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성익 종인 과장(감사원 부이사관) 승진, 2."한양장학생" 출신 이화여대 로스쿨 조 균석 교수, 3.준규(俊奎, 27世, 양경공파) 종인 제14회 변호사 시험 합격, 4.조상균(祥均, 29世, 양경공파,박사) 존스홉킨스 대학 분자생물화공학 교수
1.성익 종인 과장(감사원 부이사관) 승진 --성익(26세, 가천재공파)--
성익 종인은 父 茂行님의 長子로서 용인 출생, 슬하에 1남 2녀가 있다. 수원의 유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섬유공학과에서 학사학위, 美國의 명문 Pittsburgh 大學院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제47회 행정고등고시 합격하였다. 당시 이공계 학사 출신이 미국으로 유학하여 인문사회 전공으로 바꾸어 석사 학위 취득도 어려웠지만, 전공자들도 힘겹게 합격하는 행정고시에 쉽게 합격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었었다. 출신학교(高⦁大)에서도 축하의 인사가 끊임없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성익 종인이 학업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고교 때 극기훈련을 받으면서 공부가 가장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다. 그 후 학업에 대한 재미와 성취감를 느끼면서 학부에서 이공계는 물론 인문계 분야도 힘들이지 않고 미국유학 길에 올라 명문 피츠버그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고시에 패스하여 2004년 감사원에 입사하여 前 감찰담당관실 감찰팀장, 자치행정 감사국 제1과, 행정안보강사국 제2과 심의실 조정담당관실, 국방감사단 제2과, 특별조사국 제1과, 산업금융감사국 제3과 등에서 이공계의 기술력에다 우수한 행정능력을 발휘하여 現在는 감사원 과장(심의실 감사 품질 지원관)으로 재직 중이다. 동기 중에서는 그 승진이 선두를 차지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종인이다. 우리 한양조문의 자랑스런 인물이 아닐 수 없다.
2.-옷깃만 스쳐도 전기 잡는 소자 나왔다,-- 한국세라믹기술원의 선임연구원인 성범[순형(25세 양경공파)종인의 장남]군이 최고의 논문으로 선정되었다.
스마트폰을 충전할 필요가 없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 답이 에너지 하베스팅에 있다.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약간의 움직임만으로도 전기를 만들어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도 있다. 아이폰 SE2가 최신 AP를 탑재하고 출시되었음에도 너무 낮은 배터리 효율 때문에 구입을 망설이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은 배터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전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조성범 한국세라믹기술원 가상공학센터 선임연구원과 방창현 성균관대 화학공학 및 고분자공학부 교수 공동연구팀은 머리카락을 닮은 나노 구조물을 이용해 마찰전기 에너지를 쉽게 모으는 소자를 디자인했다고 13일 밝혔다.사물인터넷(IoT)과 웨어러블기기 등 저전력 전자기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체열로 충전되는 스마트워치나 사람이 지면을 걸을 때 생기는 압력으로 충전되는 가로등 등 일상에서 버려지는 에너지를 모아 전원으로 쓰는 ‘에너지 하베스팅’ 기술도 주목받고 있다. 한국연구재단 제공연구팀은 모든 방향의 움직임을 수직 방향으로 바꿔주는 머리카락 모양의 나노구조물을 마찰전기 소자 위에 붙이는 방식을 제안했다. 기둥 모양의 나노 구조물이 수평 방향의 힘에 따라 휘면서 수직 방향으로 힘을 전달하게 된다.연구팀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구조체에 힘이 집중됐다 분산하는 고정에서 힘을 수직으로 전달하는 것을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만든 소자는 옷깃이 흔들릴 정도의 작은 바람에도 마찰전기를 유도할 정도로 에너지 효율이 향상됐다. 옷감에 소자를 부착하고 측정한 결과 지폐를 팽팽하게 펼 때 드는 힘의 5분의 1인 0.2파스칼(Pa)에서도 소자가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양조문 종인의 쾌거라 할 수 있다.
