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훈문학관지훈예술제★

■조지훈 선생님 탄신 백주년에 (1920(경신)년 12월 3일)/ 김인환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12. 9.

■조지훈 선생님 탄신 백주년에 / 김인환
작성일 2020-10-12 18:05:24

■Ⅰ.

◎조지훈 선생님은 음력으로 1920(경신)년 12월 3일, 양력으로 1921(신유)년 1월 11일에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注室)에서 태어나셨다. 주실(注室)의 한양조씨 종택에서는 영진의숙과 월록서당을 운영하고 배영학당을 설립하여 주자학에 기초한 유학의 전통과 국어 수학 과학 등의 새로운 교과목을 가르쳤다. 배영학당과 영양보통학교에서 초등교육 과정을 마친 조지훈 선생님은 가학으로 한학을 학습하는 한편 와세다 대학의 통신강의록을 통하여 중등교육 과정을 독학하고 1938년에 혜화전문학교 특과에 입학하여 1941년에 졸업하였다. 1939년에 》「고풍의상」과 「승무」, 그리고 1940년에 「봉황수」를 《문장》에 발표하셨고 1941년에 ◎월정사 불교강원에서 노자·장자 같은 외전을 가르치셨다. 해방 후 1948년 10월에 고려대학교에 부임하여 1968년 5월에 돌아가실 때까지 봉직하시면서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으로서 한국학 연구의 기본도서가 되는 『한국민족문화대계』를 기획하여 발간하셨다. 조지훈 선생님은 시인으로서, 학자로서, 지식인으로서 겨레의 후학들이 본받고 따라가야 할 전범을 보여주셨다. 우리 주위에는 어느 한 분야에서 존경받는 스승들이 많이 계시지만 조지훈 선생님처럼 문학과 학문, 이론과 실천, 사상과 행동 사이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던 대인을 만나는 것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여 1학년에 교양국어, 2학년에 시론, 3학년에 문예사조사를 조지훈 선생님께 배웠다. 학교 잡지 일로 성북동 자택(방우정사)을 찾아뵈면 대문을 나설 때까지 마루에 서서 바라보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조지훈 선생님은 한국의 전통교육이 형성할 수 있는 전인상의 최대치를 구현하여 보여주셨다. 선생님은 문학과 학문에 공을 들이시는 것과 똑같은 정성으로 나날의 삶에 공을 들이셨다. 조지훈 선생님에게는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만한 일화가 많다. 조선어학회 시절에 종로 2가 우미관 골목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종로 깡패들과 시비가 벌어졌다. 친구들은 모두 꽁무니를 빼고 선생님만 남아 깡패 두목과 맞붙게 되었는데 허약한 체격을 보고 상대방이 잠시 망설이는 사이에 술이나 한 잔 하고 싸우자고 하시고 막걸리 두 잔을 따라 그 중 한 잔을 마시고 소금을 입에 털어 넣으시며 자리를 뜨셨다. 당시에 종로 깡패와 싸워서 맞지 않은 유일한 시인이라는 이야기가 문단에 떠돌았다. 광복 직후 선생님과 몇 사람이 명동 성당의 주교관에서 노기남 주교를 만났다. 노주교가 지식인들의 의지박약을 비판하였고 지식인에게는 지옥의 불도 견딜 수 있는 의지가 있다는 선생님의 반박에 노주교가 이의를 제기하였다. 선생님은 성냥개비 대여섯 개를 움켜쥐고 불을 붙여 손등에 올려놓으셨다. 살이 타들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모두 외면하였으나 선생님은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려서 천천히 재를 불어내셨다. 좌우대립의 소용돌이 가운데 좌익 학생이 테러를 가하려고 한 적도 있었는데 선생님이 가만히 서서 바라보자 그 학생은 슬그머니 벽돌을 놓았다.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선생님은 "선생이 학생에게 맞을 수도 있다 맞았느냐 맞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다만 당당하게 맞았느냐 비겁하게 맞았느냐하는 것은 끝까지 따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1950년 9월 어느 날 대구 동성로에 있는 술집에 문인 학자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는 박목월 시인과 국어학자 이숭녕 교수도 있었다. 대구 시내에까지 포탄이 날아오던 때였다. 술에 취해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근처에 있던 무장 군인들이 들어와 "지금이 어느 때인데 고성방가냐!" 하고 호통을 치며 살기등등하여 총부리를 겨누었다. 선생님은 "너희들만 나라를 생각하는 줄 아느냐? 어디다대고 함부로 총을 겨누는 게냐? 조지훈을 죽이고 무사할 자 있으면 쏴봐라."하고 고함을 치셨다. 군인 한 사람이 방안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모두 혼비백산하여 방바닥에 엎드렸다. 그때 선생님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셨다. 그 군인은 선생님의 머리 위로 총울 쏘아대다가 제풀에 지쳐서 그만두었다. 후에 선생님은 그 군인의 감정이 격해 있었고 당신께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 위로만 총을 쏘았지 당신이 조금만 움직였으면 가슴에 총을 맞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Ⅱ.

