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고을원님과 유배인으로 만난 문과 동방, 1644년 長興■▲심동구의 문집 <청봉집>에 실린 장녕시권 소서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3. 2.
반응형

■고을원님과 유배인으로 만난 문과 동방, 1644년 長興■

▲심동구의 문집 <청봉집>에 실린 장녕시권 소서

▲심동구의 문집 <청봉집>에 실린 장녕시권 소서

“갑신년(1644년, 인조 22) 4월 13일 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의 명이 있어 영해(寧海)로 유배되려 했으나 왕의 특명으로 유배지가 바뀌어 금오랑(金吾郞)이 장흥부로 고쳤다. 5월 3일에 나서서 (장흥)배소에 이르니 부사 오퇴이(吳退而, 오섬)가 맞아 주었다. 나는 성의 동쪽 기슭의 나이 든 관리 주억(周億)의 집에 배소를 정했다. 그해 9월 어머님의 상을 당했고, 10월 8일에는 다섯 살 되는 손자가 역질 때문에 죽었다. <후략> 기축년(1649년, 인조 27) 3월 21일에 장녕(長寧)의 적소에서 시권의 머리에 쓰노라.”

<조선왕조실록>에는 1644년(인조 22) 3월 21일 기사에서 장흥에 유배를 하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장녕시권 소서”에서는 4월 13일 영해 유배를 명받았다가 장흥으로 배소가 바뀌어 5월 3일에 출발, 장흥에 도착하여 부사 오섬(퇴이)이 맞아 주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의 동쪽에 있는 관리 주억의 집을 유배소로 하여 생활했음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글이 쓰여 진 기축년, 즉 1649년 3월까지는 장흥에서 유배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유배 온지 넉달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바로 이어 다섯 살 된 어린 손자까지 역질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화환(禍患)만 이어지고 6년이 되도록 유배는 풀리지 않아 그 사이 사이에 음영(吟詠) 한 것을 모아 시권으로 삼고 머리에 쓴 것이다. 외부에서 와서 장흥에서 6년여를 생활했던 심동구가 쓴 중요한 전라도의 기록이요 장흥 기록인 셈이다.

▲유배인 심동구가 오섬 장흥부사와 헤어질 무렵 지은 시 '別吳退而'

[김희태]
☞비난과 칭찬 어지러우니 내 어찌해야 하나,
본래 공론은 애정과 증오가 많은 것이어늘!
어버이 뵈며 효도치 못해 마음은 먹색되니,
지금 세상에 어질어 다른 무엇이 있을소냐!
◐(毁譽紛紛我奈何 훼예분분아내하)
◑(本來臺論愛憎多 본래대론애증다)
(省親非孝淸爲墨 성친비효청위묵)
(今世惟良果孰他 금세유량과숙타)

●開軒納微凉呼韻

氷難解欝扇無功。毒霧熏山火爇空。蹔取微凉何妙理。一軒開引竹林風。

碧沙督郵携酒來訪。醉中口占。

交契何論較淺深。天涯識面捴知心。覊人爛醉郵官酒。亂竹蒼蒼一院陰。

倒前韻

山影濛濛夕日陰。碧沙亭畔楚江心。孤臣去國輕秋葉。聖主恩同海嶽深。

 

비난과 칭찬의 어지러움. 공론의 애증. 효도못해 타는 마음. 어질다 한들......
무언가 대비된다. 한탄도 있다. 후회도 있다. 그렇다고 다 궂은 것만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언제 때 누구의 일을 형상화 한 것일까.

때는 1644년(인조 22) 8월께. 전라도 장흥에서 만난 두 사람. 오섬(吳暹, 1587~?)과 청봉 심동구(晴峯 沈東龜, 1594~1660). 그들은 문과 동방(同榜)이다.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유지하는데 핵심 기능을 했던 지식인 관료집단. 문과시험 합격자. 그 중에서도 한날 함께 입격한 사람들이라면 “동방”으로서 평생의 교류가 이어진다. 한데 한양과는 동 떨어진 천리길 장흥에서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우랴. 그런데도 행간에는 반가움만은 아니다. 왜 그럴까. 장흥도호부사와 유배객의 처지로 만났기 때문이다. 오섬은 장흥도호부사를 지내다 이임을 앞두고 있고, 청봉 심동구는 유배된지 넉달여. 반가움도 잠깐, 서로가 헤어질 무렵이다.

‘오퇴이와 이별하며(別吳退而)’라는 유배객 심동구의 시. 퇴이는 오섬 부사의 자이다. 우선, 그 시상을 헤아려 보자.

