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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始祖 中書公 諱之壽 壇碑文 , 二世祖 摠管公 壇碑文 , 三世祖 副元帥公 壇碑文,四世祖 龍城府阮君 壇碑文, 五世祖 襄烈公 壇碑文◈▣[大匡輔國崇祿大夫 龍原府院君 襄烈公 愚溪 趙先生 神..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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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 中書公 諱之壽 壇碑文 , 二世祖 摠管公 , 三世祖 副元帥公 ,四世祖 龍城府阮君 , 五世祖 襄烈公◈

●始祖 中書公 諱之壽 壇碑文

* 始祖 中書公

高麗朝順大夫僉議中書事

漢陽趙氏始祖諱之壽之壇

○ 高麗朝順大夫僉議中書事漢陽趙氏始祖諱之壽壇碑文

우리나라趙氏姓의貫鄕이三十五本이나된다特히漢陽은더욱盛하다公은卽그거룩하신始祖이시다公의諱는之壽요官은高麗朝順大夫僉議中書事요獨子暉는雙城摠管이요孫良琪는二代摠管兼東征軍副元帥요曾孫琳은三代摠管龍川府院君이요暾은三重大匡龍城府院君이요玄孫小生은四代摠管으로無傳이요仁璧은三重大匡龍源府院君諡襄烈이요仁瓊은檢贊成으로无后이고仁珪는檢漢城尹이요仁沃은開國一等功臣吏曹判書諡忠靖이다五代孫以下는多不盡錄하다公의墓는咸鏡道永興西面殷谷洞에모셨다고族譜에傳해지고있으나失傳하였으니嗚呼라痛嘆하도다往年에子孫들이爲先하는精誠으로屢次찾았으나찾지못하고住民에게물으면趙氏先山이이山中에있었다고하나어느곳인지를몰라뜻을이루지못하여後孫들이百世의恨을풀지못하였다이에裔孫俊植등이圖謀하기를祖上의墓所를잃으면設壇하고享祀해서그恩愛心을베풀수있다하고高宗光武五年에設壇立碑하여그精誠을表하여왔다그러나南北이分斷되어丘陵을瞻望하고壇下에焚香하는것마저할수없게되었다그리하여以南諸孫들이다시울읍한지於焉五十餘年이나되었다뿐만아니라大宗會에서分斷以後두번째族譜를發刊하려함에僉宗이協議하여이곳以南에도따로設壇하여香火하는것이道理라하여모두讚同하지않는이가없음으로이에公의胄孫知中樞公諱증의墓域인洪城郡洪北面大仁里魯隱洞梅山에設壇하오니公의尊靈降臨하시어百世子孫을矜恤하시옵소서

檀紀四千三百三十七年甲申三月 日

漢陽趙氏 大宗會 謹立

●二世祖 摠管公 諱暉 壇碑文

* 二世祖 摠管公

雙城摠管漢陽趙公諱暉之壇

○ 雙城摠管漢陽趙公諱暉壇碑文예로부터墓所를傳하지못하면設壇하여祭祀하는것이그孝誠을이루고저함이다그러나摠管公山所는咸鏡道德源郡北城面新安里龍城社漆田洞亥坐에있으니어찌設壇할必要가있겠는가그러나지금은南北分斷으로奉審하지못한지五十餘年이다때문에門中諸人이서로圖謀하여將次始祖中書公壇所와함께以北에계신四代先祖의壇을竝設하자는것이다이것은비록예전엔없었던것이나今人의情誼에可合하니이는禮緣於情이란뜻이아니겠는가公의諱는暉이니始祖中書公諱之壽의獨子이시다本來漢陽府人으로後에龍津으로移居하였다高麗高宗四十五年戊午에雙城摠管이되었고子良琪는二代雙城摠管이요孫琳은三代摠管이고曾孫小生은四代摠管으로相繼襲爵하여九十九年間和州,登州,定州,長州,預州,高州,文州,宜州,宣德鎭,元興鎭,靈仁鎭,耀德鎭,靜邊鎭等十五州를統治하였다曾孫小生은無傳하여龍川의弟龍城府院君暾이漢陽趙氏의宗孫이되었다龍城의長男龍源府院君仁璧과仲男檢贊城仁瓊과三男檢漢城尹仁珪와四男忠靖公仁沃이며玄孫良節公溫과良敬公涓은竝爲開國元勳이며그以後公의子孫들이繁盛함은모두公의蔭德이아니겠는가公의墓所앞에四季節마다開花하는나무가있으니四季花라稱한다다른곳에옮겨심으면살지못하고죽어貞節을象徵하며石人과더불어永久히墓所를모시고護衛하는뜻을表하고있어旌表하는禮로써族譜首編에登載하고있다