◎문학창작과 학문연구와 사회참여의 세 분야에서 두루 탁월한 업적을 남기셨다는 데에 조지훈 선생님의 고유한 위상이 있다.

◎김소월과 김영랑에서 시작하여 서정주와 청록파에 이르는 계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가 된다. 조지훈 선생님은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시사를 연결해준 시인으로 한국시사에 기록될 것이다. 청록파를 중심으로 하는 계보 이외에 한국현대시사에는 이상화-이용악-유치환-이육사의 계보와 정지용-김광균-장서언의 계보와 김기림-이상-김춘수-김수영의 계보가 있다. 주류시의 특징은 전통적 운율을 현대화한 데 있다. 조지훈 선생님의 시에서는 운율이 주도소로 작용하고 있다. 「가야금」은 특별히 운율이 시의 전경에 드러나는 시이지만 겉으로는 산문시처럼 보이는 「봉황수」도 소리내어 낭독해 보면 정형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시이다. 운율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소설적 구성을 정교하게 조직하는 것도 조지훈 선생님 시의 특징이다. 「승무」는 춤추려는 찰나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무대를 약간 보인 후에 휘도는 춤의 곡절로 이어지고 달빛 아래 드러나는 의상의 선에 초점을 맞추면서 무대가 현실의 무대에서 환상의 무대로 바뀌고 동터오는 빛으로 종결된다. 「花體開顯화체개현」은 논리와 개념을 넘어서 존재의 실재를 탐구하는 현대의 禪詩선시이다. 박목월 시인은 사적인 자리에서 청록파 시인들의 차이를 "두진은 직선이고 목월 자신은 곡선이고 지훈은 원"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훈 시의 우아미에 적합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조지훈 선생님은 한국현대시의 방향을 고전시의 계승으로 설정하셨고 자연을 관조의 대상으로 삼아서 실재를 탐구하는 선시의 현대화를 한국현대시의 한 목표로 설정하셨다. 조지훈 선생님의 시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강렬한 현실의식이다. 「동물원의 오후」에 나오는 시인은 말과 이름을 빼앗긴 시대에 동물원에 가서 동물들에게 정성스럽게 쓴 시들을 읽어주며 철책 안에 갇혀 있는 것은 동물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6·25 동란이 발발하자 조지훈 선생님은 종군하여 10월에 평양에 다녀오셨다. 『역사 앞에서』는 "우리 시가 두 번 다시 이런 슬픈 역사 앞에 서지 않게 되기를 비는 마음(서문)"에서 역사의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기록한 시집이다.

