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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병장조경남장군신도비(譯文)●
▣故義兵將成均進士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山西先生趙公神道碑銘 竝書▣
通政大夫전前비서원승秘書院丞 안동 김녕한安東金甯漢 짓고,
崇祿大夫前判敦寧院使海平윤용구(尹用求,1853-1939)글씨 전서도 쓰다.
목릉(선조)임진, 계사년 사이에 왜적이 침입하여 우리 강토를 짓밟고, 우리 백성을 짓이겨 죽임으로써 당시 충의를 지닌 선비들이 견고한 갑옷을 걸쳐 입고, 날카로운 무기를 움켜들고서 적개심을 품은 자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이한 계책을 내고 사기를 북돋아 작은 병사로서 많은 왜적에 대항하여 큰 공을 세운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산서 조공을 일컬어 왔다.
공은 한양인이며 휘 경남, 자 선술이다. 고려 첨의중서 지수의 후예이다. 조선조 우의정 양경공 휘 연으로부터 벼슬이 대대로 이어왔으며, 고조는 호조판서 휘 숭진이며, 증조는 참봉 휘 순이며, 조는 별제 휘 세헌이며, 선고는 사직 휘 벽이다. 비는 남원양씨 현감 언호의 딸이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명민하고 거동과 용모가 드높고 단정하였으며, 성품은 질박하고 어질고 효성스러웠다. 중봉 조선생을 사사하였는데, 중봉선생이 공을 영재라 인정하였다. 왜적이 부산성을 함락했을 적에 정발이, 동래성이 함락했을 적에 송상현이 전사했고, 조령을 잃으면서 신립이 패전하여 죽음으로써, 한양과 대궐이 짓밟혀 임금은 피난길에 올랐다. 이에 공은 칼을 어루만지면서 적개심에 동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는데, 당시 나이 23세였다.
의병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서 원천동(源泉洞)에서 군기를 엄숙히 갖추고서 병사들에게 맹서하여, 장사달을 총사(總事)로, 유지춘을 참모로, 양덕해를 운량(運糧)으로, 안사제로 좌부(左部)로, 박언량을 우부(右部)로, 박필남을 척후(斥候)로 삼았다. 인진년 9월3일 운봉으로 진격하여 팔량치에서 큰 승리를 거뒀고, 안의로 진격하여 또 육십령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왜적 300여 급을 죽였고, 산음으로 진격하여 또 다시 왜적을 대파하였다.
그 이듬해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평양과 서울을 회복하면서 조정의 명으로 의병을 해산하라고 함으로써 공은 의병을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 내적(內賊)이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공은 추동에 이르러 그 우두머리를 죽였다.
정유재란에 왜적의 배가 바다를 가득 메운 채 침략해오자, 명나라 장수 양원이 남원에 주둔하면서 방어할 계책을 생각지 않았다. 이에 공은 『수양성이 함락되었을 때 장수는 맨손으로 아무런 공효가 없었다』고 하여, 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 이튿날 성이 함락되어 왜적의 사세가 더욱 성하자, 공은 마침내 집안에 노비들로 의병의 대오를 편성하고,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았는데, 의병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에 불우치에 복병하여 황금가면을 쓴 왜적다섯 사람을 사살하여 마침내 대파하였고, 또다시 구등령으로 진격하여 왜적을 대파하였고, 또다시 궁장현으로 진격하여 대파하였고, 이어 곡성에 주둔하면서 백성을 끌어다가 벼를 베던 왜적 우두머리를 죽였고, 또다시 산동에 주둔한 왜적 50여 급을 죽였고, 또 다시 이언에서 왜적을 베었고, 이어 숙성령에서도, 해현에서도 왜적을 베면서 뒤쫓아 함양에 이르러 크게 승리하여 사람과 가축 20여 구를 되찾아 데리고 왔다. 의탄의 전투에서 왜적 50여 급을 죽였고, 모곡 지촌의 전투에서 220여 급을 사로 잡았으며, 엄천의 전투에서 230여 급을 얻었다.
명나라 장수 유정의 선봉대가 되어 왜적을 협공하였는데, 날아오는 탄환이 우박처럼 쏟아졌지만 공은 활을 당기면서 대여섯 명의 왜적을 관통시켜 죽였고, 양 진영이 한꺼번에 뒤엉켜 백병전을 벌였는데, 얼마 후에 갑자기 왜적 우두머리가 죽었다는 말에 왜적이 철수하였다. 공은 마침내 산 채로 돌아왔다.