3."한양장학생" 출신 이화여대 로스쿨 조 균석 교수 보답으로 야산 장학금 출연 조균석 교수는 양경공파(25世)로 경북 영양군 일월면 가곡(가마실)에서 태어났다.
교사였던 부친 근무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영덕과 인천에서 보내면서 성장하였다. 인천 제물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하여 4학년 재학 중에 사법시험(제22회)을 합격한 수재로 이름을 날렸다. 22년간 검사(서울남부지검 차장검사, 김천지청장 등)로 봉직하였으며, 외교관(주일대한민국대사관 법무협력관)으로 다양한 경력도 쌓았다. 퇴직 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8년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로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학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조교수는 형사법 분야의 최고 인기 학술서로 정평이 나있는 ‘형사소송법’을 저술하였으며 한국형사판례연구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는 등 형사법 분야의 국내 대표적인 전문가이다. 2014년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 비리를 감찰하는 특별감찰관 후보로 추천을 받았지만 사양하기도 하였다. 조교수는 대학 시절 병참공파 종회 장학금과 현암장학금을 받아 선조에 대한 감사함을 늘 잊지 않고 빚진 마음으로 생활하던 중 2016년 ‘한양조씨 병참공파 장학생 친목회’ 창립멤버로 참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병참공파종회와의 교류가 잦아지게 되고, 병참공파종회 장학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고 있다. ‘한양조씨 병참공파 장학생 친목회’ 초대회장을 맡았던 조태열당시 외교부 차관에 이어 2대 회장으로 2017년에 취임하여 현재까지 한양장학회 회장을 맡아 봉사하고 있다. 그동안 매년 4회의 모임과 유적지 탐방을 통하여 회원 간의 친목도모와 종친간의 정을 나누는 일에 앞장서 친목회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2018년부터 현재까지 매학기 ‘야산장학금’으로 병참공파종회에 장학금을 출연하고 있다. 야산장학금의 ‘야산(冶山)’은 그의 증조부(휘 秉林 22世 : 1861-1928)의 호이다. 야산공은 덕과 학문이 높아 향리(경북 영양 가곡)에 야산정사(冶山精舍)를 지어 널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사후에 공을 추모하는 학계(學契)도 만들어졌다. 조부(휘 禧容, 23世)은 영양 교육감을 지냈고, 부친(휘 鳳基, 24세)은 고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하여 대대로 교육계에 종사하셨다. 이처럼 누대에 걸쳐 학문적 가풍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선조들의 음덕(蔭德)임을 그는 되새기고 있다. 최근에 정암 조광조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졌지만 우리 종인들이 한국 선비의 표상인 정암 조광조 선양에 너무 소홀했던 점을 자성하면서 앞으로 ‘정암 조광조 기념사업회’ 나 ‘학술재단’이 만들어져 정암사상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고 소회를 밝혔다.
4.* 12월의 인물은 해마다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이 벌어지는 연말을 맞이하여 "근검절약으로 만석꾼이 되어 흉년의 굶주린 백성들에 곳간채 다 내 준 자인고 할아버지(16세조 휘 륵)"로 하였다.
