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의 향기를 찾아서

●몽고의 여걸, 조국대장공주 알카이 베키(趙國大長公主 阿剌海別吉)

by 晛溪亭 斗井軒 陽溪 2024. 7. 27.
728x90

●몽고의 여걸,  조국대장공주 알카이 베키(趙國大長公主 阿剌海別吉)

아랄해별길(阿剌海別吉公主, 阿剌海別吉 ?~?)

 

칭기즈 칸(중세 몽골어: ᠴᠢᠩᠭᠢᠰ
ᠬᠠᠭᠠᠨ Činggis Qan, 몽골어: Чингис хаан, 한국 한자: 成吉思汗 성길사한, 문화어: 칭기스 한, 영어: Genghis Khan, 1162년 11월 12일 ~ 1227년 8월 25일[1])은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카안이다. 중국식 별칭은 칭기스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법천계운성무황제(法天啓聖運武皇帝)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친(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ᠲᠡᠮᠦᠵᠢᠨ, 한국 한자: 孛兒只斤鐵木眞 패아지근철목진)으로,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몽골 제국을 성립시켜 몽골과 중국 지역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정복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청나라 때는 특목진(特穆津)으로 지칭되다가 청나라 멸망 후 테무진으로 복구되었다.

1189년 카마그 몽골의 칸으로 즉위했고, 1206년 전 몽골 제국의 칸으로 즉위했다. 존호인 칭기즈는 1206년 전 몽골의 칸으로 즉위하면서 몽골 제부족장들이 올린 존호이다. 중화민국 건국 이전의 중국에서는 그를 성길사 황제라 칭했다.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능력주의에 기반한 강한 군대를 이끌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이자 성공적인 군사 지도자 및 인류 최대의 정복군주로 평가된다. 반면에 침략당했던 동유럽권과 서아시아에서는 학살자이자 약탈자[2], 문명의 파괴자라는 상반된 평가도 같이 존재한다. 몽골에서는 신 또는 국가 창건 영웅으로 칭송된다. 중국사에는 (元) 태조(太祖)로 기록된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칭기즈 칸 국제공항으로 남아 있다.

●阿剌

3녀 : 조국대장공주 알카이 베키(趙國大長公主 阿剌海別吉) : 불안석반(不顔昔班), 북평왕 진국(北平王 鎭國), 조무의왕 패요합(趙武毅王 孛要合)에게 하가(下嫁)

兀思剔吉忽裡(하리우스티기쿠리) 칭기즈칸의 셋째 딸이자 감국공주(監國公主).

칭기즈칸을 들자면,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일찍이 그가 유렵과 아시아 대륙을 걸쳐 세운 몽고제국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이름이 높다. 근거하면, 북유럽에서조차 칭기즈칸을 제재로 한 장편소설이 10편에 다다른다. 그러나 만약 그의 셋째 딸인 감국공주 알카이 베키을 들자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저으며 알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 알카이 베키에 관한 역사 전적의 기재는 아주 적고 어수선해서, 만약 사학자들의 고증과 정리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오늘날까지 그녀에 대해서 여전히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진정한 여걸이었다.

1189년, 몽고부락 걸안씨(乞顔氏) 귀족은 테무친(鐵木眞)을 칸으로 추대했다. 테무친은 몽고 각 부락을 통일하기 위한 전쟁에 개시했고, 1204년에 몽고 부락은 지금의 아이태산(阿爾泰山) 일대의 내만부(乃蠻部)를 마지막으로 통일되었다. 내만부 수령인 태양한(太陽罕)은 자긍심이 높은 사람이어서 근본적으로 테무친의 눈에 들지 않았고, 사자 탈아필탑부(脫兒必塔夫)를 왕고부(汪古部)에 보내 함께 연맹을 맺어서 테무친을 협공하려고 했다.