檀紀四千三百三十七年甲申三月 日

漢陽趙氏 大宗會 謹立

●三世祖 副元帥公 諱良琪 壇碑文

* 三世祖 副元帥公

雙城摠管兼東征軍副元帥

漢陽趙公諱良琪 之壇

配郡夫人朴氏

○ 雙城摠管兼東征軍副元帥漢陽趙公諱良琪壇碑文

公의諱는良琪니始祖中書公諱之壽의孫이요雙城摠管公諱暉의子이다年十三에摠管을襲爵하여雙城摠管이되었다公의墓所는咸鏡道永興府德興面龍川里艮坐에계시고配位朴氏도합폄하였다元世祖가高麗忠烈王七年에日本을征伐함에都元帥에흔도를命하고忠烈王은公이武烈이있다하여따르도록命하니朝廷議論이年少하여어렵다고하였다公이奮慨하여말하기를내비록年少하나이미아비富貴를襲爵하였으니어찌어렵다고辭讓하겠는가請컨대軍門에서藝를試驗하리라하니王과元帥가크게奇特히여겼다出征함에都元帥는敗하였으나公은副元帥로金方慶을따라싸움에軍士를온전히하고勝捷하니元帝가嘉尙히여겨錦袍와玉帶를下賜하며말하기를네나이二十一에아직未婚이니이옷을입고東國에가서어진配匹을娶하여아름다운子孫을낳아代代로皇室에致力하기를네가오늘나를섬기듯하라하였다距今七百餘年에錦袍는保存할수없었으나玉帶는아직까지傳하는데其間數次잃었다되찾았다일찍이失火하여집을全燒함에도玉帶는後園나무가지에걸려있었고但그때홀과一枚는半을遺失하였다가有年後에行商에게서偶然히購入하여補缺하였다高宗元年에는大院君이빌려가宮에들여가서王과神貞母后께서보시고愛玩하시며久傳된것을아름답게여기시고그헤어진것을愛惜하게여겨玉工을시켜補完케하시고御覽玉帶란四字를써서本孫에게돌려보냈다그後에大院君이다시判書鍾弼에게書信을보내어借覽을請하고뒤에大院君이墓의明器로삼도록命하여함께葬事에使用되니마침내어찌할수없게되었다가丁未年에王禮로改葬하게되자前書信을가지고返還할것을要求하여回收되었다이제는바야흐로保藏되었는데萬一公의陰德과神의도움이아니었던들이러하겠는가國家나世家에도或名器가있으나公의玉帶와같이稀貴한世寶를보지못하였다일찍이後孫都承旨性敎는玉帶記事를撰하고監察鍾灝는玉帶保存顚末을짓고進士一元은贊을進士鍾奭은圖識를지어모두永久保存할計劃을삼았다三子를두니琳은三代摠管龍川府院君이요暾은龍城府院君이고天柱는判司農事이다龍川君의子는小生이니四代摠管으로無傳하며龍城君이四子를두니仁璧은漢山伯諡襄烈이오仁瓊은檢贊成이오仁珪는檢漢城府尹이오仁沃은漢山君諡忠靖이다曾玄以下는代代로道學節義가끊기지아니하고繁延하니어찌公의懿德餘韻이아니겠는가

檀紀四千三百三十七年甲申三月 日

漢陽趙氏 大宗會 謹立

●四世祖 龍城府阮君 諱暾 壇碑文

* 四世祖 龍城府阮君

三重大匡龍城君贈推忠翊戴輔理贊化

佐命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龍城府院

君門下左侍中漢陽趙公諱暾 之壇

配杆城郡夫人李氏

 

○ 三重大匡龍城君贈推忠翊戴輔理贊化佐命功臣壁上

三韓三重大匡龍城府院君漢陽趙公諱暾壇碑文

公은雙城摠管諱暉의孫으로高麗에여러번大功을세워高麗史列傳에등재되어지금까지世人이모두그名聲을알고德을稱頌하니何必여기에무엇을더記錄하겠는가삼가그傳을參考하여略述한다公의諱는暾이오初諱는祐요本은漢陽이다龍津에世居하여弱冠이못되어忠肅王을섬겼다當時女眞으로逃亡간衙前과百姓을公이王命을받고海陽에가서六十餘戶를刷還하고돌아와서監門衛郎將을除授받고뒤에또다시가서百餘戶를刷還하니王이嘉尙히여겨廐馬와綾緞을下賜하고左右衛護軍을除授하였다恭愍五年에雙城의옛땅을收復하여禮賓卿을除授받고開京에舍宅을下賜받았다六年에太僕卿에옮기었고紅巾賊이西京을陷落함에公은知兵馬使安祐의摩下에서그들을물리쳤다九年에判司農寺事를拜하고十年에工部尙書로옮겨王의南幸을따르니王이公과睦仁吉을命하여福州兵을나누어거느려서行宮을宿衛토록하였다十一年에海州牧使로나가고喪을當한지一年만에起復으로禮儀判書가되었다가다시檢校密直副使가되고紅巾賊을擊走시킨功으로一等功臣이되었다二十一年에辭任을願하여牛峰縣에居하고辛禑元年에三重大匡龍城君에冊封되고五年에龍津에歸老하였다子仁沃이따라가고자하니公이拒絶해말하기를우리집은時局의危疑함을만나서先祀를받듬이毫髮과같은데도玄陵이一門을돌보시어地位를온전히하고君을封하기에이르고너희들兄弟가모두顯達하였으되百에하나도報答하지못하였으니너희들은老父를念慮하지말고王室에致力하기를마치내곁에있는것과같이하라하였다六年에卒하시니壽七十三이다麗朝에서推忠翊戴輔理贊化佐命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龍城府院君門下左侍中判禮儀司事上護軍事를贈職하였다.