세상에는 헐뜻음과 칭찬함이 늘상 어지러울 뿐이다. 그 사이에서 나는 어찌해야 하나. 탄식이기도 하고, 과거 시험 동기 오섬 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새로운 자리로 떠난 명예로움을 부러워한다고 할까.

그런데 돌아 보니 공론이란 것, 즉 사간원과 사헌부의 탄핵「臺論」이란 것은 애정과 증오가 많을 뿐이라는 것이다. 잘못인 듯 하다가도 정의가 되고, 또 뒤집어지고. 시류와 시국은 애증이 교차하니 작별하는 친구에게 조심을 당부하는 듯. 아니면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니 회한에 겨운 듯.

시사(時事)에는 그렇다고 치고, 돌아보니 어버이를 보살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니 효라는 것은 꺼내지도 못할 수밖에. 어지러운 시사를 멀리하니 마음은 맑아졌다지만 어버이 그리면서 그 불효에 못 이겨 결국 마음은 타들어가 먹색처럼 되어 가고 있으니...

지금 세상에, 지금 사람들이 아무리 어질다 해도, 아니 나만이라도 아무리 어질게 살아 보려 한들 정말로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과연 그 누구와도 다르지 않을 손가 .

이제, 그들의 사연으로 들어가 보자.

청봉 심동구(1594~1660)는 조선시대 후기 1644년(인조 22)에서 1649(인조 27)년까지 장흥에서 6년간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살이 하면서 보고 만난 장흥 풍경과 사람들에 대해서 한권의 시집으로 엮었고, 그 전말을 담은 서문, ‘장녕시권 소서(長寧詩卷小叙)’가 심동구의 문집인 청봉집(晴峯集)에 실려 있다. 장령은 장흥(長興)의 ‘장(長)’과 수령(遂寧)의 ‘령(寧)’ 두 글자를 따서 장흥읍성을 장녕성(長寧城)이라 했다는 것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나오는 지명이다. 문림(文林)고을 장흥의 새로운 문학기록이 확인된 것이다.

‘장녕시권 소서’의 내용의 일부를 보자.

“갑신년(1644년, 인조 22) 4월 13일 밤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의 명이 있어 영해(寧海)로 유배되려 했으나 왕의 특명으로 유배지가 바뀌어 금오랑(金吾郞)이 장흥부로 고쳤다. 5월 3일에 나서서 (장흥)배소에 이르니 부사 오퇴이(吳退而, 오섬)가 맞아 주었다. 나는 성의 동쪽 기슭의 나이 든 관리 주억(周億)의 집에 배소를 정했다. 그해 9월 어머님의 상을 당했고, 10월 8일에는 다섯 살 되는 손자가 역질 때문에 죽었다. <후략> 기축년(1649년, 인조 27) 3월 21일에 장녕(長寧)의 적소에서 시권의 머리에 쓰노라.”

<조선왕조실록>에는 1644년(인조 22) 3월 21일 기사에서 장흥에 유배를 하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장녕시권 소서”에서는 4월 13일 영해 유배를 명받았다가 장흥으로 배소가 바뀌어 5월 3일에 출발, 장흥에 도착하여 부사 오섬(퇴이)이 맞아 주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의 동쪽에 있는 관리 주억의 집을 유배소로 하여 생활했음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글이 쓰여 진 기축년, 즉 1649년 3월까지는 장흥에서 유배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유배 온지 넉달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바로 이어 다섯 살 된 어린 손자까지 역질에 걸려 세상을 떠난다. 화환(禍患)만 이어지고 6년이 되도록 유배는 풀리지 않아 그 사이 사이에 음영(吟詠) 한 것을 모아 시권으로 삼고 머리에 쓴 것이다. 외부에서 와서 장흥에서 6년여를 생활했던 심동구가 쓴 중요한 전라도의 기록이요 장흥 기록인 셈이다.

장흥이 문림 고을로 잘 알려져 있는데,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는 장흥 출신, 장흥 사람들이 남긴 자료와 기록을 통한 “문(文)”이고, 다른 하나는 장흥 땅, 장흥 풍물, 장흥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文)”이다. 후자의 경우, 외지인에 의해 읽혀지고 형상화되어진 장흥의 경관이고, 그것이 다종 다양한 글로 남겨지기 때문에 문림의 한 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유배”라면 죄를 지은 사람을 일정한 곳에 격리하는 형벌로 알고 있다. 죄인이라서 여러 가지 제약을 받았고, 유배 지역 사람과도 교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유배인이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된 경우가 많아서 보통 말하는 형사사건의 잡범들과는 다르다. 문과에 급제하고 고위관직을 지내다가 일정기간 유배를 당하지만 복직 되면 또 다시 관로에서 뜻을 폈던 것이다.

