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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도시향제례❀

♠2022年度(壬寅年) 묘시제향!!!◈동부승지·직제학·자헌대부·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1567-1649◈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2.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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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서원은 조선 仁祖戊辰(1628년) 당시 도호부사였던 양열공 8세손 현곡공(玄谷公) 조위한(趙緯韓,양절공- 한풍군- 가산공파 13世)이 정헌 노경복(盧景福)과 지방유림 대표 최정립(崔挺立), 이현일(李賢一)등과 상의, 협력하여 양열공의 숭고한 교학이념과, 위대한 호국정신, 그리고 만고불변의 충절을 본받기 위하여, 조산리의 병영지에 창건 하였다. 원래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양열공(襄烈公) 조인벽(趙仁璧)을 배향하였으나 후에 그의 넷째아들인 가천재공(嘉川齋公) 조사(趙師)를 함께 모시게 되여 매년 동명서원관리자를 차지하고 있다.

■玄谷趙公神道碑銘(宋時烈 撰, 宋子大全 卷165), 行狀(朴世采 撰, 南溪集 外集 卷15), 韓國系行譜 등에 의함■

宋子大全卷一百六十五 / 碑

玄谷趙公神道碑銘 幷序

玄谷趙公卓詭嵬岸。早歲蒙難蠖屈。遭遇明時。又率意言事。用舍相半焉。論者曰。韓,歐濮議。與諸賢殊異。至被彭公重繳。然不以是後世少韓歐。公諱緯韓。字持世。漢陽人。其遠譜與靜庵先生同。曾祖邦彥。官參判。祖玉縣令。考揚庭不仕。 贈判書。能以禮法治家。妣韓氏。某官某之女。公生數歲。祖母吳夫人愛其誦書朗然曰。此吾耳邊絲竹也。十歲作詩。已有思致。十有六歲。徧讀先秦古文。場屋屢居上游。己丑。丁憂才殯殮。而母夫人疾革。嘗泄痢。又割指進血。甲午。喪母夫人踰禮。辛丑。中司馬試。癸卯。除重林察訪。平遷至主簿,監察。遂登己酉第。先是十餘年間。倭寇猶未平。嘗從金將軍德齡。試軍旅事。天將有愛公者。公欲隨入中朝。博觀天下。朝中先輩知公遺落世事。並與權石洲韠除官以縻之。旣闡大科。則光海主初卽位。群小益橫。以公嘗上疏訟鄭松江,黃芝川也。怒且忌公才。抑置宂閒。猶處以製敎。奉命朝天。畢使。卽出爲北靑判官。未幾罷歸。無何値國舅誣獄。公與諸名卿同被逮囚廢錮。時廢 母議張甚。戊午。大歸南原地。有和陶辭以見志。又作流民歎一篇。極道人民愁苦邦家顚覆狀。主見而惡之。物色之不得。後修光海實錄時。史臣收入爲信史。 仁廟反正。收用賢俊。公自司成歷尙衣正。入憲府爲掌令,執義。凡除拜。公頗引却。及被湖堂選則不復辭也。公以新化擧措頗未厭人心。多所爭論。又駁椒親鄭百昌。言雖行而 上亦不悅。遞正尙衣院。因出守襄陽。李适反。領兵至京師。願與王師討賊。主將以文吏不許。丙寅。從遠接使金公瑬。往迎 詔使。丁卯。又赴寇難。聞寇退解兵歸。未幾罷歸。敍復舊踐。自是屢入 筵席。盡心啓沃。亦論勳貴之失。 上將崇奉私親。朝議力爭其不可。公獨以爲今事與漢之定陶。宋之濮園不同。遂與諸公凹凸。誚謗四起。而公不顧也。因虹變。與諸僚上箚請納諫諍息聚斂。去奢侈戒偏私。益勵初心。懋加克復。 上嘉納。壬申。由執義陞承旨。有臺章 上不許。蓋臺臣疑公以私親議當 上心也。歷兵曹參知。復爲承旨。上疏自劾。移兵曹參議。自是數年之間。不離政院兵禮曹。丙子。與政院諸僚。因災異上言曰。 殿下誠能以至誠對越上帝。以至公赫臨下土。振肅頹綱。激勵群工。則朝廷正而人心悅。天地和而災沴消。政令不期擧而自擧。修攘不期盡而自盡。此不在 殿下一念之間乎。嗚呼。幽獨雖深。不謹則影響於外。 殿下旣已知之。其於修身治國之道。思過半矣。 上又善之。以病辭遞。冬。虜變猝遽。公以 命先往江都。聞 上改轍入御南漢城。公自中路追赴不得入。竄伏奔遑。備經危險。事定從舊職。壬午。特陞工曹參判。蓋 上念耆老久淹也。丙戌。以八袠陞資憲。知中樞府事。己丑正月。公曰。昔先君以是年棄世矣。今歲行適逼。我其殆乎。竟以其廿一日終焉。 上聞驚悼停朝市。祭賻皆如例。三月。葬于坡州七井里。公俊偉雄豪。眼空一世。善謔以諧。然又尊賢取友。律己制行。自有規度孝友出於天性。年已耆艾。語及父母。必嗚咽涕下。至使受業者廢蓼莪篇。與兄弟大被燕嬉。不忍相舍。有時出入。履發相從。家人時失其所在。疫癘死喪之威。其所行。人方之庾衮而有餘矣。牛溪成先生嚴重莊肅。然善公家行。終始親愛之。名公鉅卿。前後擧其實行。遂有棹楔之旌。常有不忍之心。倭寇時適見戰士無辜就戮者。多以布衣請見元帥而活之。爾瞻將加罪於癸丑七臣。公亦就見。力爲之地。可比之弔豎全邦之功矣。及其出身。隨事納約。傅以經義。 當宁傾聽。裨益甚多。惟其不立崖岸。油油以相處。兼且無虛口。人不甚畏憚。然其中自有理致。聽之者多所警發。蓋其意象超脫。胸懷坦夷。亦無屈首風塵之趣。而可以遊神於事物之表者。固爲諸公之所推許。而其憂愛慷慨惻怛感發之誠。則固非他人之所可窺測也。光海時遊楓嶽。夢侍 宣祖大王。詳陳衷曲。覺吟近體一篇。有萬死孤臣淚千峯獨夜心之句。而枕上有斑斑處也。淸陰文正公嘗爲群小所慍。因倂治其儕流。公聞之悲咤憂憤。殆乎成病。公爲文詞。主於莊,騷,韓,馬,戰國。少陵而以下則不屑也。故其所作雄渾峻發。如河海涵泓。山岳停峙。論者謂如其爲人。權石洲韠嘗曰。吾於詩家軌度。粗有得焉。而其根基恢拓。氣焰盛大。則何敢望某。黃芝川廷彧贈公曰。風霆歷覽無窮際。王伯論才更著高。又有天下奇男王適至之句。然則公之見推於人者。不止於詞藻已也。嘗曰。東人不喜溫公通鑑,晦菴綱目。是以墻面也。其老年所編拔奇一書。則又主於六經而下及諸子也。夫人洪氏。學生纘之女。早沒。繼娶佐郞宋耇女。生二男三女。長倚有文行。早夭。事見公祭其文。次億工曹佐郞。女長適尹確。次適朴濰。皆士人。次適府使沈榥。夫人性慈仁溫惠。有識有行。纔就姆。母夫人沒。執喪奉祭。一如成人。稍長。繼母頗莊嚴以臨。夫人敬謹罔懈。及嫁。情禮省獻。久而益虔。繼母晩乃感悟。愛之反愈己出。事公甚嚴。事雖細微。亡敢自遂。從公出入中外數十年。不以私囑干公。娣姒之間。亦不無難處者。又能以調娛焉。公官位俸祿稍隆。未嘗有居積豐侈之念曰。吾視向時窮陋拮据時則已多矣。聞人患難疾苦。爲之動心傷歎。敎子女。待衆妾。恤窮匱。皆循道理。以故公至老相莊。每歎以爲雖古之君子有不可及者。佐郞男任重,得重,萬重,益重。女歸朴泰成,金萬墡。外孫曰時亨,時亮。尹出也。曰應敎壽亮。沈出也。余於公未嘗納拜。公以世誼。寄意勤厚。仍譽場屋之文。余有羞澁意。不敢掃門覿德。今朴公世采和叔以公家狀。屬以墓文。余不敢以不文辭。蓋悔前日之失而思贖於萬一也。遂據狀第錄而因爲之說曰。公以高才偉器。當 仁廟淸明之世。特以私廟之議。見疑於儕流。坎坷以沒其世。然此出於所見之適然而自信其心也。非如 嘉靖之張,桂也。銘曰。