자린고비로 잘 못 알려진 자인고 할아버지 “베풀되 자랑하지 말라” 자신은 천정에 매 단 굴비보며 맨밥 먹고 흉년의 굶주린 백성엔 곳간채 다 내줘 우리는 훌륭한 조상을 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아울러 그 조상의 행적이나 사상을 본 받기를 원하고 있다. 흔히 자랑스러운 조상이라고 하면 높은 관직에 있었거나 학덕이 뛰어난 인물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근검절약을 실천한 인물로 평가되면서 세간에서는 「자린 고비」로 잘못 알려진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자린 고비하면 누구나 다 잘 아는 구두쇠나 인색한 사람의 대명사로 알고 있다. 이런 자린 고비가 전설적인 인물이나 어떤 문학작품 속의 주인공이 아니고 조선 시대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자린 고비는 충정공〔忠靖公 5세조 휘 인옥(仁沃)〕파의 16세손으로 휘는 륵이고 호는 자인고(慈仁考)이다. 자인고는 1648년 충북 음성군 금왕면에서 참봉공〔參奉公 휘 유증(惟曾)〕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고 근검절약으로 마침내 만석(萬石)꾼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지독한 구두쇠라는 말을 주위 사람들로부터 수 없이 들었을 것이다. 자인고에 얽힌 대표적인 일화는 천정에 굴비를 매달아 놓고 이것을 쳐다보기만 하고 그냥 맨 밥을 먹었다는 것과 하루 세끼 식사에 두 가지 이상의 반찬을 올리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다. 깨 3천석을 수확했다는 큰 부자였지만 호화사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검소한 생활로 평생을 마쳤다고 한다. 자인고의 또 다른 모습은 그의 말년에 잘 나타났다. 숙종 때 영호남 지방에 대흉년이 들자 평소 곳간에 쌓아 두었던 많은 곡식을 수백대의 우마차로 사흘동안이나 실어날라 기근(饑饉)이 든 지역의 백성을 굶주림에서 구했다. 이 일로 나라에서 세 번이나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끝까지 사양하였을 뿐 아니라 사후 증직도 받지말고 묘소에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런데 1995년 가을 후손들이 자인고의 덕을 기리기 위해 충북 중원군 신니면 대화리에 있는 그의 묘소에 비(사진)를 세웠다. 자인고는 1714년 67세로 생을 마치면서 “베풀되 자랑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물질 만능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자인고의 근검절약 정신, 헛된 명예와 권력에 연연하지 않는 선비정신, 그리고 애써 모은 재물을 기꺼히 베푸는 나눔의 미덕을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자인고라는 자랑스러운 아호(雅號)가 자린 고비로 바뀐 까닭은 앞서 말한 것처럼 큰 흉년의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된 경상도 사람들이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자비를 베풀고 작고하신 어른의 비」라는 뜻의 자인고비(慈仁考碑)를 자기네 고장에 세웠는데 이것이 음이 비슷한 자린고비(자吝考碑, 작고하신 인색한 아버지의 비석)로 엉뚱하게 와전(訛傳)되었기 때문이다.
5.청백리(淸白吏)란 염근리(廉謹吏)라고도 하며 고려시대는 염리(廉吏)로 불렸다. 청백리란 청귀(淸貴)한 관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품행이 단정하고 순결하며 일신은 물론 가내까지도 청백하여 오천(汚賤)에 조종되지 않는 정신을 가진 관리를 말한다.
