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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17世祖梧竹軒諱宜陽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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宜陽字義卿號梧竹軒己亥生辛卯司馬文章鳴于世壽同樞戊辰卒有文集墓甘泉梧香洞後亥坐配永川李氏父猶龍墓館坪沙禮洞艮坐配安東權氏父正元墓山谷聖岺酉坐

의양자의경호오죽헌기해생신묘사마문장명우세수동추무신졸유문집묘감천오향동후해좌배영천이씨부유룡묘관평사례동간좌배안동권씨부정원묘산곡성령유좌

 

 <오죽재문집서(梧竹齋文集序)> 

백년이 넘은 기록을 평론하자면 보고 아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데 미치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좋을까? 이 또한 방법이 있으니 당시의 인정된 평판을 살펴볼 뿐이다. 몸소 살펴보면 상세히 알 것인데 옛사람의 감식안이 지금보다 한 등급 높았으니 함부로 재단할 수 없고, 특히나 후세에 확실한 것을 전하는 것에 비할 바 아니니, 어찌 후세에 모색하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오죽재(梧竹齋) 조공(趙公)의 세대는 이미 백년이나 오래 되었고, 후생인 소자는 늦게 태어나 이에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였고, 문무에 정통한 지식을 쉽게 엿볼 수가 없던 차에 그 세대를 논하자면 유학이 흥성하여 석학이 빼곡히 늘어섰다. 사사한 분으로는 눌옹(訥翁) 이광정(李光庭, 1674-1756) 선생이 있고, 교유한 분으로는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1723-1801) 옹,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1719-1791) 공이 있는데, 삼현은 한 마디로 말하면 천고에 이름을 남길 수 있기에 충분하다. 눌옹은 시는 한위(漢魏) 시를 본 받으라 격려하였고, 간옹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시에서 추숭하고 힘쓰길 기대함이 지극하였다. 간혹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내는 듯하다. 비유하자면 격조와 기세는 간혹 봉황이 오동나무에 깃들고 광채를 비추고 종장이자 거장이라서 모두 한 마디가 이와 같으니, 이와 같은 평판을 주인이 어찌 평판을 고칠 수 있겠는가? 유고 3책이 장차 세상에 널리 퍼질 터인데 문장은 진실로 넉넉하고 완곡하며, 시는 더욱이 고아하고도 힘차고 범상치 않고 강건하며, 소리는 자연과 통하고 흥취가 정신적 소통으로 넘쳐나니 모두가 뜻을 무궁함에 기탁하고 흥을 사물 밖에 맡겼으니 쟁쟁 운문의 궁성(宮聲)과 우성(羽聲)이 석진(石陣)의 북과 깃발에 삼엄하게 벌려놓은 듯하다. 그러하나 시를 모르는 사람은 그 울타리를 살펴보지 못하고 망녕되이 정론하여 오로지 선배의 말로써 그것이 한위의 시일 뿐이자 이백과 두보의 시일 뿐이라고 믿게 되니, 왕세정(王世貞, 1526-1590), 이몽양(李夢陽, 1475-1529)은 더 따질 것도 없다.

공은 쌓은 지식이 풍부하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소시(小試)에 그쳤을 뿐이니 산수가 나의 지난날 약속이요, 경전이 나의 참다운 즐거움이었으며 기이한 책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고 늙어서는 더욱이 주자(朱子, 1130-1200)와 퇴계(退溪, 1501-1570)의 책을 좋아하여 시집에 차운한 시가 천편에 이르니 수식에만 힘쓰고 많다고 뽐낸 것이 아니다. 경모하여 읊조리는 사이에 황홀하여 음성의 가르침을 따르고 감동하여 흥이 일어나는 실마리를, 어떤 사람은 그것의 오묘함을 알지 못할 것인데, 시를 잘 짓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니 다른 날 이 문집이 시인의 운치 밖에서 공을 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거의 터득할 것이다.