왕고부의 거주지는 지금의 포두음산(包頭陰山) 북쪽의 달무기(達茂旗)로, 고양현(固陽縣) 일대이다. 왕고부는 대대손손 지금의 달무기 애불개하(艾不盖河) 유역인 흑수(黑水) 일대에 살았고, 그 왕성은 지금의 오륜소목고성(敖倫蘇木古城)으로, 여기에서 영묘(靈廟)는 동북쪽으로 20km 떨어져 있었다. 태양한의 사자는 왕고부에 다다랐을 때, 왕고부의 수령 아자올사(阿刺兀思)에게 말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은 없는데, 인간에게 두 명의 대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우리와 연합하여 테무친을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아자올사는 태양한의 청구를 거절했다.

아자올사는 내만부와의 결명을 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자 월홀(月忽)을 지금의 몽고공화국의 항애산(杭愛山) 일대의 첩멸연(貼蔑延)에 보내 장차 내만부가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테무친에게 고지했고, 월홀은 테무친에게 말했다. "내만부의 태양한이 당신의 활과 화살을 탈취하려고 합니다." 테무친이 들은 후 크게 감동을 받아 연달아 세 잔을 술을 마신 이후에 말했다. "내 본시 두 잔만 마시려 했으나, 술을 적게 마시면 짜증이 나고, 많이 마시면 어지러울까 두렵다." 이후 테무친과 왕고부 쌍방은 함께 내만부를 정벌하기로 협정했다.

1204년 4월 16일, 테무친은 4만 대군을 이끌고 내만부로 출정하였고, 왕고부가 안내했다. 7월 1일, 내만부 수령 태양한은 포위를 뚫는 중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로부터 테무친과 왕고부는 형제와 같이 맺어졌다. 테무친은 자신의 셋째 딸 알카이 베키을 왕고부 아자올사의 장남 불안석반(不顔昔班)에게 시집보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것은, 아자올사가 군을 이끌고 내만부에 출정했을 때, 집에 남아 있던 몇몇의 군사들이 모반을 일으켜서 불안석반을 죽인 것이었다. 테무친의 셋째 딸 알카이 베키과 아자올사의 부인 아리흑(阿里黑), 막내아들 패요합(孛要合), 조카 진국(鎭國)은 밤새 도망쳐서 왕성의 경계에 다다랐고, 이 때 성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 이런 위기 때에 마음씨 좋은 문지기가 밧줄을 이용해 성벽 밑으로 끌어내려서 그들에게 붙잡게 했다. 아랄해별길 등은 운내주(云內州)까지 도망갔다.

1206년, 테무친은 전 몽고의 대칸이 되었고, 칭기즈칸(成吉思汗)이라는 존칭을 받았다. 후에 칭기즈칸은 운내를 점령했고, 왕고부의 진국을 북평왕(北平王)에 봉했고, 또한 몽고 제국의 최고 등급의 예의로 셋째 딸 알카이 베키을 진국에게 재가시켰다. 아자올사의 막내아들 패요합은 칭기즈칸을 따라 서방 정벌의 길을 떠났다.

칭기즈칸이 서역으로 출정했을 때, 셋째 딸 알카이 베키로 하여금 감국공주로 하여, 제국 내의 일반 일들은 목화려(木華黎)에게 구체적으로 책임지게 하고, 큰 사건들은 전부 알카이 베키에게 물어보고 난 연후에 처리하라고 하였다.

1994년, 무천동토성향에서 출토된 "감국공주행선차하북도총관지인(監國公主行宣差河北都總管之印)"은, 알카이 베키의 관인(官印)으로, 또한 그녀가 행사한 감국권력의 유력한 증거이다. 패요합이 서역에서 돌아오자, 알카이 베키의 남편 진국은 이미 죽었고, 칭기즈칸은 패요합에게 북평왕의 작위를 물려받게 하고, 또한 알카이 베키을 처로 맞이하게 했다.

