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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聖經)♡

◎주님과 항상 동행하라![2025.02.23.일.주말예배]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5.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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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항상 동행하라![2025.02.23.일.주말예배]

누가복음 2:41~52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찬송 430장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1.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후렴]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2.

어린 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길로 가겠네
3.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하는 대로 주와 같이 가겠네
4.

옛 선지자 에녹같이 우리들도 천국에
들려 올라갈 때까지 주와 같이 걷겠네

Ⅴ.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 소년 예수 (눅 2:41-52)

  (1)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절기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41,42절). 예루살렘까지는 긴 여행이었으며, 또한 그들은 가난하였지만, 항상 율법에 따라 유월절 행사에 참여했다. 공적인 의식은 종종 거행되어야 하며, 우리는 모이는 일을 폐해서는 안 된다. 어린 예수는 열두살 때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유대 학자들은, 열두살된 아이들은 때때로 금식을 시작해야 하며, 열세살이 되면, 아이는 율법의 아들이 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유아기 때부터 할례에 의하여 계약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면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앞선 아이들은 신앙적인 면에서도 당연히 앞서게 된다. 어려서 하나님께 바쳐진 아이들은, 자라서는 복음의 유월절에 즉 주의 만찬에 청하여지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그들 자신이 실행하도록 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부모가 돌아간 뒤에도 계속 머물러 계셨으며 그 부모들은 알지 못하였다.

   1)그분의 부모는 그 날들을 마치기까지 돌아가지 않았다. 비록 그 첫 이틀이 지난 후에까지 그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들은 유월절 연회기간인 7일동안 내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여기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답게 의식이 끝날 때까지 서둘러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2)이 때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는데, 그 이유는 집에 가기가 싫었거나 부모와 동행하기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거기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며, 또한 부모로 하여금 자신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계시며 자신은 그들에게보다 그분에게 더욱 복종하여야 함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분이 부모들에게 보다 더욱 복종해야 될 분이셨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부모에 대한 불경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기꺼이 주의 집에 거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대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주의 집에 거할 때 그들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3)그의 부모는 그가 뒤에 남아 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하룻길을 갔다. 그들은 그가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였던 것이다(44절). 이 절기에는 많은 무리들이 몰려왔으므로, 그의 부모는 그가 그들의 이웃들과 함께 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그를 찾았다. 혹시 "우리 아들을 보셨습니까"하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45절). 어쩔 수 없이 교제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라곤 거의 혹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친족과 이웃들이 많이 있다. 그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자, 그들은 그 날 밤 그들이 묵었던 곳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4)그들은 지난 밤 묵었던 곳에서 그를 찾지 못하자, 다음 날 아침 다시 그를 찾아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그리스도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을 만나게 될 때까지 찾아야 한다. 그분을 찾는 자들은 반드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안을 상실한 자는, 그들이 어디서 언제 어떻게 그것을 상실하였는지를 숙고하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누렸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5)사흘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났다. 거기서 그들은, 그가 선생들 중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46절). 즉 그는 그 선생들에게서 훈련받거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배우는 사람으로서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지혜가 충족했을 뿐만 아니라(40절), 그 지혜를 더하며 그것을 주고 받고자 하셨음을 보이는 한 예이다. 여기서 그는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질문도 하였다. 그가 선생으로서(그는 물을 권위도 가지고 계셨다) 질문했는지, 아니면 배우는 자로서(물어볼 만큼 겸손하셨다) 질문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는 선생들에게 대답하기도 했는데, 그 대답은 매우 놀랍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47절).

   6)그의 어머니는 이일에 대해 그와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가 거기에 있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가 선생들 중에 앉아 있도록 허락받을 만큼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의 어머니 자기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를 그에게 이야기하였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48절).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놀라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그는 자기에 대한 그들의 지나친 근심을 조용히 책하셨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49절). 그러나 그 당시 그의 부모는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다(50절).

   7)그들은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그는 양친에게 예루살렘에 와서 정착해 살 것을 권하지 않고 기꺼이 나사렛에 은둔해 계셨다. 말하자면 그는 수년동안 세상에서 잊혀진 채 그곳에서 지내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첫째, 그는 그의 양친에게 순종하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목수 일에 종사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둘째, 그의 모친은 아들이 하는 말들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이 모든 말들을 마음에 두었다`

셋째, 그는 점점 자라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52절).

