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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洲集敍[李植]
昔。蘇長公論文。以孔子辭達一句爲宗旨。說者謂達者。達其意也。詞止於達。不必宏肆奇麗之爲尙。是固然矣。然惟物之不齊。理之殊也。意有遠近。辭有險易。自虞,夏,商,周之文。尙有渾噩詰屈之不同。況有屈宋以來。六義派分。群軌竝騖。均之各言其志。無闕於理。而輪蹄之餙致遠。虎豹之斑章采。斯不亦文之至哉。國朝敦尙經訓。文辭爾雅韓蘇之文。以近爲範。而秦漢諸家宏麗之體。猶未備也。逮隆萬以後。作者數公。一大振之。唯時繼而和之者。有玄洲趙公。蔚爲名家。其學於古無所不蒐。故其文於古無所不備。上蹈兩漢。下籍六朝。而亦不失孔氏辭達之旨。旣俯就場屋。大擅屠龍之譽。其應製館閣之作。皆倚馬立成。而一時諸彦。莫之先也。世方期以狎盟文囿。揭旗鼓先多士。而沛有餘地矣。不幸仕不遇時。浮沈州縣數十年。其有得有喪。欣戚不平。一寓於佔畢。故其出不窮而語益奇。惜其天球弘璧。翳鬱於蓬蒿沙礫之間。徒使田氓牧豎。見其光怪而疑駭之。豈知爲東序之珍。照乘之寶。而承奉之哉。今有克家二郞君。得保遺稿於兵火之餘。敍次爲帙。以圖琬琰之傳。余每讀而偉之。就評其略。騷賦則步驟楚漢。散文雜著則格法左馬。偶儷之篇則深得徐庾聲律。詩大篇廣韻則杜韓馳騁之餘也。摠之光景高朗。材幹瓌瑋。其縱橫奔放。若不可畔岸。而融化屈折。各有體裁。往往情艶機動。境與神會。若笙磬相宣而有遺音。噫。公之於斯藝。可謂富有之矣。至於橙林時有朽株。武庫不無刓鋒。古今大家所不能免。而後生寲識。妄生疵摘。若是者。公已逌然任之矣。公之所師友。盡一世宗匠。最與深者。吾東嶽叔父及石洲權公。而踈庵任君爲其次。公之文。兼有數公之長。而無偏至之目。可見其大矣。植也材學晩進。汨沒訓誥。中年。雖獲從公游。荷一言之提警。其於古文大家。常有望洋之歎。不自意承乏負乘。血指詞掖。玆豈非世道之慨也。今二郞君索以序引。殆是以官而不以學。佛頭布糞。可無怍乎。公諱纉韓。字善述。天稟絶人。有文武材略。其吏能之少試於下邑者。焯然有張趙襲黃之風。其發於文章者。蓋有所本。於乎惜哉。辛巳初冬。德水이식(李植)。謹敍。
▣조찬한(趙纘韓, 1572~1631) 현주집(玄洲集) 서(序)▣
옛날에 소 장공(蘇長公)이 글을 논하면서 공자(孔子)의 ‘사달 (辭達)’이라는 한 구절로 종지(宗旨)를 삼았다. 해설하는 이는 “달(達)은 그 뜻을 전달하는 것이니 문사(文詞)는 의미를 전달하 는 데 그칠 뿐 거대하고 힘껏 펼쳐낸 것이나 기이하고 아름다운 것을 숭상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만물이 고르지 않음은 이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의미에 는 심원한 것과 천근한 것이 있고 사어(辭語)에는 험벽한 것과 평 이한 것이 있다. 순 임금 시대와 하(夏)나라, 상(商)나라, 주(周) 나라의 문장에서부터 오히려 소박함과 난삽함의 차이가 있었는데, 하물며 굴송(屈宋) 이래로는 육의(六義)가 분파되고 뭇 수레 가 나란히 치달림에 있어서랴? 똑같이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면 서도 이치를 빠뜨림이 없는 데다가, 장식한 수레와 말이 먼 곳에 이르는 듯하고 반점이 있는 호랑이와 표범이 무늬와 색채를 갖춘 듯하니 이는 문장의 지극함이 아니겠는가?