청백리 정신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청렴(淸廉)은 탐욕(貪慾) 억제, 매명(賣名)행위 금지, 온화한 성품 등을 내포하고 있으며 백의민족의 사상과 예의로 전통적 민족정신의 이상적인 관료상이다. 전통적 민족정신이란 단군 이래 홍익인간 윤리관과 애국애족의 국가관에 바탕을 둔 삼국시대 화랑정신, 고려와 조선의 구국항쟁과 의병활동으로 계승 발전했다. 『고려사』에는 유석(庾碩), 왕해(王諧), 김육석(金六錫), 최석(崔碩), 정운(鄭云), 윤해(尹諧), 최영(崔塋) 등의 청백리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는 『전고대방(典故大方)』에 218명, 『청선고(淸選考)』에 186명이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 청백리는 유교적 지도이념과 주자학적 실천수행에 철저했던 인물들이다. 청백리들의 공직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며,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을 중요시했다. 관리 중에 청렴결백한 자를 의정부, 육조의 2품 이상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수직들이 추천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아 선정하였으며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 위해 마련되었던 관기숙정(官紀肅正)의 제도이다. 청백리에 녹선되면 자손까지 특혜를 줌으로써 자손들은 조상의 음덕으로 출사의 특전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의 청백리222』(조성린편저, 조은출판사)에 의하면 청백리는 총 114개 문중에서 222명이 배출되었다고 되어있다. 청백리에 녹선된 우리 문중의 선조님에 대해 알아보자. 조원기 - 한평생 나물과 오이로 사신 청백리 문절공(휘 元紀, 12세, 양절공파, 1457-1533)은 연산군, 중종대의 문신으로 자는 이지(理之), 호는 돈후재(敦厚齋), 시호는 문절(文節)로 정랑 충손(衷孫)의 아들이며 정암 조광조(靜庵, 휘 光祖, 1482∼1519)의 숙부이시다. 1483(성종14)년 사마시, 1496(연산군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시어 홍문관 수찬으로 재직 중 연산군이 사초(史草)를 보고자했으나 사관(史官)으로서 불응하다 파직 당하셨으며 1504년 사초문제로 다시 횡성에 유배되셨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형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셨다. 함경도 경원부사로 있을 때 백성과 이족(異族)들이 공의 선정이 고마워 부른 금속마양(金粟馬羊 금을 곡식처럼 말을 양처럼 여김. 관리가 청렴하게 정무를 수행함을 이르는 말)의 풍요가 조정까지 들렸다고 한다. 좌부승지로 재직 중 청백리에 뽑히셨다. 관직에 있으며 "청백리"에 녹선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분으로 강직 청빈한 생활로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그 뒤 대사헌, 이조참판, 전라도 관찰사, 형조·공조판서, 좌참찬을 지내셨다. 조카인 문정공의 명성이 높아지자 "경계하고 삼가라"고 타일렀으며 생질인 홍언필이 좌천당했을 때 쓴 편지의 "호랑이를 탔다가 몸을 다치지 않고 내리기는 어렵다"는 문구는 오늘의 공직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명언이다. 판서에 올라서도 공의 집은 오막살이로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으며 부엌에는 소금과 나물밖에 없었으며 사람들이 물건을 보내와도 의리에 맞지 않으면 사양하셨다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공은 일생을 나물과 오이, 간장도 아닌 소금 간을 한 나물국만을 반찬으로 드셨다. 일화 중에 그가 승정원 집무공간을 직접 청소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동료가 "이렇게 깨끗한 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어울리겠소?"라며 투덜거렸다. 이에 공이 "오이를 깎아 먹으면 좋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해 웃었다고 한다. “공이 벼슬에 있을 때 녹(錄)과 당봉(堂封, 국가에서 음식이 내려오면 관청에서 몫을 나눠주는 것)에서 남은 것은 고아나 과부들에게 나눠주고 자기 먹을 것은 항상 부족하였다.”고 『연려실기술』과 『해동잡록』에 전한다. 지방 관리로 있을 때도 백성들의 재물을 사사로이 빼앗거나 뇌물을 받는 일이 없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공이 연산군이라는 폭군 아래서 관직을 하셨는데도 후대에까지 귀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청빈함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 때문일 것이다.