감국공주 알카이 베키은 대칸 칭기즈칸의 딸로서 부끄럽지 않았고, <원사(元史)>에서는 그녀를 "明睿有智略", "歸出無內顧之憂, 公主之力居多"라고 설명하였다. 이는 바로 그녀가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칭기즈칸은 출정했을 때 집안에 대해 뒷걱정이 없었는데, 이는 셋째 딸 알카이 베키의 덕을 본 것이라는 뜻이다.

1211년, 칭기즈칸은 회군하여 금나라를 쳤고, 여전히 왕고부는 앞에 서서 음산(陰山)을 넘었다. 1217년, 목화려는 군을 이끌고 청총(靑冢)에 주재했는데, 이는 오늘날 호화호특(呼和浩特)의 소군분(昭君墳)이다. 감국공주 알카이 베키은 사람을 보내 술과 고기로 주었고, 장졸들을 위로했다. 1227년 칭기즈칸이 죽었을 때, 알카이 베키은 여전히 감국공주의 직권을 이행하고 있었다. 1228년. 지금의 북경(北京)인 중도(中都) 일대에서 신안(信安) 등이 무리를 지어 약탈하였고, 왕즙(王楫)등이 감국공주의 명령을 받아 출병하여 말살했다.

알카이 베키은 패요합에게 시집가서 자녀를 얻지 못했고, 패요합의 첩이 세명의 아들을 낳으니 즉 군불화(君不花), 애불화(愛不花), 졸리불화(拙里不花)였다. 알카이 베키은 그들을 친아들처럼 대했고, 아주 현덕(賢德)했다. 패요합은 죽은 후 조왕(趙王)에 추봉되었고,

알카이 베키은 죽은 후 황조고 조국대장공주(皇祖姑 趙國大長公主)에 추봉되었다. 패요합과 알카이 베키이 거주한 왕성도 조왕성(趙王城)으로 칭해졌는데, 지금의 달무기에 있는 오륜소목고성이다.

칭기즈칸의 셋째 딸 알카이 베키은 대략 1186년 즈음에 출생하였고, 그녀는 지금의 포두고토(包頭土)에서 30여 년간 생활했다. 중국과 외국의 수많은 사적들은 모두 칭기즈칸의 군무 생애를 기재하고 있으나, 감국공주 알카이 베키은 오히려 그 기록이 드무니 이는 정말 유감스런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로 조금 위로가 되는 일은, 21세기 즈음에 몽고학 학자이자 작가인 유설(劉雪) 선생이 창작해 출한한 총 길이 2800여행에 다다르는 서사 장시 <감국공주(監國公主)>로, 이는 감국공주 알카이 베키을 묘사하고 있는 문학작품이다. 그 후, 유설 선생은 또한 장시 <감국공주>를 근거로 하여 역사산문 극 <감국공주>를 각색하였고, 몽고족의 여걸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즐겨 읽을 수 있는 원본을 제공하였다.

이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쓸데없는 점을 볼 수 있다. 유설 선생의 장시 안에서, 테무친은 처음에는 알카이 베키을 왕고부의 수령의 장자 불안석반이 아니라 수령인 노년의 아자올사에게 시집보냈는데, 알카이 베키은 불안석반을 보고 반한다. 당시 알카이 베키에 대해 말하길,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기 어렵고, 대국(大局)을 두루 살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몽고부와 왕고부의 연합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했다고 한다. 2년 후, 아자올사가 죽은 후에야, 알카이 베키은 당시의 습속에 따라 자신이 진정으로 마음에 둔 불안석반에게 시집갔다고 나온다.