아조(我朝)에서는 경서의 가르침을 숭상하여 문사(文辭)가 고상하 고 우아하기만 하였고 한유(韓愈)와 소식(蘇軾)의 문장도 근래에 모 범으로 삼았을 뿐이었으니, 진한(秦漢) 제가(諸家)의 우람하고 아름 다운 문체는 아직도 갖추지 못하였다. 융만(隆萬) 이후로는 작가 몇 분이 중국에서 한번 크게 떨쳐 일어났는데 이때에 이들을 계승하여 화답하려는 이로는 현주(玄洲) 조공(趙公)이 있어 성대하게 명가 (名家)가 되었다. 그의 학문은 옛것에 대해 탐색해 보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고문에 대해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위로는 양한(兩漢)을 따랐고 아래로는 육조(六朝)에 의지하였으 며 또한 공자(孔子)의 사달(辭達)이라는 종지도 잃어버리지 않았 다. 이미 한 번 몸을 굽혀 과장(科場)에 나아가 도룡(屠龍)의 명예 를 독점하였고, 임금의 명에 따라 지은 관각(館閣)의 작품들은 모 두 말에 기대어 즉시 이루어낸 듯 하였으니 당대의 뛰어난 인재 들 가운데 앞서는 이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바야흐로 ‘문단에 서 새로 맹주가 되어 기치를 내걸고 많은 선비를 앞서는 일을 넉 넉히 해 볼 여지가 있다’고 기약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벼슬길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지방 고을에서 부침한 것이 수십 년이었다. 그는 얻는 게 있든 잃는 게 있든, 기쁨과 슬픔으로 불평한 마음일 때도 한결같이 글 읽는 데만 전념하였다. 그러므로 문사(文詞)가 나오는 것이 끝이 없고 말이 갈수록 기이했던 것이다. 애석하도 다, 천구(天球)와 홍벽(弘璧)이 쑥과 모래, 자갈 우북한 사이에 내 버려져서 다만 농부나 목동이 여러 광채가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의심하고 놀라게 하였을 뿐이니 이것이 동서(東序)의 진귀한 보옥(寶玉)이요 수레를 비추는 보주(寶珠)라는 걸 어찌 알고서 받들겠는가?
이제 가업을 계승한 공의 두 아들이 병화를 겪은 뒤까지 부친 의 유고를 보존하고는 차례를 정해 책을 만들어 완염(琬琰)과 같은 유고를 전하기를 도모하였다. 내가 매번 읽을 때마다 탁월 하다고 여겼는데 유고에서 그 대략을 평가해본다면 소부(騷賦) 는 초한(楚漢)을 추수하였고, 산문(散文)과 잡저(雜著)는 좌(左)· 마(馬)를 법도로 삼았으며 변려체(騈儷體) 글에서는 서(徐)·유 (庾)의 성률을 깊이 얻었고 장편(長篇)과 광운(廣韻)의 시는 충 분히 두(杜)·한(韓)과 함께 내달릴 만하다. 총괄하자면 그 밝은 지혜가 높고 환하며 재간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그 웅건하고 분방 함이 한계를 둘 수 없는 듯하고 융합하면서도 곡절이 있어 각각 체재를 두었으니, 왕왕 정감이 아리땁게 되고 성령(性靈)이 발동 하여 경물이 그의 정신과 만나면 마치 악기 소리가 어울려 서로를 드러내면서 긴 여운을 남기는 것과 같았으리라. 아, 공이 이러한 기예에 대해서는 그것을 풍부하게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등림 (橙林)에 있어서도 때로 썩은 나무가 있고 무기 창고에 있어서도 마모되어 무디어진 칼날이 없을 수 없으니 고금의 대가들도 이는 면할 수 없는 것이다. 후생이 까다롭게 따져 함부로 잘못을 지적 하는 일을 할 수 있었거니와 이와 같은 자들에 대해서는 공이 이 미 웃으면서 하는 대로 맡겨두었던 터였다. 공이 스승으로 삼거나 벗으로 사귄 이들은 모두 일세(一世)의 종장(宗匠)들이다. 