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 연산군에 사초(史草) 열람거부로 파직, 유배 명신록(名臣錄)에 오르고 청백리에 뽑혀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인 갑신단권보 편찬 공(公)의 휘는 원기(元紀), 자는 이지(理之), 호는 돈후재(敦厚齋)이다. 조선조의 개국(開國) 정사(定社) 좌명(佐命)공신인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양절공(良節公) 휘 온(溫)이 증조부요, 이조참판에 증직된 의영고사(義盈庫使) 휘 육(育)이 조부요, 예조판서에 증직된 성균관 사예(司藝) 휘 충손(衷孫)이 부이다. 판서공이 남상명(南尙明)의 따님에 장가들어 1457(세조 2)년에 공을 낳았다. 공이 9살 때 장기를 두고 놀이에만 치중하자 어머니로부터 한탄하는 말을 듣고 반성한 뒤 학문에 정진하여 1483(성종 14)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공은 학문을 함에 있어 이치(理致)와 경의(經義)를 깊이 탐구하고 사장(詞章)을 일삼치 아니하였으며 문장을 함에는 반드시 자기적인 창의에서 나오고 옛 사람의 한 마디 말도 그대로 쓰는 법이 없었다. 1496(연산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수찬(修撰), 봉상시(奉常寺) 첨정(僉正), 경원부사(慶源府使), 대사간(大司諫), 좌부승지(左副承旨),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절사(聖節使),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 형조판서(刑曹判書),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을 지냈다. 1500(연산군 6)년 여름 평안도 변경(邊境)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해랑도(海浪島)에 들어가 소굴(巢窟)의 적(籍)에 오르고 사세(事勢)가 장차 점점 오만하여 염려가 중국에까지 미치게 되었을 때 공이 부장(副將)으로 그들을 붙잡아 데려왔다. 임금이 감탄하고 아름답게 여기어 칭찬하기를 오래하다가 숭정(崇政)의 계직(階職)으로 특진(特進)시킬 것을 명하여 의금부(義禁府) 판사(判事)가 되었다. 공의 세 번 특명이 모두 청렴한 절조로써 포상을 받게되니 세상에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임금도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사초(史草)를 연산군이 보려고 제출을 명하였으나 이에 불응하여 파직(罷職)을 당하고 유배(流配)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두려워 하였으나 공은 움직이지 아니하였고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충효(忠孝)스럽고 절약하고 검소한 것을 좋아하였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모심에 홀로 여막(廬幕)에 거처하고 아침 저녁으로 슬퍼하며 3년을 여막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재상(宰相)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면서도 무너지는 집에 담장은 낮아서 겨우 비바람을 가리고 부엌에 있는 것이라곤 소금과 나물에 그쳐 남들이 이것을 보고 견디지 못해 하는데도 공은 즐거워하고 싫어하지 아니하였다. 사람이 한 물건을 보내옴에 조금이라도 마땅치 않으면 반드시 사양하여 받지 않고 마치 장차 자신을 더럽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니 그 평소에 밝게 행함이 그러하였다. 평생 맡은 바 국사에 성심을 다하여 비록 혹독한 추위와 성(盛)한 더위에도 일찍이 단 하루라도 휴가를 낸 적이 없으니 모든 동료와 관리들이 공을 보고서 부지런하다고 일렀다. 관속(官屬)들의 비용으로 쓰이는 물자가 집에 들어오면 봉해 두고 집에 들이지 아니하였다. 반드시 먼저 가난한 자매들을 돌보고 집안의 노인 과부 외로운 어린이에게까지 미치게 하여 집에서 스스로 보양할 것은 항상 넉넉지 못하였다. 관청에서 퇴청(退廳)해서는 항상 작은 서재(書齋)에서 서사(書史)를 죽 훑어 보고 해가 저물면 지팡이를 잡고 신을 끌면서 작은 못을 굽어 보기도 하고 두어 떨기 국화를 대하면서 읊조리고 거닐면서 마치 조물주와 더불어 벗하는 듯 하고 그 흉회(胸懷)가 호연하게 넓으니 공의 즐거움을 하는 것이 어찌 간결하고 소박한 것이 아니었던가. 