謂公徒是文章之士。則實政可以範世而警俗。謂公遭逢而利見龍飛。則於進途劣容其足。寔因心而爲行。亦眇世而肆謔。蓋卓犖而奇偉。不屑於規度繩墨。斯爲一世之雄豪。百夫之禦特。凡後之要知公者。盍亦觀其述作。

 

◐조위한 신도비명(碑銘) 해설◑

===현곡조공신도비명 병서===

현곡(玄谷) 조공(趙公, 조위한)은 행실이 탁절(卓絶)하고 우뚝 빼어나서 젊은 나이에 어려움을 당하였고, 다시 몸을 펴서 밝은 세상을 만나서도 또 뜻을 따라 일을 말하였으니, 그 용사(用捨)가 서로 반반이었다. 논자(論者)가 말하기를, “한구(韓歐)의 복의(濮議)는 여러 선현(先賢)들과 자못 달랐기 때문에 심지어 팽공(彭公)에게 무거운 탄핵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한구를 하찮게 여기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공은 휘(諱)가 위한(緯韓)이고, 자(字)는 지세(持世)이며, 본관(本貫)은 한양(漢陽)으로, 그 원대(遠代)의 계보(系譜)는 정암 선생(靜庵先生, 조광조(趙光祖))과 같다. 증조(曾祖)는 조방언(趙邦彦)으로 참판(參判)을 지냈고, 할아버지는 조옥(趙玉)으로 현령(縣令)을 지냈다. 아버지는 조양정(趙揚廷)으로 벼슬하지 않았고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예법으로 집안을 잘 다스렸다. 어머니는 한씨(韓氏)로 청안현감(淸安縣監)) 한응성(韓應星))의 딸이다.

공이 태어난 지 서너 해 되었을 때 할머니인 오부인(吳夫人)이 그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한 것을 좋아하여 말하기를, “이 소리는 내 귓가에 들리는 사죽(絲竹, 관현악을 말함)이다.”라고 하였다. 10세 때에 시를 지었는데 그 나이에 벌써 사치(思致)가 있었고, 16세 때 선진(先秦)의 고문(古文)을 두루 읽었으며, 장옥(場屋)에서 누차 상등(上等)을 차지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상(喪)을 당하여, 겨우 염빈(殮殯)을 하자마자 모부인(母夫人)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공은 모부인의 대변[泄痢]을 맛보아 병세를 살피고 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모부인에게 드렸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보다 더욱 슬퍼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중림 찰방(重林察訪)에 제수되었으며, 평천(平遷)하여 주부(主簿)와 감찰(監察)에 올랐고 마침내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에 앞서 10여 년 동안에 왜구(倭寇)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일찍이 김덕령(金德齡) 장군을 따라 군려(軍旅)의 일을 시험하였는데, 명(明)나라 장수 중에 공을 사랑하는 자가 있어서 공은 그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 천하를 두루 구경하려고 하였으나, 조정에 있는 선배(先輩)가 공이 세상일을 유락(遺落)하려는 것을 알아채고서 공을 석주(石洲) 권필(權鞸)과 함께 관직에 제수함으로써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옭아매었다.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나자 광해주(光海主)가 막 즉위하여 뭇 소인배들이 더욱 설쳐댔다. 소인배들은 공이 일찍이 상소하여 정 송강(鄭松江, 정철(鄭澈))과 황 지천(黃芝川, 황정욱(黃廷彧))을 논핵했다는 이유로 화를 내고 또 공의 재주를 시기하여 용한(冗閑)한 벼슬에 억눌러 두었는데, 오히려 지제교(知製敎)를 맡는 자리에 있게 하였다. 사명(使命)을 받들어 명나라에 갔다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즉시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나갔다가 얼마 안 되어 그만두고 돌아왔다. 얼마 뒤에 국구(國舅)의 무옥(誣獄, 선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의 옥사(獄事)를 말함)을 당하여 공은 여러 명경(名卿)과 더불어 함께 감옥에 갇히어 폐고(廢錮)당하였고, 그 당시에 폐모(廢母)의 논의가 한창 거세었다.

무오년(戊午年, 1618년 광해군 10년)에는 남원(南原) 땅으로 영영 돌아갔는데 도연명(陶淵明, 진대(晉代)의 은사(隱士)인 도잠(陶潛). 연명은 자(字)임)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화운(和韻)하여 글을 지음으로써 자기의 뜻을 나타냈고, 또 유민탄(流民歎) 1편(篇)을 지어 인민(人民)들이 고통을 겪고 나라가 뒤엎어지려는 상황을 극력 말하니, 광해주가 그 글을 보고서 미워하여 누가 지었는지 찾아내도록 하였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뒤에 광해(光海)의 실록(實錄)을 수찬할 때 사신(史臣)이 그 글을 거두어 넣어 신사(信史)로 삼았다.

인조[仁廟]가 반정(反正)하여 현준(賢俊)들을 수용(收用)하자 공도 사성(司成)으로부터 상의원 정(尙衣院正)을 거쳐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 장령(掌令)과 집의(執義)가 되었는데, 무릇 관직에 제배(除拜)될 때마다 공은 자못 핑계를 대고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호당(湖堂,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서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았다. 신화(新化)의 거조(擧措)들이 자못 인심에 들어맞지 않자 공이 쟁론(爭論)한 바가 많았고 또 (인렬왕후(仁烈王后, 인조의 후비(後妃)) 한씨(韓氏)의 형부인) 초친(椒親, 왕비의 친척) 정백창(鄭百昌)을 논박(論駁)하여 그 말이 시행되었는데 임금이 또한 기뻐하지 않았으므로, 체직되어 상의원정(尙衣院正)이 되었다가 그 일로 인하여 양양수령(襄陽守令)으로 나갔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은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에 가서 왕사(王師)와 함께 역적을 토벌하겠다고 청원하였으나 주장(主將)이 공을 문리(文吏, 문관 출신의 수령을 말함)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병인년(丙寅年, 1626년 인조 4년)에는 원접사(遠接使)인 김유(金瑬)공을 따라 조사(詔使)를 영접하러 갔고,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또 구난(寇難)에 달려갔다가 노적(虜賊)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군대를 해산하여 돌아왔다. 얼마 뒤에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서용(敍用)되어 예전의 관직에 복직되었으며, 이로부터 누차 연석(筵席)에 들어가서 마음을 다하여 임금을 계옥(啓沃)하였고 또한 훈귀(勳貴)의 잘못을 논핵하였다.

