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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陽人문화유적❀

[溪陰集:正郞公派 溪陰 趙彭年(1549 : 明宗4 ~ 1612 : 光海君4)의 文集]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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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陰集:溪陰 趙彭年(1549 : 明宗4 ~ 1612 : 光海君4)의 文集]

 

[기사전거] : 行狀(崔時弼ㆍ李毅敬 撰), 墓表(洪良浩 撰, 耳溪集 卷35), 本集內容 등에 의함

[편찬및간행]

저자의 시문은 詩賦, 雜著 도합 500여편이 家藏되어 왔다. 저자의 후손 趙得河가 가장초고를 바탕으로 수집 편차한 것을 1894년에 후손 趙冕衡에게 繕寫를 부탁하여 간행 준비를 마쳤으나 간행하지는 못하였다. 그 후 문집 간행을 위해 都有司 朴鼎陽을 중심으로 康津에 사는 후손 조면형이 校正을 맡고, 靈巖에 사는 후손 趙昌河가 재정을 맡고, 영암에 사는 崔善尙 등이 監印을 맡아 189811월에 문집의 판각을 시작하여 18994월에 靈巖에서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초간본이 본은 국립중앙도서관(46-1982),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박정양과 후손 조창하 등이 1899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본 영인 저본은 권1의 제112판은 卷次, 3의 제14판은 판차가 , 3의 제15~23판은 권차가 誤記되어 있다.

(奇宇萬 撰), 後序(趙冕衡 撰), 有司錄 등에 의함

구성과내용

본집은 62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1899년에 奇宇萬이 지은 서문이 있다.

1에는 169제가 실려 있다. 1592義州에서 지은 시를 비롯하여, 倭亂 중의 비분강개한 심정을 읊은 시와 명나라 장수 駱尙志, 劉綎統制使 李舜臣, 體察副使 韓應寅 등에게 올린 시 등 왜란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이 중 龍灣述懷는 선조를 호종하며 義州에 있을 때 지은 시로 임금에 대한 충성과 가족을 그리는 내용이며, 述懷는 임금이 욕을 당하고 국운이 위태했던 왜란을 술회하며 지은 것이다.

2에는 42제가 실려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지은 시와 將鑑博議諸將贊詩이다. 장감박의제장찬시戴溪가 편찬한 歷代將鑑博議에 실린 94명의 中國歷代 名將 가운데 전국시대의 孫武부터 五代郭崇韜까지 62명을 뽑아 이들에 대해 각각 1수씩 七言絶句로 지은 贊詩인데, 이 중 王濬, 祖逖 두 사람은 시 내용이 없다. 끝에 七言古風長句 2제가 附記되어 있다.

315편이다. 木覓山賦1572년 성균관의 輪次에서 장원한 것으로 수도 서울을 호위하는 南山의 위용과 王業의 무궁함을 기리는 내용인데, 제목 아래에 木覓枸杞인데 남산에 구기자가 많아서 목멱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색다른 주석이 달려 있다. 龍灣述懷賦159211월 선조를 호종하여 義州에 머물 때 지은 것으로 왜란 중의 분개한 심정을 읊었고, 말미에는 노래로 부른 가사 내용이 첨부되어 있다. 南歸賦는 평양성 전투를 승리한 뒤에 御駕義州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지나온 곳과 所懷를 읊은 것으로, 예전에 지은 述懷賡韻하여 15937월에 지은 것이다. 이 두 편은 저자의 다른 작품과 달리 본문에 상세한 주석이 달려 있어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인다.

4에는 2편이 실려 있다. 范純仁論救蔡確論王安石의 무리로 舊法을 문란하게 한 채확의 허물을 용서한 범순인의 일에 대해 논한 글이며, 謝安矯情鎭物論나라 재상 사안이 나라 군사가 쳐들어와서 이들을 물리친 보고서가 올라와도 바둑을 두면서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등, 아무리 위급한 때에도 몸가짐을 태연히 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는 내용이다.

5에는 2, 3편 등 9편이 실려 있다. 전은 大殿誕日正朝에 올린 賀箋이며, 서는 李後白의 서원을 康津에 세울 것을 청하는 편지, 왜적의 방어에 필요한 康津兵營長興으로 옮기지 말도록 士民을 대신하여 체찰사에게 올린 편지 등이다. 이 밖에 擬表祈晴文, 저자가 살던 金陵(康津) 黃谷 인근의 泉洞 시냇가에 세운 溪陰亭에 대한 기문, 그리고 순서대로 정밀하게 책을 읽는 것이 독서의 요체가 된다는 등 저자의 독서론을 피력한 讀書綱要가 실려 있다.

6에는 崔時弼李毅敬이 지은 行狀, 洪良浩가 지은 墓表 등의 묘도문자, 徐希信이 지은 扈聖功臣都監呈文湖南節義錄, 倡義錄등에서 뽑은 저자 관련자료 등이 실려 있다.

권미에는 1899년에 지은 후손 趙冕衡後序가 있는데, 후서 말미에 本集1899년 영암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사실을 알려 주는 己亥仲春靈巖開刊이라는 刊記가 판각되어 있다. 이어 본집의 간행에 참여한 인물의 명단을 기록한 有司錄이 실려 있다.