청송 심동구의 경우, 1624년(인조 2년) 문과 증광시에 입격한다. 1644년 2월 사간(司諫)에 올랐다가 심기원(沈器遠)의 옥사에 친척으로서 연좌하여 장흥에 유배되었다. 심기원의 옥사란, 1644년 심기원이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임하게 되자 이를 기화로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을 추대하려는 반란을 모의하였다는 것. 이들 일파는 사사(賜死)를 당하는데 사실은 실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심동구는 심기원의 친척이라 해 장흥으로 유배를 당하니, 당시 사람들이 억울해 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그만큼 정치색이 짙었던 옥사요 그에 따른 유배였던 것이다.

심동구는 장흥에 유배 온 바로 그 무렵, 장흥도호부사 오섬(吳暹, 1587~?)을 만난다. 1644년 5월 10일께, 372년전의 일이다. 유배 죄인이었지만, 정치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유배인이 관인을 만나는 것은 그만큼 자유로웠다. 그런데 중앙 관인 심동구와 지방관 오섬의 의례적인 만남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문과 시험 급제 동기였던 것.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그것도 문과. 대과라 불리운다. 문관(文官)을 뽑던 과거시험인데, 제술(製述), 경서, 강론, 대책 따위를 시험 보았는데, 초시ㆍ복시ㆍ전시의 세 단계가 있었다. 문과합격자는 고위 관원으로,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활동하였고, 조선 왕조 오백년을 지탱한 핵심 세력이었다. 그리고 과거 시험 동기는 동방(同榜)으로 불리우면서 활동기간 내내 교류를 이어 갔다.*1)

그런데 한양에서 천리길 장흥에서 만났으니 그 정겨움이란 어떠했겠는가! 아마도 날 새도록 세상사, 국가사, 인간사를 논의 했을 것이다. 오섬 부사는 군위오씨로 제주출신. 1643년 8월에 장흥도호부사로 부임했고, 심동구가 유배왔던 1644년 8월까지 재임했다. 심동구가 유배온 5월부터 오섬부사가 이임한 8월까지 넉달여 장흥에 함께 있었던 셈이다.

오섬부사는 제주출신으로는 드물게 직부전시로 문과에 올랐다. 직부전시란 과거시험 3단계 가운데 두 번째 단계를 거치지 않고 마지막 절차인 전시(殿試)에 바로 응시할 수 있다. 그리고 장흥도호부사, 울산도호부사 따위 여러 곳의 지방관을 역임한다. 무장현과 보성군 두곳에는 선정비도 남아 있다. 남아 있다. 장흥부사 때의 선정비도 있다는 기록이 <장흥읍지>에 있으나 아직 찾지는 못하였다.*2)

<장령시권> 시집에 실렸을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교류시가 바로 ‘오퇴이와 이별하며(別吳退而)’라는 제목의 시이다. 퇴이는 오섬부사의 자(字)이다.

문제는 ‘장녕시권 소서’로 그 유래를 적은 원자료, <장녕시권(長寧詩卷)>의 행방이다. 심동구의 문집인 <청봉집>에는 모두 700여수의 시가 실려 있다. 이들 시가 지역이나 시기별로 분류되어 있지는 않고 시의 형식별로만 분류되어 실려 있다. 원래 <장녕시권>으로 편제된 시집이 있었는데, 문집을 편찬하면서 형식별로 분류하여 편차하지 않았나 싶다.

다만, <청봉집>을 보면 1644년 8월경 오섬의 장흥부사 이임 때 심동구가 지은 시 ‘오퇴이와 이별하며(別吳退而)’라는 시에 이어 장흥 관련 지명을 알 수 있는 시가 있다. ‘장흥 사인과 상대하면서 칠석날 밤에 지은 시(月夜 適與長興士人相對 士人占題 應呼輒成)’, ‘벽사도 찰방이 술을 가져와 취중 구점으로 지은 시(碧沙督郵携酒來訪 醉中口占)’ 따위이다. 칠석날 밤에 지은 시는 아마도 오섬부사와 함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앞에는 갑신년(1644년) 4월 20일 금산을 출발하면서 선조묘에 곡사(哭辭)하고 과천 삼현을 지나면서 그늘 아래서 비탄을 못 이겨 고향의 산을 돌아보며 지은 시가 있다. 4월 13일 유배지가 장흥으로 바뀌어 5월 3일에 출발해 장흥에 도착함으로 유배를 오는 길에 지은 시로 보인다. 이들 시가 <장녕시권>을 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장녕시권> 단독 시집의 행방을 찾는 일과 이를 국역 주석해 당시의 장흥 풍물과 경관을 복원하여 문림 고을의 장흥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이는 자료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오섬부사와 유배인 심동구가 치루었던 1624년의 과거시험 급제자가 38인*3)이었으니 이들이 장흥부사 오섬, 장흥 유배인 심동구와 교류한 장흥의 자료 등 지역자료도 찾아야 한다.

