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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 파별 주요 세거지◈
‘고려사(高麗史) 의 조휘(趙暉) 열전(列傳)’에 의하면, 한양조씨(漢陽趙氏) 는 시조 조지수(趙之壽) 전(前) 까지는 한양부(漢陽府)에서 대대로 살아오다가 고려말(高麗末) 시조 조지수(趙之壽)와 그 아들 조휘(趙暉)가 동북면(東北面) 용진현(龍津縣)으로 옮겨 그 후손들이 2~3대 그곳에서 살다가 고려가 멸망하자 다시 한양(漢陽)으로 복귀(復歸)하였다.(원사(元史)의 왕준(王俊)전과 비교 해야한다.심양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
5세 조인벽(趙仁璧)의 맏아들인 양절공(良節公) 조온(趙溫)의 자손들 중에서 7세 한풍군(漢豊君) 조완(趙琓)의 후계(後系)는 조완(趙琓)의 큰 아들 조증(趙璔)의 대 이래로. 홍성(洪城)에 11세 조지황(趙之璜) 조지거(趙之琚) ㆍ 이래로 예산(禮山)ㆍ당진(唐津) ㆍ 연안(延安) ㆍ 안성(安城) ㆍ 공주(公州) 등지에 세거했던 것을 비롯하여 13세 조석호(趙碩虎)의 대를 전후해서 청양(靑陽)의 정산(定山) ㆍ 음성(陰城) ㆍ 함평(咸平) ㆍ 장성(長城) ㆍ 부여(扶餘) ㆍ 곡성(谷城)의 옥과면(玉果面) ㆍ 전주(全州) ㆍ 남원(南原) ㆍ 영광(靈光) ㆍ 진도(珍島) 등지에 자리 잡았다.
또한 7세 조하(趙河)의 후계(後系)는 일부가 11세 조세의(趙世義)의 대부터 고원(高原)에, 9세 조옥숭(趙玉崇) 이래로 문천(文川) ㆍ 북청(北靑)에 가 살았으며 일부는 10세 조숙(趙琡) 이래로 당진(唐津)의 면천(沔川)에, 17세 조시중(趙時重) 이래로 평창(平昌) ㆍ 단양(丹陽) 등지에 터를 굳혔던 것 같다.
조하(趙河)의 동생인 조흥(趙興)의 후계(後系)는 9세 조철(趙澈)이 연산조 무오년(戊午年)에 의주(義州)로 유배된 이후 그 자손들이 의주(義州) ㆍ 철산(鐵山) 등지에 자리잡았던 것을 비롯해서 11세 조첨(趙詹) ㆍ 조규(趙圭)의 대부터 4~5대에 걸쳐 보령(保寧) ㆍ 공주(公州) ㆍ 충주(忠州) ㆍ 청주(淸州) ㆍ 아산(牙山) ㆍ 이천(利川)의 음죽(陰竹), 서산(瑞山)의 태안(泰安), 부안(扶安), 담양(潭陽) 등지와 용인(龍仁) ㆍ 평택(平澤) ㆍ 안성(安城) 등 경기도 일대에 산거했다.
그리고 7세 조육(趙育)으 후계(後系)는 조육(趙育)의 현손 조희헌(趙希憲)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해 공주(公州) 평창(平昌)으로 옮겨가 정착한 뒤에 그곳에 세거하였고, 문정공(文正公) 후손들은 용인(龍仁)에 8세 조의손(趙義孫) 이래로 보령(保寧)에 ㆍ 아산(牙山) ㆍ 평창(平昌) 등지에 나뉘어 살았다.
6세 조온(趙溫)의 동생인 양경공(良敬公) 조연(趙涓)의 자손들은 대체로 10세의 대를 전후하여 양주(楊州) ㆍ 고양(高陽) 등 경기지역에서 전국 각지로 산거해갔는데 7세 조모(趙慕)의 후계(後系)가 연천(漣川) ㆍ 영암(靈岩) ㆍ 무안(務安) ㆍ 광주(光州) ㆍ 함평(咸平) ㆍ 장성(長城) ㆍ 나주(羅州) 등지와 함남 이원(利原)에, 조혜(趙惠)의 후계(後系)는 남원(南原) ㆍ 장흥(長興) ㆍ 무안(務安) ㆍ 영광(靈光) ㆍ 단양(丹陽)의 영춘(永春) ㆍ 영월(寧越) 등지에 정착 ㆍ 세거하였다고 믿어진다.
또한 조연(趙涓)의 넷째 아들 조련(趙憐)의 후계(後系)는 9세 조종(趙琮)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피해 지금의 영풍(榮豊)으로 옮겨간 뒤에 영풍군(榮風郡) 일원과 안동(安東) ㆍ 봉화(奉化) ㆍ 청송(靑松) 등지, 평창(平昌) ㆍ 홍천(洪川) ㆍ 양양(襄陽) ㆍ 공주(公州) ㆍ 여주(驪州) ㆍ 평산(平山) 등지에 살게 되었던 것 같다.
▣6세 가천재공(嘉川齋公) 조사(趙師)의 자손들은 9세 조문림(趙文琳)의 대부터 15세 조무(趙懋)의 대에 걸쳐 용인(龍仁) ㆍ 제천(堤川) ㆍ 영천(永川) ㆍ 홍천(洪川) ㆍ 단양(丹陽) ㆍ 충주(忠州) ㆍ 해주(海州) ㆍ 횡성(橫城) ㆍ 이천(利川) 등지에 세거의 터를 굳혔고, 부사공(府使公) 조순(趙純)의 자손들은 단양(丹陽)과 제천(堤川)의 청풍(淸風) 등지에 많이 살았다.
한편 6새 조뢰(趙賚)의 자손들은 8세 조전(趙銓) 이래로 금산(錦山)에, 9세 조승손(趙承孫) ㆍ 조백운(趙伯雲) 이래로 상주(尙州)의 함창(咸昌) ㆍ 문경(聞慶) ㆍ 선산(善山) ㆍ 강진(康津) ㆍ 영암(靈岩) ㆍ 나주(羅州)에 살았으며 그밖에 한양(漢陽) ㆍ 청주(淸州) ㆍ 제천(堤川) 등지에도 일부 자손들이 가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참의공(參議公) 조재(趙䝴)의 자손들이 단양(丹陽)의 영춘(永春) 등지에 세거하였으며, 사평공(司評公) 조갱(趙賡)의 자손들은 9세 조맹생(趙孟生)의 대부터 함평(咸平)에, 16세 조국주(趙國柱) 이래로 곡성(谷城) ㆍ 정읍(井邑) ㆍ 장성(長城) ㆍ 진천(鎭川) 등지에 살게 되었다.
6세 판사공(判事公) 조관(趙貫)의 자손들은 11세 조공려(趙公呂)가 김제(金堤)로 가 나뉘어 살았다.
1930년 당시 한양조씨(漢陽趙氏)는 , 충북 청원군(淸原郡) 강내면(江內面), 음성군(陰城郡) 금왕읍(金旺邑), 단양군(丹陽郡) 영춘면(永春面), 충남 당진군(唐津郡) 면천면(沔川面), 전남 무안군(務安郡) 석곡면(石谷面), 경북 영양군(英陽郡) 일월면(日月面) , 안동군(安東郡) 서후면(西後面), 예천군(醴泉郡) 감천면(甘泉面),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일원, 옹진군(甕津郡) 용천면(龍泉面), 함남 북청군(北淸郡) 덕성면(德城面), 이원군(利原郡) 동덕면(東德面) ㆍ 서면(西面), 영흥군(永興郡) ㆍ 고원군(高原郡) 일원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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