갑인년(1914) 매우절(6, 7월)에 완산(전주) 유필영(柳必永) 삼가 씀

尙論百歲以上睹記, 有不及智見, 或未逮, 若之何而可也? 是亦有道, 攷論當時之定評而已. 躬閱親見者, 旣知之詳, 古人鑑識高於今一等, 秤稱不苟, 尤非後世比傳信, 豈由後摸索者之可擬哉. 梧竹齋先生趙公之世, 已百年古矣, 後生小子有生晩, 未及之嘆, 經箱武庫, 未易窺測間常論其世斯文盛際, 鴻碩林立也, 師事有訥翁李先生, 交遊有海左丁公艮翁李公, 三賢一言足以千古. 而訥翁勉以詩效漢魏, 艮翁待以李杜之間推詡期勉至矣. 或以怒猊決石, 譬其格力, 或以瑞羽棲梧, 贊其光彩, 宗匠鉅工, 咸一辭如是, 汝南月朝, 疇人敢改評哉. 遺集三冊, 將廣于世, 文固贍鬯紆餘, 詩尤蒼健奇崛, 聲通於自然, 趣溢於神會, 類皆托意於無外, 寓興於物表. 鏘鏘雲門之宮羽森列石陣之旗鼓. 然瞢於詩者, 未可窺其藩籬, 妄爲論隲, 只以前輩之言, 信其爲漢魏而已李杜而已, 弇峒不足數也.

公蘊蓄宏富, 未時與遇而小試, 則山水, 吾宿契也, 典墳吾眞樂也, 僻書滾帙, 靡不淹貫而晩來尤好朱退書, 詩集次韻, 至累千篇, 非是役藻而誇多也. 景慕吟咏之際, 怳然音旨之聆而感發興起之端, 自有人不及知之妙, 工詩特餘事也. 他日之是集者求公於詩家韻格之外, 庶乎其得之矣.

閼逢攝提格梅雨節完山(全州)柳必永謹序

눌옹(訥翁) : 이광정(李光庭, 1674-1756)을 가리킨다. 이광정의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이며,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이현일과 이재(李栽), 권두경(權斗經), 권두인(權斗寅)에게 학문을 배웠다. 평생을 학문에 종사하여, 경상 감사를 지낸 조현명(趙顯命)과 김재로(金在魯)가 그를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영남 제일의 인물이라고 칭송하였다. 문집으로 ≪눌은집(訥隱集)≫(22권 11책, 한국문집총간), ≪망양록(亡羊錄)≫이 있다.

◐정범조(丁範祖, 1723-1801): 조선 문신이다. 자는 법세(法世), 호는 해좌(海左), 시호는 문헌(文憲),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벼슬은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내고 판서에 이르렀다. 저서에 ≪해좌집(海左集)≫이 있다.

이헌경(李獻慶, 1719-1791):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경(星慶), 자는 몽서(夢瑞), 호는 간옹(艮翁), 백운정(白雲亭), 현포(玄圃) 등이다. 홍명한(洪名漢), 신광수(申光洙) 등과 교유하였다. 저서로 ≪간옹집(艮翁集)≫이 있다.

노예결석(怒猊決石): 당나라 때 명필 서호(徐浩)가 일찍이 42폭의 병풍을 썼는데, 여기에는 팔체(八體)가 다 갖추어진 데다 초서와 예서가 더욱 뛰어났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 서법을 형용하여 말하기를, “성난 사자가 돌을 후벼낸 듯, 목마른 준마가 샘으로 내닫는 듯하다.(怒猊抉石, 渴驥奔泉)”라고 했다.

여남월조(汝南月朝): 여남월단(汝南月旦)과 같은 말로 어떤 인물에 대해서 품평하는 것을 말한다. 여남에 살던 후한(後漢)의 허소(許劭)와 허정(許靖) 형제가 매월 초하루(月旦)에 향리의 인물들에 대해서 평을 했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後漢書≫ 卷66 <許劭列傳>에 보인다.

벽서(僻書):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기이한 내용의 책으로, 기문벽서(奇文僻書)라고도 한다.

유필영(柳必永, 1841-1924)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달(景達), 호는 서파(西坡), 안동에서 세거하였다. 아버지는 유정진(柳定鎭)이며, 어머니는 예천권씨(醴泉權氏)로 권교상(權敎相)의 딸이다.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이고, 권연하(權璉夏)·이만각(李晩慤)·김흥락(金興洛)·김도화(金道和) 등과 교유하였다. 집안에 전하여지는 학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14, 15세의 나이로 사서삼경은 물론 제자서(諸子書)에까지도 박통하여 영남의 문맥을 이어받았다는 칭예를 받았다. 후일 유치명에게 수학하고 돌아와서 주서(朱書)를 탐독하고는 학문의 심오한 경지를 터득하였다.