[주석]
1) 예컨대, 1542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동기생(하서 김인후 등)들이 대과에 급제한 뒤 가진 모임을 기념해 그린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희경루 방회도(喜慶樓榜枋會圖)‘(보물 제1879호, 동국대박물관 소장) 광주 희경루에서 방회를 기념한 계회도(契會圖)이다. 1546년(명종 1) 증광시의 동기생들이 1567년에 다시 만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다. 당시 광주목사(光州牧使) 최응룡(崔應龍), 전라도관찰사 강섬(姜暹), 전 승문원 부정자 임복(林復), 전라도병마우후 유극공(劉克恭), 전 낙안군수 남효용(南效容) 등 5인이다. 광주목 희경루 방회도에 대해서는 인지의 즐거움 126 참조.

2) 오섬의 행적에 대해서는 김희태, ‘조선후기 한 지방관의 행적 찾기-장흥부사 오섬(吳暹)의 사례-’, <장흥문화> 36, 장흥문화원, 2014. 53~74쪽참조. 오섬부사의 행정을 찾는데에는 제주의 군위오씨 종중(오승환님, 오태석님), 제주출신으로 장흥경찰서장을 지냈던 오영기님과도 인연이 있다.

3) 인조 2년(1624년) 갑자 증광방(增廣榜)은 모두 38인이다. 거주지별로 보면 경(京) 23인, 지방 15인다. 전라도 거주로 기록된 사람은 영광 신응망(辛應望), 구례 장희재(張熙載) 2인이다. 오섬(제주, 당시 전라도에 속함)까지 합하면 3인인 셈이다. 이들 37인과의 교류관계도 더 조사가 필요하다. 오섬과 문과 동방 38인 명단은 金堉(본관 청풍, 거주 京), 任絖(풍천, 경), 姜瑜(진주, 경), 李皞(신평, 청주), 金知復(영동, 상주), 申悅道(鵝州, 의성), 黃호(창원, 경), 洪宗海(남양, 경), 趙公淑(평양, 경), 辛應望(영월, 영광), 洪집(풍산, 경), 尹絳(파평, 경), 許啓(양천, 경), 裵尙益(경주, 영천), 金輳(해평, 성주), 權克明(안동, 봉화), 呂綽(성주, 성주), 元振河(원주, 경), 池德海(충주, 청주), 李大純(전주, 경), 鄭晋(초계, 경), 吳達升(해주, 경), 崔時煥(경주, 경), 睦性善(泗川, 경), 沈東龜(청송, 경), 鄭심(진주, 상주), 朴敦復(무안, 영해), 具鳳瑞(능성, 경), 吳暹(군위, 제주), 權심(안동, 경), 鄭百亨(진주, 경), 琴忠達(奉化, 영천), 李보(전주, 경), 李惟吉(전주, 경), 張熙載(구례, 구례), 鄭沇(延日, 경), 朴而立(고령, 한산), 李時稷(연안, 경)이다.(송준오·송만오 편저, <조선시대문과백서>(상)-태조~인조-, 삼우반, 2008, 440~442쪽 참조.)

[도움되는 글]
* 김희태, ‘조선후기 한 지방관의 행적 찾기-장흥부사 오섬(吳暹)의 사례-’, <장흥문화> 36, 장흥문화원, 2014. 53~74쪽
* 김상찬, 문림고을 장흥의 새로운 문학기록 확인-조선중기 장흥 유배인 심동구가 쓴 시집, 장령시권(長寧詩卷)-, <장흥타임스>(www.jhtimes.net) 2015년 03월 21일자.

원산 씨족문화연구소 | 고을원님과 유배인으로 만난 문과 동방, 1644년 장흥 - Daum 카페

 

고을원님과 유배인으로 만난 문과 동방, 1644년 장흥

고을원님과 유배인으로 만난 문과 동방, 1644년 장흥 김희태 비난과 칭찬 어지러우니 내 어찌해야 하나본래 공론은 애정과 증오가 많은 것이어늘어버이 뵈며 효도치 못해 마음은 먹색되니지금

cafe.daum.net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