공은 조카인 광조(光祖)의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 늘 이를 심히 근심하며 편지를 보내어 경계토록 하였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정암(靜菴)이 사사(賜死)됨에 충격을 받고 승지공〔承旨公, 양경공파 10세조 휘 세정(世楨)〕과 함께 족보를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한양조씨로서는 최초의 족보이며 우리나라의 민간 족보로는 제2호를 기록한 자랑스러운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 자세한 내용은 이 홈페이지 자료실에 있는 종보 제22호의 『한양조씨족보수찬사 ① 갑신단권보』를 참조 바람)이다. 1533(중종 28)년 77세를 일기로 타계(他界)함에 임금이 이를 슬퍼하고 아깝게 여기어 정원(政院)으로 하교(下敎)해 말하기를 「공의 청백(淸白)은 천성(天性)에서 나와서 늙도록 양(襄)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가상하고 아름답도다.」하고 2일간 조회를 철폐하고 의례적인 부의(賻儀) 외에 특별히 면포(綿布)를 하사해서 장사와 제사에 쓰이게 하였으니 또한 근래에 없던 바이었다. 문절(文節)의 시호를 받고 명신록(名臣錄)에 올랐으며 조문절공유고(趙文節公遺稿)가 있다.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생질인 영상(領相) 홍언필(洪彦弼)이 묘비명(墓碑銘)을 지었다. 부인 금성인(錦城人) 나씨(羅氏)는 현감(縣監) 성손(誠孫)의 따님으로 공이 벼슬이 없는 선비 때로부터 공경해 섬기기를 어김없이 하여 능히 가난한 것을 평안이 여기고 담백한 것을 기뻐하였다. 자녀가 없어서 서자(庶子)를 어루만지고 정성껏 돌보니 일가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공보다 먼저 돌아가셨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하계리에 합장하였었으나 화성시 봉담읍 세곡리로 옮겼다(사진은 갑신단권보:한양조씨족보 복사본임).
6.충효(忠孝)와 절의(節義)의 백세사표(百世師表) 가천재공〔嘉川齋公, 6세조 휘 사(師)〕은 시조 중서공(中書公)의 6세손으로 양렬공〔襄烈公, 휘 인벽(仁璧)〕의 넷째 아드님이다.
양렬공은 처남인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수차례 출사(出仕)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굳게 지켜 강원도 양양으로 내려갔다. 1628년(인조 6) 양양부사 조위한(趙緯韓, 양절공의 8세손)과 지방 유림이 뜻을 모아 양양 조산리에 동명서원(東溟書院)과 충현사(忠賢祠)를 세워 양렬공을 봉향하였다. 가천재공의 사적은 족보와 조선왕조실록에 약간 실려 있는 것 이외는 전해 오는 것이 별로 없다. 족보에 의하면 공은 태조 이성계의 생질로서 누차 벼슬길에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양렬공이 있는 양양으로 가서 오직 충절로 세상을 마치니 조정에서는 그 후 예에 따라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의 직책을 내렸다. 공의 행적(行蹟)은 삼은〔三隱 : 포은(圃隱), 목은(牧隱), 야은(冶隱)〕과도 뜻을 같이 한 충효와 절의로서 백세(百世)의 사표(師表)가 될만하다. 정종(定宗)이 일찍이 공의 중씨(仲氏)되는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휘 연(涓)〕에게 말하기를 “경(卿)의 아우 사(師)는 충효양전(忠孝兩全)했다” 고 하였다. 공이 동명서원 충현사에 배향된 연혁은 다음과 같다. 1628년 동명서원 창건 당시에는 양렬공 한 분만 봉향되었으나 1686년 서원이 소실(燒失)되고 백년이 지난 1786년 경북 봉화에 병참공파 후손이 서원을 재건하여 양렬공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병참공파의 단구공〔丹丘公, 11세조 휘 정(貞)〕과 공을 나란히 배향한 사실이 1849년에 간행된 기유보(己酉譜)에 전해 온다. 그 후 봉화의 서원이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81년 양양에 서원이 복원되면서 충현사에 공이 배향되고 있다. 공께서는 한 때 살던 곳을 와선대(臥仙臺)라 이름하고 가치천(嘉致川)에서 매일 유유자적(悠悠自適)함으로써 호를 가천재(嘉川齋)로 삼은 것이나 공의 재실 편액(扁額)을 치천재(致川齋)로 이름붙인 것도 다 여기에서 연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공은 1432(세종 14)년 음력 10월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공이 유언하기를 “나 죽은 후에 포은(정몽주) 묘소 근처에 묻어 지하에서라도 따라 노닐게 해 달라” 하였는데 자손들은 그 유지(遺志)를 받들어 이와 같이 장례를 모시었다. 이로 보면 공은 포은을 인생과 학문의 선배로서 또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평소 사숙(私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의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언양(彦陽) 김씨(金氏)로 대사헌 계생(繼生)의 따님이다. 큰 아들 휘 맹발(孟發)은 현령, 둘째 휘 중발(仲發)은 현감, 셋째 휘 계발(季發)은 녹사(錄事)이다. 제향은 음력 10월 4일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묘소에서 받들고 있다.