임금이 장차 사친(私親)을 숭봉(崇奉)하려고 하니 조정 신하들의 논의가 그 불가함을 극력 쟁집(爭執)하였는데, 공은 홀로 “이번 일은 한(漢)나라의 정도왕(定陶王)이나 송(宋)나라의 복원(濮園)과는 같지 않다.”고 하여, 마침내 제공(諸公)들과 의견이 서로 다르자 공을 비방(誹謗)하는 말이 사방에서 일어났는데 공은 돌아보지 않았다. 홍변(虹變)으로 인하여 여러 동료들과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에게 간쟁(諫諍)을 받아들일 것과 취렴(聚斂)을 종식시킬 것과 사치(奢侈)를 없앨 것과 편사(偏私)를 경계할 것과 초심(初心)을 더욱 면려하여 극복하는 일에 힘쓰도록 청하자,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에 집의(執義)를 거쳐 승지(承旨)로 승진하였는데 대간(臺諫)의 논핵이 있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체로 대신(臺臣)이 공을 사친(私親)에 대한 논의로써 임금의 마음에 맞춘 것으로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병조참지(兵曹參知)를 거쳐 다시 승지가 되자 상소하여 자핵(自劾)하였으므로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이임(移任)되었다. 이로부터 수년 동안에 승정원과 병조, 예조를 떠나지 않았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승정원의 동료들과 함께 재이(災異)로 인하여 상언(上言)하기를,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지성(至誠)으로써 상제(上帝)를 대하시고 지공(至公)으로써 하토(下土)에 임어(臨御)하시어 무너진 기강을 진숙(振肅)시키고 뭇 신하들을 격려(激勵)시키면, 조정이 바로 서고 인심이 기뻐하며 천지(天地)가 조화되고 재이(災異)가 사라질 것이며, 정령(政令)은 수거(修擧)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수거될 것이고, 재앙을 물리치는 일은 재앙이 없어지기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니, 이는 전하의 일념(一念) 사이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오호(嗚呼)라, 유독(幽獨)이 비록 깊지만 삼가지 않으면 밖에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곧장 드러나는 법이니, 전하께서 이미 그것을 아셨다면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의 방도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절반이 넘은 셈입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또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이어 병 때문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그해 겨울에 노적(虜賊)의 변고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공은 어명을 받고 먼저 강도(江都, 강화(江華))로 갔는데, 임금이 길을 바꾸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서, 공은 중도에서 뒤따라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적을 피해 이리저리 달아나 숨느라고 온갖 위험을 겪었으며, 사태가 진정되자 예전의 관직에 복직되었다.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에 특명으로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승진하였는데, 대체로 임금께서 공이 기로(耆老)로써 오랫동안 엄체(淹滯)되어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에 나이가 80세가 된 까닭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년) 정월에 공이 말하기를, “예전에 선군(先君)께서 이해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지금 세행(歲行)이 마침 핍박하니, 나도 올해가 위태롭구나.”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그달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임금이 부음(訃音)을 듣고서 깜짝 놀라 애도하여 조시(朝市)를 정지하였고 제전(祭奠)과 부의(賻儀)를 전례(前例)에 맞게 내려 주었다. 그해 3월에 파주(坡州)의 칠정리(七井里)에 장사지냈다.

공은 사람됨이 준위(俊偉)하고 호걸스러워 안중(眼中)에 일세(一世) 사람들을 허여(許與)하지 않았으며 곧잘 우스개로 농담을 하였다. 그러나 또 현인(賢人)을 존경하고 벗을 취하는 일과 자기 몸을 닦아서 행실을 조심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그 규도(規度)가 있었다. 효성과 우애가 천성으로부터 나왔으니, 나이가 이미 노인이 된 뒤에도 얘기하다가 부모에 대한 말이 나오면 반드시 울먹이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므로, 심지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육아편(蓼莪篇, 효자의 효심을 읊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임)을 폐(廢)하게 하였다. 형제들과 더불어 큰 이불을 함께 덮고 자면서 즐겁게 지냈고 차마 서로 떨어지지 못하였으며, 출입할 때에도 항상 형제들과 함께 길을 나섰으므로 집안사람들이 때때로 그가 있는 곳을 잃기도 하였다. 돌림병이 돌아 죽어가는 때에 공이 행한 것은 사람들이 유곤(庾袞)에게 견주어도 남음이 있다고 하였다. 우계(牛溪) 성 선생(成先生, 성혼(成渾))은 장중(莊重)하고 엄숙(嚴肅)하였으나 공의 가행(家行)을 착하게 여기어 처음부터 끝까지 공을 친애하였고, 명공(名公)과 거경(巨卿)들도 전후로 공의 실행(實行)을 천거하여 마침내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항상 불인지심(不忍之心)이 있었으니, 왜구(倭寇)가 침입하였을 때 마침 전사(戰士)가 죄 없이 죽게 된 것을 보고서는 공이 포의(布衣)로써 원수(元帥)에게 뵙기를 청하여 그를 살려 준 일이 많았다. 이이첨(李爾瞻)이 장차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의 일곱 신하들에게 죄를 가하려고 할 때에도 공이 또한 그를 찾아가서 일곱 신하들을 위하여 애를 써주었으니, 이야말로 조수(弔豎)가 나라를 온전하게 한 공로에 견줄 만하였다. 급기야 출신(出身)하게 되어서는 일에 따라 납약(納約)하고 경의(經義)로써 가르치어 당저(當宁)가 귀를 기울여 들었으므로 도와준 것이 매우 많았다.

생각건대, 공은 날카롭게 애안(崖岸)을 세우지 않고 남들과 부드럽고 매끈하게 처하였으며, 또한 아울러 빈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다지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스스로 이치가 있어서 듣는 자들을 경계하고 깨우치는 것이 많았다. 대체로 그 의상(意象)이 초연(超然)하고 흉회(胸懷)가 탄이(坦夷)하여 또한 풍진(風塵)에 머리를 숙이는 취미가 없었으며, 사물(事物)의 너머에 유신(游神, 마음을 즐겁게 함)할 수 있었으므로, 진실로 제공(諸公)들에게 추허(推許)를 받았고 그 우애(友愛)가 강개(慷慨)하고 측달(惻怛)하여 감발(感發)하는 성의는 진실로 다른 사람이 엿보거나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광해(光海) 때에 풍악산(楓嶽山)에 유람하러 갔다가 꿈속에서 선조 대왕(宣祖大王)을 모시게 되었는데 자신의 진심을 상세히 진달하고서, 꿈에서 깨어난 뒤에 근체시(近體詩) 한 편(篇)을 읊었는바, “만 번 죽음을 무릅쓴 외로운 신하가 눈물을 흘리고, 일천 개 산봉우리는 홀로 밤을 지새우는 마음일세.[萬死孤臣淚 千峰獨夜心]”라는 구절이 있었고, 베개에 눈물을 흘린 얼룩이 있었다. 청음(淸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일찍이 뭇 소인들에게 밉보인 까닭에 그 제류(儕流)들까지 싸잡아서 다스렸는데, 공은 그 소식을 듣고서 슬프게 탄식하고 걱정하고 분개하느라고 거의 병이 날 지경이었다.