** 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게 주시는 은혜와 교훈과 축복은 무엇인가?

누가복음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 아버지 집

* 예수님의 성장 과정(2:40-52)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영육은 균형 있는 성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신자들의 성장 과정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성장 과정에서 부모는 예수님을 잠시 잃어버리는 일을 당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것을 모르고 동행 중이라 생각하며 하룻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늘 동행해야 하는 우리가 주님의 뜻보다는 자기 생각을 앞세울 때, 그리고 그 생각대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예수님을 잃을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여기에서의 문제는 예수님이 움직이고 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움직이며 변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한결같은 분이십니다.

주님! 아버지 집인 성전에 머물면서 말씀을 배우며 듣기도 하고 물으면서 주님과 같은 지혜와 총명을 얻게 하옵소서. 아멘 🙏

우리 인간이 물어왔던 모든 질문 가운데 가장 진지한 것은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저는 이 질문에 대하여 가장 통찰력 있는 대답을 시도한 사람은 “1600년대를 살았던 불란서의 천재 철학자 파스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쓴 “팡세”에서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한 줄기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실로 자연 가운데서도 가장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을 분쇄하기 위해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을 가지고도 넉넉히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인간을 분쇄한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 더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 23편의 내용은 “다윗의 체험적인 고백”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권력도 재물도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자신의 본모습을 잘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갈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점이 바로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권력과 그의 재물”이, 자신의 영적인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그는 “자신의 분수”를 지켰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가 되시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 바로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종착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목자”라면 “우리 모든 인간은 양”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양과 같은 우리 모든 인간의 문제에 목자로서 해답이 되신다.”는 선언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시는가?”를 이해하기에, 앞서 문제 속에 있는 우리 “인간의 실존”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과 같은 우리 “인간”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성경에 나타난 다윗의 인생고백을 통해 우리 삶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내 인생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2-3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 “쉴만한 물가”는 양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잔잔한 물가”를 말합니다.

양이 자기의 길을 알아서 가는 것이 아니리, 목자의 인도함을 따라 그 길을 동행할 때, 거기에서 양은 “삶의 평안함과 잔잔한 물과 쉴만한 곳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윗은 찬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도하심에 자신의 전 존재를 맡겨야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자 주님만이 우리 인생의 참 목자가 되셔서 “당신이 계획하신 최선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내 인생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안위하신다는 것입니다.

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 “안위”란 말은, 눈물을 닦아주고, 새 힘을 북돋아 주는 “위로”를 의미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경제적 어려움이나, 질병과, 자녀문제 등의 어려움들이 면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의 목자가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려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 나를 위로해 주신다.”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실 양은 멀리서 겉으로 보면 깨끗해 보이지만, 가까이 있으면 냄새나고 너무 쉽게 환경에 오염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다 양 같아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 타락”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를 의롭다할 육체가 하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우리 인간은 오늘날의 눈부신 문명을 발전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스스로 만든 그 문명에 의해 위협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핵무기를 만든 것이 누구였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 “핵무기를 규제해야 한다.”고 소리치며, 서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나라가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우리는 얼마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 자동차 덕분에 우리는 교통사고율 세계 제1위의 국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다가 모종의 종양이라도 발견되었다 싶으면, 갑자기 힘이 빠져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 오늘 근사한 모습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왔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책의 어두운 갈등”이 있고 “방황의 상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요, 양과 같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말합니다.

여호와는 구약성경에 무려7,000번이나 나오는 단어인데, 그 뜻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는 길 잃은 인간의 목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요10: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한 사람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양들을 찾기 위해 “나와 함께 잃은 양들을 찾자”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3. 내 인생의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하게 대우하신다는 것입니다.

5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 “기름으로 머리에 바른다.”는 것은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이 될 때 “기름을 바르는 예식”을 의미하는데, “총애를 받는다, 혹은 직분을 받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존귀하게 대우하시는 주님을 만날 때, 예외 없이 우리의 삶도 흘러넘치도록 감동적인 삶을 누립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사실 “솔로몬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의 여호와의 집은 장막으로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이 계시는 곳이기에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약속이고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날 사랑하시는 만큼 나도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배하는 우리들의 결단은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9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 시대의 민중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는 모습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2제자를 세우시는 모범을 보여주신 다음, 그 제자들이 또 다시 각각 12명 내외의 영혼들을 책임지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사명”이라는 것을 알고, 목회  비전을 이루어가며 우리의 큰 목자요, 선한 목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생명을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출처: https://sugisa.tistory.com/15721211 [晛溪 斗井軒 Sugisa: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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