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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 東 溟 書 院 重 建 記(1982년4월) 가천재-현감공파-청송부사공파종회 중형(中衡)▣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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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 溟 書 院 創 建 記(1628년인조6년)玄谷 趙緯韓

▣ 東 溟 書 院 重 建 記(1982년4월) ▣

 

▣ 東 溟 書 院 重 建 記 ▣

[1856年4月]

 

襄陽北數里許 有造山里 里之坊 有魯連灘 陶醉石柴桑村 恭惟我先祖襄烈公 愚溪先生 罔僕遯荒之地也

 

先生 位躋麗朝輔理功臣 三重大匡 龍源府院君 而見麗運將泡 退隱于此 頭尙戴殷義 不食周 與三隱同節 節又家而有若

先生之四子 嘉川齋先生 先生之於李太祖

親爲舅甥矣 徵辟不就者 其亦非其君不事之義歟 伯仲叔三先生之蒲輪一起者順先先生之命 而先生獨歸侍襄陽 奉承遺命 與元耘谷天錫 衛護恭讓王 倍切社屋之恨 而其貞忠大孝 幷烈烈於當世 定廟聞而獎之 謂其仲兄良敬公 涓曰卿之弟師 忠孝南全焉 先先生之遺風餘韻 嘗洋洋不泯于世 而遠之人 聞風興起 懶夫立志 匹婦慕義 使此 東海荒僻之州 化爲鄒魯絃誦之郍 先生之風 山高水長 八世孫府使公諱緯韓 莅玆州 追遠先躅 而仁祖戊辰 刱建東溟書院 鄕之長德及第盧公景福 崔公徒立李公賢一諸賢 完議于士林 立忠賢祠於院北 以爲先生 尸祝而配享

嘉川齊先生 皆當時公議之鄭重也 累經兵燹 昌平日暮 正宗丙午 移建于順興仍舊頌東溟書院 而追配後孫丹邱公諱貞 高宗辛未以國領毁掇 戊戌後孫觀察使公諱鍾弼 立碑定閣於襄陽書院舊址者 已爲百數十餘年 而又今因東海高速道路擴張 碑與閣又不保 子孫之所咨嗟 士林之所痛衋(혁) 襄陽章甫 乃以書院重建之議 先發論者儒道會 而關于成均館李載瑞館長 亦追佇先生大節 將爲後院奉安計 而重建之後事 巨力綿才 今春告功訖 院貌重新 乃擇書良辰 國內縉紳 駿奔齊會 而大擧公論 因揭四百年前 東溟書院舊額 奉安先生位牌 配享嘉川齊先生 盖依遵舊院規也 先生 衛忠卓節 文章道德 可爲百世宗師 而興廢有數 俎豆之院 後起於數百載之後 何其盛也 落之日 僉議使中衡 記其事

顧愚劣淺學 不敢當是寄 而畏編逡延焉 又申之 故終不辭 而忘其借踰 撰此如右 以竣後之 立言君子 而其山川之勝 必有親目者詳錄焉

 

檀君紀元 四千三百十五年 壬戌四月 上浣

後孫 中衡 盥手謹撰

 

 

《동명서원 중건기》

 

양양(襄陽)의 북쪽 몇 리 쯤에 조산리(造山里) 마을이 있고, 노련탄(魯連灘:노련여울) 도취석(陶醉石)이 시상촌(柴桑村)에 있으니, 공경히 생각컨대 나의 선조 양렬공(襄烈公) 우계(愚溪) 선생께서 고려(高麗)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은둔하신 땅이다.

 

선생은 고려 왕조에서 보리공신(輔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용원부원군(龍源府院君)에 올랐으며, 고려의 국운이 덧없는 물거품처럼 될 것을 헤아리고 이곳으로 물러나 은둔(隱遁)하였다.

 

머리 속에 은(殷) 나라를 향한 의리를 받들어 주(周)나라의 곡식을 먹지않겠다는 생각으로 삼은(三隱)과 절개를 같이 하였으니, 그 절개 또한 가정에 전하여 선생의 넷째 아들 가천(嘉川) 선생도 이와 같았다.

 

선생은 조선(朝鮮) 태조(太祖)와는 외숙과 생질 사이의 인척(姻戚)으로 임금이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은 것이 또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리가 아니겠는가?