병사는 천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크고 작은 전투에서 귀신과 같은 전략으로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움으로써 한 마리의 기마와 한사람의 병졸도 잃지 않았다. 이에 도체찰사 이원익과 원수 권율이 전후하여 공을 포상하는 계(啓)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공은 『임금이 욕을 치루고 있는데 신하가 목숨을 바치는 것은 본분이다. 나라위 수치를 설욕하지 못함으로써 그 죄가 날로 심한데, 어떻게 감히 공을 세웠다고 자처하겠는가!』라고 하여, 마침내 강력히 시양하여 그만 두었다.
인조 갑자년(1624)에 역적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공은 의병을 일으켜 전주에 이르렀는데, 이괄의 난이 평정됐다는 말을 듣고 멈추었다. 정축년(1637)엔 호란(胡亂)이 일어나 의병을 이끌고 청주에 이르렜는데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는 말을 듣고 대성통곡하면서 집에 돌아왔으며, 그 후 황명단을 쌓아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뜻을 담았다. 공은 이 전투에서 비록 혁혁한 전공은 없었지만 그 빛남은 일월과 다투어 천하 만세에 말할 만하다.
호남과 충정의 경계에 일찍이 큰 호랑이가 많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길가는 이들이 길을 갈 수 없었다. 이에 공은 덫을 놓아 죽여 방어영에 호랑이를 보냈다. 공이 백성을 위해 어려움을 없애준 공 또한 왜적을 평정한 공에 못지않다.
공은 6살만에 부친을 잃었고 13세에 어머니마저 잃음으로써 외조모 허씨의 손에 길러졌다. 허씨가 연로하였고, 또한 다른 자녀가 없음으로써 조모와 손자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며 하나의 운명으로 살았기에, 처음 고제봉에게 의병을 데리고 찾아갔지만 조모 허씨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그 길로 되돌아 왔다. 또다시 중봉의 격문을 보았지만 또한 허씨의 병이 심함으로써 찾아가지 못하여 칠백의사의 렬에 동참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삼았다.
마침내 이에 여러차례의 큰 공헌으로 중흥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비록 종충간(宗忠簡:宗澤)과 악무목(岳武穆:岳飛)으로도 이보다 더할 수 없었을 터임에도 그의 공을 자랑하지 않고 그의 포상을 강력히 사양하였다. 군자가 이 점을 어려운 일이라 칭찬하였다. 학문의 공을 속일 수 없는 일이며, 중봉선생은 참으로 지인(知人)이라 말할 만하다.
신사년(1641) 정월 19일에 임종을 맞으니 그 태어난 경오년(1570)간은 향년 72세이다. 남원부 동쪽 백암방 덕언동 사좌에 안장하였다. 공은 인조 갑자년(1624)에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그 후 공의 정충으로써 여러차례 증직이 내려 가선대부 호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으르렀고 주포원에 배향되었다. 공은 불후할 것이다.
전화를 겪은 나머지, 문헌을 많이 유실하였지만 공이 저술한 전진일록(戰陣日錄)과 야사(野史)8권이 다행히 전해져 옴으로써 국사에 누락된 부분을 보완힐 수 있으니, 조정에 큰 보답과 사림의 존숭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후세에 빛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공은 재혼하였는데, 무두 김씨이다. 전부인은 자식을 낳지 못하였고, 후부인은 3남1녀를 낳았다. 시영•시형•시탁과 壻 정인화이다. 두 부인은 모두 공의 묘소와 함께하면서도 각기 하나의 묘소를 가지고 있다. 공의 후손 성민이 장차 묘비를 세울 적에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로서는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나, 공의 행장을 지은 버 있고, 내가 태어난 시대를 슬퍼하는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이 글을 쓰면서 스스로 분개하는 바이다.
명문은 다음과 같다.
중봉선생의 큰 솜씨여! 어진 재목을 길렀도다.
성대한산서 조공이여! 문무의 재주를 다하였도다.
임진애란으로 국운이 비색하여, 왜적이 창궐하자
이에 의병을 모아, 예닐곱번 정벌함에
바위로 알을 누른 듯, 범이 염소를 몰아가듯 하였다.
어지러운 전운(戰雲)을 쓸어버리니, 다시 동녘이 맑아졌어라.
금노가 쳐들어옴에, 국치는 회계보다 심하였다.
황명단에 빛나는 충성이여! 태양과 별과 함께 하리라.
유가의 단전(單傳) 심법(心法)으로, 떳떳한 본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네.
많은 군자여! 공을 보면서 스승을 삼아라.
상장 군탄(上章 涒灘: 庚申 1920) 건(乾:4월) 재순(再旬:20일)
통정대부 전 비서원승 안동 김녕한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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