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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조찬한(趙纘韓)의 '한양협소행 주증라수양(漢陽俠少行 走贈羅守讓)'▣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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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찬한(趙纘韓)의 '한양협소행 주증라수양(漢陽俠少行 走贈羅守讓)'▣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2. 5. 28. 09:43

[인문학 스토리] 용성(남원)의 성아래에서 우연히 만나 손을 잡고 서로 보며 옛적을 생각한다.

玄洲集卷之二 門人愼天翊攷 / 七言古詩 四十三首○詩集

漢陽俠少行。走贈羅守讓。


조찬한(趙纘韓)의 '한양협소행 주증라수양(漢陽俠少行 走贈羅守讓)'-
서울의 협객 나수양을 남원에서 만나다

나공(羅公)의 5 형제가 모두 평상시의 협객인데 수양(守讓)씨만 홀로 호남에 낙척(落拓)하여 나를 임실에서 보았다.
등불 아래에서 붓을 잡고 달리듯 써서 주다.

羅公五兄弟皆平時俠客,
而守讓氏獨落湖南, 見我於任實.
燈下把筆走贈.

漢陽昇平二百祀。都人士女殷且美。家家鍾鼎食如蟻。明粧耀日喧歌吹。三門之外稱俠窟。三鄭五羅唯其最。吐氣如虹聲若雷。大袴緩帶相徘徊。三月鶯花滿禁城。掠挾妖娥松峴隈。索酒酒肆醉如泥。鬪殺惡少如豚鷄。端陽令節好角觝。力如任鄙任顚委。武昌豐川許與李。高馬躍出鍾樓市。爭雄較悍挺劍合。聲勢拉霄風埃起。武昌許李似哮虎。名聲未出諸羅氏。是時季羅年最少。指揮衆俠如兒戲。殺狗屠豕日復日。春風無邊秋夜月。歲時伏臘銳氣加。連鑣共袂爭馳突。超越人家十丈墻。上城下城如平陸。偸出侯家絶代色。不啻齊狗偸狐白。傾都振畿畏如狼。郭解精悍人誰敵。一朝海寇蹵三京。漢陽文物煙塵腥。豪華任俠散如煙。飢寒流落湖州城。多豪多俠十無一。只有二羅飄如萍。只今鬚髮已衰落。驥老奮憊無筋力。龍城城下偶見之。握手相看感疇昔。噫吁嘻。家藏亡命報人讎。侯生雖老爲上客。君不見歷階色動秦舞陽。少子血勇焉足責。

'서울 태평성대 200년이라
도읍의 남녀는 풍요롭고도 훤칠하네.
집집마다 부유해 밥이 고봉밥이네.
밝게 치장하여 환하고 시끄러운 노랫소리 불러오네.
대궐문 밖에 협객의 소굴을 헤아리니
정씨 세 명과 나씨 다섯 명이 최고라네.
날숨은 무지개 같고 소리는 우레 같으며
큰 바지에 느슨한 띠로 서로 배회한다네.
3월이라 앵두꽃이 궁궐에 가득하니
송현 모퉁이에서 아리따운 이들 납치한다네.
주점에서 술을 찾아 고주망태처럼 취하고선
졸렬한 소인배들과 닭과 돼지처럼 싸워
단오의 좋은 계절에 각저 놀이를 좋아하니
힘이 임비와 같아 맘대로 꼬꾸러뜨리네.
무창과 풍천의 허씨와 이씨는
높은 말로 종루 거리에서 뛰어나와
자웅 다투고 사나움 겨루려 칼을 빼어 겨루니
소리의 기세가 하늘을 당겨 세상의 먼지가 일어나네.
무창의 허씨와 이씨가 범이 포효하는 듯해도
명성은 나씨를 벗어나지 못하지.
이때에 막내 나씨의 나이 가장 어려여러 호걸 지휘하는 것이 아이 장난치는 듯했네.
개를 죽이고 돼지 잡길 날마다 이어져
봄바람이 끝이 없는 날이나 가을밤 달 뜬 날이나
복날이나 섣달이나 날카로운 기운이 더해져
재갈을 잇고 소매를 공유한채 다투어 돌진하며 달리네.
남의 집 10길 담장 넘어 평지처럼 성을 오르락내리락 하네.
고위관직의 집에 절세가인을 보쌈해 나오고
제나라 개 뿐만 아니라 여우 털가죽 훔치네.
서울을 거꾸러뜨려 두렵기가 승냥이 같으니
곽해처럼 날쌔고 사나움을 누가 대적하리?
하루아침에 왜구가 서울과 평양과 개성의 삼경을 짓밟아 서울의 문물이 연기가 되고 티끌이 되며 더럽혀졌네.
호협하던 협객들도 연기처럼 흩어져
호남땅에서 굶주리고 추위에 시달리며 흘러다니니
많던 호협한 이들 열에 하나도 없는데
다만 두 명의 나씨만이 표류하길 부평초처럼 하는 구나.
지금은 머리와 수염이 이미 세어버렸고
천리마도 노쇠하여 고달파져 근력마저 없다네.
용성(남원)의 성아래에서 우연히 만나
손을 잡고 서로 보며 옛적을 생각했네.
아! 아!
집에서 원수를 갚고 망명한 이를 숨겨주리니
후생은 비록 늙었더라도 상객으로 여겼으니.
그대 보지 못했나?
시간이 흘러 진무양 얼굴색이 변한 것을.
어렸을 적 혈기와 용맹을 어찌 족히 책망하리오.   (玄洲集' 卷之二)