7.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전환기에서 나라에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그 자손들이 번창하여 조문(趙門)을 빛낸 4세조 용성부원군으로 하였다.
위대한 선조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원(元) 지배하에서도 평생을 고려 조정에 충성 4세조 용성부원군〔휘 돈(暾), 초휘(初諱)는 우(祐)〕은 1308년 (고려 충렬왕 34) 쌍성(현 영흥)에서 출생하여 1380년(우왕 6) 용진에서 돌아가셨다. 증조부는 시조공〔휘 지수(之壽)〕, 조부는 총관공〔휘 휘(暉)〕으로 3세조 부원수공〔휘 양기(良琪)〕과 정부인(貞夫人) 능성(綾城) 박씨(朴氏)와의 사이에서 2남 1녀중 차남으로 태어나셨다. 장남 용천부원군〔龍川府院君 휘 림(琳)〕은 쌍성총관을 물려 받으셨는데 동국문선(東國文選)에 의하면 품성이 호유(好儒)하여 시서(詩書)에 통달하고 예의를 숭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외동 따님은 후에 조선 태조가 된 이성계(李成桂)의 조부인 춘〔椿, 도조(度祖)로 추존(追尊)되었음〕의 첫 부인 박씨(朴氏)가 자춘(子春)을 낳고 돌아가심에 후 부인이 되셨다. 여진지역으로 도망간 160여호의 백성들 데려와 공(公)은 약관(弱冠)이 못되어 충숙왕을 섬겼는데 아전(衙前)과 백성이 세금을 포탈하고 여진지역으로 자주 도망하여 들어가므로 여러번 해양〔海陽 현 길주(吉州)〕에 파견되어 160여호의 도민(逃民)을 데려 온 공로로 충숙왕이 말과 비단을 내리고 감문위(監門衛) 낭장(郎將), 좌우위(左右衛) 호군(護軍)이 되었다. 1356년 공민왕이 원(元)의 세력이 쇠약해진 틈을 타 쌍성총관부를 수복코자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 병마사로, 대호군(大護軍) 공천보(貢天甫)와 종부령(宗簿令) 김원봉(金元鳳)을 부사(副使)로 하여, 강원도 존무사(存撫使) 이인임(李仁任)과 더불어 관군을 이끌고 가서 치도록 하였다. 이 때 조카인 총관 소생(小生)에게 아들 인벽(仁璧)을 보내 백호(百戶) 조도적(趙都赤)을 비롯한 다수의 쌍성인을 귀순시키는 등 동북면병마사 유인우에 적극 협력하여 철령이북 9주(州) 10진(鎭)을 회복하였다. 그 공로로 예빈경(禮賓卿), 태복경(太僕卿)이 되어 개경(開京)의 저택을 하사받았다. 이 때 이성계의 부 자춘(子春)은 쌍성에서 천호(千戶)로 있다가 고려 조정에 들어와 소부윤(小府尹)을 제수(除授)받고 유인우와 같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다. 공민왕 9년 서북면병마사로 왜구를 격퇴하고 이듬해에 동북면병마사로 임무를 수행하다 사거(死去)하였다. 쌍성수복에 큰 공, 홍건적 격퇴로 일등공신 공은 1359년 지병마사(知兵馬使)로 서경(西京, 현 평양)에 출몰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여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가 되었고 1361년에는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올라, 홍건적의 재침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복주(福州, 현 안동)로 남행하는 왕을 따라 행궁숙위(行宮宿衛)의 책임을 맡았다. 