 

 

https://zh.wikisource.org/wiki/%E6%96%B0%E5%85%83%E5%8F%B2/%E5%8D%B7116

 

新元史/卷116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維基文庫,自由的圖書館 阿剌兀思剔吉忽里闊里吉思 術忽難 術安 巴而術阿而忒的斤亦都護火赤哈兒的斤 紐林的斤 帖木兒補化 伯顏不花的斤 卷一百十六·列傳第十三   阿剌兀思剔吉忽里〈

zh.wikisource.org

阿剌兀思剔吉忽里闊里吉思 術忽難 術安 巴而術阿而忒的斤亦都護火赤哈兒的斤 紐林的斤 帖木兒補化 伯顏不花的斤

卷一百十六·列傳第十三

 

阿剌兀思剔吉忽里〈(闊裏吉思、術忽難、術安)〉 巴而術阿而忒的斤亦都護〈(火赤哈兒的斤、紐林的斤、帖木兒補化、伯顏不花的斤)〉

阿剌兀思剔吉忽里,汪古部長也。蒙古語:汗之子弟爲剔吉,亦曰的斤,統數部之長爲忽里。阿剌兀思,則其名也。汪古部乃白達達十五部之一,本爲布而古特,亦曰貝而忽特,遼人稱爲烏而古,屢降屢叛。後爲金人所撫,屬西北路招討司。大定後,北族漸強,金塹山爲界,以限南北,烏而古部有帳四千,居界垣之衝要,屏蔽山後諸州。獲古謂長城曰盎古,又訛爲汪古云。

太祖既滅王汗,乃蠻太陽汗懼,遣使約阿剌兀思請爲右臂,助攻太祖。部衆有欲從之者,阿剌兀思聞太祖威名,度不敵,遣部將脫兒必塔失奉酒六樽,執送乃蠻使者,以其謀來告。時蒙古但飲湩酪,無酒。太祖飲三爵而止,曰:「是物少則發性,多則亂性。」使還,酬以馬五百、羊千,且謂阿剌兀思曰:「異日吾有天下。不報汝之功,天實鑑之。」遂定議同伐乃蠻。甲子,太祖親征乃蠻,阿剌兀思果先期以部衆來會。太祖元年,世襲千戶。六年,伐金。車駕先至其部,以阿剌兀思爲嚮導,南逾界垣。太祖命還鎮本部,爲其部衆欲從乃蠻者所殺,並殺其長子不顏昔班。後追封高唐王,諡忠武。

不顏昔班尚太祖第三女阿剌罕公主。至是,公主同阿剌兀思之孫鎮國及幼子孛要合,夜遁至界垣,門己閉,守者縋而納之,遂避地於雲內州。及太祖平雲內,購得之,厚加賜與。以孛要合尚幼,先封鎮國爲北平王,以國俗尚阿剌罕公主。太祖征西域,以孛要合從,阿剌罕留漠南,號監國公主。公主明敏有智略,侍女數千人給事左右,軍國大事,雖木華黎國王亦諮稟而後行。

鎮國卒,子聶古伯嗣。尚睿宗女獨木幹公主,略地江淮,卒于軍中,賜興州民千戶餘給其喪。

 

孛要合自西域返,封北平王,仍約世婚,敦朋友之好,號按達忽答,譯言親好也。復尚阿剌罕公主。孛要合三子,皆侍妾所出,曰君不花,曰愛不花,曰拙裏不花。君不花尚定宗女葉裏密失公主,從憲宗攻宋合州。宋人乘壁而詬,有傍坐張蓋者,矢石莫能及。君不花一箭殪之,遂平其壘。卒,諡忠襄。三子:曰囊家台,曰喬鄰察,曰安童。

囊家台尚亦憐真大長公主,封趙王,卒,諡忠烈。子馬札罕,尚桑哥八剌大長公主。泰定元年,封趙王,泰定帝崩,起兵討大都,兵敗被執而死。

 

喬鄰察,尚宗王阿只吉女回鶻公主,封趙王。卒,諡康僖。

愛不花,尚世祖季女月烈公主。中統初,從徵阿里不哥,敗叛將闊不花於按檀火爾歡。三年,從親王撥綽、諸王帖哥圍李璮於濟南,當城南一面。賊數出南門。輒爲愛不花所隙。璮伏誅,又從丞相伯顏征西北叛王,敗撒里蠻於孔古烈。卒,諡武襄。愛不花四子,皆月烈公主所出,曰闊裏吉思,曰也先海迷失,早卒,曰阿里八□,曰術忽難。愛不花卒,闊裏吉思嗣。