檀紀四千三百三十七年甲申三月 日

漢陽趙氏 大宗會 謹立

●五世祖 襄烈公 諱仁璧 壇碑文

* 五世祖 襄烈公

純誠翊衛輔理功臣三重大匡

龍源府院君贈左政丞領 經筵事

漢山伯諡襄烈漢陽趙公諱仁璧之壇

配貞敬夫人河東鄭氏

配貞和公主全州李氏

○ 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三重大匡龍源府院君贈左政

丞領 經筵事漢山伯諡襄烈漢陽趙公諱仁璧壇碑文

公의諱는仁璧이요號는愚溪또는海月亭이다始祖中書公諱之壽와摠管公諱暉와副元帥公諱良琪와龍城君諱暾의四世는곧公의高曾祖祖考考位이다公은龍城君의맏아들로龍津에서誕降하였다特異한才質이있어學問을兼通하여先世의遺風을能히이었다恭愍王五年雙城回復時에父公과함께東北面兵馬使柳仁雨를도와護軍이되었으며十二年金鏞의討伐에공을세워收復京城二等功臣으로冊封되었고二十一年家州에서亂動者들이地方官吏를죽이는일이있자判事로서이들을討伐하였으며이해에萬戶가되어咸州北靑에서倭寇를大破하여奉翊大夫에올랐다辛禑元年密直副使로서忠惠王의아들을自稱한僧釋器를잡는데功을세우고다시東北面元帥로出征하여倭寇를討伐하였다三年甕津文化地方에侵入한倭寇를攻擊하였으며다음해判密直으로火砲를使用하여水軍을訓練시켰으며六年江陵道上元帥가되어倭寇를擊退하는데큰功을세웠다九年門下贊成事로東北面都體察使가되고十一年四道都指揮使가곧이어交州道元帥가되었다昌王元年威化島回軍에加擔하고三司左使가되었다恭讓王元年判懿德府事가되고다음해回軍二等功臣으로冊錄되었다太祖二年朝鮮朝에서開國二等功臣으로追錄하고推誠亮節翊衛輔理佐命功臣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判都評議司事領經筵事漢山伯龍源府院君에封해지고諡襄烈을下賜하였다配貞敬夫人은河東鄭氏니一男一女를두었는데溫은開國定社佐命功臣漢川府院君諡良節이오配貞和公主는六男二女를낳으니涓은佐命功臣右議政漢平府院君諡良敬이오侯는知敦寧諡安靖이오師는號嘉川齋니僉知中樞요傅同知敦寧과保와伯은无后하다孫儀는僉知로无后하고琓은漢豊君이오河는都制요興은參判이오育은庫使요慕는摠制요慈는敦寧이오惠는崇政으로諡恭安이오憐은兵參이오得壽는司正이오孟發은縣令이오仲發은縣監이요季發은錄事로无后이다曾玄以下는不錄한다墓는開城興敎面蛇串里丑坐原이고公主墓는長湍郡西面田齋里子坐原이다仁祖六年襄陽府使인後孫緯韓이地方儒林과協議하여東溟書院과忠賢祠를세워公을모시고三子嘉川齋公을함께配享하였다

檀紀四千三百三十七年甲申三月 日

漢陽趙氏 大宗會 謹立

 

[愚溪趙仁璧先生神道碑]

[양양동명서원앞에세운우계양렬공조인벽신도비문번역문]

▣[대광보국숭록대부 용원부원군 양렬공 우계 조선생 신도비명]▣

▣[大匡輔國崇祿大夫 龍原府院君 襄烈公 愚溪 趙先生 神道碑銘]▣

선생의 諱는 인벽(仁璧)이오 號는 우계(愚溪)이며, 또 해월정(海月亭)이라한다. 性은 조씨(趙氏) 貫鄕은 한양(漢陽)이시다. 시조 諱 지수(之壽)는 고려의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僉議中書事)이시고, 그 아들 諱 휘(暉)는 쌍성총관(雙城總管)이시고, 아들 諱 양기(良琪)가 습작으로 총관이 되시어 나이 十三세에 원(元)나라에 청병하여 동쪽 일본을 정벌(征伐)함에 군사를 온전한 채로 돌아오고 또 합단(哈丹)을 토벌하여 포로를 원나라에 바차니 원세조가 크게 기특히 여겨 비단 도포와 옥띠(지금의 漢陽趙氏家寶/●서울시 동산문화재 나1-계13525호●)를 하사하여 장려(獎勵)하니 선생께 조부.증조부가 되신다.

아버지의 諱는 돈(暾)이신데 처음 처음 諱는 우(祐)라 하였다. 여진(女眞)의 난을 숙청하고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일등공신으로 책록되시고 삼중대광 용성부원군(三重大匡龍城府院君)으로 봉하셨다. 비위 군부인(郡夫人)은 간성이씨(杆城李氏) 평리 홍복(洪福)의 따님이시다.

선샌께서는 용진현(龍津縣,現강원도문천시 옥평동일대로 변경)의 세거하시던 댁에서 태어나셨다. 태어나시면서 특이한 바탕이 있으시어 어려서부터 슬기와 도량이 남의 생각밖에 뛰어나셨다. 자란 뒤에 학문과 문장을 겸하고 통하여 능히 부조(父祖)의 유풍을 ㅇ;ㅣ으 시고 공민왕을 섬겨 등주(登州)의 十二城을 넓혀 平正하시고 또 정세운(鄭世雲) 안우(安祐) 이방실(李邦實)과 더불어 서경(西京)의 백년 동안 빼앗겼던 땅을 토벌하여 회복시켰다. 공민왕(恭愍王)二十一년엔 안함(安咸)·변주(邊州)·북청(北靑) 등지에 도적이 들어 그것을 크게 격파시키고 적 七十여 首級을 베이고 봉익대부(奉翊大夫)를 배수하였다. 우왕(禑王)五年 己未(1379)에 계림에 도적이 들어옴에 강릉도 도원수 겸 부윤을 배수하고 그곳을 다스렸다. 八年 壬戌(1382)에는 강릉도 상원수가 되셔서 부원수 권현룡[[壬戌辛禑八年○大明 洪武十五年]임술신우 8년(1382), 대명 홍무 15년○江陵道上元帥趙仁璧 副元帥權玄龍 與倭戰 斬首三十級。○ 강릉도 상원수 조인벽(趙仁璧)과 부원수 권현룡(權玄龍)이 왜적과 싸워 머리 30급을 베었다.]으로 더불어 적을 쳐서 대파하고 적의 머리 三十급을 베었다. 十一年 乙丑에 교주도(交州道)에 도적이 들어옴에 사도 도지휘사(四道 都指揮使)를 배수하셨으니 사실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삼중대광용원부원군삼사좌사겸판소부시사(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三重大匡龍源府院君 三司左使 兼 判小府寺事)를 하사 하였다. 그런 뒤에 고려의 운수가 종말을 고하니 조선조 태조(太祖 李成桂)께서 등극하여 남매의 情義로써 세 번 부르시고 일곱차례나 벼슬을 제수 하였으나 모두 나서지 않으시고 망복지의(罔僕之義=신하로 되지 않겠다는 의리)를 굳게 지켜서 관동(關東)의 양양(襄陽)의 시상촌(柴桑村)으로 돌아가 누우셔서 여울물을 노련탄(魯連灘)이라 하고, 돌을 도취석(陶醉石)이라 하여 강해 이장년(江海 李長年). 월촌(月村) 정만(鄭槾)으로 더불어 도의의 사귐을 삼아서 바다 위에 작은 집을 짓고 해월정(海月亭)이라 이름하여 바다로 도피한 뜻을 부치고 흰 옷과 백립을 쓰고 거문고 노래를 스스로 즐겨 산수의 사이에 방랑하여 세상밖에 일을 묻지 아니하고 세모의 하늘 아래 혹 대궐을 사랑하고 서울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시를 지어 이르기를

 

♠蝶趐勳名薄 (접혈훈명박) 龍腦富貴輕 (용뇌부귀경)

♣나비의 날개처럼 공명은 얄팍하고,

♣용의 뇌인 부와 귀도 가벼이 여기노라!