 

[溪陰集序]

溪陰集序[奇宇萬] b006_32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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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生遺文垂三百年未行非直爲雲仍私慨士林與有責焉及今始謀剞劂余曰遲之哉曩日國家崇奬節義靡幽不闡使此集得行則詩足以領在樂官文足以裨補風化而見今黑齒搶攘庶僚依阿伏節死義之風掃地盡矣此等文字便作越人章甫何益矣旣而曰速之哉亂極思治天理固然家讀戶誦又安知不爲慷慨思奮之一苗脉也哉先生以經術之士遭龍蛇之變扈駕龍灣應接軍務累被天奬大僚推讓至使天將歎滯下僚而知東國不競先生之爲先生可知已及味其忠憤諸作雖謂日月爭光非過語也第其龍灣述懷尤令志士霑襟其詩曰主辱臣當死時危敢顧私腰間一長劒倚馬立西垂方拈筆寫此星月爲之動光恨無望氣者道其事使先生得行其志則忠武海上之捷在其度內而壯士南江之死亦其所抱惜乎以文武才具用於應接而不用於委任宜乎天將有此歎也此集之行莫說其他上自執政下至韋布拈出述懷詩千遍讀過則今日事猶可爲也先生孝友出天斫指廬墓子職純至山猪野雞物感亦多內外百行昭載狀德此不重述特書曠感于中者以弁其卷來請文者後孫奉河喜權

歲己亥仲春幸州奇宇萬謹書

 

[溪陰集後序]

溪陰集後序[趙冕衡] b006_402a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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士君子立天地間以忠孝大節冠冕當時表準後世與元氣相終始文章乃其餘事耳然不有以傳之則古今來賢聖及諸家著述同歸於亂波平楚後千百世亦無所考據而激厲之者矣有明萬曆二十年卽我宣廟之二十五年天禍國家島夷匪茹事將不測先生以承文校理扈駕龍灣錄一等功臣亂已出宰礪城不能與世浮沉歸老于溪亭以詩書自娛其平生所著詩文本原經術而忠義之所激昂腔血幾乎著紙使忠臣義士抆淚於片稿隻字之間至於知舊雅謔閒居雜詠亦皆冲淡蕭散有規箴之意非其蓄積有素烏能及此歲甲午春後孫得河過余於春星堂請繕寫本稿盖紙字爛故未及登榟惟是之懼余嘉其意而公私多難未之遑也越四年戊戌冬十一月族兄昌河氏倡爲剞劂之役庸余校讎有不獲辭者故敢爲之次嗚乎今之距萬曆三百有八年先生之忠節孝行在人耳目赫赫若昨日事而千載在後不有今日之役則吾恐東漢之淸節士獨一嚴先生而已

己亥二月旣望族孫冕衡謹序

 

[溪陰集後序]

溪陰集刊記 b006_40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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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亥仲春靈巖開刊

 

[溪陰集有司錄]

有司錄 b006_403a 편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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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有司幼學

朴鼎陽 潘南人字君▣。

羅州

都廳有司

林炳簳 羅州人字士哲

羅州

副有司

李浩臣 延安人字永郁

康津

別有司

李祥林 原州人字贊華

康津

正言

鄭芳鉉 河東人

羅州

李善源 星山人字慶集

寶城

校正

趙冕衡 漢陽人字士民

康津

掌財

趙昌河 漢陽人字士彦

靈巖

監印

崔善尙 全州人字敬兼

靈巖

愼炳佑 居昌人字處安

靈巖

文元錫 南平人字明寗。

靈巖

 

●七言古風長句 祔
1見客似無官
2謝李別提相過


[溪陰集卷之三]
●賦
1木覓山賦
2寸草軒賦
3龍灣述懷賦 龍灣。義州別號。
4南歸賦 幷小序
5擬北山移文。寄金處士。錦城倡義通文答後
6聽潮樓賦 樓在湖南康津縣。今鎭海樓。
7登平乘樓賦
8棋賦
9鐵柱杖賦
10易水悲歌賦
11神鷹不顧鳶賦
12遼使問起居賦
13東風不世情賦
14山靜似太古賦
15尙友賦