가장 더 불어 깊이 사귄 이는 우리 숙부 동악(東嶽) 선생과 석주(石洲) 권 공(權公)이고 소암(踈庵) 임군(任君)이 그 다음이다. 공의 문장은 이분들의 장점을 아울러 가지고 있으면서 한쪽으로 치우쳤다 는 지목을 받지 않았으니 그 규모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재능과 학문이 늦게 진보했고 훈고(訓詁)에만 골몰하였 으니 중년에 비록 공을 좇아 배움을 구해 일깨워주는 한 마디 말 씀을 들을 수 있었지만 고문대가에 대해서는 항상 망양(望洋)의 탄식이 있었다. 그런데 내 자신이 생각지도 않게 빈자리를 채워 군자의 수레를 타느라 사액(詞掖)에서 혈지(血指)를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세도(世道)를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 공의 두 자제가 서문으로써 나에게 요청하였는데 아마도 이는 내 관 직 때문이지 내 학문 때문은 아닐 것이다. 부처의 머리에 똥칠을 하게 되었으니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공의 휘(諱)는 찬한(纘韓)이며 자는 선술(善述)로 천품이 매우 뛰어난 데다 문무(文武)의 재략(材略)이 있어서 그 관리로서의 재능을 작은 고을에 약간 시험한 것만으로도 분명하게 장·조·습·황(張·趙·襲·黃)의 풍도가 있었다. 문장에 발현된 것도 대개 근본이 있었을 것이니, 아, 애석하도다.
신사년 초겨울에 덕수(德水) 이식(李植)은 삼가 쓰다.
●玄洲先生集序[李景奭]
古昔操觚之家。以作者稱之者代各有之。而詩文異體。類多偏造。詞賦駢儷。鮮克全美。求諸輓近。又何寥寥。不杇之業。其亦難矣。竊觀玄洲趙先生之所樹立。可謂古作者之徒而全其美矣。先生生而秀發。遠邁不群。自髫年華問已大。稍長披遡千古。博綜百氏。擷英瞻縟。播興超峻。纚纚不竭如陸海之充羡。琱言瑋撰。間以詰屈。亦猶劍閣橫絶。重巖錯峙。人莫得以窮也。一掞天庭而冠千人。聲價傾一代。薦紳諸公。莫不推挹。儕友中切磨浸灌。壎箎迭和者。石洲,東嶽。而淸陰相公。又最親厚。深居簡出。而獨時時與先生還往。遠近負笈之士嚮風投歸。一皆進之而作興之。由函丈之間而闡巍科爲聞人者非一二。雖以景奭之不才。辱先生之提掖。每趨門墻。輒聞先生讀書聲。時先生已以老師爲世所重。而其勤於業如此。韓愈氏之言曰。用功深者。其收名也遠。詎不信歟。如使鞭橐中原。宗工哲匠。未必不交讓一頭。而靑冥蹭蹬。蜚不盡翰。金馬白虎未展潤色之才。銅魚玉麟徒著治行之最。驥足終馽。牛耳莫執。嗟乎。豈非命也。豈非命也。有遺集。詩二卷,駢語一卷,賦與文亦各一卷。諧宮叶商。高追李杜之風。駢球儷金。優入盧駱之室。敷陳則軌乎楊揚馬。纂言則根於韓柳。奇而有致。險而不詭。古人之所不能兼者。先生兼有之。不亦偉乎。且喜臨池眞草。翩翩深得右軍之法。武亦可以威敵。而薄試於渤海之治繩。何天之賦材也若是其全矣。而其施之也如有慳焉乎。噫。向者重金疊紫。躍馬高衢者何限。而磨滅殆盡。惟先生沒已久而名益彰。豈造物者之餉先生。不在彼而在此也。先生長胤龍宮使君公。將梓文集。屬余引之。而不幸使君奄圽。季胤學士乞縣爲任實宰。始得剞劂之。千里書來者再三。徵序甚勤。余於此。烏得不悲且嘅也。先生舊游。皆已九京。玄晏之托。吁其已矣。絳帳之下。非無子雲之侯芭。而今存者。只有愼副學天翊。如余樗散。代匱詞林。猥當此事。噫。余何敢爲。又何敢不爲。且余有所感矣。先生嘗閒住交河。築小亭於湖上。命余記之。以爲晩歲之期。蓋陋舍亦相望也。湖小依舊。人代已變。撫迹對卷。重爲之增慟也。
歲舍乙未秋七月哉生明。門下原任領議政李景奭。謹序。
▣조찬한(趙纘韓, 1572~1631)《현주선생집》서玄洲先生集序▣
옛날에 글을 짓는 문학가 중에는 작자(作者)라고 칭하는 이들 이 시대마다 각각 있었다. 하지만 시(詩)와 문(文)은 체제가 달라 서 대체로 한쪽만 치우치게 짓는지라 사(詞), 부(賦), 변려(騈儷) 를 모두 잘할 수 있는 이는 드무니, 최근에 찾아보건대 또 얼마나 수가 적었는가. 영원히 이어질 업적은 또한 어렵도다.