♠萬事驚秋夢 (만사경추몽) 東窓海月明 (동창해월명)

♣만사가 가을 꿈에 놀라듯 사라지고,

♣동창엔 바다 달이 밝게도 비쳐온다.

라 하고 또 이르기를

♠淡淡西山月 (담담서산월) 靄靄空中雲 (애애공중운)

♣맑고 맑은 서산의 달이며,

♣상하게 일어나는 공중의 구름이라!

♠山人不畏虎 (산인불외호) 永夜不掩門 (영야불엄문)

♣산 사람 호랑이 두려워 아니하니,

♣긴긴 밤에 사릿문 닫지 않네!

라고 읊으니 세상에서 선생의 시는 질탕하고 호매하여 세간의 때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청풍(淸風)과 높으신 절개(節槪)는 당시의 삼은(三隱 = 圃隱 鄭夢周 牧隱 李穡 冶隱 吉再를 말함)으로 더블어 나란히 아름다움을 같이하여 모진 이도 청념해지고 게으른 이도 서게 하였다. 동해의 황벽한 고을이 화하여 추로(鄒魯=孔孟이 사시던 곳)의 예악학문이 있는 고을이 되었으니 선생의 풍도는 산고수장(山高水長=덕화가 높고 긴 것을 말함)하다할 것이다. 태종조에 추성양절익위 보리좌명공신 보국숭록대부 문하좌정승 판도평의시사 영경연사(推誠亮節翊衛 輔理佐命功臣 輔國崇綠大夫 門下左政丞 判都評議寺事 領經筵事)를 贈職하고, 한산백(漢山伯)을 奉하고 諡號는 양렬(襄烈)이라 下賜하였다.

配位 정경부인(貞敬夫人) 하동정씨(河東鄭氏)는 一男 一女를 낳으니 아들 온(溫)은 개국정사좌명의 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이며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으로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繼配 정화공주(貞和公主)는 조선 환조대왕(桓祖大王)의 따님으로를 六男二女를 낳으셨다. 아들 연(涓)은 좌명일등공신(左命一等功臣)으로 우의정(右議政)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이며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다음 후(侯)는 지돈령(知敦寧)으로 시호는 안정(安靖)이고 사(師)는 별호(別號)를 가천재(嘉川齋)라 하는데 예에 따라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중추부사(僉中樞府使)를 제수(制守)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양양(襄陽)에 가서 양렬공(襄烈公) 모시니 정종(正宗께서 충(忠)과 효(孝)의 두 가지를 온전히 하였다하는 교시(敎示)가 있으셨다.

부(傅)는 동지돈령(同知敦寧)이고, 보(保)와 백(伯)은 무후(無後)하다. 세 따님은 선공감정(繕工監正) 황길원(黃吉源)과 내부부령(內部副令) 임맹양(林孟陽)과 소윤(小尹) 곽왕보(郭王輔)에게 출가(出家) 하였다.

큰 아드님의 손자 의(儀)는 첨지(僉知)이고, 완(琓)은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한풍군(漢豊君)을 봉(奉)하였고, 하(河)는 도제(都制)요, 흥(興)은 참판(參判)이오, 육(育)은 의영고사(義盈庫使)이다. 둘째 아드님(涓)의 손자 모(慕)는 총제(總制)요, 자(慈)는 돈령(敦寧)이오, 혜(惠)는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시호는 공안(恭安)이오, 련(憐)은 동지돈령(同知敦寧) 병조참판(兵曹參判)이다. 셋째 아드님의 손자 득수(得壽)는 사정(司正)이오, 넷째 아드님의 손자 맹발(孟發)은 김화현령(金化縣令)이오, 중발(仲發)은 장성현감(長城縣監)이오, 계발(季發)은 녹사(錄事)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선생의 산소는 개성 흥교면 사관리의 축좌(丑坐) 언덕에 계시다. 사패지(賜牌地:공신에게 주는 땅)의 산판(山坂)이 있으며, 묘비(墓碑)가 있으시다. 정화공주(貞和公主)의 산소는 장단 진서면 전제리 취적교(吹笛橋)의 동북방 五리 자좌(子坐) 언덕에 있고, 역시 사패지(賜牌地) 산판(山坂)이 있으시다. 아아! 우리 선조의 성덕(聖德)과 끼치신 음덕(陰德)으로 자손에게 유택(幽宅)이 흘러서 그 수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도학(道學) 문장(文章)과 이름난 공경들이 면면하게 대를 이어서 동국(東國)의 대성(大聖)이 되었다. 그리고 문정공(文正公) 별호 정암(靜菴)과 같은 분은 오현(五賢)의 으뜸으로 동방(東方)의 사표(四表)가 되시니, 이 또한 선생의 끼치신 덕이 아니겠는가?❁

양양(襄陽) 옛 고을의 수석(水石)의 성지(聖地)를 추상하니 선생의 발자취가 이르지 낳은 곳이 없었으나 세상이 멀고 사람이 없어져서 무성한 풀과 보리(麥)가 성하는 탄식이 있을 따름이다. 지난 인조 무진년에 후손 부사 위한(玄谷 緯韓)이 마침 이 고을에 임하여 선세의 자취를 찾아 계술(繼述)하고 동명서원(東冥書院)을 세우니, 고을의 선비들이 또 선생의 큰 절의를 추모하여 서원의 북쪽에 충현사(忠賢祠)를 세우고 조두(俎豆=祭器와 祭物)를 베풀어서 향사(享祀)하고 가천재공(嘉川齋公)을 배향(配享) 하였다. 대개 향선생이 몰하심에 향사하는 의리이었다. 병화를 여러 차례 겪어서 세웠다 폐했다하기를 수차 있었는데 정종조 병오년에 순흥(順興)으로 옮겨 세웠다가 고종조 신미년(辛未年)에 이르러 온 나라의 사우를 모두 훼철시켰다. 그 후 무술년(戊戌年)에 후손 관찰사 종필(鍾弼)이 양양의 옛 터에 비[東溟書院遺墟碑]를 세우고 각을 세웠다.

