 머문 것은 7여년간 ,
이 기간동안 크고 작은 여러차례의
전투를 치루게 된다 .

그 중 가장 빛나는 전투중의 하나가
양비천 전투이다 .

680년, 토번의 가장 유명한 장수
" 찬파등 " 은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 양비천까지 진출해 진을 치고 주둔했다.
하원군 경략대사 이경현은
이 토번군을 물리치기위해 두차례나
전투에 나서지만 모두 실패한다 .

치밀한 작전을 세운 흑치상지는
3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간을 틈타
3만여명의 군사가 머무는 토번의 진영을
급습한다 .
그리고 승리했다 .

마치교수의 이야기.

양비천의 승리는 당대군사역사와
중국 군사역사에 중요한 의의 .
<중국군사통사>도 이 사건을 중요하게 처리 .
양비천 대승으로 조정에서도
흑치상지 더욱 신임 .

이 전투의 결과 흑치상지는
하원군 경략대사로 다시 승진을 하게 된다 .
이 전투는 당이 토번을 상대로 싸워
가장 화려한 승리를 거둔 전투 중의
하나로 역사에 남았다

그 결과 당은 옛 영토를 부분적으로 회복을 하게 되고
흑치상지는 14000명의 군사를 거느린 하원군대사로 승진을 하게 됩니다 .

그런데, 따지고보면 흑치상지는 당이 점령한 점령국의 장수 ,
그것도 한때는 부흥운동에 몸 담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
그런 그가 어떻게 당의 군부조직에서 승진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요 ?

그것은 바로 중국의 번장 제도때문입니다 .

오랑캐 번 , 장수 장 " .
번장제도란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장수를 기용하는 제도입니다

신당서의 제이번장은 이국나라의 번장들에 대해 적고 있는데,
모두 13명의 장수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

# 집실사력,설필하력,흑치상지,이근행,논궁인. 등등.

돌궐추장을 비롯해서 말갈, 토번 까지
당대의 번장들은 이렇게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활약을 했습니다 .

바로 이런 당의 번장제도가 흑치상지가 군인으로서
승진을 하는 배경이 됐던 것은 사실입니다 .

신당서 (21). < 신당서 > 열전 흑치상지조는
흑치상지가 청해성에 머문 7년동안
그 지역을 어떻게 다스렸는지를
잘 기록하고 있다 .

흑치상지는 당시 자신이 관활하던 하원군 일대에
봉화대 70여개소를
설치하고 5천경의 밭, 즉 1500만평에 이르는
땅을 개간해 세수를 늘렸다고 한다 .

이 무렵, 흑치상지는
나라에 공이 많은 제후들에게
내리는 칭호인 연국공을 받게 된다

청해성에서 7년을 머물렀던 흑치상지는
서안에 돌아와 잠시 머문다 .
이 기간동안 남경에서 일어난
서경업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온다 .

그러나, 이 무렵 변방지역이 소란스러워지자
조정에서는 다시 흑치상지 필요로 한다.
결국 그를 변방으로 다시 보내게 된다

돌궐족의 반란이 잦자
687년, 측전무후는 흑치상지를 연연도대총관으로
임명하고 산서성 일대에 파견을 한다 .

황화퇴전투에서 흑치상지는
돌궐의 쿠틀록과 원진 등을 맞아 일대접전을 펼친다,

흑치상지는 이 전투에서 돌궐족을
거의 전멸시킨다 .
달아나는 적을 40리나 추적해,
북쪽 사막지대로 쫓았다 .

당대에 계속 승리를 거두었던 장수는 소수에
불과하다. 오직 흑치상지만이 모든
역사기록중에서 볼 때 한번도 진 적이 없다 .

당나라에 입당한 이후, 30여년동안 단 한차례의 전투에서도 진 적이 없다
그것도 당나라의 변경만을 돌며 당의 골칫거리 토번과 돌궐을 막아냈던 장숩니다.

당의 군사조직은 중앙의 12위가 전국을 통치하는 방식이었습니다 .
이 12위의 우두머리가 바로 대장군이었다 .
우무위위대장군이라면 적어도 당의 군부서열 12위안에 드는 높은 자리인데 흑치상지가 이자리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흑치상치는 그당시 측전무후가 자신의 권위를 다지기위해 수많은 신하.장수를 참살하는시기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살당하였다.

신망이 높은 신하와 장수를 토사구팽식으로 제거한것이다.

당시 신당서에는 측전무후에 의해 죽임을 당한 신하들이 한페이지에 몇명식이나 기록돼 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지 10년뒤 ,
흑치상지는 아들 준의 노력으로
드디어 누명을 벗게 된다 .

준은 아버지의 누명이 벗겨지자
곧바로 아버지 묘를 북망산으로
이전할 것을 건의한다 .(묘지석내용)

측천무후는 이를 흔쾌히 허락한다 .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지
10년이 지난 699년 ,
흑치상지는 드디어 북망산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

---참고--- 흑치가문이 대대로 다스리던 흑치(검은이빨)이란 지역은 지나인 역사학자들은 지금의 광동성,지역이라고 추정한다.그이유는그지역에 나는 열매중에 오랜기간 씹으면 이빨이 검어지는 열매가 있다고 하고 그지역주민들은 할아버지대까지 이빨이 검은분이 종종 있었다고 증언한다.. 결국 흑치(검은이빨)라는 지명과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지요.즉 백제가 중국대륙의 동쪽해안지방과 중국남부해안지역및 일본에까지 이르는 해양세력이었다는 것을 밝혀주는 내용입니다..백제가 대륙에서 활동하고 존재했다는사실은 수많은 지나족의 정사및사서에조차 기록돼어져잇는 사실이고 일본이 백제의 영역이었다는것과 이번에 흑치상치의 비밀이 풀림으로써 광동성.복건성.대만지역에 까지 세력을 뻗친 강력한 해양세력 이었다는 것이 확인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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