현주(玄洲) 조 선생(趙先生)이 수립한 바를 삼가 살피건대, 옛날 작자의 무리가 모든 문체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선생은 세상에 태어나 타고난 재주가 출중하여 남달리 고고하고 호방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명성이 이미 성대하 였다.
조금 자라서는 천고의 세월을 헤치며 거슬러 올라가 제자백가 (諸子百家)에 널리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그 정화(精華)를 거두어 들여 시문이 풍성하고 화려해졌으며 흥을 퍼뜨려 탁월하고 특출 해져서 재주가 넘쳤던 육기(陸機)처럼 문사가 계속 이어져 다하 지 않았다. 그리고 말을 다듬어 아름답게 글을 지으면서 난삽하 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사이사이 넣은 점은 또 검각산(劍閣山)이 가로놓여 있고 첩첩의 높은 산이 뒤섞여 우뚝한 듯해서 사람들이 궁구할 수 없었다.
한 번 조정을 환히 비추어서 천 명 중에 으뜸이 되어 그 성가 (聲價)가 한 시대를 경도되게 하였으니, 조정의 모든 관리들 중에 추중하고 존숭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울리는 벗들 중에 절차탁 마하면서 영향을 주고받고 형제처럼 지내면서 서로 화답한 이는 석주(石洲) 권필(權韠)과 동악(東嶽) 이안눌(李安訥)이었다. 청음 (淸陰) 김상헌(金尙憲) 상공은 또 선생과 가장 친밀하고 돈독하여, 깊은 곳에 은거하며 드물게 밖에 나왔으나 유독 조 선생과는 때때 로 왕래하였다.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책 상자를 짊어지고 온 선비들이 선생을 앙모하여 의탁함에 한결같이 다 나아오게 해서 진작하게 하시니, 그 배우는 자리를 통하여 과거에 좋은 성적으로 급제해서 명망(名望) 있는 사람이 된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재주 없는 나이지만 외람되이 선생의 인도를 받았는데, 그 문하에 달려갈 때마다 늘 선 생의 책 읽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선생은 이미 나이 많은 스승으 로서 세상의 존중을 받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학업에 부지런하였 으니, 한유(韓愈)가 “공부가 깊은 자는 그 명성이 오래도록 전해진 다.”라고 한 말이 어찌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선생이 중원에서 채찍을 잡고 활집을 잡았다면 탁월한 재주를 지 닌 문인이라도 반드시 한 걸음 양보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높은 자리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여, 날면서 날개를 다 펼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금마문(金馬門)과 백호관(白虎觀)에서 문채가 나게 글을 다듬는 재주를 펼치지 못하였고 지방관으 로 나가거나 변방을 지키며 가장 훌륭한 다스림의 공적을 드러 냈을 뿐이니, 천리마의 다리는 끝내 묶이고 쇠귀를 잡지 못한 것과 같았다. 아,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어찌 명이 아니겠는가. 선생에게는 유집(遺集)이 있으니, 시가 두 권, 변려문이 한 권, 부와 문도 한 권씩이다. 