철훼된지 이미 백여년(1982년)이 되었는데 광복함에 미쳐서 경향의 종친들이 서원을 복원할 생각을 가지고 여러 차례 상의하고 사림들에게 통해 알리고 아울러 성균관(成均館)에 통고(通告)하니, 당시 관장 이재서(李載瑞)가 선생의 대절(大節)을 크게 사모하여 성의를 같이 하고 협조하여 드디어 옛 터에 다시 세웠다. 시작한 지 三년만에 준공을 고하니 사우가 거듭 새로워졌다. 이에 국내의 진신들이 모두 모여서 분주히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가천재공(嘉川齋公)을 배향(配享)하였다.

다만 그러나 산소는 이북 땅에 있어서 여러 후손들이 성묘(省墓)하거나 향사(享祀)를 할 수 없으니, 맺힌 한이 극진(極盡)하다. 이러므로 모두가 의론하여 말하기를 양양(襄陽) 땅은 선생의 끼친 자취뿐 만이 아니라 후학들이 사우를 세우고 해마다 향사하는 곳이니 마땅히 여기에 단을 마련하여 묘제의 의식을 겸행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하여 드디어 터를 닦고 비를 세우고 아울러 신도비문(神道碑文)을 마련함에 존중의 여러 선비들이 중형(中衡)으로 하여금 명(銘)을 하라하니 돌아보건대 불초한 후손이 지식이 적고 학문이 없으니 어찌 능히 성한 덕과 큰 행실에 손을 쓸 수 있겠는가. 굳이 사양타 못해서 드디어 그 참남됨을 잊고서 명(銘)을 하였다. 이르되

 

송악(松岳)은 높고높고

용진(龍津)은 맑고맑다.

정기와 영기을 모아

선생을 탄강케 하였도다.

성한 시대 충성스런 신하로

나라 호위 간성(干城)되었다.

등주(登州)를 확대하고

서경(西京)을 회복했다.

백년토록 침노(浸怒)한 땅

일조(一朝)에 되찾았다

요순(堯舜)임금 이루었고

당우(唐虞)세상 만들었다.

왕명으로 작(爵)봉하니

삼중(三重)이요 대광(大匡)이라.

고려(高麗) 운수 다해가니

양양(襄陽)으로 은퇴(隱退)하다.

외로운 신하 나라 망하니

전 임금 잊지 못해.

서산에서 고사리 꺾고

시상촌(柴桑村)서 국화 먹네.

충성심은 해와 달을 꾀어 뚫고

의리는 감상을 중히 한다.

두 임금 섬지기 아니하고

스스로 다스리며 높이 나른다.

홀로서 충성심 보존하고

푸른 저 하늘에 보답한다.

곧은 충성 높은 절개

늠름하기 상설(霜雪)같다.

하늘같이 솟은 빗돌

길가에 세웠도다.

산이 평파하고 바다가 마르도록

만세(萬世)토록 길이길이 창성(昌盛)하리.

 

 

◐단군기원 四千三百十年 정축 七월 유화절에

二十세손 中衡은 손을 씻고 삼가 碑文을 짓고 誠力으로 建立하다.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17세손 종업(鍾業)은 번역하다.

 

[飜譯文影印:嘉川齋公派 24世孫 晛溪 趙炳龍]

[2021.03.22.21:00.斗井軒에서.....]

●開國定社佐命功臣輔國崇祿大夫議政府 左贊成漢川府院君諡良節趙公溫神道碑

○ 開國 定社 佐命功臣 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左贊成 漢川府院君 諡良節 趙公 溫 神道碑銘

(번역문)