[溪陰集卷之四]
●論
1范純仁論救蔡確論
2謝安矯情鎭物論


[溪陰集卷之五]
●箋
1大殿誕日賀箋
2正朝賀箋
3擬漢蘭臺令史孔僖謝幸闕里會講論語表
4苦雨祈晴文
●書
1上邑宰請建李靑蓮書院書
2與金節度書
3上體察使書 代縣士民作
4溪陰亭記
●溪陰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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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亭以溪陰。識其地也。蓋古之人。名其亭閣。或有自稱之者焉。或有取其物者焉。或有識其地焉。如醉翁亭野翁亭。乃自稱者也。栢堂竹閣。取其物者也。合江亭岳陽樓。識其地者。余家于金陵之黃谷。谷之乾方有泉洞焉。洞有溪。潺潺而流。錚錚而聲。至家北遇石凹處。匯爲池。復落巖而注下。放乎前川。丙午春。余乃沿流沂源。愛其淸澈。乃買斷丈地。作亭于溪之上。以爲休息之所。欲擇令名而莫能定。夢神謂己曰亭可名以溪陰。余遂以名之。夫山南爲陽。水南爲陰。而亭在于溪之南。故曰名亭溪陰。識其地也。抑又自稱之辭。取物之義。亦在其中。我不在山不在野。而長在乎溪上。則自稱曰陰翁。不其宜乎。若夫取物。亦有兩端焉。仲尼有樂水之稱。孟子有觀瀾之語。是誠取其道理而言者也。有曰溪橋曉溜浮梅萼。桃花流水杳然去。臥看溪南十畝陰。是則只取其興味者也。余昧道瞢學。已不跂於聖贒之域。其能取義理之微旨。反之於吾身而有得焉爾乎。乃若溪之爲物也。夏宜急雨。聞疊鼓聲。冬宜堅氷。作白玉面。秋月照之。光似躍金。春風吹之。紋如織縠。宿契幽人之趣。屢挑騷客之腸矣。而余早脫宦海。晩吟林泉。時時散步於溪畔。悠悠獨吟於亭上。玩四時之光景。忘一身之榮枯。簞瓢空而晏如也。鵬程阻而自得也。其視鄙夫俗子營營區區。亦可謂得江山之興味。知其無可柰何而若命焉者也。雖然父母已沒。而初無兄弟。仰而不能不愧於天。俯而不能不怍於人。旣不得於君子之三樂。溪亭之景致。雖美。肯以外物而動心也歟哉。此正岳陽樓記中不以物喜。不以己悲之意也。然而平生不以山爲囚。不以溪爲愚。洗耳綠池。濯纓淸波。水流縱急而心與境俱靜。是余之可慕可能者矣。雖不望於智者之涬於事理而周流無滯。雖未及於先憂後樂之范公。大川喬嶽之醉翁。聊且識其地。以名吾亭。遂爲之記。萬曆己酉春正月人日。黃谷逸人。書于亭之壁。
5讀書綱要