공은 문사(文詞)에 있어서는 장자(莊子), 이소(離騷), 한유(韓愈), 사마천(司馬遷), 전국책(戰國策), 소릉(少陵, 당대(唐代) 두보(杜甫)의 호)을 위주로 삼았으며 그 이하로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지은 글들은 웅혼(雄渾)하고 준발(峻發)하여 마치 하해(河海)처럼 드넓고 산악(山岳)처럼 우뚝하였으므로, 논하는 자들은 공의 글이 그 사람 됨됨이와 같다고 말하였다. 석주(石洲) 권필(權鞸)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시가(詩家)의 궤도(軌度)에 조금 터득한 것이 있으나 그 근기(根基)가 넓고 기염(氣焰)이 성대함은 어찌 감히 조모(某, 조위한)를 따를 수 있으랴?”고 하였고, 지천(芝川) 황정욱(黃廷彧)도 공에게 시를 지어 증여하기를, “바람과 천둥을 무궁하게 겪을 때에 왕패를 논한 재주 더욱 훌륭하네.[風霆歷覽無窮際 王伯論才更着高]”라고 하였으며 또 공을 “천하의 기이한 남자 왕적이 이르렀네.[天下奇男王適至]”라고 칭찬한 싯구도 있었으니, 그렇다면 공이 남들에게 추중(推重)받은 것이 단지 사조(詞藻)에만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온공(溫公, 송대(宋代)의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과 회암(晦庵,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담장을 마주한 것과 같다.”고 하였고, 그가 노년에 편집한 ≪발기(拔奇)≫라는 책은 또 육경(六經)을 위주로 하고 아래로 제자(諸子)에게까지 언급한 것이었다.

공의 부인은 홍씨(洪氏)로 학생(學生) 홍찬(洪纘)의 딸인데 일찍 요절하였다. 계취(繼娶)는 좌랑(佐郞) 송구(宋耈)의 딸인데,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조의(趙倚)는 문학과 행실이 있었으나 요절하였으며 그에 관한 일은 공이 지은 그의 제문(祭文)에 보인다. 차남은 조억(趙億)으로 공조좌랑(工曹佐郞)이다. 장녀는 윤확(尹確)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박유(朴濰)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사인(士人)이다. 막내딸은 부사(府使) 심황(沈榥)에게 시집갔다. 부인은 성품이 인자(仁慈)하고 온혜(溫惠)하였으며 식견도 있고 행실도 있었다. 부인은 겨우 유모(乳母)에게 나아갈 나이에 모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상례를 치르고 제사를 모시는 일을 모두 어른처럼 해내었고, 조금 자라서는 계모(繼母)가 자못 장엄(莊嚴)하게 대하였으나 부인은 공경하고 조심하면서 게으르지 않았으며, 시집을 와서도 정성과 예절로써 살피고 모시어 오래 지날수록 더욱 경건하게 하였으므로, 계모도 만년에야 느껴 깨닫고서 도리어 자기가 낳은 자식보다 더욱 부인을 사랑하였다. 부인은 공을 섬김에 있어서도 매우 엄격하여 일이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감히 자신이 나서서 해버린 적이 없었으며, 공을 따라 중외(中外)에 출입한 지 수십 년 동안에 공에게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않았고 시누이와 동서 사이에도 또한 난처한 일이 없지 않았으나 또 능히 조정(調停)하여 즐겁게 지냈다. 공의 관위(官位)와 봉록(俸祿)이 조금 높아지더라도 재물을 쌓아 풍요롭고 사치하려는 마음을 한 번도 갖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지난날에 궁색하고 가난하게 살 때와 비하면 이것도 이미 많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환난(患難)과 질고(疾苦)를 들으면 그들을 위하여 마음으로 놀라며 가슴 아파하고 한탄하였다. 자녀를 가르치고 중첩(衆妾)들을 상대하고 궁색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들을 모두 도리에 따랐으니, 이 때문에 공이 늙어서까지 서로 공경하면서 매양 탄식하기를, “비록 옛날의 군자도 따라가지 못할 것이 있다.”고 칭찬하였다.

좌랑(佐郞) 조억(趙億)의 아들은 조임중(趙任重), 조득중(趙得重), 조만중(趙萬重), 조익중(趙益重)이고, 딸은 박태성(朴泰成)과 김만선(金萬墡)에게 시집갔다. 외손(外孫) 중에 윤시량(尹時亨)과 윤시양(尹時亮)은 윤확의 소생이고, 응교(應敎) 심수량(沈壽亮)은 심황의 소생이다.

나는 공을 찾아뵌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공이 세의(世誼)로써 나에게 근후(勤厚)하게 뜻을 부치었고 이어 내가 장옥(場屋)에서 지은 글을 칭찬하였는데, 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감히 공의 집에 찾아가 덕(德)을 바라보지 못하였다. 지금 박세채(朴世采) 화숙(和叔) 공이 공의 가장(家狀)으로써 나에게 묘문(墓文)을 부탁하였는데,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없었다. 대체로 그 까닭은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만분의 일이라도 속죄(贖罪)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가장을 토대로 하여 차례대로 기록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공은 높은 재주와 훌륭한 기도(器度)로써 인묘(仁廟, 인조)의 청명(淸明)한 세상을 당하여 다만 사묘(私廟)에 대한 논의 때문에 제류(儕流)들에게 의심을 받고 불우하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것은 그 소견이 때마침 그러하여 그 마음에 자신(自信)한 것에서 나온 일이었으니, 가정(嘉靖) 연간의 장계(張桂)와는 같지 않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謂公徒是文章之士위공도시문장지사

공이 한갓 문장을 잘한 선비라고 말한다면,

▣則實政可以範世而警俗칙실정가이범세이경속

실제의 정사가 세상에 모범이 되고 세속을 깨우칠 만하였고,

▣謂公遭逢而利見龍飛위공조봉이리견룡비

공이 시대를 잘 만나서 용이 날아오른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則於進途劣容其足칙어진도렬용기족

진도(進途)에는 그 발을 집어넣는 것이 졸렬하였네.

▣寔因心而爲行식인심이위행

진실로 마음을 인하여 행동을 하였고,

▣亦眇世而肆謔역묘세이사학

또한 세상을 흘겨보아 거침없이 농담하였네.

▣蓋卓犖而奇偉개탁락이기위

대체로 탁월하고 기위(奇偉)하여

▣不屑於規度繩墨불설어규도승묵

규도(規度)와 승묵(繩墨)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네.

▣斯爲一世之雄豪사위일세지웅호

이야말로 일세(一世)의 웅호(雄豪)이고

▣百夫之禦特백부지어특

백부(百夫) 중에 뛰어난 인물일세.

▣凡後之要知公者범후지요지공자

후세에 공을 알고자 하는 자는

▣盍亦觀其述作합역관기술작

어찌 그가 지은 글을 살펴보지 않겠는가?

우암 송시열 지음.