高麗 恭讓王이 太祖를 都統使로 삼아서 將次 遼東을 공격할때 軍師가 威化島에 이르러 回軍할 것을 定策하니 當時에 마음을 함께하고 協力한 사람은 곧 待中 沈德符와 評理 裵克廉과 鄭地와 右代言 趙仁沃과 吏曹判書 趙溫 等 四十五人이니 溫은 卽公의 이름이다. 高麗 忠穆王 三年(一三四七) 丁亥生이요 仁沃은 公의 叔父이다. 얼마후에 淸州에 水災가 일어나 公이 王에게 가서 命令을 받들기를 하늘이 災變을 내린 것은 賢臣을 가둔 때문입니다. 라고 아뢰니 王께서 깨달으시고 賢臣 李牧隱과 權陽村을 淸州獄에서 釋放시켜서 돌아오매 密直副使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壬申 七月 十六日에 公이 裵克廉 趙浚 鄭道傳 모든 분과 같이 國璽를 받들고 太祖 邸宅에 가니 太祖가 門을 닫고 들이지 않아 公 等이 門을 열고 直接 들어가서 廳舍위에 두니 그 이튿날 太祖가 卽位하고 開國功臣 벼슬의 차례를 定할 때 裵克廉 趙浚 等 十七人으로 차례를 定하고 왕으로 推戴하여 함께 大業을 이루었으니 그 功이 甚히 큰지라 功勞함을 잊기 어려운지라 平壤尹인 公도 諸公 十一人과 함께 擧事를 議論하여 임금을 推戴하였으니 그 功이 또한 크다. 그 外 十九人도 그 功을 可히 賞주라 하더라. 太祖二年 癸酉年에 西北面都巡問使가 되어서 倭寇를 樹州에서 擊破하고 寧海州人 李唐信을 捕虜로 바쳐 遼東으로 護送하고 義州道의 壯丁들을 軍籍에 入籍시켜 軍事力을 强化하였다. 王이 壽昌宮 後苑 靑心亭에서 돌을 던져 싸우는 擲石놀이를 구경하니 公이 節制使로서 擲石軍을 거느렸으며 親軍衛都鎭撫가 되었다. 戊寅年에 鄭道傳을 죽일 時에 公은 關連하지 않았다. 그 後로 中樞院事 義興三軍府 左軍 同知節制使와 商議門下府事가 되시다. 上王이 太宗으로 더불어 定社功臣의 차례를 議論할때 公을 推誠協贊定難反正載安宗社의 功勞가 重大하여 永世토록 잊지 않을 功臣으로 삼으니 都監이 王께 말씀하여 趙溫은 功勞가 적지아니하니 二等功臣을 삼아서 閣을 세워 形像을 그리고 碑을 세워 功을 기록하고 父母와 妻는 二等을 넘어 贈職을 封하고 直子는 二等을 넘어 蔭職하고 直子가 없으면 즉 甥姪과 女婿를 等級을 높이고 功勳田 一百五十結과 奴婢 十五名과 書記 五名과 守禦軍 八名을 下賜받고 初仕에 들어가기를 허락받고 馬舍와 馬一匹과 金銀帶 一腰와 겉옷과 속옷 各 한벌을 하사 하고 嫡長孫은 世世로 벼슬을 하여 그 祿을 잃지 않게 하라 하고 政案을 기록하여 말하기를 定社二等功臣 溫의 子孫은 永世토록 도우라 하고 드디어 智門下府事가 되시다. 日本左京大夫 六州牧 義弘이 九州를 쳐서 이기고 使臣을 보내어 바야흐로 物件을 들여오라 하고 스스로 그 功을 말하고 百濟의 후손이라 하여 土田을 요구하거늘 왕이 관련되는 官廳으로 하여금 議論할때 公이 參知門下府事로서 成石璘 趙英茂 河崙과 함께 議論하니 옳지 않다 하였다. 定宗 元年 八月 四日 公이 鄭南晋 趙珍과 더불어 王을 모시고 말을 타고 막대기로 공을 치는 擊毬놀이를 하였기에 각각 馬 一匹씩을 下賜 받았다. 宗親 靖安公 芳雨와 益安公 芳毅와 懷安公 芳幹과 上黨諸侯 李佇와 勳臣 李居易과 趙英茂와 李天祐를 命해서 典 모든 道兵을 해체할때 公 또한 參與하고 그 남은 典兵者도 다 罷하였다. 太宗이 卽位하매 知中軍節制使가 되고 곧 參贊門下府事와 商議門下府事로 옮기다. 司憲府와 司諫院에서 서로 글을 올려 가로되 趙英茂 等이 兵器를 거두어 모을 때 卽時 輸納하지 아니하고 여러날 遲延하여 軍用物을 任意로 줄이고 參謀 道理를 하지 아니하니 罪를 可히 다스리지 못하니 그 벼슬을 거두고 그 罪를 鞠問하여 法에 依한 措置를 施行하라 請하다. 王이 듣지 아니하니 臺諫이 連日 두번 上疏하고 세번 上疏 하니 왕이 마지 못하여 가벼운 法을 適用하여 다만 그 職만 罷職하고 功臣은 保存하게 하였다. 얼마 있다가 벼슬에 還職하여 凉竹笠과 斜皮靴 各 하나씩 下賜받다. 樂正鄭以吾 宮中甲士의 養成軍을 罷하라 疏請하다 그 때에 甲士는 芳幹의 摩下사람이 많은지라 世子가 出入할 때 항상 두려움을 生覺하는 故로 또 이를 記錄하노라. 왕이 公에게 일러 가로되 나의 말이 어떠하오 하자 公이 가로되 어찌 가히 一儒의 말로써 가벼히 宮中의 甲士를 罷하라 합니까 왕이 가로되 너의 말이 더욱 나의 뜻과 같다 하면서 곧 鎭撫所 甲士 三百名을 罷하고 軍器를 다 三軍府로 보냈다. 庚辰七月에 公이 完山府로 流配되니 그때에 太上王이 公을 不忠이라 하여 罪를 定宗에게 請하는 故로 不得已 이런 命이 있었느니라 左政丞 成石璘과 右政丞 閔齊가 文武百官을 거느리고 太上殿에 가서 公이 無罪함을 分別하여 밝히니 드디어 大闕밖에 나가 편히 있으라 命하다. 얼마 있다가 三司左使 佐命功臣 四等에 책록되시다. 辛巳八月에 參贊議政府事로서 명나라에 聖節을 하례할 때 왕이 冕服으로 君臣을 거느리고 太平館에서 拜表하고 宣義門까지 전송하였다. 明年 正月에 돌아와서 議政府 贊成事에 오르다. 