[溪陰集卷之六]
●1.故行礪山郡守贈左承旨溪陰趙公行狀[崔時弼]
公諱彭年字景老。其先漢陽人也。六代祖孝生將仕郞。典涓司參奉。自漢陽南徙于羅州。子曰子山。子山生伯雲。寔公之高祖也。妣尹氏。康津黃谷人仡春之女也。此又移家于黃谷。俱學生。曾祖考諱永發。忠武衛副司直。妣金氏。安東順孚之女。祖考諱安植從仕郞。禮賓寺參奉。妣金氏。同里竹谷哲貞之女。考諱世傑。秉節校尉。以公勳贈通政大夫工曹參議。妣金氏贈淑夫人。籍金海。學生殷赫之女也。公以己酉六月十四日。生于黃谷里第。幼聰明絶人。於書一覽便卽成誦。長而尋師講習。能通大義。壬申游學於泮宮。作木覓山賦。魁于多士。至徹睿覽。遂知名當世。藉藉人爭艶稱焉。是秋講四書于禮部皆通。癸酉春。中生員試。丙子登明經丙科第三人。偶閱大邑都書員田案。誦傳無一錯漏。新曆一覽與人。永不忘一字。誠異才也。葢公之博學好問。參議公勤家累仁之功。至是始著焉。丁丑冬。除會寧府敎授。兩親在堂。辭不赴。四舘不可躐次進薦。凡閱四歲。皆食于家。壬午正月。例拜校書館副正字。鎖直香室。二月兼奉常寺參奉。夏呈辭歸覲。十二月陞正字。癸未三月。再授奉常參奉。四月授著作。未幾以課試不作。解爲司猛。六月薦博士。其在太常。祀事孔明。其在芸閣。讎校惟精。十月奔外憂。甲申荐遭內艱。合窆于坎火之山。遂居廬於其下。朝夕上塚號霣。雖風雨未嘗一日廢焉。當享祀則蠲饎盡愨。自鼎俎至床筵。靡不手適而躬親焉。所食兩度溢米而已。菜醬亦擇其味不甚滋者而強進也。遇諱辰則輒先齋沐。不接賓客。端居一室。未敢言笑。必思其所爲。而冀神爽之相注。逮晨號哭將事。殆若袒免之始。人不忍仰視。而莫不稱服焉。丙戌三月由吉。六月薦授成均館典籍兼南學敎授。九月攝敬差官。監穡事于金浦。爲學田也。俄拜司憲府監察。十一月除全義縣監。地小民殘。邑又累經匪人。衆弊蝟集。下車後銳意櫛爬。其政尤以興學校敦風化爲本。俗多觀感而興起焉。兩造就卞則以公嚴爲案。了不以蹊徑被其鑽刺也。自奉極簡。盤供只數器而已。衣袴仍穿家製。而經年不以新造焉。出入不張蓋。騶傔亦僅數人而止。所騎殆是款段劣容代步者。丁亥春上疏。獲減漕水軍絶戶三十餘額。闕番價布幾三百餘疋。實惠灌洽于一境。咸謳謠而頌也。第其裁束豪右太過。巨室滋不悅。齊瞷參會。煽謗于朝。戊子六月被臺評罷歸。庚寅十月甄敍而拜承文校理。壬辰三月。差贈祭官行事于長興治之東。以兵使卞國榦之卒也。竣事纔還。値倭寇之警。請出內需司布帛以賜南征將士。又請上親御敦化門。下哀痛罪己言。以慰軍民。仍與臣隣以議防禦之策。且手製一疏曰都城雖云闊大難守。宗廟社稷所在。柰何委而去之。固宜鑿斯築斯。與羣下效死。如孟子之言。則猶可爲也。旣奏不省。四月二十九日。以大祝兼典祀官。秖詣于靖陵。是夜大駕避賊西狩。僕夫蒼黃泣請曰自此直下湖南庄所。公發憤叱却曰君父蒙塵。不思奔問。豈忍草間苟活。要以爲全軀保妻子之計乎。有死而已。安敢爲言。翌日與成均典籍徐希信。自陵所還渡江。取道于箭串津。轉向楊州大灘,澄波渡等處。逶迤趲進。備嘗險艱。時京師已陷。宮闕皆燼。且官軍新刳于臨津。賊勢甚盛。夜發長湍。蠒足疾行。初昏始抵松都。乘輿已發矣。五月旣望。追及於平壤。而沿道累被賊陣所攔。其危偪困迫。殆不可殫記。行在僚屬。皆喜公之脫厄。服公之仗義。咸嘖嘖而傳說稱道也。李白沙恒福筵啓曰趙某忠肝節槩。合施褒奬。上卽召入慰諭。命拜禮曹佐郞。時華使絡屬。迎接禮繁。前此爲是官者。連遭非理於上國人。如有時朢李體素春英。至被捽曳於李提督。而公乃受任於齒舌之後。應對周旋。動合機宜。邢軍門謂柳西崖成龍曰海東宜不競也。如趙某尙滯下僚。其可謂能用人乎。大同館中。未曾見此輩矣。上之出平壤。在六月上旬。公臀生毒腫。且値馬瘏而不得扈行。非敢後也勢也。倭入浿城。道路阻絶。追入于渭原,碧潼,昌城之境。七月始達于義州。卽行在所也。又拜承文校理。時八路盡陷賊藪。大駕寄在一隅。擧國所望。只是請兵一事。表啓文字。槐院專管。大提學尹月汀根壽。作一四六奏文以示公。公曰誠盡美矣。某句用事似不襯。某句下語恐有忌。尹公大寤曰君雖有詞翰名。不料其如許矣。合置湖堂選也。他日吾可以剡錄。俄遷刑曹正郞。時寵婭之弟金公諒因紬商不低價杖殺之。臺啓請治公諒。諉諸其奴。欲令代囚焉。公爲該色。請於判書鄭西川崑壽曰直歸於公諒而償命。方可爲立法制夬人心。而轉展爲重恢之階也。鄭公吐舌曰君不畏死。可謂強項令也。又作郞於薛天使都監。主搬運芻粮事。以嫺辭令負幹局也。戶曹判書李坡谷誠中欲薦爲本曹郞曰文士例短才具。而此人何兼備也。癸巳正月。天兵勦走箕都之賊。時廟位主。東宮奉在寧邊府。上命妙簡大祝官。走告賊破。李梧里元翼以冢宰。差以公名。 上敎曰此任果得人矣。大駕還次定州,永柔也。仍以刑官從。又疏陳三事。