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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6世祖 嘉川齋公(諱師)神道碑와 齋室 致川齋◈嘉川齋公諱師趙先生神道碑銘竝書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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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世祖 嘉川齋公(諱師)神道碑와 齋室 致川齋◈

가천재공휘사조선생신도비명병서(嘉川齋公諱師趙先生神道碑銘竝書)

이씨 조선<李韓>의 처음에 가천재 조선생(嘉川齋趙先生)이 있었으니, 휘는 사(師)요, 그 선대(先代)는 한양 사람이다. 시조 지수(始祖之壽)는 고려에서 첨의 중서사(僉議中書事)로 이 분이 휘(暉)를 낳았으니, 쌍성총관(雙城摠管)이고, 총관이 양기(良琪)를 낳았으니 총관을 습작(襲爵)하고, 이 분이 돈(暾)을 낳았으니 예의판서 용성부원군(禮儀判書龍城府院君)이오, 이 분이 인벽(仁璧)을 낳았으니, 보리공신용원부원군(輔理功臣龍原府院君)인데 고려의 운수가 다 한 것을 보고, 양양시상촌(襄陽柴桑村)으로 은퇴(隱退)하여 망복(罔僕)의 절의(節義)를 지켰으니, 후일에 추증하여 한산백(漢山伯)을 봉하고 시호를 양렬(襄烈)이라 하였으니, 이 분이 가천재공에게 아버지가 된다.

비(妣)는 정화공주(貞和公主)로서 선생은 처음부터 이태조의 친생질(親甥侄)이니, 예(例)에 의하여 통정대부 중추원사(通政大夫 中樞院事)에 재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양양(襄陽)으로 돌아가 조정에서의 여러번 초빙을 거절하고 나가지 않고 늙어서 마쳤다.

일찍이 원운곡 천석(元耘谷天錫)과 더불어 공양왕(恭讓王)을 호위(護衛)하고 있었기에, 교분이 가장 친밀하여 가치천(嘉致川) 위에서 초연하고 자유롭게 지내면서 스스로 호(號)를 가천재(嘉川齋)라하고 노닐던 대(臺)를 와선대(臥仙臺)라 하였다.

임종할 때 (자손들에게) 일러두기를,

[내가 죽거든 마땅히 포은(圃隱 鄭夢周)의 묘소 근처에 묻어서 지하에서라도 따라 노닐게 해달라.]

라고 하여 마침내 유명(遺命)을 준행(遵行)하여 용인 능곡(龍仁陵谷)의 오향의 언덕을 벼개로 장사하였으며, 후일 양렬공(襄列公)을 향사하는 충현사(忠賢祠)에 배향(配享)하였다.

배(配)는 숙부인 언양김씨(淑夫人彦陽金氏)니 대사헌 계생(大司憲繼生)의 딸이다. 묘소는 같은 언덕이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맹발(孟發)은 현령(縣令)이오, 중발(仲發)은 현감(縣監)이오, 계발(季發)은 녹사(錄事)다. 맹발의 아들은 승원(承源)이고, 손자는 위(瑋)니 모두 군수(郡守)다. 중발의 아들 민(珉)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의(執儀)이고, 쟁(崝)은 도사(都事)요, 준(嶟)은 군수요, 숭(崇)은 사용(司勇)이요, 금(嶔)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인데 이 분이 계대(系代)를 이었으니, 그 후손에 고관과 학자가 대대로 이어 <대강 추려도> 문숙(文琡)은 문과한림(文科翰林)이고, 문림(文琳)은 침랑(寢郞)임. 문거(文琚)는 세마(洗馬)요, 광언(光彦)은 문과응교(文科應敎)요, 공(珙)은 사성(司成)이며, 우(愚)는 수의(修義)요, 임(恁)은 교위(校尉)요, 변(抃)은 증좌찬성시정익(贈左贊成諡貞翼)이며, 세주(世舟)는 부사(府使)요, 세규(世珪)도 부사(府使)며, 그 다음에 원서(元緖)는 진사(進士)이다.