拙裏不花,鎮雲南,卒。子火思丹,尚宗王卜羅出女竹忽真公主。

 

闊裏吉思,性勇毅,習武事,尤篤好儒術,築萬卷堂於私第,日與諸儒討論經史,陰陽、術數,靡不通曉。在北邊爲廟以祀孔子,表賀聖節獨用漢文。尚裕宗女忽答迭迷失公主,繼室以成宗女愛牙失於理公主。奉命駐和林,防叛王海都。至元三十四年,諸王也不幹叛,東附乃顏。闊裏吉思率千餘騎,晝夜兼行,旬日追及之。方暑,北風大作,左右以風勢不順,請待之。闊時吉思曰:「夏得北風,天讚我也。」策馬徑進,賊大敗,也不幹以數騎遁走。闊裏吉思身中三矢,一矛斷其發。凱旋,賜黃金三斤、白金千五百斤。

成宗即位,封高唐王,賜金印。駙馬封王,自闊裏吉思始也。是時,海都、篤哇屢擾北邊,闊裏思請往討賊,成宗不告許。再三請,乃許之。瀕行,誓曰:「不平西北,吾馬首不南。「大德元年,遇賊於伯牙思之地,衆請俟大軍畢至,與之戰。闊裏吉思曰:「大丈夫報國,而待人耶!」即整軍而進,大敗之。詔賜世祖所服貂裘、寶鞍,及繒錦七百匹,介冑軍器有差。

二年,諸王將帥議防邊,皆曰:「賊往歲不冬出,可休兵境上。」闊裏吉思曰:「不然,今秋候騎漸少,所謂鷙烏將擊,必匿其形,備不可緩也。」衆不謂然,闊裏吉思獨嚴兵以待。是冬,篤哇、徹徹禿等果出兵,襲合剌合塔之地。闊裏吉思三戰三卻之,乘勝逐北深入,馬蹶被執。賊誘使降,不從,又欲以女妻之,闊裏吉思毅然曰:「我帝婿也,非帝后命而再娶可乎?」!賊不敢逼。成宗憫闊裏吉思陷賊,欲遣使詢其消息。其家臣有阿昔思者,衆稱其可用,乃遣阿昔思使於篤哇,遇之稠入中。闊裏吉思一見,即問:「兩宮安否?」次及其嗣子。語未畢,爲左右引去。闊裏吉思竟不屈而死。

九年,贈推忠宣力崇文守正亮節保德功臣、太師、開府儀同三司、上柱國、駙馬都尉,諡忠獻。並追贈曾祖阿剌兀思高唐忠武王,祖孛要合高唐武毅王,父愛不花高唐武囊王。

 

以子術安幼,詔闊裏吉思弟術忽難襲高唐王,尚宗王兀魯□女葉綿幹真公主,卒,繼尚宗王奈剌不花女阿實禿忽魯公主。術忽難才識英偉,善撫衆,境內又安。痛闊裏吉思死節,表請恩恤。又請翰林學士承旨閻復勒其事於碑。教養術安過於已子。至大元年,術忽難進封趙王。時術安已長,術忽難以王位讓之。術安既襲趙王,尚晉王甘剌麻之女阿剌的納八剌公主。一日,召王傅脫歡、司馬阿昔思謂之曰:「先王旅殯卜羅,荒遠之地,神靈靡託,吾痛不欲生,若得請於朝歸葬先塋,吾死瞑目無憾矣。」二人白其事於知樞密院事也裏吉尼,奏聞,武宗嘉歡曰:「術安孝子也。」賜阿昔思黃金一瓶,與脫歡子失忽都魯、術忽難子阿魯忽都、斷事官也先等十九人,馳馹以往,復賜從者鈔五百貫。淇陽王月赤察兒等遣兵六百人,護其行至殯所,啓視面如生,遂歸葬焉。