曰備邊司論功之不平也。曰都元帥金命元之當遞也。曰平安節度李潤德之當戮也。諸宰乃於筵中大加非斥曰語多狂妄。不可用也。領相尹梧陰斗壽曰今日諸臣。留在一隅。惟以保全身命賭取官爵。爲得計。未嘗以直截之辭。動觸時諱。而此人獨以滿朝之所不敢言。登諸章奏。甘自陷於逬逐蹭蹬之科。儘可謂鳳鳴朝陽矣。大司憲沈一松喜壽曰臣以都憲。反有愧於刑郞。彼誠有大力量。而臣則爲妾婦之徒也。上數幸肅川,平壤。禮接唐將也。公每躡通禮官。動止進退。極有雅儀。往復應酬。俱合體貌。上敎曰吾以爲具宬善於此任矣。斯人也又不减矣。李提督駐札京城。公呈國咨于軍門。請尾擊倭奴。劉員外留鎭定州。亦以上命往來問候。因奉紫石大硯。嘗以上命就監李統制舜臣軍於南海。以其廉察監陣之故。而三日留陣。備論禦倭獻䤋之策。又細陳覆啓之條。李公稱歎不已。許以大力量大簡局云云。公作詩贈之曰從今要續浯溪頌。莫笑書生迂且狂。又以上命往諭韓體察應寅于臨津。公作詩贈之曰踈慵若使參蓮幕。肯讓燕然作漢銘。盖公雖在下位。旣値否運。思欲以忠義自勵。以樹奇勳。仰報聖恩。而身旣文士。不慣武猷。故動以古人濡染大筆處之。然其志槩激烈素如是。於此亦可見公之所抱負也。公嘗在龍灣。適當竆沍。身無所着。上憐其寒凜。命賜疋帛。力辭不受。仍獻詩句曰一身寒凍猶微事。願作南征將士衣。上敎鄭松江澈曰卿每欲以淸白忠義。自矢于心。此人亦可以匹於卿也。公之忘身憂國。一片丹心。不但受奬於 君父。足令人感發於百有餘年之後矣。公在江西。以病遞職。思切南歸。求爲錦城提督官。甲午棄而還家。戊戌十二月。除礪山郡守。己亥春。力疾上任。政尙勞來。流民頗集焉。公曰吾欲以宿昔之志。略試於民社之地。而大饑之餘。閭里創殘。有若巨疾纔愈。眞元漸惙者然。固莫如靜以鎭之。然其所尤無良者。不可以不搏焉。痛繩其土豪數三家。竟被其囑臺官罷之。癸卯四月。拜光山提督官。甲辰錄扈聖原從勳居一等。以負羈絏于關西也。戊申宣廟禮陟。三年不御酒肉。居處一依親亡之時。以盡方喪之制焉。盖公當親之病。而旣斷其指。及親之歿而又泣其血。古所謂忠求于孝者。儘如斯夫。辛亥湖南多士。有以李靑蓮後白將欲俎豆之議。公與白進士振南,金處士應鼎。與夫二三同志者。奔走經始焉。凡論議之際。公皆謙讓未遑也。至於文字。皆出於公之手。其樂道尙賢之誠。有若嗜慾然矣。壬子正月二十四日。考終于寸草軒。葬于先隴之傍。後贈承政院左承旨。配利川徐氏。繼配原州李氏。皆貞夫人。葬同原。有三子。長冬曦參奉。次冬暘主簿。次冬昕參奉。孫曾以下。多不能盡錄。公天性外柔內強。不爲巧言令色一種瞹眛之態。其事親事君。欲以忠信不欺爲主。不諂於勢官。不驕於寒士。自知也明而確。處衆也和而嚴。平生所恨。祿不逮親。且以無他昆季。作爲終身之憾。至於環堵蕭然。簞瓢屢空。心有所不屑也。惟以遇昌期不大施爲。晩暮悒悒焉。雖然起竆裔而翺翔館閣。自末宦而密勿禁闥。上以爲聖主之所嘉賞。下以爲諸贒之所推詡。因以至于中國大人之所慕望而稱引焉。此亦衆人之所難能也。足以破後來位不滿德之疑也夫。公少師愼監司喜男。深究義理之原。洛閩請書。無不精硏。晩得啓蒙易書。讀而好之。欲竆其蘊盡其變。而歎無明師友以啓導之者。築亭于家之北溪上。命名曰溪陰。種竹養花。以爲休息之所。時有質業請益者。則輒敎之奬之。但以黃谷多互鄕之徒。如坐塗炭。獨坐生荊而已。每曰吾以古人所云千百人中只知有我者。把成大樣子。又以推分任運。無求無悶。用以爲一段節度云。有私藁一卷。就其中槩而論之。則所謂寸草軒賦及龍灣述懷等作。備論三春報輝之情。而要殫孝於事親。追記五蛇從龍之蹟。而擬竭忠於報 君。所謂范蠡贊與樂毅贊等篇。盖取其養兵棲山而卒致沼吳之功。亦慕其得贒共國。而終成下齊之烈。所謂留侯張良,諸葛孔明等詩。竊自比跡於儒者氣像。三代人物之輩也。所謂鄧司徒,寇穎川,郭子儀,李光弼等詩。豈非寓意於中興殊勳再造偉績之間耶。所謂東風賦。先論漢廷尉之失勢。而至歎貴賤之見情。若夫三月雪詩。遠引宋羣小之稱瑞。而因勉宰輔之調元。所謂謝安矯情論。斥小草之出山。而譏其屐折賭墅之非正。若夫擬北山移文。嗤鳴騶之入谷。而嘲其林慙㵎愧之後黷。所謂金節度書。觀其志則高直不讓於汲黯之亢禮。若夫徐友人論。讀其文則柔忍殆類於相如之引嫌。所謂聽潮軒賦。盛說縣基高占之勝。而要以爲方輿之誌。若夫上體察書。細陳兵營移設之弊。而冀以爲邑子之利。且其壯士一去杳不還而波寒者。所謂易水賦也。悲歌千秋。寓曠感之歎。若其飛將虛老。惜未逢而數奇者。所謂李廣歎也。窃比吾身起同調之恨。且其居靜占閑而取冷煖之手談者。所謂碁局賦也。卽此而可想其雅趣也。若其厭華惡姸而薄妖冶之色態者。所謂梨花詩也。由玆而足驗其高致也。嗚呼。聖人曰誦其詩讀其書而不知其人可乎。今於公。亦宜云然。是爲狀。
聞慶後人崔進士時弼謹狀