 

▣南溪先生朴文純公文外集卷第十五 / 行狀(朴世采 撰, 南溪集 外集 卷15)

◐知中樞府事玄谷趙公行狀 代趙南平作癸卯六月二十二日

本貫漢陽郡。

曾祖諱邦彥。禮曹參判。妣貞夫人魯氏。

祖諱玉綾城縣令 贈吏曹參判。妣 贈貞夫人奇氏,吳氏。

考諱楊庭。贈吏曹判書。妣 贈貞夫人韓氏。

公諱緯韓字持世。初名紹韓。後改今名。而持世卽牛溪先生所命也。自號玄谷。一號素翁。本高麗僉議中書事諱之壽之後。再世而有諱良琪。年十三襲爵雙城摠管。嘗討哈丹。獻俘于元。大爲世祖所奬。賜錦袍玉帶。又三世而有諱溫。入我 朝事 太祖 太宗。錄開國定社佐命功臣。官至議政府左贊成事漢川府院君。 贈諡良節公。又三世而有諱壽昌。護軍 贈戶曹參判。實公高祖也。參判公故爲 中宗朝名臣。綾城公以文學節槩聞當世。不幸坎壈蚤卒。判書公屢屈公車。晩以詩酒自娛。有四丈夫子。訓迪甚嚴家法。少長日必晨興。盥櫛拜謁唯謹。有少失儀則。公輒不降色。其他多類此。以故諸子擧能銜訓懋學。卒有所成就。公於兄弟爲叔。以隆慶元年丁卯七月戊寅生。生稟秀異。已有出群之氣。甫數歲受學。文理大闡。誦讀琅然。吳夫人素鍾愛。必引置左右曰。此吾耳邊絲竹也。萬曆丁丑遘癘疾。幾危而甦。作詩送判書公。所辭語懇惻。出於自然。人尤異焉。比十五六歲。已誦諸經。遍覽先秦古文。聲譽蔚然。自是數歲以後。屢魁試屋。己丑丁外艱。旣殯。韓夫人患痢。公迎醫診視侍藥。晝夜不解帶。醫言當嘗糞以驗差劇。公如其言。疾愈甚。乃斷手指調藥以進。數日遂瘳。甲午丁內艱。間嘗流寓湖南。屬倭寇未靖。邊陲用兵。公遂從義兵將金德齡陣中。又及 天朝將士遊。欲入江浙間放跡不果。辛丑始中司馬試。癸卯拜重林察訪。公少與石洲權公才名相埓。蓋自辛壬禍亂。憂傷發憤。傲視當世。月汀尹公根壽素知其意。幷除權公敎官。使少降其守云。丙午調繕工監直長。丁未春旱甚。 宣廟下敎求言。公上疏。大抵以伸雪冤枉爲消弭之道。略曰。自 殿下中興以來。庶政日新。與國更始。不念舊惡。而況此遇災之日。所當洞開獄門。銷融罪籍。使刑餘之喘。絏縲之徒。亡不遍被 聖澤。普回天怒。而奈何 綸音纔下。有司弄法。以雷雨渙沛之典。爲市恩鬻權之地。此豈 天地好生之心。帝王赦過之德哉。今之抱冤之臣。不可一二遍擧。而姑以最痛冤者言之。成渾林泉抱病。篤學自修。本不嬰情於世事。而不幸爲時論所中。反覆顚沛。至蒙以無據之罪。鄭澈剛方疾惡。斷無他腸。按獄之際。雖或有所差失。而討逆之罪。反深於爲逆之律。此則其人與骨皆已朽矣。而名猶存於丹籍。目不瞑於黃泉。冤枉之極。孰有加於此乎。至於黃廷彧父子。流離陷賊。保護 王子。險阻艱難。終始一心。而不圖爲宿嫌所中。枉加臣子亡窮之惡。受刑竄謫。已過十四年之久。尙在覆益之下。不得共列於疏放。惟臣妄意旱魃爲虐。未必非此人之冤氣爲祟也。臣目覩冤枉。不知忌諱。論別是非。觸犯 天威。衷情所激。言不知裁。伏乞 聖慈天地父母。快釋此三臣者。上答天譴。下洩幽冤。則霖雨之滂沱。豈特千里。而 國家億萬年無彊之休。殆基於此矣。冬陞南部主簿。未幾遷司憲府監察。己酉登增廣殿試第二名。拜成均館典籍。移工曹佐郞兼春秋館記事官。庚戌陞禮曹正郞知製 敎。秋充謝恩使書狀官如 京師。翌年春復 命。尋除北靑判官。蓋爲群小所忌也。壬子罷歸。亡何延興獄起。時賊臣爾瞻將廢 母后。以國舅爲禍本。誘怵武人鄭浹。歷擧一時巨公名臣。盡之一網。公與諸公遂被逮。居數日而釋。自此禁錮。戊午捲家還南原。有終焉之計。復次淵明歸去來辭以見志。其辭曰歸去來兮。世不我知可以歸。自古不遇者非一。吾何爲乎傷悲。仰孤雲之高標。邈淸風之難追。瞻頭流之幽邃。絶人間之是非。催潘岳之秋興。拂張翰之征衣。涉漢水之浩洋。辭終南之翠微。浩然而歸。策馬南奔。朝發京華。夕至衡門。玉堂金馬。非我思存。可以供老。樂我瓢尊。念疇昔之嬰禍。羌魄悸而汗顏。食同魚而滅耳。豈人心之所安。饕薄祿而營生。縱驅命之所關。較得失於平生。盍遐擧而大觀。矧年老而多病。可卷懷而求還。世雖棄乎君平。道卽存於蜺桓。歸去來兮。聊卒歲而優游。臥一壑之煙霞。竟何慕而何求。當梁肉於晩食。替榮華於無憂。古人先我而實獲。欽往迹而爲疇。顏闔鑿坏。管寧浮舟。或潛身於滄海。或絶響於林丘。雖出處之異路。蓋明哲之同流。顧余志之異是。但有意於歸休。已矣乎。人生富貴在何時。歲月如流不可留。吁嗟乎。舍此將安之。唐虞不復見。巢許非所期。甘終身而倘佯。趁春耕而夏耔。遡長風而放歌。迎素月而哦詩。旣得所而定居。肯從詹尹決所疑。及目見賦役煩重。餓孚載塗。乃以俗諺作流民歎。辭意悲惋。曲盡情態。一時膾炙。見者欲涔然泣下。以此流入宮中。至於光海使人物色中外。幾不免奇禍。後當修史。白江李公特爲採見其事云。至天啓癸亥。 仁祖反正。收召屛黜。拜成均館司成。命太學士申公欽別選知製 敎。將置湖堂儲養之地。公亦與焉。移尙衣院正。司憲府掌令。陞拜執義兼春秋館編修官。會闕中因宮人徐氏有交通外人之迹。仁城君珙驕恣無狀。又與監察爭馳。道詆憲府醜甚。公慮新化椒禁不嚴。 王子已橫。首論之。時當鼎革。民初聞蠲戶役罷內司。無不懽忭。而旋有徵督之擧。加以號牌抄軍管餉。一時並行。怨咎漸興。自元惡腹心長第受誅。政刑已正。而好峻議者毋論䝱從失志之徒。一切繩以重律。且逆獄繼起。人心尤疑。懼不定。公以爲今日之議。當待民優恤。用法寬輕。包容鎭定。以收人心。以定國勢。繇此公在憲府數月。所駁爭率持是意不變。秋鄭百昌察貢士於忠淸左道。處事失宜。以致罷場。而京試亦有擧子不持講帖者。議者將論其事。公啓言 國家待儒生。本宜示以優容之道。況乃犯法者至尠。抱冤者甚多。而渾被削榜。恐其益失士心也。因論百昌之失曰。臣等請罷試官。以慰多士。而 殿下終不聽焉。 殿下之心。出於至公。臣實知之。若遠方儒士不曉。以爲百昌 殿下椒掖之臣。必乃以此有所顧藉。此甚不幸也。今見宋海等疏。