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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한양조씨 청송부사공파(靑松府使公派) 조금(趙嶔), 영천입향조 자계 조문림(紫溪, 趙文琳)의 자계정(紫溪亭)■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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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 청송부사(靑松府使)공파 조금(趙嶔), 영천입향조 자계 조문림(紫溪, 趙文琳)의 자계정(紫溪亭)■

[정의]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하고, 조문림(趙文琳)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시의 세거 한양조씨다.

 

[연원]

한양 조씨(漢陽 趙氏)의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고려 중기에 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고, 독자를 두었는데,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 조휘(趙暉)이다. 또한 3세조 조휘(趙暉)의 아들 조양기(趙良琪)는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總管府/나중엔 ) 겸 좌부도원수(左府都元帥)를 지냈다. 4세조는 쌍성등처군민총관(雙城等處軍民總官) 조림(趙琳),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조돈(趙暾)이다. 조돈의 아들 조인벽(趙仁璧)은 아버지와 함께 홍건적(紅巾賊) 격퇴에 큰 공을 세웠다. 5세조때 쌍성등처군민총관(雙城等處軍民總官) 조소생(趙小生)이였고, 한양 조씨(漢陽 趙氏)로 처음 영천에 입향한 사람은 조인벽(趙仁璧)의 증손인 청송부사(靑松府使) 조금(趙嶔)(1490.04 1493.5 通政 재임 중 사망)의 셋째 아들 정릉참봉(定陵參奉) 자계공(紫溪公) 조문림(趙文琳)이다.

 

[입향 경위]

정릉참봉(定陵參奉)을 지낸 조문림이 영천으로 입향한 동기와 연대는 불분명하다. 다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공의 3종질인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게 되자 세태에 염증을 느끼고 은둔을 결심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문림이 영천을 우거지로 선택한 이유는 경주 양동(良洞)에 있는 처가를 왕래하면서 평소 산수가 좋은 영천시 자양면(紫陽面)을 눈여겨 보아둔 때문으로 추정된다.

 

[현황]

입향 이후 인물을 향지(鄕誌) 영양지(永陽誌)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로 부사(府使)에 이른 조금(趙嶔), 입향조 조문림, 충순위교위(忠順衛校尉) 조임(趙恁), 참봉(參奉) 조원서(趙元緖), () 공조참의(工曹參議) 조침(趙忱),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인 조종악(趙宗岳), 교수(敎授) 조종대(趙宗岱), 무신년에 창의를 한 조태한(趙泰漢), 호군(護軍) 조흥한(趙興漢), 철종(哲宗)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조문교(趙文敎), 학행으로 이름난 조석한(趙錫漢)과 조대경(趙垈慶), 조여정(趙如鼎), 조중교(趙重敎) 등이 있다.

한양 조씨는 주로 북한 지역인 황해도와 함경도에 큰 집성촌이 있으며,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 연정리,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와 유포리, 전라남도 무안군 석곡면 일원,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완전리와 영양군 일월면 주실 마을 등에 100여 호 이상 세거하고 있다. 영천 지역에는 금호읍 성천리에 조종악(趙宗岳)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으며, 청통면의 우천리에는 조종대(趙宗岱)의 큰아들 조홍적(趙弘績)의 후손이, 신덕리에는 조종대(趙宗岱)의 둘째아들 조홍기(趙弘紀)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영천시 자양면에는 입향조를 추모하는 자계정(紫溪亭)과 자계선생한양조공유허비(紫溪先生漢陽趙公遺墟碑)가 있으며, 금호읍 성천리에 조종악(趙宗岳)의 구암정(龜巖亭), 청통면 신덕리에 조종대(趙宗岱)의 자암정(紫巖亭), 청통면 우천리에 조홍기(趙弘紀)의 서은정(西隱亭)이 남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조종대(趙宗岱)

한자 조종대(趙宗岱)

이칭/별칭 경립(景立)자암(紫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종식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충신.