●2故行礪山郡守贈左承旨溪陰趙公行狀[李毅敬]
公諱彭年字景老。其先漢陽人也。六代祖將仕郞典涓司參奉孝生。始南徙于羅州。歷子子山。至諱伯雲。又移家于康津縣北之黃谷里。寔公之高祖也。曾祖諱永發忠武衛副司直。祖諱安植從仕郞禮賓寺參奉。考諱世傑贈通政大夫工曹參議。妣淑夫人金海金氏。學生殷赫之女。公以嘉靖己酉六月十四日。生于黃谷里第。幼極聰悟。每課雖累百行。讀纔一遍。便卽成誦。新曆一覽與人。終不錯一字。偶閱年分書員文案。而後因誤見燒。請誦傳無詿誤。誠異才也。才學日就。文章夙成。其師愼監司喜男亟稱譽不容口。天賦至孝。稚齡亦能行定省之節。志色忠養之方。無不殫誠而盡力。嘗有山猪野雞入孝廚。見者莫不異之。親嘗疾篤。醫者反走。公急斫指以血進。因得復甦。至於游學遠離。雖非所欲。而重違親旨。亦復勉從也。歲壬申。鼓篋泮宮。作木覓山賦。魁多士。至徹睿覽。又講四書于禮部。通明經義。名聞藉甚。人爭稱艶焉。癸酉春中生員高等。丙子歲。登明經丙科第三人。丁丑冬。除會寧府敎授。以遠違兩親。辭不赴。四館例不爲躐次進薦。以故家食凡四歲。其於事親之節。爲學之方。得益盡誠而專意焉。壬午春。始補校書副正字兼奉常參奉。夏呈辭歸覲。冬陞正字。癸未四月。陞著作。以課試不作。遞付司猛。六月陞博士。其在太常。祀事孔明。在芸閣。讎校惟精。是歲十月。奔赴外憂。翌年正月。荐遭內艱。合窆于所居東數里地名感化之山。遂居廬於其下。晨夕上塚號霣。雖風雨未嘗一日廢也。至於饋食蠲饎之間。亦致其誠愨。自鼎俎至床筵。靡不手適而躬親焉。所食只兩次疏糲而已。遇諱辰。齋沐不接賓客。必思其平日所爲。庶幾僾愾之相感。逮晨將事。號哭殆若袒括之初。人莫不感歎稱道焉。丙戌三月由吉。六月受成均典籍兼南學敎授。九月攝敬差官。監穡事于金浦。爲學田也。俄授司憲監察。十一月除全義縣監。地𥕂民殘。邑又累經匪人。衆弊蝟集。下車銳意爬櫛。政以興學校敦風化爲本。民多觀感而興起焉。自奉極簡。盤供只數器。衣袴仍穿家製者。經年不以新造。出入不張盖。所騎劣容代步。騶傔亦僅數人而已。丁亥春。上疏獲減漕水軍絶戶三十餘額。闕番價布幾三百疋。實惠灌洽。閤境謳謠。第其裁束豪右太過。巨室滋不悅。因造謗于朝。戊子夏。竟被臺評罷歸。庚寅冬。甄敍授承文校檢。壬辰三月。差贈祭官。行祀于長興治之東。以兵使卞國幹之卒也。竣事纔還。値倭寇之警。卽上疏請 上親御敦化門。下哀痛罪己言。以慰軍民。仍與諸臣參議防禦之策。又云都城雖云闊大難守。宗廟社稷所在。奈何委而去之。固宜築斯鑿斯。與羣下效死。如孟子言則猶可爲也。又請出內需司布帛。以賜南征將士。旣奏不省。四月二十九日。以大祝兼典祀官。祇詣靖陵。聞是夜大駕避賊鋒。已蒼黃西狩。僕夫執鞚泣請公自此直下湖南庄所以避之。公叱之曰君父蒙塵。爲臣子者。不思奔問。忍作草間苟活。爲全軀保妻子計乎。吾有死而已。汝勿復爲言。遂與成均典籍徐希信。自陵所還渡江。取道于箭串。轉向楊州大灘,澄波渡等處。逶迤趲進。時京城已失守。宮闕皆灰燼。且國兵新刳于臨津。賊勢益熾。道路梗塞。遂夜發長湍。蠒足疾行。備嘗艱險。間關至松都。則乘輿已發矣。五月旣望。始乃追及於平壤。沿路累被賊兵所抄截。幾死者累。其危偪困迫。殆不可狀言。 行在諸臣僚咸服公之仗義。喜公之脫危。無不嘖嘖稱歎也。白沙李公恒福筵啓曰趙某忠肝節槩。合施褒奬。上卽召入而慰諭。命授禮曹正郞。上之出平壤。在六月上旬。公適臀生毒腫。且値馬瘏。不得扈從。而賊入浿城。前路復阻。遂迤入渭原,碧潼,昌城之境。七月始達于義州行在所。復授承文校檢。時八路盡陷賊藪。乘輿寄在一隅。擧國所朢。惟是皇朝請兵一事。而奏請文字。槐院專管。大提學月汀尹公根壽作奏文一通以示公。公曰誠盡美。但某句用事似不襯。某句下語恐有忌。尹公大悟曰君雖有詞翰名。不料其如許矣。如公合置湖堂選。他日吾可以剡錄。俄遷刑曹正郞。時寵姬之弟金公諒恃恩驕恣。以紬價不低。杖殺商人。臺啓請治公諒。諉諸其收。欲令代囚。公爲該色。憤請於判書西川鄭公崑壽。直以公諒置法償命。方可以立法制夬人心。而亦足展轉爲重恢之階。