其言苟涉誣罔則已。萬一近似。百昌之罪惡得薄乎。 上始罷百昌職。而兼指公爲苟且之論矣。遞拜尙衣院正。俄除襄陽都護府使。憲府論遞。數日而止。蓋坐前事也。公在郡數歲。政淸訟息。一境安堵。又留意於興學育才。親自訓課勤至。又立考試法。別置學田以勵之。文風自此稍振。丙寅翰林檢討姜曰廣,給事中王夢尹頒 詔東來。遠接使金公瑬啓公優有華國手。請以製述官。帶職往還。公至都隨迓 詔使于關西。丁卯虜寇至。公領郡兵星夜赴難。比聞 行在議和。同諸路罷歸。崇禎戊辰病重不赴試官。監司李顯英 啓罷之。未幾敍拜掌樂院正。遷承文院判校。選拜弘文館副校理。改尙衣院正。尋復拜副校理。自是數歲。昵侍 經幄。討論文義。殆無虛月。裨益弘多。嘗因講書經。至嗚呼曷歸。進曰此章所說。雖千載之下。可以隕淚。人君若失人心。而至於蹙蹙靡騁則更何及哉。此 殿下所當戒者也。我 國田賦頗輕。而獨軍布極爲煩重。故至有散而之四方者。非特使民室廬蕭條。田疇荒頓。甚則生子棄而不擧。推此以往。可知其愁怨之情也。凡徵價布。本爲分給捧足。而三人所出。堇及一人。臣意姑罷此法。使四人輪回立番。庶無偏苦之患。 上曰。初爲游兵之多。以有徵布。其弊終至於此。公曰。此非 國制爲然。實梁淵判兵曹時所創也。且聞本曹胥徒多至數十百人。廩食甚多。以浚血剝膚之資。而卒用飽養此輩。尤可痛心。久之移司諫院司諫。還拜校理。一日講至皇天眷佑有商。俾嗣王克終厥德。傳曰蓋天命眷商。陰誘其衷。故嗣王能終其德。進曰蔡氏此註恐未安。夫太甲於桐。處仁遷義者。專由伊尹匡救之力。尹乃不敢自以爲功。歸之皇天。所以示勸戒之意也。今不及此義。而只有云云。是人之遷善改過。不在用力之如何。而必待天誘其衷。然後克從厥德。不幾於使世主皆曰我生不有命在天。作善作惡。皆上帝之所畀。而無意克己悔過者乎。皇天無親。克敬惟親。人君若恐懼修省則天必眷佑。若怠慢暴棄則天必厭斁。豈有無道之君而可得陰誘其衷之理。 上亟然之。其高識類此。時議以崔公鳴吉爲進賀使。蓋泛海之役也。延平府院君李貴進曰。此事甚無謂。蔑待勳臣如此。故屢致逆變。若不倚重勳臣。則外戚宦官。孰不可倚重。公駁曰貴之言過矣。勳臣雖可倚重。凡立 殿下之朝者。其忠君憂國之誠。豈下於此輩。而必以是爲言邪。且外戚宦官之說。尤不敢出諸口者也。貴瞿然稱謝。因講接下思恭。進曰向日臨筵。自 上有狗彘之敎。事甚未安。今見此語。人君待下之道不可如是慢侮者。其意益明白矣。唯 上留念焉。 上曰爾言甚當。蓋欲言不公之事。而致有此失。不勝赧然。先是金公堉以阻金世濂銓郞被罪。李貴又爲論救甚力。 上乃敎以同黨雖若狗彘。薦之猶恐不及。異己者雖有可用之才。擯棄如遺。故公於是及焉。嘗進曰近者臨筵。自 上務爲淵默。使下情不能上達。然則臣等雖欲畢忠盡言於前。而其道末由。此匹夫匹婦所以不獲自盡者也。又曰人君苟能安不忘危。以圖其始。則豈有亡國之理乎。詩曰靡不有初。鮮克有終。此在恒人。猶以爲難。況人君耶。 殿下臨御以來將至十年。雖無大段隳失。而若復恐懼兢業。虛心納諫。得賢制治則善矣。反復不已。 上皆深謝之。後値講丕平富。公進曰夫民者。國之根本。而必欲使斯民丕平富。聖人爲國之道也。今日國家所以民窮財匱一至於此者。良由奢侈之習漸甚。衣服飮食務極豐美故也。至於市井則皆以文錦爲袴。而法司不能禁。豈不寒心。若 殿下能從儉約。則此弊不患不祛矣。臣聞勝國之末。此習亦甚。我 太宗大王問祛弊之道於黃喜。對曰自 上不御錦繡。小臣亦着木綿。此習當自止也。累世傳爲美談。惟 殿下察焉。 上甚然之。公久在詞掖。應製館課屢居魁褒賞。至是 天朝逆帥劉興治擅殺都督陳繼盛。 朝廷方議進討椵島。 上命公製進檄文。辭甚嚴厲。有曰三軍錯愕。血濺宋義之頭。絶嶼蒼茫。悲甚田橫之客。世爭傳誦。歷執義,判校,成均館直講,尙衣院正。復拜判校。辛未以推考敬差官赴湖南。冬兼侍講院輔德。拜修撰轉校理。會以啓覆入侍時。鍾城人羅守男等有越境殺人攘奪之罪。 上以此問左右。公進曰虜賊方欲敗盟。若以此執言生釁。其禍無窮。昔者兩女爭桑。尙爲吳楚興兵之端。況此人所犯。於法罔赦者乎。宜正其罪。以杜後患。 上從之。 章陵禮議十年未決。擧朝力爭以爲不可行。公素於此議。意見有異。實難苟合。故曾在癸亥初。與朴潛冶知誠論辨相符。久而無所變者。蓋謂 仁祖旣非以旁支入承大統。如定陶濮國故事。則不可稱叔。又不可別廟故也。至是玉堂當陳箚請 止 追崇。而公適在直。無可代者。不得已略陳不敢強屈素見。以循時論之意。因請罷免。 上優旨不許。會有白虹貫日之變。公偕同僚上箚。請納諫爭息聚斂。祛奢侈愼偏私。益勵初心。懋加克復。 上嘉納。壬申復由執義陞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諫院以公前辭校理時疏意有涉干幸論罷。 批曰。形諸文字。希冀恩澤。雖趨附時論。圖占美爵者。猶所不爲。爾等勿以此致疑於此人。遞歷兵曹參知。拜右副承旨。上疏辭略曰。臣愚不識忌諱。動輒得咎。欲爲盡禮。人以爲諂。衆訽漂山。式月逢彈。臣旣得罪於時論。欲加之罪。何患無辭。而橫駕汙衊於無情文字之間。雖欲彊顏冒恥出謝新 命。其於物議何。其於廉隅何。臣在玉堂時。偶閱唐人辭職表。有曰年迫懸車。位纔執戟。臣愛其對 精巧。剽竊引用於乞解之章。若曰古今異宜。如此侈曼之語。何敢塵瀆於君父云。則臣亦何言。至於駁之以幸恩干澤。臣之冤抑次於骨髓。是將愈久而愈深矣。臣讀書五十年。尙未解蒙。曾不省八字之中含蓄許多意思。而誤爲使事。臣之瞢闇無識至此尤極也。 上優旨不許。吏判李公貴亦上箚伸救。未幾遷兵曹參知。陞參議。尋以立馬見頉奪告身。乙亥敍拜左副承旨。陞右承旨。歷禮曹參議。丙子復移左副承旨。時有雷雨之變。公偕同僚啓陳消弭之策。略曰 殿下誠能奮發爲大警動大振作之擧。無事文具。無事末節。以至誠對越。以至公赫臨。