또한, 고조부인 유정원(柳正源)으로부터 전하여져오는 역학(易學)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시경≫에도 조예가 깊어 새로운 주석을 시도하였다. 스승 유치명의 ≪정재집(定齋集)≫ 원집과 속집을 편집하였다.

1919년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영남을 주축으로 한 한국 유림은 독립청원서를 보냈는데, 이때 파리장서에 서명하여 항일 의지를 확고히 밝혔다. 이 거사를 전후해서 남도에는 곽종석(郭鍾錫)이요, 북도에는 유필영이라 하여 ‘남곽북유(南郭北柳)’라고 불렸다. 유필영은 서파정사(西坡精舍)에 몰려드는 후진을 양성하는 방법으로 먼저 시(詩)로써 마음을 발양(發揚)시키고 다음에 예(禮)로써 율기(律己)하도록 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호정(戶庭)의 출입도 삼가하였다. 또한 기미년 만세사건에 연루되어 성주에까지 연행되기도 하였다. 저서로 ≪서파문집(西坡文集)≫(26권 13책, 국립중앙도서관)이 있다.

무명자집(無名子集)문고 제1책

오죽재에 대한 기문〔梧竹齋記〕

봉황은 새들과 동류(同類)이고 오동나무와 대나무는 뭇 초목과 동류이니, 특출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동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동류이면서도 서로 다른 점이 있다. 봉황도 뭇 새들처럼 어디엔가 깃들어 자고 먹이를 먹으니, 이는 다른 새들과 같은 점이다. 하지만 봉황은 탱자나무나 가시나무에는 깃들지 않고 닭이나 집오리처럼 곡식을 먹지는 않으니, 이는 다른 점이다.

또 오동나무와 대나무도 땅에 뿌리를 박고 가지가 뻗고 잎이 돋으니, 이는 뭇 초목과 같은 점이다. 하지만 오동나무는 줄기가 벽옥(碧玉) 같아 봉황이 깃들고, 대나무는 열매가 낭간옥(琅玕玉) 같아 봉황이 따 먹으니, 이는 다른 점이다.

이처럼 동류이면서 다르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찾는다면, 봉황은 오동나무ㆍ대나무와 참으로 ‘다르면서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봉황은 반드시 오동나무에 깃들고 반드시 대나무 열매를 먹는다. 자연물도 이처럼 동류가 아니더라도 뭔가 동질성이 있으면 감응하는 법인데, 더구나 군자가 덕(德)을 빗댈 적에 어찌 자신과 동류가 아니라는 이유로 동질감을 표하지 못하란 법이 있겠는가?

옛사람들이 봉황을 두고 반드시 성인(聖人)의 출현과 함께 나타나는 희귀한 상서(祥瑞)의 징표라고 한 데에는 까닭이 있으니, 봉황의 생김새가 앞은 큰기러기, 뒤는 암사슴, 이마는 황새, 뺨은 원앙 같고 오색찬란한 모습이 다른 새들과 다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또 맑은 달빛 아래 우거진 한 그루 오동나무의 싱싱한 잎새를 보면 훨훨 날아가는 봉황의 모습이 떠오르고, 맑은 바람 속에 서걱이는 댓잎의 무성한 그림자를 보면 사뿐히 내려앉는 봉황의 모습이 떠오르는데, 이것이 오동나무는 다른 초목들과 달리 열매 한 송이마다 꼭지가 다섯 개씩 달리고 거기에 젖 모양의 열매가 맺히며, 대나무는 뭇 초목들과 달리 구름을 찌르는 창처럼 곧고 높게 자란다는 외형상의 다른 점 때문만은 아니다.

봉황은 동방의 군자의 나라에 출현하는데,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안정되고 봉황이 날면 다른 새들 수만 마리가 뒤따른다고 한다. 또 오동나무는 햇살 따뜻한 곳에서 자란다고 했는데, 햇살 따뜻한 곳이란 산의 동쪽을 이른다.