이 시는 16세기 말 서울의 임협(任俠)을 그린 내용으로, 당시의 시정세태의 일면을 엿보게 합니다.

[전북 남원시 주생면 제천리 829-6]

조찬한은 남원출신으로, 무오년(1618년, 광해군 10년) 2월에 형님 조위환이 서울에서 식구들을 데리고 남원(南原)에 잠시 와 살게 되었습니다.
동생 현주공(玄洲公) 조찬한(趙纘韓) 이 또한 토포사(討捕使)로서 삼남 지방을 다스리고자 먼저 남원에 와 있어 서로 떠돌아다니는 중에 다행히 만나게 되니, 아주 기이한 일이었습니다.

이 시는 협객 중의 한 사람이었던 나수양(羅守讓)에게 지어준 형식입니다. 시의 현재는 임진왜란 직후의 어느날, 시를 쓴 장소는 전북 임실입니다.

그런데 서사의 화폭이 펼쳐진 시공은 임진왜란 직전의 서울 성중입니다.

작품은 서두에서부터 무사안일로 사치 향락에 젖은 분위기를 소개하면서 특히 협객들의 소식과 활동상을 들려줍니다.

이른바 삼정오라(三鄭五羅)의 명성이라든지, 시정에서 호기를 다투고 우쭐거리며 노는 정경이라든지 모두 진기하고 재미난 사실로 엮입니다.

그러나 작품은 한낱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흥미로운 세태를 펼쳐 보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협객들의 활동상을 서술한 다음 “저처럼 용맹한데 누가 감히 대적할까[郭解精悍人誰敵]?”라고 일단 찬탄의 말로 정리를 합니다.

바로 이어 왜군의 침략을 받게 되는데 “으스대던 협객들도 연기처럼 흩어지니[豪華任俠散如煙 ]”라고 정작 용맹을 발휘해야 할 자리에 당해서 무력했음을 뚜렷이 인식케 합니다.

7년 전란의 어려움 속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조국을 수호한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입니다. 하지만 침략군이 "하루아침 섬놈들이 삼경을 짓밟으니 / 한양성 번화 문물 잿더미로 변했구나[一朝海寇蹵三京 漢陽文物煙塵腥]”라고 시인이 몹시 개탄했던 그 책임과 과오를 엄중히 따져 물어야 옳았습니다.

또한 각기 자기반성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작품의 주제는 안일에 젖었던 데 대한 자기반성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시인은 시를 주는 인물, 나수양에 대해 의기를 북돋는 말을 결말에서 덧붙입니다.