鄭公吐舌曰君不畏死。可謂強項令也。公時又帶薛天使都監郞官之任。主搬運芻糧事。以其嫺辭令負幹局也。戶判坡谷李公誠中嘗欲遷爲本曹郞曰文士例踈於事務。而此人何其才幹兼備也。癸巳正月。天兵勦走箕城賊。時東宮奉廟社主在寧邊府。上命簡大祝官走告賊破之由。冢宰梧里李公元翼以公名應。上以得人爲敎。大駕還次定州永柔也。公仍以刑官從。又疏陳三事。一備邊司論功之不平也。二都元帥金命元之當遞也。三平安節度使李潤德之當戮也。諸宰乃於筵中大加非斥曰。語多狂妄不可用也。惟領相梧陰尹公斗壽以爲今日諸臣。留在一隅。惟以保全身命。賭取官爵爲得計。未嘗以直截之辭。一觸時諱。而此人獨以滿朝之所不敢言者。登諸章奏。甘自陷於逬逐蹭蹬之科。可謂鳳鳴朝陽矣。大司憲一松沈公喜壽之啓則曰臣爲都憲。反有愧於刑郞。彼誠有大力量。而臣則爲妾婦之道也云。上數幸肅川,平壤。禮接唐將。公每攝通禮官。動止進退。極有儀度。往復應酬。俱合節次。上敎曰予以具宬爲善於此任矣。趙彭年又不减矣。時華使絡屬。迎接禮繁。前此爲是官者。連遭非理於上國人。雖盛有時望者。亦或至被捽曳於庭。公則應對周旋。動合機宜。邢軍門嘗謂西崖柳公成龍曰東國宜不競也。如趙某者。尙滯下僚。其可謂能用人乎。大同館中。未曾見此輩矣。李提督之駐札京城也。公呈國咨于軍門。請尾擊奔倭。劉員外之留鎭定州也。公奉命往來問候。進紫石大硯。嘗以繡衣就監李統制舜臣軍於南海。亦以上令往諭韓體察應寅軍於臨津。皆出特簡。而俱能宣布主上德意。一軍無不感奮而思效焉。其在南海。美其忠義凜烈。而贈詩曰從今要續浯溪頌。莫笑書生迂且狂。其在臨津。許其軍律整齊。而有詩曰踈慵若使參蓮幕。肯讓燕然作漢銘。公雖沈屈下僚。値時孔艱。思欲以忠義自勵。以樹奇勳報主恩。而世皆謂文士不慣武猷。其見期許者。亦不過以古人所云濡染大筆者處之而已。然其所抱負之不草草。於此亦足見其一段也。嘗在龍灣。衣袍弊盡。上憐其寒凜。 命賜疋帛。公力辭不受。仍獻詩。有曰一身寒凍猶微事。願作南征將士衣。上敎松江鄭公澈曰卿常以淸白忠義。自矢于心。今趙某亦足亞於卿也。公之忘身憂國。一腔丹血。早已見知於君父者。盖亦如此。公在江西。以疾遞職。因思南歸。求爲錦城提督官。甲午復棄而還家。戊戌冬。除礪山郡守。力疾上任。政尙勞來。流民頗集焉。公曰吾宿昔之志。聊可試於民社之地。而大創之餘。閭里凋弊。有若大病纔愈。元氣澌綴者然。固莫如煦濡摩附之爲得。然至於巨猾大奸。亦不可以不搏逐。痛繩土豪數三家。竟被囑臺官而罷之。公歸家。環堵蕭然。簞豆時或不繼。而處之而安焉。不少以爲意。惟取閩洛諸書而讀之。硏幾極深。尤喜易啓蒙。遂得以竆其蘊而盡其變。有質業請益者。各因其材而導迪之。俾底於成就者多。嘗築亭北溪之上。以爲藏修之所。種花栽竹。兼寓晩暮之賞。而命名曰溪陰。一方之章甫後生。稱爲溪陰先生。盖以此也。癸卯春。除光山提督官。甲辰錄扈聖原從功一等。以負羈絏于關西也。戊申二月。宣廟禮陟。公哀痛至深。廢內寢不御酒肉。居憂之節。一依親亡時。以畢方喪三年之制。自玆以後。當光海政亂。雖有 除命而一不起就。後來人始服公見識之明節操之確焉。公且嘗與白松湖振南,金處士應鼎。倡建靑蓮李公後白祠宇。其往復通諭文字。皆出公手。士論翕然從之。事竟底成。其爲一時士類之所推重。此亦可見也。歲壬子正月二十四日。考終于寸草軒。卜葬于感化山先隴之傍子坐之原。後仁廟臨御。追贈公承政院左承旨。配利川徐氏。繼配原州李氏。皆貞夫人。葬同原。有三子。長冬曦參奉。次冬暘主簿。次冬昕參奉。孫曾以下多不能盡錄。盖公生稟異質。聰穎絶人。文詞贍逸。下筆立就。而平生用力。尤在聖賢之書。忠孝至誠。原於天賦。其事親也。常致力於愛日養志先意承顔之間。而左右無方。不專以口體之奉爲能焉。其事君也。尤效誠於直節忘身淸忠謇諤之地。而亦不以職次之微有間焉。仕官則不以貴勢而諂屈。不以沈滯而慼嗟者。是公之志操也。𦲷民則雖以風化敎導爲本。而裁束豪右。亦不以巨室而少饒者。是公之政績也。其在關西行在所也。當國事板蕩之辰。奉使旣數稱旨。隨事無不恢遊。