 

阿里八□尚宗王完澤女奴倫公主。鎮國子聶古臺尚拖雷女獨木幹公主,襲北平王,追封鄃王,無子,以術忽難嗣。術忽難以趙王讓還術安,而己還襲鄃王,卒,諡忠襄。

巴而術阿而忒的斤亦都護,亦都護者,畏兀兒國之王號也。畏兀兒即唐之回鶻,以和林爲王庭。會昌中,加鶻內亂,又爲鄰國所攻,焚其牙帳,諸部潰散。餘衆徒於火州,兼有別失八里之地,北至阿術河,南接夏之肅州,東至兀敦、甲石哈,西界吐番,改稱畏兀兒。至巴而術阿而忒的斤之父月仙帖木兒,爲西遼屬國。

及巴而術阿而忒的斤嗣位,西遼主直魯古使其太師僧沙均監其國,恣睢自擅。巴而術阿而忒的斤不能堪,用國相仳理伽帖木兒計,結蒙古爲外援,遂殺沙均,遣其臣別吉思與阿鄰帖木兒等來納款,時太祖四年也。受命末行,適太祖遣使者安魯不也奴等至其國。巴而術阿而忒的斤大悅,厚禮之,命別吉思等偕使者入朝,至辭曰:「聞往來人言,可汗雄威大度,善撫百姓,方棄哈剌契丹舊好,遣使通誠,並以古兒汗國情上達。不意遠辱天使先臨下國,譬雲開見日,冰泮得水,喜不知勝。而今而後,願率部衆爲臣爲子。竭犬馬之勞。」

是時,蔑兒乞脫黑脫阿中流矢死,其子忽禿等函其父首渡額兒的失河,將來奔,先遣其屬額不幹通款於畏兀兒,巴而術阿而忒的斤殺之。忽禿至,與畏兀兒人戰於嶄河,敗走。巴而術阿而忒的斤知蔑兒乞爲太祖深仇,別遣使者曰阿兒思蘭斡乞,曰忽察魯斡乞,曰孛羅的斤,曰亦難海牙,輕騎出別吉思等之前來告捷。既而別吉思等偕安魯不也奴等亦至。太祖大悅曰:「亦都護果能輸誠戮力於我,仍遣安魯不也奴等往勞,且徵方物。」尋遣使齎珍寶方物入貢。

六年春,覲太祖於客魯漣行宮,奏言:「倘恩顧臣使遠近知臣得託陛下襟帶之間,附四子之末,幸甚!」太祖感其言,字以皇女阿勒可敦公主,序在第五子之列。

十四年,車駕親征西域,巴而術阿而忒的斤率萬人從行,與皇子朮赤同克養吉干城。奉命率所部先歸。後又從征西夏,有功。初,太祖以阿勒可敦公主字巴而術阿而忒的斤。其正妃妒,不令娶。迨妃死,太宗即位,方議遣公主下嫁,公主旋卒。未幾,巴而術阿而忒的斤赤卒。

子怯石邁因嗣。卒,弟薩侖的斤嗣。憲宗初,薩侖的斤來朝。別失八里有造飛語者謂:薩侖的斤欲盡殺奉天方教方之部民,其僕訐於官。時賽甫曷丁監治別失八里,要薩侖的斤歸,詢之,無其事。然其僕猶堅證之,事聞於朝,命忙哥撒兒覆按。刑訊薩侖的斤誣服,乃殺之。命其弟玉古倫赤的斤代立。憲宗方有慊於太宗子孫,凡太宗舊人在畏兀兒者,緣此斥逐殆盡。玉古論赤的斤卒,子馬木剌的斤嗣,率探馬赤萬人從憲宗入蜀,圍合州,師還,卒。