시율(詩律)이 조화를 이루어서 높이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유풍(遺風)을 따랐고, 옥과 금을 나란히 늘어놓은 듯하여 노조린(盧照鄰)과 낙빈왕(駱賓王)의 방에 충분히 들어갔다. 상세히 서술한 글은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궤적을 따 랐고, 말을 모아 엮은 글은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에 뿌리 를 두었다. 이에 기이하면서도 운치가 있었고 험벽하면서도 속이 지 않아서 옛 사람이 겸할 수 없었던 것을 선생은 겸하여 지녔으 니, 또한 훌륭하지 않은가.
또 서법(書法) 배우기를 좋아하여 해서(楷書)와 초서(草書)가 경쾌하고 날렵해서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을 깊이 터 득하였다. 무예 또한 적을 두려움에 떨며 복종하게 할 수 있었으 나, 헝클어진 실마냥 어지럽던 발해(渤海)를 다스린 공수(龔遂)처 럼 지방을 다스리며 조금 시험해 보았을 뿐이다. 어찌 하늘은 재능을 내림에는 이렇듯 온전하였으면서 그것을 펼치게 하는 데 는 인색하게 구는 듯하였는가. 아, 고관(高官)을 여럿 배출한 집 안 출신으로 큰 길에서 말을 달리듯 공명과 부귀를 누린 자가 얼마나 많았겠냐만, 그들은 자취도 없이 거의 다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선생만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이나 명성은 더욱 드 러나고 있으니, 아마도 조물주가 선생에게 누리게 해 준 것은 저 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 듯하다.
선생의 큰아들인 용궁 현감(龍宮縣監) 조휴(趙休) 공이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려 하면서 나에게 머리글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 는데, 불행히도 그가 갑자기 죽어 버렸다. 이에 선생의 막내아 들인 학사 조비(趙備)가 지방관 자리를 청하여 임실 현감(任實縣監)이 되어서 비로소 글을 새길 수 있었다. 그가 천릿길에 편지 를 보내온 것이 두세 번이었는데 서문을 구하는 뜻이 매우 간절 하였으니, 내가 이에 어찌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선생과 지난날 교유하던 벗들은 다들 벌써 구천(九泉)에 있으 니, 훌륭한 이에게 서문(序文)을 부탁하는 일은 아아, 끝이 났도다. 진홍색 휘장 아래 양웅(揚雄)의 후파(侯芭)와 같은 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남은 자로는 그저 부제학 신천익(愼天翊)과 나 같이 쓸모없는 자가 있을 뿐이다. 문단에 쓸 사람이 없기에 대신 맡아서 외람되이 이 일을 담당하였다. 아, 내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또 어찌 감히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나에게는 감회가 있다. 선생은 일찍이 관직을 떠나 교하(交河)에 한가로이 살면서 호숫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는 내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고 그것으로 만년의 기약을 삼았으니, 누추한 나의 집 또한 선생의 집과 서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호숫가의 작은 정자는 전과 같은데 세대는 이미 변하였으니, 지난 자취를 더듬으며 책을 마주하여 거듭 더 통곡한다.