 

세 형제분이 포륜(蒲輪)으로 하나같이 일어남은 선생의 명(命)을 따른 것이나, 선생이 홀로 양양(襄陽)으로 돌아와 모시며 유명(遺命)을 받들어 계승한 것이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과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호위하였으니, 사옥(社屋:亡國)의 한탄이 더욱 통절하였고, 그 곧은 충절과 효성이 당세에 함께 열렬(烈烈)하였다.

 

묘우(廟宇:祠堂)를 세워 포장(褒獎)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중형(仲兄) 양경공(良敬公 :涓)이 말하기를, "卿之弟師 忠孝南全"이라 하였다.

 

선생의 유풍여운(遺風餘韻)이 일찍이 양양(洋洋:성대함)하였고, 세상에 민멸(泯滅:사라짐)되지 아니하여 세대가 멀어져도 사람들이 풍성(風聲)을 듣고 흥기하였다.

 

게으른 사람(懶夫)도 뜻을 세우고 필부(匹婦)도 절의(節義)를 흠모하였으니, 이로 하여금 동해의 벽촌 고을에도 추로(鄒魯:儒學)의 글읽는 일에 교화 되었다.

 

선생의 풍월(風月)은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

 

8세손 부사(府使) 위한(緯韓)이 이 고을에 부임하여 선조의 자취를 추원하며 인조(仁祖) 무진년에 동명서원(東溟書院)을 창건하였다. 고을의 덕망높은 노경복(盧景福), 최도립(崔徒立), 이현일(李賢一) 제현들이 사림(士林)의 논의를 결정하여 충현사(忠賢祠)를 서원의 북쪽에 세우고 선생의 위패(位牌)를 배향(配享)하였으니, 가천제(嘉川齊: 齊는 齋의 오자인 듯. 가천재) 선생이 대개 당시의 공의(公議)가 정중하였다.

 

여러 번 전란을 겪으면서 태평세월이 날로 저물어가고, 정조(正祖) 병오년에 옛 모습대로 동명서원을 순흥(順興)에 옮겨 세우며, 후손 단구공(丹邱公 : 貞)을 추배(追配)하였다.

 

고종(高宗) 신미년에 나라에서 서원의 훼철(毁撤)을 명(命)하여 없어지게 되었는데, 무술년에 후손 관찰사 종필(鍾弼)이 양양(襄陽)의 서원 옛 터에 동명서원유허비을 세운 것이 이미 백 수십년이 지났고, 또 지금 동해고속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비각을 또 보존할 수 없음은 자손들의 탄식이요, 사림(士林)의 애통함이다.

 

양양의 선비들이 서원의 중건을 논의하니, 먼저 발의를 의논한 것은 유도회(儒道會)인데, 성균관 이재서(李載瑞) 관장 또한 선생의 대절(大節)을 추저(追佇: 추모하기를 바람)하여 서원에 봉안을 계획하였으니, 중건하는 일에 큰 힘과 재지(才智)를 다하여 금년 봄에 준공하게 되었다. 서원의 규모가 중신(重新)하고 좋은 날을 선택하여 국내의 고위 관료들이 고유(告由) 행사에 달려왔으며, 공론이 크게 일어나 400년 전 동명서원 옛 편액을 걸고, 선생의 위패를 봉안함에 가천재 선생을 함께 배향하였으니, 대개 옛 서원의 규구(規矩:모범 제도)를 따른 것이다.

 

선생의 위충탁절(衛忠卓節)과 문장도덕(文章道德)은 백세의 종사(宗師)가 될만 하였으니, 흥망에 운수가 있는 것이다.

조두(俎豆:제향)의 서원이 수백년 뒤에라도 흥하게될 것으로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

 

낙성(落成:준공)하는 날에 여러 의론이 나 중형(中衡)에게 그 사실을 기록하라 하니, 돌아보건대 천열(淺劣)한 학문으로 이를 감당할 사람이 못된다고 주저하는데, 또 거듭 청(請)하니 끝내 사양하지 못하여 참람함을 잊고 위와 같이 짓는다.

 

준공한 뒷날에 입언군자(立言君子)는 반드시 그 산천의 빼어남을 보고서 자세히 기록하리라.

 

단기 4315년 (서기 1982) 임술 4월 상완

후손 중형(中衡) 손을 씻고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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