그렇다면 천 길 높은 곳에서 빙빙 돌다가 부덕(不德)한 행실의 위험한 징조를 보면 거듭 날갯짓하여 멀리 날아가 버리고, 빛나는 덕행을 보면 내려앉는다는 봉황이 나타날 곳은 분명 천하의 동쪽일 테고, 그중에서도 봉황이 내려앉아 깃들 곳은 또 틀림없이 산의 동쪽일 것이다. 어찌 사방 중의 동쪽은 오륜(五倫) 중의 인(仁)에 속하여 동방의 나라는 군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이치상 이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사(上舍) 조의양(趙宜陽)은 안동(安東)의 현자(賢者)이다. 태학(太學)에서 함께 수학하는 인연으로 뵈었는데, 매우 존경하게 되어 어딘가 특별한 곳에 사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여쭈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사는 곳에 봉황산(鳳凰山)이 있고 남덕대(覽德臺)가 있기에 내 서재의 편액을 오죽재(梧竹齋)라고 하였네. 나를 위해 기문(記文) 좀 써 주지 않으려는가?”

우리 동방은 천하의 동쪽으로 군자의 나라이고, 안동은 또 우리 동국(東國)에서도 군자의 고장이다. 천하에 봉황이 없다면 몰라도 있다면 분명 이곳에 있을 것이니, 봉황산 동쪽 남덕대 아래의 높이 자란 오동나무와 쭉쭉 뻗은 대나무 사이에서 봉황이 날아다니리라. 그곳에서는 세속을 초탈한 현인이 주인이 되어 봉황의 즐거운 노래를 들으면서 조화롭게 교감하며 지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군자가 봉황에 대해서와, 봉황이 오동나무와 대나무에 대해서는 과연 동류가 아니면서 같은 점이 있으니, 같은 점이란 서로 기약하지 않고도 자연히 감응하는 이치이다. 서재의 이름을 오죽재라 한 것이 참 적절하지 않은가?

조 상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을 내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에 내가 일어서서 말하였다.

“상사님의 이름은 ‘햇살 따뜻한 곳〔朝陽〕’에 걸맞으니 제 말을 무리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삼가 기문을 써 드린다.

[주-D002] 벽옥(碧玉) : 옥(玉)의 일종이다. 옥은 그 안에 섞인 불순물에 따라 녹색ㆍ붉은색ㆍ누런 녹색 등으로 색깔이 달라지는데, 벽옥은 녹색을 띤 것이다.[주-D003] 낭간옥(琅玕玉) : 중국에서 나는 경옥(硬玉)의 하나로, 짙은 녹색 또는 청백색의 반투명한 돌이다.[주-D004] 앞은 …… 모습 : 원문은 ‘鴻前麐後 鸛顙鴛思 五色備擧’이다. 《시전대전(詩傳大全)》 〈권아(卷阿)〉의 세주(細注)에 인용된 《설문해자(說文解字)》의 내용에서 따온 말이다.[주-D005] 열매 …… 맺히며 : 원문은 ‘櫜鄂之五乳’이다. 《시전대전》 〈권아〉의 세주(細注)에 북송 육전(陸佃, 1042~1102)의 《비아(埤雅)》 권14 〈오동나무〔梧〕〉의 내용을 인용하여 “열매꼭지가 모두 다섯 개씩인데, 젖 모양의 열매가 꼭지에 달린다.〔櫜鄂皆五 其子似乳 綴於櫜鄂〕”라고 한 말을 원용한 것이다.[주-D006] 봉황은 …… 한다 : 원문은 ‘鳳凰出於東方君子之國 見則天下安寧 飛則群鳥從以萬數’이다. 《시전대전》 〈권아〉의 세주(細注)에 인용된 《설문해자》의 내용을 재인용한 것이다.[주-D007] 오동나무는 …… 이른다 : 《시경》 〈권아(卷阿)〉에 “오동이 자라니, 저 햇살 따뜻한 곳이로다.〔梧桐生矣 于彼朝陽〕”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집주(集注)에 “산의 동쪽을 햇살 따뜻한 곳이라고 한다.〔山之東曰朝陽〕”라고 하였다.[주-D008] 천 길 …… 내려앉는다는 : 원문은 ‘翔于千仞 遙增擊於細德之險微 而覽輝下之’이다. 《문선(文選)》 권60 〈조굴원문(弔屈原文)〉의 “봉황은 천 길 높은 곳에서 빙빙 돌다가 빛나는 덕행을 보면 내려앉고, 부덕(不德)한 행실의 위험한 징조를 보면 멀리서 거듭 날갯짓하여 날아가 버린다.〔鳳皇翔於千仞兮 覽德煇而下之 見細德之險徵兮遙增擊而去之〕”를 원용한 말이다.[주-D009] 상사(上舍) 조의양(趙宜陽) : 1719~? 자는 의경(毅卿),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집은 안동(安東)에 있었다. 53세인 1771년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24년 동안 성균관 유생으로 지냈으며, 1794년(정조18)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축하하는 경과 별시(慶科別試)에 응시하였다가 정조의 특명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고, 1807년(순조7)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문집으로 《오죽재집(梧竹齋集)》이 있다.
상사는 성균관의 상재(上齋)에서 기거하는 생원 진사를 이르는 말로, 조의양이 생원이므로 이러한 호칭을 사용한 것이다.[주-D010] 봉황 : 원문은 ‘丹穴九苞之羽’이다. ‘단혈산(丹穴山)에 사는 아홉 가지 특징을 지닌 새’라는 이 말은 《전당시(全唐詩)》 권60 이교(李嶠)의 〈봉황새〔鳳〕〉에 “단혈산에 새가 사는데, 이름이 봉황이라네. 아홉 가지 특징을 갖춘 영물(靈物)로, 오색찬란하다네.〔有鳥居丹穴 其名曰鳳皇 九苞應靈瑞 五色成文章〕”라는 시구를 축약한 말이다. 아홉 가지 특징은 《초학기(初學記)》 권30에 나열된 것(一曰口包命 二曰心合度 三曰耳聽達 四曰舌詘伸 五曰彩色光 六曰冠矩州 七曰距銳鉤 八曰音激揚 九曰腹文戶)을 참고할 수 있다.[주-D011] 상사님의 …… 걸맞으니 : 상대방의 이름 ‘의양(宜陽)’을 ‘양(陽)에 마땅하다.’라고 풀이하고, 앞에서 오동나무는 ‘햇살 따뜻한 곳〔朝陽〕’에서 자란다고 한 말과 연관 지어 한 말이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강민정 (역) | 2013