十一月에 東北面察理使가 되시니 吾都里 사람이 왔다. 趙思義의 兵亂後에 오도리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산골짜기에 숨고 敢히 나오지 못하였었는데 公이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傳하여 국가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조회하라 하여 내조하였다. 癸未十一月에 司平左使 李彬과 驪興君 閔無恤을 明나라에 보내니 謝恩禮와 兼하여 宗系를 분별하여 밝히더라 대개 前年에 公이 聖節使로 명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祖訓條章에 이르기를 太祖께서 李仁任의 아들이라 하여 朝鮮에 돌아와 告하여 분별하여 밝힌것이다. 乙酉年에 義安大君 和와 寧安君 良祐와 完山君 天祐로부터 王을 모시고 內樓의 잔치에 參席하였다. 丙戌年에 兵曹判書가 되고 다시 議政府 贊成事가 되시다. 戊子年에 太上王이 돌아가심에 齋都監判事가 되시다. 乙丑年에 功臣掌務가 되시어 西川君 韓尙敬으로부터 閔無咎와 閔無疾 等의 罪를 다스리는것을 논의할 때 刑曹正郞 李仲蔓은 公의 사위이므로 罪는 마땅히 罷職이로되 公의 緣故로 罪를 免하다. 太祖行狀 碑文은 河崙과 權近의 作으로 행동한 말이 合當치 못함이 있는지라 公臣臺諫이 二公의 不敬한 罪를 번갈아 請할 때 公이 南在復으로부터 請하되 왕이 말씀하시기를 河崙과 權近은 처음에는 비록 두 마음을 太祖께 있었으나 이제는 나에게 忠臣이니 너의 무리는 또한 나의 臣子라 마땅히 내 말을 따를지어다. 趙英茂와 安景恭 鄭擢 劉敞 韓尙敬 趙狷으로부터 왕이 말하여 가로되 太祖께서 만약 鄭道傳이 없었으면 누가 같이 開國을 했으리요 그 베푸는 마음이 公께서 나왔으니 可히 容恕하리라 하고 왕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마땅히 다시 생각하리라 하니 公이 欣然히 물러가시다. 이로써 彈劾을 받지않게 臺諫에게 입었으되 왕이 就職을 命하다. 辛卯에 왕이 上王殿에 나가 獻壽와 極舞 춤을 추니 宗親과 公께서 參席하셨다. 壬辰年에 三軍別待衛 鷹揚衛節度使 別司 禁提調中軍節制使를 두니 公이 左一番節制使가 되셨다가 輔國崇祿大夫 府院君이 되시다. 太宗十七年(一四一七)丁酉 閏五月十九日에 漢川府院君으로 卒하시니 史臣이 말씀하시기를 公이 太祖를 왕이 되기전부터 섬김으로 開國 定社 佐命 功臣되시고 太祖 定宗 太宗 三朝를 섬겨서 議政府 贊成事에 이르시다. 사람됨이 淸廉하며 靜肅하고 溫柔하며 善良하고 몸가짐이 恭遜하고 말이 적으셔서 家産을 챙기지 않고 貴하게 節制하고 儉素하시니라. 享壽는 七十一에 訃音을 듣고 朝會를 거두고 賻儀를 前例와 같이 하다. 攸司를 命하야 禮葬하게 하고 諡號를 良節이라 贈하니 溫良하며 好樂하고 淸廉하며 自克한 것은 그 諡號法이다. 墓所는 坡州 交河面 吾道里 長鳴山 北龍之原에 있으며 壬坐이다. 賜牌山坂이 五町七段步가 되느니라 옛 碑碣이 傳하지 않음으로 玄孫 判決事 邦楨과 參判 邦彦이 다시 세웠는데 또 保傳하지 못하였다. 後孫 逸掌令 文穆公 克善이 다시 세우고 陰記를 撰하고 文簡公 松谷 豊陽 趙復陽이 碑文을 지었으되 오히려 大碑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지난번에 宗議를 열어서 將次 圖謀할 때 後孫 炳吉이 나에게 碑文을 請하니 내가 감히 辭讓하지 못해서 마침내 碑文을 지어 쓰기를 公의 先祖는 漢陽人이다 高麗 僉議中書事 之壽는 卽 公의 五代祖이며 高祖 暉는 雙城摠管이니 摠管府를 和州에 두었으니 지금의 永興郡 迤北十二城이라 曾祖 良琪는 襲爵으로 摠管이 되고 元나라 世祖가 日本을 征伐할 때 副元帥로서 金方慶을 쫒아서 日本을 치고 全軍이 무사히 돌아왔다. 할아버지 暾은 高麗에서 벼슬하여 雙城以北 九州 十鎭을 收復하고 紅巾賊을 擊破하고 禮儀判書 三重大匡 龍城府院君이 되시니 事績은 高麗史에 記錄되어 있느니라. 大提學 尹紹宗이 本傳을 지었다. 아버지 仁璧의 號는 愚溪요 又號는 海月亭이다. 登州十二城을 깨끗이 收復하고 安祐와 李邦實과 더불어 平壤을 收復하여 三重大匡 龍源府院君이 되시고 朝鮮朝에서 左政丞 漢山伯을 贈하니 諡號는 襄烈이다. 東溟書院에서 祭享을 받들고 있다. 妣는 河東鄭氏니 生一男一女를 두고 妣 貞和公主는 卽 桓祖大王 第一女니 生六男二女를 두었다. 公의 配 張氏는 忌 三月三日이요 墓는 合兆하다. 配 朴氏 忌는 七月十六日이요 墓는 長端에 있으나 失傳하다. 五男三女를 두었으니 儀는 僉中樞요 琓은 知中樞 漢豊君으로 宗統을 이어받아 追封하고 河는 都制別將이요 興은 繕工監正 贈吏曹參判이요 育은 義盈庫使니 贈吏曹參判이다. 一女 婿 府使 李仲蔓은 西原人이요 二女 婿 護軍 尹希吏는 坡平人이요 三女 婿 直長 李紹仁는 仁川人이다. 