至元三年,世祖命其子火赤哈兒的斤嗣。後爲都海所攻,畏兀兒部衆迸散,詔火赤哈兒的斤收撫之。二十二年,篤哇、卜思巴率兵十二萬,圍火洲,聲言:「阿只吉、奧魯赤有衆三十萬,猶不能抗我,汝敢以孤城拒我乎!」火赤哈兒曰:「吾祖宗世國於此,生爲吾家,死爲吾墓,終不能從爾也。」圍六月,不解。篤哇以書系矢射於城中曰:「我亦太祖諸孫,何以不附我。且汝祖曾尚公主,沒能以女與我,則罷兵。不然,且亟攻汝。」火赤哈兒曰:「吾豈惜一女,不救民命。合吾終不見之。」出其女也立亦黑迷失,厚載以茵,縋城下與之。篤哇乃解去。後火赤哈兒入朝,世祖嘉嘆。尚定宗女巴哈兒公主,並賜鈔二十萬錠賑其民。火赤哈兒以火州荒殘,徙於州南哈密力之地。兵力寡弱,北軍奄至,戰歿。三子:紐林的斤,次欽察臺,次雪雪的斤。

紐林的斤尚幼,詣闕請兵爲父復仇,世祖壯其志。尚太宗女孫不魯罕公主,公主卒,尚其妹八卜叉公主。詔紐林的斤留永昌,俊與北征諸將同發。會吐番脫思麻作亂,命以榮祿大夫、平章政事,領本部探馬赤萬人鎮吐番。至大初,召還,嗣爲亦都護,賜金印。延祐三年,始稽故實,封爲高昌王,別賜駝紐金印,爲設王傅官。其王印行於漢地,亦都護印行畏兀兒境內。八卜叉公主卒,繼尚安西王阿難答女兀剌真公主。復立畏兀兒城。五年,卒。三子:曰帖木兒補化,曰籛吉,曰太平奴。

帖木兒補化,大德中尚闊端太子女孫朵兒只思蠻公主。至大中,從父入朝,留備宿衛,又事皇太后於東胡。以中奉大夫領亦都護事。又出爲鞏昌等處都總帥達魯花赤,護王位於叔父欽察臺,辭不受,乃嗣爲高昌王。至治中,領甘肅諸軍仍治本部。泰定中,召還。自此畏兀兒之地入於察合臺后王。帖木兒補化旋奉命與威順王寬徹不花等分鎮襄陽,拜開府儀同三司、湖廣行省平章事。致和元年,以懷王命召至大都,佐平內難。時湖廣行省左丞有罪,詔誅之,帖木兒補化爲之申請,竟獲免。其人素與帖木兒補化不協,皆服其雅量。留拜開府儀同三司、上柱國、錄軍國重事、知樞密院事,以亦都護高昌王讓其弟籛吉。天曆二年,拜中書左丞相。三月,改太子詹事。十月,又拜御史大夫,改知樞密院。元統元年,再爲御史大夫。後至元六年,拜中書左丞相,監修國史。至正元年,罷。十一年,有譖帖木兒補化於丞相脫脫者,誣以謀害大臣,脫脫奏殺之,並殺御史大夫韓嘉納,又欲殺帖木兒補化弟太平奴。刑部尚書宋文瓚以無信讞駁之,始獲免。

籛吉,至順二年以亦都護高昌王護太平奴。卒,子月魯帖木兒襲。卒,子桑哥襲。

雪雪的斤,駙馬都尉、中書右丞相,封同昌王。子朵兒的斤,駙馬都尉、江浙行省丞相,封荊南王。朵兒的斤子伯顏不花的斤。

伯顏不花的斤,字蒼崖,倜儻好學。初用父蔭,同知信州路事。又移建德路。徽州賊犯遂安,伯顏不花的斤將義兵敗之,又擒淳安叛賊方清之,以功擢本路總管。至正十六年,授衢州路達魯花赤。明年,行樞密院判官。阿魯灰引兵經衢州,軍無紀律,所過剽掠。伯顏不花的斤曰:「阿魯灰以官軍而爲民患,此國賊也。」乃帥兵逐之出境。遷浙東都元帥,守衢州。頃之。擢江東道廉訪副使。