◎조지훈 선생님은 가학으로 습득한 유학과 혜화전문에서 익힌 불교와 조선어학회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면서 체득한 국어학을 토대로 하여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를 전공으로 삼고 연구를 수행하셨다. 『한국문화사서설』(탐구당, 1964)은 원래 고려대학교 이인수 교수의 영역을 위해 1947년에 정리한 원고였다. 멀리 수메르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동북아문화는 시베리아계, 중앙 만주계, 중앙 몽골계, 서부 황하계, 남북한국계로 구성되어 있으며 巫敎무교와 선조 숭배를 공통의 생활양식으로 하는 문화이다. 칼 활 북 방울 거울 깃털을 소중하게 여기고 신화에 조류 난생 설화가 들어 있고 禪讓선양에 의해 왕위가 교체되는 것이 동북아시아 문화의 특색이다. 동북아시아 무교의 특색은 만신과 일신을 동시에 신앙하는 다신적 일신교이다. 원효는 『화엄경』을 다신적 일신론으로 해석하여 대중불교를 창시하였고 수운은 『중용』을 다신적 일신론으로 해석하여 동학을 창시하였다. 유럽에서 보수주의로 배척된 가톨릭이 한국 지식인들에게 진보주의로 작용하여 정약용의 민권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도 다신적 일신론의 변형능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지훈 선생님은 한국문화의 고유성을 최하층의 민중에서 찾으셨다. 최하층의 민중은 외래문화보다 기층문화에 의존하여 생활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에서 조지훈 선생님은 민속학을 한국학의 중심에 놓으셨고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한국문화사대계』를 기획하셨다. 민족자위항쟁사, 민족해방투쟁사, 민족사회운동사를 포괄하는 『한국문화사대계』 제1권의 『한국민족운동사』(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64)는 민족문화와 민주정치의 결합을 민족운동의 주류로 설정하고 모든 순국열사들의 역사적 위상을 적절하게 배치한 균형감각 때문에 이미 이 분야의 고전이 된 저서이다. 한국적 미의식의 기본범주를 우아미와 비장미와 관조미로 분류하고 우아미의 파격적 변형인 멋과 우아미의 비속한 변형인 골계미를 언어학적 방법으로 연구한 「멋의 연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멋의 의미를 분석한 대표적인 논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조지훈 선생님은 한국어의 어휘를 분석하여 멋의 형태미와 구성미와 정신미를 규정하고 우아미의 조화와 균형에 근거하여 못 박는 목수에게는 목수의 멋이 있고 대장간의 풀무쟁이에게는 풀무쟁이의 멋이 있음을 예로 들어 우아미를 생활과 예술에 두루 나타나는 미적 범주로 규정하셨다. 한국에에서 가치 판단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어는 '좋다'와 '됐다'이다. 반대말인 '궂다' '나쁘다' '더럽다'와 대조할 때 '좋다'의 의미는 순리 정상 조화 성취로 한정됐다. '됐다' 역시 '안됐다' '다됐다' 등과 대조하면 성취와 부응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됐다'가 끝장을 의미하므로 '됐다'는 덜 되거나 안 되거나 못 되지 않았으면서도 항상 다 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아름답다'를 '더럽다' '칙칙하다' '숭하다' 등과 대조함으로써 깨끗하다, 맑다, 예쁘다 등의 의미소를 추출하고 제 마음과 같고 제 마음에 맞는 상태, 즉 대상이 제 마음에 어울릴 때 느끼는 감정인 아름다움이 바로 한국적 미의식의 정통 이념인 우아미라고 규정하셨다. 아름다움은 고움과 멋으로 분화된다. 고움은 구체적이고 형태적인 면에서 아름다움보다 더욱 두드러지는 정적 미의식이며 멋은 고움의 규격성과 雅麗性아려성을 변형한 동적 미의식이다. 조지훈 선생님은 다시 세련·경청· 結構결구와 소박·典重전중·虛隙허극이라는 멋의 양면성을 분석함으로써 취미와 흥취에서 비롯하여 조화와 분별을 거쳐 자유와 자연에 이르는 멋의 의미분포를 해명하셨다. "멋지게 죽었다"는 용례가 보여주듯이 멋은 낙천만이 아니라 비장까지 내포한다. 조지훈 선생님에게 멋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지녀야 할 삶의 척도였다.

◎조지훈 선생님은 1937년에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김동삼 열사의 시신을 만해가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참례하셨고 오대산 월정사 외전 강사 시절에는 일제가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렬을 주지에게 강요한다는 말을 듣고 종일 痛飮통음하다 피를 토하셨다. 자유당의 부패와 공화당의 독재를 외면하는 지식인의 세태는 선생님을 한 시대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로 나서게 했다. 「지조론」은 위선적인 虛學者허학자들에 대한 질책이었다. 조지훈 선생님은 4·19 교수단 데모에 참여하여 한국교수협의회의 시국 선언서를 집필하셨다. 1965년 5월 5일자 조선일보를 통하여 조지훈 선생님은 박정희 대통령의 진해 발언을 학자와 학생과 기자를 적으로 돌리는 배제의 정치라고 비판하고 포섭의 정치를 권고하셨다. 이 글 때문에 정치교수로 몰렸고 늘 사직서를 가지고 다니셨다. 조지훈 선생님은 4·19의 민권혁명을 보충하는 민생혁명의 요소가 5·16에 있다고 인정하셨으나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는 정부가 강한 정부라는 신념 때문에 민생이 민권을 억압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역사의 상처를 당신 자신의 상처로 겪어내시면서 조지훈 선생님은 항상 현실을 토대로 하여 사물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 하셨고 멋을 척도로 하여 인간을 전체적으로 포착하려 하셨다. 조지훈 선생님의 문학과 학문은 영원히 민족문화의 보석으로 그 광휘를 잃지 않을 것이다.

⊙《PEN문학》(2020.7·8월호)

●[출처] 조지훈 선생님 탄신 백주년에 / 김인환|작성자 남사랑



한국문인협회와 유족과 함께 행사를 준비해온 주최 측은 “단순한 예산 삭감이 아니라 남양주시의 관심과 의지부족임을 확인하고 절망한다”며 “편중된 문화예술예산이 바로잡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남양주시는 “코로나 19로 대규모 인원이 모이는 행사가 어려운 만큼 금년에는 이정표 및 안내판 설치 등 묘역 정비에 힘쓸 계획”이라며 “장기적으로는 묘역이 포함된 화도읍 마석우리 222-1번지 일원을 공원으로 조성해 남양주의 품격 높은 지역 명소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라고 해명했다.

또 “심사에 공정을 기하고자 외부 전문가 4인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고 덧붙였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