정종대왕(定宗大王)이 일찍이 선생의 중씨되는 한평부원군연(漢平府院君涓)에게 말씀하기를, [경의 아우 사(師)는 충효양전(忠孝兩全)했다.]라고 하셨다.

아! 성생이 가신지 五백여년이 되었는데 그 훌륭한 행검(行檢)과 탁월한 절개는 그 상세한 고사(故事)를 참고 할 만한 것을 얻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왕의 말씀이 지중하니 여기에 밝힌다.

후손 중형(仲衡)이 집에 전해오는 간략한 기록과 국사에 실려있는 것으로 행장을 만들어서 가원(家源)에게 묘도(墓道)에 세울 비명(碑銘)을 써달라고 하였는데, 내가 마침 해외 여행으로 빨리하지 못했다가 돌아오자 다시 깨우치는 편지가 와서 감히 다시 늦출 수 없는 지라 명(銘)하여 이르기를,

왕조(王朝)의 성씨(姓氏)가 바꿔지는 크나큰 혁명이니

하늘이 한일이니 잘 못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지말라.

朝代易姓大革命 天也匪人莫誰何

나아가고 물러서는 의리는 일찍이 공부한 바 있어

선비다운 일이다 지조를 숭상함이지 다른 뜻은 없었네

行藏之義夙所講 士也尙志餘無他

그 시절은 당당히 뽑낼 수 있었던 조가천선생(趙嘉川先生)

한양의 명문가벌(名門家閥)이며 또한 아름다웠으니

時維堂堂趙嘉川 漢陽名閥也蟬蜎

아버지는 이미 정화공주(貞和公主)에게 장가 들었서도

오히려 정절(靖節)을 지켜 시골로 은퇴(隱退)하니

皇考旣尙貞和主 猶修靖節臥林泉

()도 욕심없는 깨끗한 정신을 이어받어 <조정에서>불러도 나가지 아니하며

훌륭한 훈작(勳爵)을 헌 신짝 같이 버렸구나.

公嗣淸塵徵不起 好爵如棄弊屣然

일찍이 운옹(耘翁)과 더불어 공양왕(恭讓王)을 섬겼으니

그리워라 아름다운 사람은 잊쳐지지 않으니

曾與耘翁事恭讓 懷哉佳人不能忘

먹구름같이 어둡던 한시절이 지나간지 五百년이나 되었지만

넋이야 주저하며 슬픔만 더 했으니

雲黝草冥五百春 魂兮夷猶增惆悵

착한 자손들이 돌을 쪼아 유적(遺蹟)을 기념(紀念)하고저

먼 조상의 잔약한 기록과 옛날 사실을 주어 모으니

慈孫琢石紀遺蹟 代夐史孱故實摭

왕의 말씀에 충효양전이라 하였으니

천년을 두고 전하고 칭송하여 오래 오래도록 싫증남이 없으리라.

忠孝兩全王有言 傳誦千秋無久射

지나다가 이 글을 읽는 자는 반드시 엎드려 절하면서

가득찬 맑은 바람에 하하며 한바탕 칭찬하리라.

過者讀之尻必昻 滿山淸風噓一席

기미(己未 一九七九원일(元日)

문학박사(文學博士진성 이가원(眞城李家源)은 삼가 찬()하다.

李家源 一九一七年生李退溪의 十四世孫 文學博士 中華民國哲士 延世大敎授.

通政大夫僉知中樞院事 嘉川齋先生漢陽趙公師之墓 淑夫人彦陽金氏祔左

통정대부첨지중추원사 가천재선생한양조공사지묘 숙부인언양김씨부좌


 

출처: https://sugisa.tistory.com/entry/通政大夫僉知中樞院事-嘉川齋先生漢陽趙公師之墓-淑夫人彦陽金氏祔左통정대부첨지중추원사-가천재선생한양조공사지묘-숙부인언양김씨부좌 [晛溪 斗井軒 Sugisa: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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