上則爲 聖主之嘉賞。下復爲同朝諸鉅公之所推許。因至於天朝大人。極加華褒。至以尙滯下僚爲慨。則於此亦可見公才諝幹局。大有所抱負者。而後之位不稱德。雖爲可慨。然亦何足以此爲公之輕重耶。若就公一生行誼。撮而論之。文章極贍博。而是公餘事也。學術儘高明。而公不自居焉。才局雖兼備。而一不得大用焉。山猪野雞入孝廚。人謂之誠感。而公則以爲偶然。親癠而斫進指血。迓續垂絶之命。親歿而泣血廬墓。以盡哀慕之誠者。在他人亦罕聞。而在公則爲疏節也。最是壬辰黑齒之凶鋒猝逼。去邠之行蒼黃。當時朝士之名位稍顯。而平居頗以節義自任者。亦或以事出倉卒。徊徨不知所爲。亦不能一一執羈靮以從也。惟公以一箇微官。旣與大駕隔絶。且賊勢鴟張。道路阻塞。而公忠義奮發。旣不愛惜軀命。又不顧戀妻子。叱斥家奴南下之懇。徒行蠒足。涉危險穿荊棘。萬死一生。間關轉進。如水之萬折必東。竟得奔問于播越之間焉。則如公忘身愛君之忠。誠可謂貫日月而質鬼神。惟此一事。眞可以垂光于竹帛。輝映乎千古。起立乎後人也。至若方喪三年。致哀無間者。亦人所難及。而昏朝除命。一不起膺者。尤可想公節槩之卓然也。公有遺稿一卷。詩賦雜著幷五百餘篇。率皆寓然而發。非若文人謾浪吟咏者。若寸草軒賦及龍灣述懷等賦。備論三春報輝之誠。而要殫孝於愛親。追記五蛇從難之蹟。而擬竭忠於報君者也。若范蠡,樂毅等贊。盖取其養兵棲山。卒致沼吳之功。慕其得賢共國。終成下齊之烈者也。若張子房,諸葛孔明,鄧司徒,寇穎川,郭汾陽,李司徒等詩。或窃自比於儒者三代人物之流。或寓深感於中興殊勳。再造偉績之間者也。且夫壯士一去杳不還而波寒者。易水賦也。飛將虛老。惜未逢而數奇者。李廣歎也。此亦悲歌千秋。寓深歎於曠世。略比吾身。起遐想於同調者也。以公之孝之忠。其所表見於文字間者。固當如此。至若兼抱濟世才具。而竟不得一展其所蘊。裨替匡恢大業。少答聖上知遇之恩。則其所忠憤感慨援古而自傷者。擊節吟諷。亦足令人有想像而慨歎者矣。趙觀運,奎運昆弟。卽公之玄孫而文行士也。一日袖故進士崔時弼所記公行錄一卷及他遺事略干條。來示毅敬。因起身言曰吾先祖行誼卓絶。而行狀墓文之屬。尙未得大手之發揮。窃恐從此日就湮滅而無傳。以重吾殘孫不肖之罪也。執事倘賜就加繤述。以惠我來裔則幸甚。余惟公吾同郡先輩名流也。因父老所稱。稔聞其忠孝節義之槩。且以趙君兄弟從遊之舊誼。有不可固辭者。謹就諸識錄。略加節次。爲一編文字而歸之。以俟當世立言君子之採擇。然因此窃有所慨然者。公遺集當刊之論。盛行士林間。而第緣力綿。早晩未可卜。祠宇合建之意。亦有一方章甫之公議。而亦以朝有禁令。難於擅行。則顧此十數行寂寥文字。亦安能闡發其德行風烈之萬一。俾得垂徽光於後世無竆也。誠欲公忠義節孝。表章於世。永作後人之矜式。則其道何由。此余所以撫卷而增歎者也。
原州後人李毅敬謹狀
3贈承旨溪陰趙公墓表[洪良浩]
4扈聖功臣都監呈文 典籍徐希信。爲公伸狀。 [徐希信]
5扈聖功臣都監呈文[再呈] [徐希信]
6扈聖原從功臣錄券傳旨
7湖南節義錄
8胄峯書院祝文
●胄峯書院祝文 b006_40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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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陰趙先生春秋享祀時祝文
勤家勤國。盡孝盡忠。文學並著。永世垂功。祔享。
德林趙先生春秋享祀時祝文
誠著曾傳。學符羲經。淵源有正。標人準程。謹具牲幣。式陳明薦。尙饗
9倡義錄

●溪陰集後序
1溪陰集後序[趙冕衡]
2[溪陰集刊記]

●溪陰集有司錄
1有司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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