十八年二月,江西陳友諒遣賊黨王奉國等號二十萬寇信州。明年正月,伯顏不花的斤自衢引兵援之,奉國敗走。時鎮南王大聖奴、樞密院判官席閏等屯兵城中,聞伯顏不花的斤至,開門出迎,羅拜馬前。伯顏不花的斤登城四顧,誓以破賊自許。後數日,賊復攻城,伯顏不花的斤大饗士卒,約曰:「今曰破賊,不用命者斬。」乃命裨將大都閭將阿速諸軍及民兵爲左翼,出南門;高義、範則忠將信陽一軍爲右翼,出北門;自與忽都不花將沿海諸軍爲中軍,出西門。直入賊營。斬首數千級。賊亂,幾擒奉國。援賊突至,忽都不花復勒兵力戰破之。

二月,友諒弟友德營於城東,繞城植木柵,攻我益急,又遣僞萬戶周伯嘉來說降。高義潛與賊通,紿忽都不花等,謂與奉國相見,則兵釁可解。忽都不花信之,率範則忠等十人往見,奉國囚之不遣。明日,奉國令高義以計來誘伯顏不花的斤。時伯顏不花的斤坐城上,見高義單騎來,伯顏不花的斤謂曰:「汝誘十帥,無一人還,今復來誘我耶?我頭可斷,足不可移」。乃數其罪斬之。由是,日夜與賊鏖戰。

夏四月,有大呼於城下者曰:「有詔。」參謀海魯丁臨城問:詔自何來?」曰:「江西來。」海魯丁曰:「此賊耳。吾元朝臣子,可受爾僞詔乎?」呼者曰:「我主聞信州久不下,知爾忠義,故來詔,爾徒守空城欲何爲耶?」海魯丁曰:「汝聞張睢陽事乎?」僞使者不答而去。伯顏不花的斤笑曰:「賊欲我降爾,城存與存,城亡與亡,吾計之熟矣。」時軍民唯食草苗茶紙,既盡,括靴底煮食之,又盡,掘鼠羅雀以食。

六月,奉國親來攻城,晝夜不息。賊穴地百餘道,或魚貫梯城而上。萬戶顧馬兒以所部叛,城遂陷。席閏降,大聖奴、海魯丁皆死之。伯顏不花的斤力戰不姓,乃自刎。

其都將蔡試盡殺妻子,及蔣廣與賊巷戰。試遇害,廣爲奉國所執。賊愛廣勇敢,誘之降。廣曰:「我寧爲忠死,不爲降生。汝等草寇,吾豈屈汝乎?」賊怒磔之。

有陳受者,信州人,伯顏不花的斤知受有膂力,募爲義兵。戰敗,爲賊擒,罵不屈,賊焚殺之。

先是,伯顏不花的斤援信州,嘗南望泣下曰:「我爲天子司憲,知上報天子,下拯生民,餘皆無可恤,所念者太夫人耳」。即日入拜其母鮮于氏曰:「兒今不得事母矣。」母曰:「爾爲忠臣,吾即死復何憾?」鮮于氏,太常典簿樞之女也。伯顏不花的斤因命子也先不花奉其母間道入福建,以浙東廉訪司印送行御史臺,力守孤城而死。事聞,賜諡曰桓敏。

史臣曰:「阿剌兀思、巴而術阿而忒的斤,咸早識真主,自託於肺附之列,宜可以憑藉恩寵,世爲藩臣。乃阿剌兀思部人所殺,亦都護之疆域亦見並於強鄰,雖其子孫不失富貴,然社稷則墟矣。殆所所謂積弱之餘,不能自振者歟。」  

 

728x90
반응형