원수를 갚는 그날에 그대는 늙었으되 참으로 지모와 용기를 내보라는 의미입니다. 시인의 의식의 저변에는 적개심과 원수에 대한 응징의 정신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거북바위와 도산정(道山亭)址 위치

(지번명)전북 남원시 주생면 제천리 829-6

◉마당바위와 월파정(月派亭)址 위치

(지번명) 남원시 주생면 제천리 714

 

◉주생면 제천리 제천(諸川)마을

 

본래 남원군 주포면(周浦面) 지역으로 내(요천)가 흐르므로 제구내, 제구 또는 제천(諸川)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제천리(諸川里), 도내리(島內里), 상내리(上內里) 일부와 기지면(機池面) 고룡리(古龍里) 일부가 병합되어 제천리(諸川里)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 취락의 조성 내력은 정확히 알수 없으나, 조선조 중엽 예조참의와 좌승지를 지낸 한양조씨(漢陽趙氏) 13세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3권122편)이 정치에 뜻을 잃고 낙향(落鄕)하여 이 마을에 정착한 후 10여년간 살았고, 한양조씨 17세 高孫(泰裕태유:3권407편)부터 내동으로 이동하였으며, 밀양 박씨, 나주 나씨, 전주 이씨 등이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며, 조선시대 선조왕때 참판 지위로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던 박춘성(朴春成)의 아들 박효련(朴孝蓮)이 한양에서 남원으로 이주하여 그 자손이 번영하고, 이와 반면에 세 성씨(姓氏)중 이(李)씨와 나(羅)씨는 점차 타지로 옮겨가 밀양박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제천은 구한말까지 남생방(南生坊)의 관문으로 방의 휴게소 구실을 하여 주생의 소재지란 별명이 생길만큼 인파가 붐비는 지점이기도 하였다. 마을앞에는 요천이 유유히 흐르고 마을 입구에는 옛날에 월파정(月派亭), 도산정(道山亭: 현재는 마을에서 주민휴게실로 사용하며, 道林亭으로 변경했음)등 정자가 있어 선비들의 휴식장소로 이용 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이전은 농경지에 홍수피해가 잦아 영세민이 많았고 또 하천부지를 개간하여 토질이 척박하였으나 1964년 부터 1966년 사이 요천호안 공사로 인하여 홍수를 막고 수리안전 답으로 수해가 예방되어 점차 토지가 비옥해지면서 부촌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1993년도에 86.8㏊의 농토가 구석구석 경지정리가 완료되어 기계화 영농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은 현대식 마을회관 신축과 주택개량, 부엌개량등으로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마을 뒤에는 남원∼곡성간 국도 17호선과 전라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어 교통은 매우 편리 하다.

 

마을 뒷산에는 삼충사(三忠祠)가 있는데 일명 구천사(龜川祠)라고도 한다. 구천사는 문화재 자료 58호로 관리하고 있으며 그 설립은 조선조 철종임금때 일이며, 이곳에 호조참판 박춘성(朴春成), 박흥남(朴興男), 박연수(朴延壽)등 공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주요 성씨로는 밀양박씨, 김해김씨, 나주나씨, 전주이씨 등이 있다.

 