 

[가계]

조종대(趙宗岱)는 한양 조씨(漢陽趙氏),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하며, 영천으로 입향한 정릉 참봉(定陵參奉) 조문림(趙文琳)이 고조이다. 증조는 충순위(忠順衛) 조임(趙恁)이고, 조부는 참봉 조원서(趙元緖)이며, 아버지는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된 조침(趙忱), 어머니는 수원 김씨(水原金氏)로 의릉 참봉(義陵參奉) 김백윤(金伯胤)의 딸이다.

조종대의 자는 경립(景立), 호는 자암(紫巖)이며, 1569(선조 2)에 태어나 1635(인조 13)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첫째 부인은 성산 이씨(星山李氏)이며, 둘째 부인은 성주 이씨(星州李氏)로 이영문(李榮文)의 딸이다.

슬하에 25녀를 두니 아들은 조홍적(趙弘績)과 조홍기(趙弘紀)이며, 사위는 충의(忠義) 서준언(徐遵彦), 현감(縣監) 정사명(鄭嗣明), 생원(生員) 최유정(崔有珵), 통사(統使) 김시강(金是剛), 박희도(朴希道)이다.

 

[활동 사항]

조종대는 효성이 지극하고 힘써 학문을 닦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영정을 자양(紫陽) 기룡산(騎龍山)의 바위 구멍 속에 숨기니, 지금까지 그 바위를 성현암(聖賢巖)이라 일컫는다.

후에 포은의 영정을 입향조 정자인 계정에 옮겨 감추었으며, 벼슬은 교수(敎授)에 이르렀다.

 

[묘소]

조종대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삼귀리에 있으며, 손후익(孫厚翼)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신덕리에 후손들이 공을 추모하여 세운 자암정(紫巖亭)이 남아 있다.

 

조종악(趙宗岳)

한자 조종악(趙宗岳)

이칭/별칭 경앙(景仰)구암(龜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종식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의병.

 

[가계]

조종악(趙宗岳)은 한양 조씨(漢陽趙氏)로 조지수(趙之壽)를 시조로 하며, 영천으로 입향한 정릉 참봉(定陵參奉) 조문림(趙文琳)이 고조이다. 증조는 충순위(忠順衛) 조임(趙恁)이고, 조부는 참봉 조원서(趙元緖)이며, 아버지는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된 조침(趙忱)이다. 어머니는 수원 김씨(水原金氏)로 의릉 참봉(義陵參奉) 김백윤(金伯胤)의 딸이다.

조종악의 자는 경앙(景仰), 호는 구암(龜巖)이며, 1566(명종 21) 37일에 태어나 1633(인조 11) 103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부림 홍씨(缶林洪氏)로 습독(習讀) 홍대원(洪大源)의 딸이다.

슬하에 24녀를 두니 아들은 동추(同樞) 조홍훈(趙弘勳)과 증() 통정(通政) 조여훈(趙汝勳)이며, 사위는 호군(護軍) 오천인(烏川人) 정헌도(鄭憲道)와 시독(侍讀) 월성인(月城人) 이우계(李友桂), 서산인(瑞山人) 류현(柳現), 군수(郡守) 청도인(淸道人) 김시명(金是鳴)이다.

 

[활동 사항]

조종악(趙宗岳)은 인품이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일찍이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모에게 우리 집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아 왔으니, 어지러운 난국을 당하여 편히 있을 수 없습니다고 말하니, 노모는 장하다며 허락을 하였다.

조종악은 아우 조종대(趙宗岱)에게 노모를 부탁하고, 본군 의병진으로 가서 군무에 참여하여 적을 크게 무찔렀다. 의병장 권응수(權應銖)는 조종악의 지략과 용맹을 장하게 여겨 따로 청송진(靑松陣)으로 보내어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고 이로 인해 청송 지방이 병난(兵難)을 입지 않았다.

후일 조정에서 공훈을 기려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를 제수하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기록하였다.

 

[묘소]

조종악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기룡산(騎龍山)에 있으며, 이태일(李泰一)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성천리에 후손이 공을 추모하여 세운 구암정(龜巖亭)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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