振肅頹綱。激勵群工。則朝廷正而人心悅。天地和而災沴消。政令不期擧而自擧。修攘不期盡而自盡。此不在 殿下一念修省之間乎。嗚呼。幽獨雖深。不謹則影。 殿下旣已知之。其於修身治國之道。思過半矣。 上嘉納。病辭遞。冬虜報猝急。 上預命朝臣之老病者先往江都。蓋以 大駕將幸彼故也。公行到安山。聞 上已回向南漢山城。卽以單騎追至南門。爲伏兵所阻。又與沈參議之源數人。再進東門而不利。仍痛哭奔竄。欲由海道復入江都。會値其陷敗遂止。亂平奔問于京城。自是數歲。累拜承旨,刑工禮三曹參議。壬午 特命陞拜嘉善大夫工曹參判。蓋公久在玉堂銀臺。 恩遇備至。至是 上念公年踰耆艾。尙勤職事。不憚劇易。故有是除。乙酉轉禮曹參判。翌年光海君卒于濟州。公職當泛海護喪事西歸。朝議以爲此役甚巨。不可煩耆宿。遂 啓遞之。秋以壽登八帙。 命陞資憲階。遂入耆老社。丁亥拜知中樞府事。嘗曰往在己丑。吾喪嚴君。今歲行在此。吾其殆乎。竟以己丑正月二十一日疾終于正寢。訃聞 上驚悼。 命輟朝市。 賜祭賻並如例。以是年三月二十七日葬于坡州津村七井里坤坐艮向之原。公性資直亮而孝友出天。風流篤厚而氣槩邁世。旣以博聞多藝。早有聲名。而又能尋師取友。備識大義。貞確之操。久著於昏亂之朝。廉謹之節。不間於衰晩之日。蓋其義雖切於徇國奉公。而顧其趣常在於湖山花鳥之外也。平生處心行事。以直情不欺爲本。持論以平易明白爲準。其在見守所到。雖被挫揠淪斥。無所回撓。是以立朝論議。雖與世時有牴牾。而君子不以此病公。若其嫺飾設爲名高者則公亦未嘗以爲屑也。少事父母。愛敬俱至。愼終追遠。誠禮無違。每授門生詩經。至蓼莪篇。反復再三。實有不忍讀者。是以請業者廢其篇以爲常。逮于晩歲。語及兩親。悲傷感歎。不覺泣下沾襟。因誦姜晉山希孟送曹大虛序中數語。嗚咽久之。誠可謂耆耋而爲嬰兒慕者也。己丑喪中。以指血己韓夫人疾。厥後月汀公在同里聞之。以其實狀轉報禮曹。至 孝宗時又因李公景奭具列于朝。遂 命掉楔其門。兄弟四人。自爲知己。昕夕相樂。情愛藹然。死喪之畏。哀戚殊至。季氏玄洲公常自湖南赴試至都。猝遘疾甚異。欲歸而難於獨行。公聞其意。立與南轅。往返千里。殆周數月。時公夫人在高陽田舍。堇一舍而近。實未知有行也。癸丑仲兄僉知公與夫人患唐疫疾革。方毒氣流行。遘之者輒底死亡。故親戚莫敢顧視。公身爲救護其疾。晝夜不懈。及並不幸。手執殯斂。誠禮益備。時毋論同室比隣。率被其傳染。而獨公終始得免。人咸異之。以爲庾衮不啻也。其友愛之隆如此。當拆產。公慮老姊貧窶無依。特以所當得者推與之。亡所吝。僉知公身後只有一孫。遭丙子之亂。爲賊兵所掠。公聞之悲痛甚切。卽走僕虜中。捐重金求索。竟不得。只買其妹而歸。公終身以爲恨。其訓子弟。率循先法。如見小失。必擧古今臧否法家遺事。以爲勸戒。其同宗之在外者。造請千謁。戶屨常滿。其待之疏戚遠近。無不各得其意。公素忠厚坦易。綽有前輩長者之風。人有篤行高才。未嘗不咨嗟賞譽猶不及。至於窮鄕晩生。苟有質問。則輒誠心誘掖。多至成名。若夫州縣疵政。同朝過失。則罕爲稱說。如有所恥。然其是非黑白。辨於心者蓋晢然也。少時不羈。旣而通達世情。不欲爲崖異。又善諧謔。其所言雖若出於戲嬉。而莫不各有理致。聽者解頤。故或觸忌諱。人亦不怨也。其氣象高邁。胸懷恢蕩。本無屈首風塵之趣。而可以遊神於八極之表者。固爲諸公所推許。然其戀主急難。感奮跌宕之意。隨事發見。常遊楓岳。夢 宣廟爲說衷曲甚詳。覺而於悒。枕上淚痕猶班班也。公感作一詩曰。暮宿吉祥寺。雲山深復深。飛湍豗大壑。落月隱西岑。萬死孤臣淚。千峯獨夜心。無端憶 君夢。驚斷曉鍾音。蓋其時適當昏亂。豈亦有所相感而然耶。癸巳適聞戰士八九人無辜將騈首就戮。公時以布衣在帶方。卽見元師權公慄以解之。八九人遂得不死。丁巳之禍。爾瞻將復罪受遺諸臣。會公與縱臾者邂逅。遂力爲之緩頰。已而訪玄軒申公,柳川韓公於郊外。申公迎謂公曰。吾聞公近所爲。殆所謂爲人排患釋難解紛而無取者也。公其爲今日之魯仲連乎。韓公亦深自致謝不已。讀書至忠臣烈士遇難慷慨。舍生取義。與夫奇釁險阻。抱冤莫伸者。輒三復悲歎。至如賢邪進退之機。憂傷感激。義形于色。嘗於戊寅年間。群小惎淸陰金文正公甚。公聞之悲吒不豫者累日。公於文章。自未成童。業已誦習經籍。淹通子史。復從佛頂洪老人至誠屢質。肯綮多所解悟。弱冠所取友如鳴皐任公,竹窓具公,石洲權公,東岳李公,體素李公。皆與之磨礲浸灌。揚扢今古。赤幟詞林。自此聞見日博。結纂益精。於書好讀南華戰國離騷昌黎。至如司馬氏少陵。尤所服膺而不舍。故其所樹立。雄渾峻發。如河海涵泓。山岳停峙。行其所無事。而出之不窮。論者以爲其氣酷類之云。至於博士家業。尤稱典雅。時承隆萬升平。文學英俊林立。然每値公入禮圍。同試者微視公操觚行墨沛然。無不嚴憚之。而及拆號公名常占其首。及文出。章甫多取以爲法。黃公廷彧,尹公根壽,崔公岦俱愛公才。稱爲後來巨擘。黃公贈公詩曰。風霆歷覽無窮際。王伯論才更著高。又曰天下奇男王適至。人間仙客李膺來。然則其所推。非止爲詞藻已也。石洲公嘗與黃公語。黃公曰君平生自視與某甫何如。權公曰鞸區區所自奇者。特於作詩軌度。有小見得耳。若其根基恢拓。氣燄盛大。稱其家數者。何敢望某甫。黃公亟然之曰。老夫恐後之篤論者將以此掩君詩名也。平生手不釋卷。又能強記。及至晩歲。慮精力未逮。爲編一書曰古文拔奇。蓋自易經以下中採左國莊騷。以至呂氏博義幾十數家。常置几案。點閱不住。尤喜看溫公資治晦翁綱目。雖到耆耋而猶然也。文集十四卷行于世。少而有志於學。壬辰亂後。訪牛溪成先生。公於流離中往返請問者。蓋屢矣。而先生答書亦勖以勉學擇友。未幾易簣。其在帶方。與崔石溪命龍友善。往還講論。久而無斁。至於沙溪金公。自少從遊。每稱其忠信好學。實有前賢未易及者。嘗以兄禮事之。而金公亦加愛重。到經義難解處。必以咨詢歸正焉。公在阨窮。