◉주생면 내동리 내동(內洞)마을

본래 남원군 남생면(南生面) 지역으로 안골 또는 내동(內洞)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때 내동리(內洞里), 광촌리(廣村里)와 성내면(城內面) 감동리(柑洞里), 견소곡면 (見所谷面) 수촌리(水村里) 각 일부가 병합되어 내동리(內洞里)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은 구한말까지는 이곳 내동(內洞)마을을 비롯 도산(道山), 낙동(樂洞)을 합하여 남생방이라 일컬어 왔다. 내동(內洞) 마을이 언제, 어떻게 형성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조선조 중엽 예조참의와 좌승지를 지낸 한양 조씨(漢陽趙氏) 13세조 현곡(玄谷) 조찬한(趙纘韓:3권122편)이 정치에 뜻을 잃고 낙향(落鄕)하여 제천리에 정착한 후 10여년간 살다, 한양조씨 17세조 高孫(泰裕태유:3권407편)때에 이마을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깊은 계곡 안에 있다하여 마을 이름을 [안골]이라 하였다.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마을을 형성하여 내동(內洞) 마을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내동마을은 전형적 유교사상이 농후한 보수적 양반촌으로 산중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교통이 불편하였으나 금풍선 확.포장 공사로 매우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대다수가 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나 일부 농가에서는 과수(황금배, 포도, 복숭아), 축산(젖소,사슴, 육계), 인삼재배 등으로 소득증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계곡이 깊고 아름다우며 물과 바위들이 맑고 깨끗하기가 비길데 없는 내동(內洞)은 부는 없어도 귀는 있다는 옛말과 같이 많은 인재를 배출 하였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지금은 환경개선 사업으로 새로운 변모로 탈바꿈하여 살기 좋은 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대규모 저수지(금풍 저수지)를 신설하여 관개수리를 원활케하여 걱정을 덜게 하였고 계절 따라 낚시꾼들이 모여드는 관광 유원지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을옆으로는 광주~대구간 88고속도로가 통과 하고 있으며 이곳에 마을 전경과 금풍제를 비롯 주생,금지의 광활한 농경지가 어우러져 뒷산의 과수원 전경이 그림 같이 펼쳐 보이는 곳에 88고속도로 남원 휴게소가 설치 되어 있다. 주요 성씨로는 한양조씨(漢陽趙氏), 전주이씨(全州李氏), 해주오씨(海州吳氏) 등이 살고 있다.

 

❀南原 도산정道山亭址와 거북바위❀

예조참의와 좌승지를 지낸 한양 조씨(漢陽趙氏)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이 정치에 뜻을 잃고 낙향(落鄕)하여 이 마을(주생면 제천리)에 정착한 후 10여년간 살아 온 동안 건립한 정자로 兄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이 1620년대 중단 쯤에 남원의 아우 현주공 조찬한 댁을 방문하여 남원지역의 광한루•요천내•금수정•비안정 등을 유람하면서 소감으로 정자를 건립하여 준 것으로 보임.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 1567 명종22~1649 인조27, 82세)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 1572년 선조5~1631년 인조9, 59세)

●1626년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 발발.

●1627년 (인조 5)년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 일어남.

●용성지(龍城誌) : 1752년(영조28)이후 편찬에 기록

●검 토 : 1600년 중반부터 1700중반 기간에 도산정 정자가 소실됐 것으로 보인다.

 

●47세 때 1613(광해군5) 선조 장인 김제남의 무옥(誣獄)때이 같이 등과 했던 정협(남원 부사 역임)의 고변으로 여러 조신들과 함께 구금되었다. 그후 1620년경 노모를 모시고 남원으로 내려가 은거하다 10년후 인조반정으로 재 등용되어 공조참판을 역임하였다.

 

♠(圓岩 : 거북이 머리문양의 바위:일명 거북바위로 부름, (지번명)전북 남원시 주생면 제천리 829-6 당산느티나무) 현재는 종손댁이 마을에 기부제납하였고, 남원시와 주생면사무소에서 주관하여 정자를 지여줘 마을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도림정(道林亭)으로 명명하고 있다.

 

※용성지(龍城誌) : 방두천(房斗天) 이 전라남도 남원군(현 남원시)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사찬한 지방지. 읍지. 이 읍지의 저본은 1699년(숙종 25)≪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 명령시에 이도(李燾)·최여천(崔與天) 등이 편찬한 것인데, 1752년(영조 28) 남원복호사적(南原復號事蹟)이 작성된 것으로 보아 편찬 연대는 1752년 이후로 본다. 구지(舊誌)와 신증(新增)편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구지로 표기된 부분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유사하다.

 

◉현주공적자종손 子 成宗[성종]

西紀一九五六年丙申三月一日生宗中率先塋奉審玄洲公宗會監事(有)今迎士建理事室羅州陳貞伊父烘元西紀一九六十年庚子六月三日生

서기일구오륙년병신삼월일일생종중률선영봉심현주공종회감사(유)금영사건리사실라주진정이부홍원서기천구백륙십년경자육월삼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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