僉中樞는 無后요 漢豊君의 아들 璔은 功臣의 嫡長孫으로 知中樞요 瑠는 嘉山郡事 贈工曹參議요 都制別將의 子는 玗이요 璋은 司直이요 瑭이며 璡은 察訪이며 琚요 珙은 通德郞이며 球다. 參判의 子 秀文은 平安兵使요 璜은 郡守요 秀武는 府使요 庫使의 子 哀孫은 文科에 급제하고 藝文舘檢閱과 成均舘司藝요 信孫은 牧使요 義孫은 進士에 判官이다 曾孫 允瑄은 蔭府使로 贈承旨요 允瓚은 縣監이요 允瑛은 禦侮將軍이요 允瑺은 郡守요 允琇는 司直이다. 壽昌은 御侮將軍이요 繼宗은 全羅兵使요 元紀는 進士로 文科 及第하여 刑曹 工曹判書를 歷任하고 左參贊에 이르고 諡號는 文節公이요 玄孫 邦楨은 別試文科에 及第하여 判決事요 邦彦은 進士로 別試文科에 及第하여 副提學과 江原 全羅 監司로 禮曹參判에 이르렀고 光祖는 號가 靜菴이니 大司憲이 되고 贈領議政이며 諡號는 文正公이고 孔子 文廟에 配享되었다. 五代孫 達孫은 大護軍이다 輔는 號가 遯菴이고 別提요 弼은 號가 遯溪이니 別座요 佑는 號가 竹溪로 進士에 佐郞이요 傅은 都事니 四兄弟 모두 己卯士禍때 禍를 같이 입었다. 六代孫 興仁은 大護軍이요 光庭은 壬辰倭亂때 倡義하여 延安城을 지킨 功으로 贈戶佐요. 七代孫 緯韓은 號가 玄谷으로 進士와 增廣甲科에 及第하여 禮曹叅判이며 耆老社에 들었고 纘韓은 號가 玄洲이며 進士로서 文科에 及第하여 左承旨요 配 高興柳氏는 殉節하여 旌閭를 받았다. 八代孫 從善은 漢溪君이요 克善의 號는 冶谷으로 逸掌令이며 贈吏曹判書와 祭酒를 겸직하고 諡號는 文穆公이다. 九代孫 明漢은 漢原君이요 得男은 丙子胡亂時 王을 扈從하고 殉節하여 忠臣旌閭를 세웠다. 渭叟는 府使로 孝旌를 세웠다. 代數가 먼 後孫 中에서 亨復은 進士로 增廣文科에 及第하여 吏曹參判이요 性敎는 進士로 增廣文科에 及第하여 泮長 知申 大司憲 禮曹判書 文衡으로 諡號는 文憲公이다. 恒敎는 進士로 增廣文科에 及第하여 同副承旨요 鐘灝는 監察이요 鍾弼은 進士로 壯元하고 增廣文科에 及第하여 工曹判書를 歷任하고 耆社에 들었으며 外官職에 六道의 監司를 歷任하고 鍾純은 增廣文科에 及第하여 承旨요 嘉善大夫에 올랐다. 子孫모두가 最高顯達한지라 以外 文官 蔭職武官을 殿堂에 올리지 못한 者는 많음으로 다 記錄하지 못하노라 鳴呼라 公이 將帥와 宰相과 功勳이 있는 家門에 태어나셔서 벼슬이 正一品인 政丞에 올랐는데도 조금도 驕慢하고 자랑하는 態度가 없고 몸가짐에 淸廉하고 儉素하여 襃賞과 賜牌田畓이 있는데 모든 어려운 一家에게 나누어 주고 草屋 수칸에 말을 둘곳이 없었으며 食卓에는 맛있는 飮食이 없고 坐席에는 깔방석이 없어 八十이 가까운데 처음과 끝이 한결같이 하셨는니라. 公이 돌아가시매 그의 아들이 집을 짓고 작은아버지 議政公 涓을 請하여 落성 하려하니 後에 議政公이 到着하여 섬돌을 보고 앉지도 않고 나가면서 말하기를 兄님께서 살아계실 때 섬돌의 階段을 만들지 아니한 것은 어찌 財力이 不足하여 그러셨겠느냐 너희들은 先人의 儉素한 德을 따르지 아니하고 石築으로 層臺를 만들었으니 나는 다시 너의 집에 들지 않으리라 하니 모든 조카들이 두려워하여 卽時 헐었으니 史臣이 칭하는 것은 곧 이러하기 때문이다. 洪相國彦弼이 公을 일러 말하기를 淸廉하고 德望이 높으신 節義를 稱讚하였으니 當日에도 알지 못하는데 後孫 百世에 公같으신 분이 몇사람이나 있을까 後孫이 昌大한것은 반드시 公께서 後孫에게 끼친 蕯德이로다. 이어 記錄하여 말하되 雙城摠管의 家世에 公께서 우뚝 태어나셨다. 威化島에서 回軍함에 모든분들이 誠意를 다 하여 協贊했도다. 水災變이 발생하자 널리 救援하였으니 二賢 李牧隱과 權陽村을 淸州獄에서 放免하도다. 마침내 太祖를 王位에 推戴하였으니 함께 大業을 이루었도다. 開國의 공을 의논하니 封爵이 赫赫하도다. 兵器를 輸納함에 遲延하여 彈劾을 입었도다. 父子벼슬을 지킴에 事務에 어려운 말이 있도다. 太上王에게 미움을 보였으니 完山府에 流配했도다. 文武百官이 더욱 힘써 分別하여 告하니 太上王께서 疑惑을 풀으셨으니 돌려서 聖節을 賀禮하는 使臣을 命하였도다. 돌아와 兵曹判書 職을 맡았으니 곧 두 政丞에 오른것이다. 三峰 鄭道傳의 용서를 청하여 王이 再顧하였도다. 三軍을 잡았으니 벼슬이 輔國崇祿大夫에 이르셨도다. 儉素한 德望과 淸潔한 風度는 可히 千百世에 傳하리로다. 무릇 나의 後孫을 누가 恭敬하지 아니 하리요 밝은 모습으로 代代로 臣으로 奉職하였으니 處處에 偉大한 事蹟이로다. 비석의 이수가 산처럼 우뚝솟았으니 꽃다운 名譽가 흩어지지 아니하리라.

 

封塋 後 五百八十五年 壬午 (二千二年) 十月 日 黃州 邊時淵 撰

緬封于 戊子(二千八年) 八月十三日 洪城郡 洪北面 大仁里 梅山祭閣谷 始祖中書公 壇下 甲坐 合窆

西紀二千十二年 壬辰 七月 日 知中樞府事公派 會長 時衡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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