金公或守外郡。謂公盍以物納官取直。少濟其急。公辭謝不敢。金公曰此特與官家交易耳。非有甚害於義也。其情摯類此。朴公知誡與之同閈。見其稚年志學。後頗稱賞。及癸亥禮議。所見相合。以此至蒙世之訕訾而不恤也。公雖雅以文章名世。寓言老莊。若其所志顧跂慕者。深在於爲己之學。故旣以忠孝自厲。而復以禮法訓家。樂善愛士。老而冞深。其果騷人逸士。脫略名敎。詆排儒學者。所趣異矣。素善梧陰尹文靖公,白沙李文忠公。俱見以國士待之。及白沙謫圽北靑。公以二詩哭之。語甚悲惋。李公榮元,林公懽及其弟㤞,宋公邦祚,李公命後。或以同學。或以氣節相結。平生交誼甚篤。無愧古人。其他知舊遊好。俱一時名勝。雖至白首存沒。未有一人相失者。若其救菑恤患。急人之義。雖當時諸公皆自謂不及也。光海旣廢 母后。公卽南歸。築室于蓼水之上。日與一二故人。賦詩觴詠。翛然與世相忘。其所以潔身遠遯。婆娑丘園。以待淸明。所操者審矣。居家衣服飮食。一任家人所給。不復點檢。若其遭亂流徙。飢寒困苦。人所不堪。而處之晏如。朝 天之日。以太僕 恩賜。盡買書籍。已無他溷也。其罷官而歸。行橐無所嬴。其周流諸曹。只仰食俸祿之入。而一切世俗生產宂瑣。非唯不爲。抑亦內絶其心也。雖及暮歲。率是無變。一室蕭然。凝塵滿席而已。子卯之變。公在東郡聞難。首諸州勤 王。至丙子 仁祖遽入南漢。公狼狽道路。慟哭抆血。誓死從 駕。悲動傍人。其立朝所言。如恤民祛奢。推誠愼終。略具於前。而至論兵制則欲分農戰。論學校則欲加勸課。論法祖則請以 仁廟爲師。論治道則又謂當隨時損益。以救其弊。不可徒守舊法。推其所知。無不羅列陳白。冀動 主聽。其當官奉公。以勤愼二字爲主。司無誤事。人無汙舌。夙夜之勞。每以身先。燥濕之際。一無所擇。世以爲難。性好山水。少與諸公。詩酒游戲於西湖。以爲樂也。及罹癸丑之禍。東遊楓岳。極幽妙奇詭之觀。未幾南歸。登頭流山。訪孤雲遺跡。以散其湮鬱不平之氣。繼而佩符襄陽。日探嶺海之勝。至是詞句益妙。氣韻愈雄。蓋亦所謂得江山之助者也。晩歲酷好菊花。遍求諸種。用意栽培。常到九秋以後。欲使一庭渾然成金海。且作石假山。雜植花卉。四時紅碧相映。幷於堂傍。引水爲方塘。常偃仰其間。以寓臥遊之意。至或諷詠終夕。時時慷慨。曼聲爲悲歌數闋。聲調高朗。辭氣激烈。蓋時丁變。故公亦老羸暇退。不復有意於當世。欲以此自悅而終其天年。然則其地偏心遠。微意可知矣。最公生當 宣廟盛際。未及通顯。晩始釋褐。而値光海昏亂。禁錮流遯殆十數年。至于 仁祖更化。首被 召用。屢遷臺憲。似若可以有爲者。又與時論相左。斥補外郡。後雖出入經幄。而公年已至。遭罹兵亂。懷思就閒矣。天之畀公。固不可謂不美。而用非其才。位未充其德。豈所謂時命之不諧耶。痛矣痛矣。公娶南陽洪氏學生纉之女。以萬曆乙酉歸于公。後十三歲丁酉卒。 贈貞夫人。葬于高陽城山先壟下甲坐庚向之原。生一女。壬辰之亂夭死。無他子。繼娶鎭川宋氏佐郞耇之女。以萬曆庚子歸于公。後四十六歲崇禎乙酉卒。封貞夫人。葬于坡州公墓之後。夫人性慈仁溫惠。有識有行。纔就姆母尹夫人歿。夫人執喪奉祭。一如成人。稍長繼母崔夫人頗嚴莊。以臨。夫人事之敬謹罔懈。及嫁情禮省獻。久而益虔。無一不本於衷者。崔夫人晩乃感悟。愛之反愈已出。事公甚嚴。事雖微細。亡敢自遂其意。從公出入中外數十年。不以私囑干公。爲夫子羞。娣姒之間。亦有相責望妨礙之端。夫人處之尤以和順無拂。卒見解釋。公之未達也。其窮陋亡狀。夫人左右拮据。奉君子育幼稚無甚闕。逮乎官位。俸祿稍隆。其衣食亦務爲儉約。未嘗有居積豐侈之念曰。吾視向時豈不大奢乎。如珍寶玩物婦人所好弄者。夫人視之與布菽日用無異也。其不惑異物如此。其泛愛惻怛。迥出常倫。聞人患難疾苦。爲之動心傷歎。敎子女不置。或勸課學業。或戒奢侈遵禮度。靡有不至。待衆妾。非但不加色辭。久則恩禮無間。咸欲感戴。御臧獲優其恩而約責其功。雖有罪過。輒以溫辭諭之。俾有所改。公與夫人至老相莊。每歎夫人賢。以爲雖古之君子有不可及者。生二男三女。男長倚有文行。年堇十六而夭。事見公祭文。次億工曹佐郞。女長適士人尹確。次適士人朴濰。次適鍾城府使沈榥。億娶大司憲李楘女。生四男二女。長任重次得重次萬重次益重。女長適幼學朴泰成。次適生員金萬墡。尹確生二男二女。男長時亨次時亮。女長適士人李攀龍。次適士人李厚遠。朴濰早卒無子。沈榥生一男一女。男壽亮。女適幼學李泰朝。嗚呼。公之言行本多可擧。而其遡靖 社已上。非億所及者。雖由此以降。進而經席敷奏。臺省言議。固不遑細聞。若其家庭所覩記。亦豈無一二可采者。而億又不敏。不足以深識之也。日月逾逝。而事蹟逾就微昧。爲是大懼。謹以家譜所錄。幷考文集。掇其平生志行之大略。有所敍次。間或自知其不敢僭論。而亦不敢不詳書。以備財幸。總之所謂掛一而漏萬者。不孝之罪誠難逃避。惟望當世立言之君子。俯賜矜察。闡發幽光。具載豐碑。以賁泉塗云爾。不肖孤億泣血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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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공조판서 조위한(趙緯韓) 묘-한양조씨-

(파주)공조판서 조위한(趙緯韓) 묘-한양조씨- 경기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 산75-23(입구:정미소 안) 조위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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