세사 을미년(1655년, 효종6) 가을 7월 초사흘.
문하 원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삼가 서문을 쓰다.
玄洲集跋 / 跋
玄洲集跋[愼天翊]
我東雖稱小華。地實偏薄。前後詞匠大家云。皆未免局量淺狹。倘非風習所移歟。先生述作。獨超然橫越。直得楊馬眞派。籠駕王楊盧駱。仍之李杜韓柳之體。异乎偉哉。天翊自稚少。得侍軒屛。不但於文辭爲然。廓而約。肅而和。履家以禮。牧民以仁。旣賢且才。何施不宜。而適値昏朝。荏苒下列。翰墨之不得售。固其所矣。命也奈何。季子備以校理。出倅任實。幸裒刊若干首。以圖不朽。知余迷蒙。以其門人之故。委書請跋。辭謝不獲已。略陳如右。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愼天翊。謹跋。
●현주집 발문 -신천익-
玄洲集跋 愼天翊
우리나라는 비록 소중화(小中華)53라 일컬어지지만 땅이 치우 치고 척박하기에 앞뒤로 문장 대가(大家)라고 하는 분들이 모두 국량(局量)이 얕고 좁음을 면치 못했으니 혹여 풍습(風習)에 변화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선생의 저술은 유독 초연하게 우뚝 뛰어올라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54의 진정한 후계를 곧 바로 잇고 왕발(王勃), 양형(楊炯), 노조린(盧照鄰), 낙빈왕(駱賓王)55을 앞지르고 이백(李白), 두보(杜甫),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56의 문체를 따랐으니, 기이하면서도 위대하다. 나 천익(天翊)은 어릴 적부터 선생을 곁에서 모시는 기회를 얻었는데 다만 문 장(文章)만 그런 게 아니었으니 드넓으면서도 간약(簡約)하고 엄 숙하면서도 온화하였고 예(禮)로써 가정에서 행하고 인(仁)으로 써 백성을 다스리셨다. 현철(賢哲)한 데다 재기(才氣)도 있었으니 어디에 쓰인들 맞지 않았겠는가만, 마침 혼조(昏朝 광해군)가 집 권한 때를 만나 낮은 자리에서만 맴돌았으니 문재(文才)를 인정 받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운명이니 어 찌하겠는가. 선생의 막내아들 조비(趙備)가 교리(校理)로서, 임실 (任實)의 수령으로 부임하여 다행히 약간의 작품들을 모아 간행 하여 불후(不朽)하게 전하기를 도모하면서 내가 어리석음을 알면 서도 선생의 문인이라는 연고로 편지를 보내 발문을 청했다. 나는 사절하다가 그만두지 못해 위와 같이 대략 서술한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신천익(愼天翊)은 삼가 발문을 쓴다.
玄洲集識[趙龜祥]
先祖考遺稿。先君子莅任縣時入梓。藏其鋟板於客館矣。己酉年。客館回錄。鋟板竝爲灰燼。不肖孫龜祥。惟恐久而失其傳也。更以鑄字。印出百餘件於茂朱府。今頒於祖考子孫及若干親舊間。仍識其始末焉。時崇禎後再庚寅也。
현주집 지 -조귀상-
●玄洲集識 趙龜祥
돌아가신 조부의 유고(遺稿)는 선친(先親)께서 임실현에 부임하셨을 때 간행하고 객관(客館)에 그 판목(板木)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기유년(1669, 현종10)에 객관이 불타 버릴 때 목판까지 모두 재가 되었다. 불초한 손자 귀상(龜祥)은 행여 오래 지나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다시 활자를 가지 고 무주부(茂朱府)에서 백여 본(本)을 인출(印出)하였다. 지금 선조(先祖)의 자손들 및 약간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어 그 전말(顚末)을 기록한다. 지금은 숭정(崇禎) 기원 후 두 번째 경인년(1710, 숙종3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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