梧竹齋記

鳳凰之於飛鳥類也。梧若竹之於衆草木亦類也。拔乎云爾。惡得謂非類。然而類之中。有不類者存焉。故鳳凰之棲而食。與飛鳥類也。而其棲而不於枳棘。食而不與雞鶩啄粟則不類也。梧若竹之根於土。枝而葉。與草木類也。而其柯碧玉而實琅玕。爲威鳳之棲而食則不類也。其所以類而不類也相類。則鳳凰之於梧竹。眞不類而類也。故其棲也必以襯榮。其食也必以練實。物猶以非類而以類相感。而况君子之比德。又豈可以非吾類而不以類之乎。古之人之於鳳凰也。必以爲聖德之符而希世之瑞者。盖有取爾也。非爲其鴻前麐後。鸛顙鴛思。五色備擧之不類而已也。是故霽月孤柯。菶菶其容。則想翽翽之于飛。淸飈䟱葉。猗猗其影。則思縹縹之爰止。又非爲其櫜鄂之五乳。雲槊之萬尺。不類於凡卉也。吾聞鳳凰出於東方君子之國。見則天下安寧。飛則羣鳥從以萬數。又曰梧桐生于朝陽。朝陽者山之東也。然則彼翔于千仞。遙增擊於細德之險微。而覽輝下之者。必在於天下之東。而其所止而棲者。又必在於山之東。則豈不以四方之中。東屬於仁。爲君子之國。而有聲相應氣相求之理耶。今趙上舍宜陽氏。安東之賢者也。遊于太學。余獲拜而甚敬之。意其居之必有異也而叩之。則曰吾之居。有山曰鳳凰。有臺曰覽德。因扁吾齋曰梧竹。子盍爲我記之。余惟吾東天下之東而君子之國也。安東又東國中君子之鄕也。天下無鳳則已。有則必在於斯。無乃丹穴九苞之羽。徊翔於山之東臺之下高梧脩竹之間。而又有高世之賢爲之主人。相與和德音於雝雝喈喈之際耶。然則君子之於鳳凰。鳳凰之於梧竹。果爲非類之類而其所以爲類者。盖有所不相期而自然相感之理矣。齋之以是名。不亦宜乎。趙上舍曰。子之言。余惡敢當。余作而曰。上舍之名。固宜於朝陽者也。不佞之言。不可謂不類也。於是謹書以歸之。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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