그 후 해주목사(海州牧使), 예의판서(禮儀判書), 검교밀직부사(檢校密直副使) 등을 역임하고 홍건적 격퇴의 공로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퇴임후 귀향시 아들들에 훈계 "왕실에 전력" 공은 1375년 용성부원군에 봉해지고 1379년 용진으로 돌아갈 때 4남 인옥(仁沃)이 따라가고자 하니 『우리 가문이 위태롭고 불안한 시국을 만나 자칫하면 선조의 제사도 겨우 터럭 끝만한 희망이었는데 공민왕의 보살핌을 과분하게 받아 일문(一門)이 보전되었으며 지위가 봉군(封君)에 이르렀다. 너희 형제들도 관(官)에서 모두 영달하였으나 백분의 일도 보답한 것이 없으니 너희들은 늙은 아비의 걱정은 하지말고 온 힘을 다하여 왕실을 받들라. - 치력왕실(․致力王室)』고 아들들을 훈계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공은 1380년 (우왕 6년) 돌아 가신 후, 추충익대보리찬화좌명공신(推忠翊戴輔理贊化佐命功臣)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판예의사사(判禮儀司事)에 증직되었다. 기라성같은 자손들, 조선의 명문 기반 닦아 군부인(郡夫人) 간성(杆城) 이씨(李氏)와의 사이에 4형제를 두셨으니 1자는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 양렬공(襄烈公) 인벽(仁璧), 2자는 검찬성공(檢贊成公) 인경(仁瓊), 3자는 검한성공(檢漢城公) 인규(仁珪), 4자는 충정공(忠靖公) 인옥(仁沃)이다. 그 뒤를 충절과 학행등으로 유명한 양절공 온, 양겨경공 연, 안정공 후, 가천재공 사, 부사공 순, 절효공 뢰, 참의공 재, 사평공 갱, 판사공 관 등 기라성 같은 손자들이 조선의 명문 한양의 기반을 닦았다. 양위분의 묘는 안변군 신모면 어유지 능척곡에 나란히 모셨다. 파주 양경공 묘역에도 북녘에 묘소가 2세조 총관공, 3세조 부원수공, 5세조 양렬공과 함께 공의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해마다 개천절인 10월 3일에 향화를 올리면서 위대한 선조의 유훈으로 살아가는 후손이 되기를 다짐하고 있다. 고 있다. <사진: 파주 덕은리에 있는 용성부원군의 제단과 비석>
8.준규(俊奎, 27世, 양경공파) 종인 제14회 변호사 시험 합격
2025년 4월 24일 발표된 제14회 변호사시험에서 준규(俊奎, 27世, 양경공파) 종인이 최종 합격했다.
준규 종인은 고려대학교 교육학과와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인천 한남관세사무소 대표 충섭(忠燮)의 아들로 병참공파 장학생 출신이다.
9.조상균(祥均, 29世, 양경공파) 논문 세계 유명 학술지 " Nature"등재
미국 스탠포드 의과대학 랩(심혈관연구소)에서 박사후 과정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조상균 종인은 지난 몇년 동안 '심장섬유증(cardiac fibrosis)' 치료를 위한 새로운 접근방식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여 그 결과물이 2025년 4월말에 발간된" Nature"지에 실렸다.
" Nature"지는 자연과학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술지이다.
작년에 존스홉킨스 대학 분자생물화공학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2025년 2학기부터 근무하게 된다.
조상균 종인은 조태열 외교부장관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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